1)시호 -大武神王 . 시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엄청난 무위를 간직하고, 세계에 그 이름과 용맹을 떨쳤을 거라는 것이다.
大解朱留王. 이는 시호가 아닌 이름이다. 해모수선군처럼....
이에서 유리가 고주몽의 혈통이 아닌 부여의 혈통임을 알 수 있다.
이름은 무휼. 어머니는 다물국 송양의 딸로 유령인물임.
혁거세 33년 11세로 나이로 大子(태자와 같은 뜻인지 다른 뜻인지 연구가 필요하다.)가 됨. 10세에 침략군(부여) 방어 사령관이 되어 승전. - 말도 안되는 왜곡. 120 년을 없애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억지 기록.
해모수는 기원전 4세기에 조선(대부여)의 마지막 선군으로, 부여의 새황제로 새시대를 개창한다. - 박충원의 자동서기
한단고기는 기원전 237??년 임술년에 황제 즉위.
2) 2년 봄정월.京都에 震. 百濟民一千餘戶來投.(BC106 또는 AD 19년)
일천호면 최하 5000인이다. 이 정도면 백제 내에 큰 변란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사기에는 한수의 동북부락이 굶주려 고구려로 망명했다 하는데....
이걸 사실로 받아들이기가 꺼려지는 이유는 무엇인가??삼국중에 사료가 가장 부실한 것이 백제인데, (신라의 5%정도...)여기서 고구려와 동시에 기록된 사건이 있다함은???
초기 부분에 있어서 양국에 동일 사건이 기록되는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전쟁기록조차도 어느 한 쪽에서 처들어 가면 상대방은 방어하는 기록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거의 없다.
왜곡자들이 양쪽에 집어넣은 듯한 의심은 과민일까?
웃긴 것은 중국 기록에 의하면 백제인들은 고구려로 갈 수가 없다.
바로 북의 강역을 낙랑이 차지하고 있으니까...
더 웃긴 것은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에 말갈이 있다는 기록도 많다는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120년 상향조정했을 때 온조의 번조선과 한무제 간에 전쟁이 일어나 국가가 어지러울 때와 일치한다.(한사군전쟁.. 한의 처참한 패배로 끝난 전쟁.. 논공 행상을 기억하라...)
이런 상황이라면 전란을 피해 고구려로 피난하는 인구가 많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의 고구려 정벌전 당시 최고 중국통이던 이정 대원수가 고구려가 900년 간 이어져 내려 왔다는 말을 그냥 무시할 것인가?? 과연 이정이 해모수의 부여와 고구려를 구분하지 못하고 900년이라 한 것일까?
사료에서 고주몽과 해모수가 무관한 인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데, 부자관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왜곡이 아니고 무엇인가?
현재의 25사 중에 가장 오래된 원본을 찾아보라...
당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이 하나도 없다. 거의 대부분이 청나라 명나라의 것이고, 오래된 것은 송 정도이다.
즉 북위서이니 남제서이니 하는 것들, 사마천의 사기 까지도 원본이 어떻게 써졌는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써서 궁형을 당하는데(다른 이유로 핑계되고 있지만, 실은 한무제의 신경을 건드리는 기록을 썼기 때문에 형벌을 받은 것이다.) 한에 불리한 기록을 썼기 때문이리라..
25사 모두가 원본이 내려오지 않는 상황에서 왜곡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꿈많은 몽상주의자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실한 기록들을 찾는 일이다.
3)3년 봄 3월 東明王廟를 세움.
여기의 동명왕은 주몽이 아니다. 바로 유리의 아버지인 부여의 동명이니 바로 解東明이다. 유리는 부여의 국왕이었지만 고 주몽이 선양함으로써 고구려 황제에 즉위한다. 비류가 그 과정에서 축출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비류는 졸본 부여 공주의 딸이다. 즉 주몽은 졸본부여의 사위가 되어 부여를 이었다가 고구려로 국호를 바꾸고 재 창국한 것이다.-삼국사기)
유리의 입장에서 고구려 황제로서는 주몽의 사당을 세워야 하고, 부여 동명왕의 아들로서 동명왕의 사당을 세워야 하는 애매한 입장이었으리라.
그래서 결국 누구의 사당도 안 세웠던 것이다. 반면 무휼의 경우는 주몽과 직접 연관이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인 해동명의 사당을 세운 것이다.
만약 동명과 주몽이 같은 인물이었다면 기록에는 始祖廟 나 東明聖王廟라고 썼어야 한다.
더욱이 동명성왕과 동명왕은 그 뜻에서 천지차이의 차이가 있다. 성인과 평인의 차이이다.
후손으로서 조상을 깍아내릴 수 있단 말인가? 후의 조선 때만 하여도 감히 시호를 부르지 못하고, 선대왕이나 태조 대왕, 세종 대왕과 같이 대왕을 붙여 극존칭의 뜻으로 부른다.
유리도,대무신왕도 시조묘에 제를 지낸다는 기록이 없다.
신대왕조에 이르러야 졸본 시조묘에 제를 지낸다는 기록이 나온다.(여기서도 동명왕묘가 아님에 유의...)
설령 이 기록을 후대의 사가가 자기 자신의 기분으로 이렇게 기록을 했다면 그것 자체가 왜곡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것을 옛 기록대로 안쓰고 자기식대로 고쳤다 함은 다른 것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왜곡의 정도는 사가의 양심에 반비례하겠지만.....
위의 기록은 유리에게 양위한 고주몽성제와 아버지 동명왕을 후대의 중국학자들이 왜곡하는 과정에서 동명과 성제를 떼서 동명성제로 하고 , 그나마 황제가 자기네 뿐이라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동명성왕이라고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부여왕 대소와 계속 얽히는데, 이는 북부여와 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등을 더 연구해야 어느 정도 앞뒤가 맞는 기록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뒤죽박죽 헷갈리다.)
4)4년 동 12월. 王出師伐夫餘~
四年冬十二月王出師伐扶餘次沸流水上望見水涯若有女人舁鼎游戲就見之只有鼎使之炊不待火自熱因得作食飽一軍忽有一壯夫曰是鼎吾家物也我妹失之王今得之請負以從遂賜姓負鼎氏抵利勿林宿夜聞金聲向明使人尋之得金璽兵物等曰天賜也拜受之上道有一人身長九尺許面白而目有光拜王曰臣是北溟人怪由竊聞大王北伐扶餘臣請從行取扶餘王頭王悅許之又有人曰臣赤谷人麻盧請以長矛爲導王又許之
부여 정벌전. - 어느 부여인지 확실치 않으나 본문의 기록을 근거로 판단하면 대해모수가 대부여황제가 될 때 이동한 북부여의 분파인 동부여로 추정(위치는 대안령, 소안령, 내몽고 북부지역.)
出師 - 이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가 알기로는 제갈 공명으로부터 출사나 출사표란 용 어가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다. 더욱이 이는 한족의 용어이지 한인의 용어가 아니 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고구려의 사가가 이 기록을 남겼다고 보기는 힘들 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사를 쓰는 과정에서 유입된 언어일 가능성이 제일 높다.
출사의 다른 기원에 알고 있는 분이 계시면 가르침 부탁합니다.!!!!
비류수 상류에 주둔(次) - 신령스러운 솥과 가보라는 주장을 하며 솥을 엎고 다니겠다는 사나이에게 負鼎씨를 하사. 후대에 부정씨 전혀 안나옴.
水涯若有女人 이 뜻은 애매하다. 약자가 왜 들어갔는 지 모르겠다. 해석본은 물가에서 여인이 솥을 가지고 놀고 있다라 나와 있지만.... 글쎄...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자 한다. 수아야유여인(애의 고음이 아이다. 현재 애,아,이의 세음으로 쓰인다. 그리고 약자는 반야야나 절 야등으로도 쓰인다._)
즉 물가의 절벽에 있는 절을 바라보니 어떤 여인이 솥을 가지고~~ 로....
여기서의 절을 석가의 불교사찰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전불시대의 사찰일 가능성보다 정신을 갈고 닦는 도량일 가능성이 높다.
利勿林에서 주둔. 金璽兵物금옥새와 신병들을 얻음.
上道有一人身長九尺許面白而目有光拜王曰臣是北溟人怪에서 許의 의미는??? 분명 형용사인데......
아무튼 키가 9척이면 최소한 220Cm 이고, 흰 얼굴이니 백인이다. 눈의 광채는 기백을 상징하는 것이라. 실제로 모든 사람의 눈에서는 약하든 강하든 광채가 나온다. 광채가 안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맹인이거나 시체이다.
조폭들의 눈에서 섬짓함을 느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北溟은 시베리아의 어느 곳으로 추정한다. 당시의 한자는 음차와 훈차를 병용했기 때문에 판단하기가 힘들다. 여기서는 훈차로 판단되는 데 북쪽의 아득한 곳이라는 곳에서 온 백인이 바로 괴유인 것이다.
즉 , 고구려가 마한의 뒤를 이어 시베리아 제민족을 경영하는 임무를 맡았으므로 고구려 관경내에 백인이 있다 하여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구려와 마한의 관계를 부정하는 사람들만 빼고..) 괴유는 대소와 원한이 있어 보이는데, 부여의 영토가 시베리아와 중국 흑룡강성 접경지대에 있었으니 유목민족(순수혈통은 백인에 가깝다.부로 북방계,초원의 길을 이용. 코카서스인도 유목민이다. 남방계는 혈통이 번잡하다. 주로 비단길 이용. 흉노,타타르,월지등....)과 충돌이 있었음은 충분하다.
4년 겨울 12월에 출정 → 5년 봄 2월 부여국 남쪽지방에 진격. 여기에서 추정되는 거리는?? 그리고 군사의 수도 안 나와 있다. 괴유가 대소를 죽임. 부여의 거센 반격.(왕이 죽어도 굴하지 않는 민족성을 알 수 잇다.대개 중국의 군사는 지휘자가 죽으면 지리멸렬해 버린다.)
고구려의 군량미 부족.하늘의 도움으로 안개를 틈 타 도망, 신마 거루와 沸流源(원의 의미가 무엇인가? 단순히 비류의 근원이라는 뜻인가? 강의 의미는 아니이다. 평원의 의미도 아니다. 아마도 비류수의 시원이 있는 평원 지대의 뜻이리라. 위치는 내몽고 북부와 흑룡강성 북서부와 시베리아 접경지대 쯤.)에서 얻은 솥과 이물림의 병물들을 잃어버렸다고 함. 금새를 잃었다는 기록은 없다.금새는 어디로 갔을까?/
고려태조 왕건이 얻은 게 무엇이죠?? 금새던가??
그거랑 연관이 있나??
겨우 돌아와서 과인이 부덕 어쩌고 저쩌고 하며 제를 지내고 ,군사와 백성들을 위로하니 왕의 덕망과 의로움에 백성들이 충성을 맹세하였다.
교묘한 왜곡. - 사실을 기반으로 반대되는 기록을 하고는 왕을 추켜세움으로써 왜곡되었다 는 인상을 지운다.
5)
5년 3월 신마 거루가 부여말 100필을 거느리고 학반령 아래 거회곡에 돌아옴.
4월 대소의 동생이 갈사수 가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됨. 금와의 季子로 역사서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100여명과 함께 도망. 鴨淥谷에서 海頭王을 죽이고, 갈사왕이 됨.
추7월 대소의 從弟가 1만여를 이끌고 고구려에 항복. 絡氏성을 주고는 掾那部 왕으로 삼음.(해석본 주의보. 왕으로 삼아 봉했다는 기록을 삭제한 해석본에 유의. 동부여의 땅을 연나부로 만들고 왕(제후)이 다스리게 함. 고구려는 연합국가이다.)
이로서 고구려 땅은 북옥저, 선비, 부여를 병합하고 양맥과 행인국을 병합하니 타클라마칸 이북 시베리아 , 몽고 서부,감숙, 내몽고, 섬서,바이칼호 동쪽(현재 부리야트 공화국), 흑룡강성 서부,요녕성 , 길림성, 백두산 지역, 하북성, 산서,일부 등을 포함한다. 마한 강역의 4 분의 1정도를 되찾은 셈이니 바로 다물국책의 결과이다. (증거 대라 하지 마세요... 이걸 대려면 몇 달을 잠도 안자고 매달려야 하니까..... 나중에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올릴 테니 지금은 이런 식으로도 생각이 가능하구나 하고 생각해 주시길.....)
겨울 10월 괴유 죽음. 北溟山陽(남)에 장사를 지내고 有司에게 해마다 제사를 지내게 함.
蓋馬國 - 태행산맥이 西盖馬大山이다. 옛 명칭이라고는 하지만 과연 태고 시에도 서개마 대산이었을까? 아마 개마대산이었을 것이다. 명청 대에 이르러 백두산을 개마대산으로 칭하면서 西자가 붙었으리라.. 여기서는 산동성 태산 부근으로 추정되지만 시베리아의 어느 곳일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다만 백두산 부근이 아님은 확실시 된다.
해석본 - 9년 겨울 10월.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니 개마국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 로한다. 모(왕모)는 포로로 잡고 그 땅은 군현으로 삼는다.
왜곡의 증거가 남아있는 기록이다. 이것은 정덕본으로 중종 대의 판본이다.(일제 때 새로 싹 바꿔 버리지 않았다면...) 문제는 蓋馬國殺其王慰安百姓母虜掠의 母부분이다. 대체 해석이 엉터리다. 조선 후기의 주자본에는 모자가 말 毋자로 기록되어 있다. 말무자를 쓸 경우 해석은 자연스럽다.
개마국왕을 죽이고는 백성을 위로하고 노략질을 금지했다. 이 글자가 변화된 것을 단순한 실수로 보아야 할까? 일제의 왜곡의 흔적이 아닐까??
句茶國 - 구다국!! 우연인가? 한단고기의 12한국 중에 句茶川國이 있음이.......
박충원의 자동서기에는 구다천국이 나오지 않는다. 구다천국 대신에 독로국이 나온다. 바이칼호 동쪽에 위치하여 후에 북옥저가 된 초강국이었다.
그런데, 한단고기에도 독로란 이름이 나온다. 삼성기전 하편에 10세 한웅인 갈고 한웅을 瀆盧韓이라 부르니, 바로 독로국의 수장을 말함이 아닌가??!!!
한은 북방민족의 왕의 명칭을 말함이니 징기스칸의 칸도 여기에서 연유된 것이다. (혹시 젱기스한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불린 것은 아닐까?? 징기스칸은 서양식 발음이니까....)
더욱이 한인의 전통은 선양제도로 혈통 이양주의가 아니다.(신라 초기까지만 해도 이어졌다.) 더욱이 3301년동안 유일하게 육체로 태어나 다스리신 지위리 한인님이나 18분 한웅들, 그리고 48분의 선군들 모두 영적으로 신인을 넘어 한체에 드셨거나 한의 경지를 바라보시던 분들이다.(선군들의 경우는 후대로 갈수록 그 경지가 낮아져 갔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한의 경지란 7차원의 경지로 바로 신계이다. 여호와를 비롯한 제 민족신들이 7층에 거하고, 예수 같은 분들은 6층에 거하신다. 즉 예수님은 신인의 경지를 바라보시던 분이며 위의 분들은 최소한으로 잡아도 예수님보다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영계통신 - 스웨덴보르그, 및 요기 요가난다의 스승 유크테스참고)
예수님도 우리 민족의 비전 수련법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물론 그과정에 페르시아 ,이집트나 희랍의 비전들도 익혔지만.....
(리바이 도우링 보병궁복음서-아카샤레코드)
신시 시대만 해도 전 한인들의 경지가 성인 대우를 받으실 만한 정신세계를 향유하셨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 당시의 역사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성인의 상위 단계가 哲人이다. 철인은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푸하앗~~~~~!! 하아~ 말이 엇나갔다.... 사상이 다른 사람에게 반발이 심할 것 같아... --;;;
그런데 구다천국의 위치가 헷갈리는데요? 흐음~~ 어딜까나? 구다천국이 독로국이라면 바이칼 호 동쪽이고.. 그곳에서 바로 북옥저가 되니까.... 흐음 전통을 지키는 일파는 아메리카로 한반도나 만주로 유입되었으니까.... ??? 에엥??? 백두산 근처인가? 숙신 밑에 지금의 연해주??? .아니면 하북성의 낙랑이나 섬서성 옥저 부근??? 그 도 아니면 객현한국의 부근?? 흐음. 여기는 한반도인데?
와아~~~ 이것은 한참 연구가 필요할 것 같네요....
결론은 잠시 보류...
7)
10년 봄 정월 을두지를 좌보로 松屋句를 우보로 삼음.
흐음~~ 우보 좌보 대보의 삼보체제인가...? 그리고 다물국의 인물이다. 송양의 아들이나 손자 쯤 될려나?? 유령인물 모후 송씨와 연관이 있으려나??
8)(BC98년 혹은 기원후 28년)
十一年秋七月漢遼東大守將兵來伐王會羣臣問戰守之計右輔松屋句曰臣聞恃德者昌恃力者亡今中國荒儉盜賊蜂起而兵出無名此非君臣定策必是邊將規利擅侵吾邦逆天違人師必無功憑險出奇破之必矣左輔乙豆智曰小敵之强大敵之禽也臣度大王之兵孰與漢兵之多可以謀伐不可力勝 王曰謀伐若何對曰今漢兵遠鬪其鋒不可當也大王閉城自固待其師老出而擊之可也王然之入尉邦巖城固守數旬漢兵圍不解王以力盡兵疲謂豆智曰勢不能守爲之奈何豆智曰漢人謂我巖石之地無水泉是以長圍以待吾人之困宜取池中鯉魚包以水草兼旨酒若干致犒漢軍王從之貽書曰寡人愚昧獲罪於上國致令將軍帥百萬之軍暴露弊境無以將厚意輒用薄物致供於左右於是漢將謂城內有水不可猝拔乃報曰我皇帝不以臣駑下令出師問大王之罪及境踰旬未得要領今聞來旨言順且恭敢不藉口以報皇帝遂引退
11년 가을 칠월 漢 遼東大守 침략. 병력 수 안나옴. 우보 송옥구의 말은 그대로 믿을만 하나 우보 을두지의 말은 왜곡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송옥구의 말에 의하면 한나라 곳곳에 도적이 횡행했다 한다. 더욱이 여기에도 뚜렷한 왜곡의 흔적이 나와 있다.
今中國荒儉盜賊蜂起이다. 어느 것이 왜곡의 흔적인지 알겠는가? 바로 中國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뜻이라면 바로 고구려 황성이 황폐화하여 도적이 봉기 한다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경우에는 앞뒤의 문장이 연결되지 않는다.
설마 아직도 옛날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 中國이라 불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아니겠죠?
당시의 중국이라 함은 황제가 사는 경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王이 口속에 들어가 있는 국자지요.. 아!! 口도 국자임을 유의...
설마 고구려는 왕이니까 중국 황제가 사는 곳을 중국이라고 하실 분은 없겠죠?
고 구려는 엄연한 황제국이니까.... 오히려 중국인들이 양심이 있었다면 고구려를 황제국으로 모시든, 백제를 황제국으로 모시든 해야 하지요.
위의 기록은 송옥구가 말하는 것이므로 중국 사서 또한 고구려의 기록을 참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만의 용어인 중국이 사용되는데... 이런 점에 의문을 안 가지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
한나라의 뜻이 아니라 변방장수의 독단이라는 기록도 우습다.
이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한나라 전체를 상대하는 것은 고사하고, 한 개 제후국에도 밀릴 만한 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아닌가? 엄청난 독설이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는 고구려의 100배 이상가는 군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이어지는 기록은 얄팍한 술수가 느껴지는 기록이다.
左輔乙豆智曰小敵之强大敵之禽也
이것의 바른 해석은?? 작은 적은 강하게 나가고,큰적은 사로잡아라?
해석본은 작은 국가는 큰 국가의 포로가 된다...
하지만 갈 지자의 쓰임은?
작은 적敵의 강함은 큰 적을 사로잡는다....
작은 상대는 강대한 상대에게 사로잡힌다. -이게 가장 바른 뜻인 것 같지만......
병법가로서의 자세가 안 되어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중국인의 왜곡이 확실한 대목이다.
올바른 해석 올려주시길.....
왕의 병력과 한의 병력을 비교하면 한에게 당해낼 수 없다. - 이말도 지어낸 말이다. 요동대수의 병력을 못 감당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더욱이 고구려는 한나라 전체가 국운을 걸고 달려들어도 열 번 싸워 한 번 이길까 말까 한 상대인데....
기억하는가? 유리왕 31년의 기록을?
거기에서 아직 흉노도 못 이기는데, 부여나 예맥이 다시 일어서면 큰 근심이 아니겠습니까라는 엄우의 말을.... 여기서 부여나 예맥이 흉노보다 더 두려운 상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은 물론 당나라도 흉노를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흉노보다 더 강한 부여와 예맥..
이 기록 당시 고구려는 이미 양맥(예맥)과 부여를 병합한 상황이었습니다.그런 초 강대국들을 병합한 고구려가 한 전체도 아닌 요동대수가 두려워 수성전을 펼친다 .... 이런 기록을 믿으십니까?
제가 부여를 초강대국이라 한 것은 부여가 9한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상고사의 기록이 모두 소실되시다시피 한 상황에서 정신계열의 기록이 당시의 상황을 알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고고학?? 맹인이 코끼리 만지기이죠.
박충원의 자동서기 에 의하면 9한은 북부여(여기에서 동부여가 나뉘어진듯..),부여,옥저,북옥저,낙랑,남국,구려,청구,숙신입니다.
숙신에 대한 기록 중에 시황제 정의 진나라나 유방의 한나라가 성(번성하다,강성하다)한다 해도 숙신에 막(이르지 못한다,보다는 감당하지 못한다가 옳다.)한다고 나온다.
나중에 원문을 올리겠다.
찾았다!!!!
晉書97卷
동이 열전 숙신씨조. 雖秦漢之盛莫之致也
그리고,최치원전의 기록에는 고려나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병사 일 백만이 남으로 오월(절강성,광동성,광서성,강서성,호남성,안휘성)을 북으로 유연제노(얼핏 하북성을 생각하기 쉬우나 호북,섬서,감숙,산서일부 등이 옳다.중국 세력이 강할 때, 섬서성 요를 중심으로 영토분쟁이 벌어졌다.)를 뒤흔들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고려와 백제의 연합군이 일백만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고구려 백제가 각각 일백만 이상의 강병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선군조선(단이 아니다 시전절에 의해 선이 옳다.신선의 선과도 통한다.)에 삼한이 있었으니 곧 마한 변한 진한이다. 이 삼한의 위치는 재야사학자들도 혼동하는 사람이 많이 있는데, 마한은 시베리아를, 번한은 중국대륙을, 진한은 한반도와 동북삼성을 다스렸다.
최치원이 마한이 곧 고구려요, 변한이 백제요, 진한이 신라라고 말한 기록은 참으로 진실인 것이다. 고구려가 시베리아를 , 백제가 중국을, 신라가 만주 및 한반도를 다스렸다는 내 사관은 여기서 나온다.
다만 진한이 신라요 마한이 백제, 변한이 가야(요즘에는 가야와 변한 세력이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바뀐 듯 하지만... 저희 때는 변한이 가야였답니다.한심한 작태였지요.)라는 것은 반도의 삼한을 혼동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반도삼한의 존재는 목화의 유입에서 알 수 있습니다. 삼한에서 목화를 쓰고 비단을 썼는데, 후대에 고려 때에 느닷없이 목숨걸고 목화씨를 들여오다니요... 오죽하면 문익점이 창작인물이라는 설까지 나오겠습니까?
조선의 삼한에서 목화는 물론 비단등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비단은 중국의 산물이 아니라 조선의 산물인 것입니다.
한단고기에 호구 조사를 했는데,그 수가 무려 1억 8천만이었습니다. 14세 선군 때입니다. 이를 9한으로 평균치를 내어도 2000만입니다.
고구려가 9한 중 하나인 북부여의 뒤를 이어 비류국(다물국,12한국 중의 비리국의 일파일 가능성도 있다.)을 병합한후 내세운 多勿(腹舊土.옛땅을 되찾는다.)에 따라 북옥저를 정벌하고, 부여를 병합하고,선비, 양맥을 병합하면서 마한의 시베리아 강역을 되찾으려 애쓰던 고구려입니다.
많은 한인들이 세계로 이주하였다 하더라도 이 때 고구려의 인구는 일천만 이하가 아닙니다.(고구려는 연합제 국가입니다.고구려 본국의 인구는 한 최하 500만 이상으로 해 두지요.)
王從之貽書曰寡人愚昧獲罪於上國致令將軍帥百萬之軍暴露弊境無以將厚意輒用薄物致供於左右於是漢將謂城內有水不可猝拔乃報曰我皇帝不以臣駑下令出師問大王之罪及境踰旬未得要領今聞來旨言順且恭敢不藉口以報皇帝遂引退
여기서 보면 고구려는 밸도 없는 국가이다.
上國.... 이 글을 보고 고구려를 자존심이 있는 국가로 볼 것인가? 더욱이 죄인이 상국에 죄를 지어 백만대군(이게 아부인지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사실로 보고자 한다...)을 이까지 오게 했으니 정말 죄송합니다....
하니
황제가 노해서 나를 파병하였지만(이 글은 앞선 우보 송옥구의 말과 안맞다.송옥구는 황제가 보낸 것이 아니라 변방장수 하나의 독단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만대군까지는 아니더래도 수십만 대군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정도의 군력은 황제의 지시없이 움직인다면 반역이나 다름없다. 즉 , 황제의 명이 있었다는 말이다.)
보니 신의도 있고, 그리 무례한 것 같지 않으니 돌아가서 황제에게 잘 말하겠다....
돌아가면 너는 죽음이다!!!!!. 요동 대수 의 이름도 기록안 되어 있는 것은 이가 가상인물이라는 얘기이다. 사기 조선전의 기록을 떠올려 보라 . 정벌군 장수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모두 최고 형인 기시형(사형후에 사지를 찢어 시자에 걸어 두는 것.)을 당했다. 사마천 조차도 궁형을 당해 사내 구실을 못하게 되었다.왜? 사기에 한무제의 신경을 거스리는 기록을 남겼으니까.... 설마 친구를 옹호하다가 벌을 받았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는 분이 계실까요???
아무튼 요동대수의 이름이 안 기록되었다 함은 앞선 가상인물이라는 가설과 이름 조차도 올릴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비율은 3:7로 후자가 높다. 왜냐하면 전자의 경우 훨씬 상향된 기록을 남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 후자를 가지고 상상해 보자.
今中國荒儉盜賊蜂起이다. 바로 고구려를 비롯한 한인(7차원 한체.하늘인물.우리 스스로 천족이라 부른 것.중국인에 의해 예맥 또는 동이족. 북두칠성과 12황도의 수행인과 연관이 있는 민족이기 때문.한국 시대인들은 최하 5차원 상념체이었고, 6차원 신인을 넘어 7차원 한인에 이른 분들도 많았다. 그래서 문명이나 기록이 별로 없는 것이다.석가나 예수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박충원의 자동서기.)들의 무력의 성격을 말해준다.
즉 위의 기록들은 한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대무신왕에 의해 한나라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다. 대무신왕의 시호를 생각해보라.. 위대한 무예의 신이 아닌가!!!
이런 시호를 그냥 나오는대로 지었다고 보는가? 위대한 무신의 호칭에 걸맞는 업적을 쌓았다고 보는 것이 백번 타당하다. 그런 분이 한나라 따위에게 당하겠는가?
요동태수의 이름이 없는 것은 요동태수가 바로 비운의 주인공이기 때문인 것이다. 고구려에 의해 엄청 당한 인물인 것이다.
동이무력의 성격은 광명이세,홍익인간에 나타나 있다.광명이세라 함은 세상을 광명으로 가득 채운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수신이니 자기 자신이 광명이 되는 것이다.(광명이 된 사람이 바로 성인이요, 성인의 상위 개념인 철인이다.48분의 선군이나 18분의 한웅. 7인의 한인. 이중 7분의 한인은 이미 한체를 체득화하신 신들이다. 박혁거세나 김수로 , 고 주몽, 고 온조(주몽의 아들이므로..)등도 성인의 반열에 드신 분들이다. 주몽은 중화인들도 성제로 추앙하였다.)
다음에 제가하고 치국하여 평천하하니 개인,가족,나라,천하의 순으로 광명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써 홍익인간이 사용된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 말로 해서 들으면 다행이지만 말로 해도 안 되는 상대에겐 무력을 써서 광명으로 이끈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동이무력의 성격인 것이다. (고구려 당시의 열국 시대는 9한을 하나로 묶는 시대적 사명이 있었기에 전쟁이 잦았던 것이다. 그리고, 천지 공사에 의해 전 지구인 영혼을 진화시키기 위해 한인들 스스로 세상의 물결 속으로 뛰어드니 열국시대는 유체시대로 옛날에 비하면 영혼들의 수준이 아주 낮아진 것이다. 기원전이 기원후로 넘어가면서 육체 시대로 보면 될 듯하다.스웨덴보르그는 정신문명이 황금시대,백은시대,철기시대..등의 순으로 퇴화해 았다고 했다. 증산도에서는 지금을 금수시대,즉 짐승의 시대라고 본다.실제로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이 많은 세상이 지금이다. )
위의 기록에 중국(중국인들이 왜곡한 것이지만..)도적이 봉기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왜곡기법에 유의. 대부분은 글자,단어,문장등을 바꾸거나 거꾸로 바꾸거나 하는 정도지만 완전 창작품도 있음에 유의.)
즉 중국이 어지러울 때 중국과 전쟁을 펼친 것이 동이라는 것이다.
한나라가 황폐하고 도적이 들고 일어난다는 송옥구의 말에서 한나라가 어지러웠음을 알 수 있다. 동이무력의 성격상 고구려가 한나라를 정벌하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때이다. 해주류(대무신왕)왕이 한나라 정벌전을 펼친다. 그러자 대고구려 최전방인 요동(한의 요동은 호북성일 가능성이 크다.더 못하면 청해나 감숙성, 강하면 섬서성 요의 서쪽.중국 세력은 고대에 섬서성 요의 동쪽으로 진출한 적이 한번도 없다.넘었다가 혼난적은 있어도...)대수가 방어하겠지만 결코 상대가 되지 못한다. 고구려 군은 파죽지세의 기세로 한의 수도를 향해 진격한다.(호경을 지금의 장안성 유적이라고 하시며 펄쩍 뛰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그 유적은 신라나 고구려의 금성 또는 장안성일 가능성이 훨씬 크다.믿거나 말거나.....)
결국 고구려에게 두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으리라.. 그렇게 나라를 보존하고는 요동태수를 목을 잘라버린다.
그리고는 , 수치를 감추기 위해 요동태수의 기록을 모두 삭제하고는 사실을 거꾸로 하여 한의 요동태수가 고구려 수도 위나암성을 포위하고는 너그러운 아량으로 용서하여 고구려의 왕조가 계속되게 하는 은혜를 베풀었다~~~ 이렇게 왜곡한 것이다. 이러니 요동태수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푸하하~~~~ 속 시원하다~~~~~~
동이 무력의 성격에 관한 것은차후에 따로 올리려 합니다.
중국과 한국의 무력의 차이 -
신라 문무왕시 구진천이라는 弩師를 당 태종이 불러들여 나무로 노를 만들게 하니 겨우 30보 나갔다. 이에 당태종이 니네 나라의 노는 1000보를 나간다는데 왜 30보밖에 안 나가느냐 하니 재료가 나빠서 그럽니다. 그래서 신라의 재료를 구하여다 만들게 하니 90보를 가더라... 당태종이 일부러 안만드는 걸로 생각해 열받아가지고 너 만들래?죽을래? 했지만 끝까지 안 만들었다.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안나와 있다.
이에서 무엇을 느끼는 가? 당에서는 100보 나가는 노도 없었다는 소리이다. 이에 비해 신라는 아무리 낮게 본다 하더라도 500보 이상은 더 나갔다는 얘기이다. 1보가 150Cm이니 750m요, 만약 진짜 1000보를 나갔다면 1500m이다.
그럼 말할 분이 계실 것이다. 그럼 총보다 더 멀리 가는데 말이 되느냐고, 충분히 말이 된다. 바로 풍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협지에 나오는 것과 같이 기를 주입하여 쏠때 나오는 현상이다.
봉우 권태훈 옹의 말에 의하면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할 당시 돌팔매를 잘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2Km밖에 지나가는 일본군들의 트럭 속의 장교를 맞추어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관심법을 통한 것으로 10m 밖에 붓으로 깨알만한 점을 찍어 계속 바라보다 보면 정신통일이 이루어지고, 마침내는 그 점이 눈앞에 쟁반만하게 크게 보인다고 한다. 눈앞의 쟁반을 못맞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남은 문제는 멀리 던질수 있는 힘인데, 비전의 강장제 같은 것을 먹어 힘을 내었다 한다.
숙신이 가장 강한 궁술을 보유한 나라임에 비해 신라는 그다지 뛰어난 나라가 아니었다. 고구려나 백제가 더 뛰어나면 뛰어났으리라. 당나라는 신라가 아니었다면 되리어 고구려나 백제에 멸망당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숙신은 고려의 왕건 당시까지도 독립을 유지했다.(한단고기 태백일사 고려)
삼국사기 원문에 당나라와의 전쟁기록들에 많은 누락자들이 보이는 것은 진실을 숨기기 위한 노력인 것이다.(아마도 몰랐을 것입니다. 님들 중에 삼국사기의 전쟁부분에 수많은 구절들이 단체로 누락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 계십니까? )
9)
十三年秋七月買溝谷人尙須與其弟尉須及當弟于刀等來投
買溝谷人 12한국 매구여국인의 후예가 아닐까? 박충원의 자동서기에 의하면 외몽고동부에 있던 매구여국은 독로와 무예전쟁을 치룬 후 패배하여 독로의 요구로 고향을 떠나 지금의 대흥안령 산맥에 자리잡았다 한다.
매구여인의 대부분이 아메래카로 이주했지만 안 가고 남은 이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 매구여국의 일부가 대흥안령의 한 곡에 이 때까지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沸流部-느닷없이 나온 비류부. 비류국이 항복한후 그 땅은 다물도 또는 다물국이다.
이 비류부는 무엇인가?
王聞之欲殺之以東明舊臣不忍致極法黜退而已
- 구도등 2인을 죽이려 하지만 동명의 구신이라 죽이지 못하고 퇴출하여 서민으로 만들 뿐이다.東明이 과연 주몽인가?
아니다. 이는 부여의 동명왕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감히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렇게 부르겠는가? 아무리 싸가지가 없어도 동명성제나 동명성왕이라 칭해야 한다.
실제는 부여의 후예인 무휼이니 주몽을 할아버지 등으로 안 부른다 하더라도 동명성제 정도는 불러야 정상. 聖자가 들어간 것과 안 들어간 것은 천지차이....
결론은 성제와 동명왕이 전혀 다른 인물이기에 동명성왕이라는 칭호가 안나오는 것이다. (한단고기 북부여기 참조.) 즉 위의 셋은 부여가 병합되면서 고구려로 유입된 동명왕의 신하들이다. 그들을 다물국인 비류수 부근의 한 부족을 다스리게 한 것이다. 미류부란 고유명사라기 보다는 일반명사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몽은 성인 품에 드는 인물이다. 신하를 쓰는 데에 허투로 썼겠는가?
즉 부여의 신하들을 조정에 등용하지는 못하고, 살 방도를 마련해 주었는데, 남의 처첩을 빼앗는 등 극악 무도한 짓을 일삼으니 죽이려 했지만 차마 할아버지(부여동명왕)을 생각해서 못죽인 것이다.
夏四月王子好童遊於沃沮樂浪王崔理出行因見之問曰觀君顔色非常人豈非北國神王之子乎
호동왕자가 옥저에 놀러 갔는데,낙랑왕 최리를 만난다.
이상하지 않은가? 옥저 땅에 느닷없이 낙랑왕이라니....
이상할 것이 없다.
여기서의 옥저는 남옥저로 오대산에서 지금의 북경까지의 영토로 북은 부여와 접했는데,부여가 멸망했으니 고구려가 있겠죠. 그리고 그 동에 낙랑이 있었으니 하북성 요녕성이지요. 당연히 그 북에는 고구려가 있고요..
하북성과 하남성에 온조황제가 번한을 대표하여 서백제 황제가 된다.
동에 낙랑이 있고, 북은 부여지만.. 고구려에 예속되니 고구려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
백제의 동에 낙랑이 있고,북에 말갈이 있다는 사서의 기록은 이 상황을 말 한 것이지만..
말갈에 대해서는 아직 지식이 짧다. 하다못해 옳은 발음등만 알아도 큰 도움이 될텐데... 말갈의 고음은 당최 ..... --;;; 설마 무가르같은 식은 아니겠죠???
구당서 199권에
新羅가 卞韓이며 苗의 후예라 나오지요.이해 되십니까?
당연히 안되겠지요.
漢의 樂浪땅에 있으며 東南大海라고 나오지요. 여기에 함정이 존재합니다. 바로 동과 남은 큰 바다이다라고 해석한 분은 왜곡자들에게 일조를 한 것입니다.
바른 해석은 동은 대이고 남은 해이다가 옳은 해석입니다.
중국인들의 숨기기 기법을 알아야 풀 수 있는 해석입니다. 즉 동은 대산 또는 태산,(산동에 태산이 있고, 이 이남에 또 대산이 있습니다.) 남은 해라는 것은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명입니다. 양자강하류인 절강성과 강소성 복건성에 해와 관련된 지명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영토가 서는 백제가 있고 , 북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사방이 2000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상식에 주의... 사방입니다. 중심을 기점으로 각각 2000리 라는 것입니다. 즉 한변의 길이가 4000리라는 것이지요.. 당의 1리가 560m 이지만 여기서는 500으로 잡겠습니다. 2000Km!! 한 변입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영토는 한반도와 동북삼성,그리고, 하북성입니다. 그 서에 백제가 있고, 북에 고구려가 있고, ... 이 기록대로라면 고구려가 장안성의 동쪽에 장성을 쌓으는 이유가 이해되겠지요??
그리고,만주원류고 9권 신라 9주
문무왕 - 요동,북평 정복.
상주- 동경로 길림성 연안현.
전주- 북경로-하북,열하
강주- 요령성
삭주 - 봉천성
명주 - 산동의 예땅
이라는 기록도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한단고기의 기록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한단 고기의 기록을 부가하면 더 많은 부분에 차이가 생겨납니다.
당 두우 통전 고구려전
우북평,어양, 상곡,태원......
동서6000리 강역이라고 했다. 3000Km 이상이다.
위의 기록대로 신라가 만주를 지배하지 않았고, 숙신도 없어서 동해안 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해도, 서쪽끝이 내외몽고는 물론 감숙성,청해성,바이칼호 동서가 강역이라는 얘기이다.
게다가 만주를 신라가 그 이북을 숙신이 지배했다 하면 고구려의 영역은 더 서로 가니 신강 티벳까지 그 강역이라는 얘기이다. 사마르칸드의 벽화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나 신라,백제 사신들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돌궐은 티벳,신강을 기점으로 중앙아시아,시베리아 등지를 활동하던 민족이다.(왜곡자들에 의해 동돌궐 서돌궐로 나뉘어 동돌궐이 내몽고에까지 활동했다는 허무맹랑한 설명이 이어지지만......)고구려가 돌궐과의 전쟁을 통해 신강,티벳을 수복했음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고구려의 다물정책은 마한의 강역을 되찾는 것이다.치우의 장당경이 티벳 및 청해성이였으니 고구려는 마땅히 그 땅을 찾아야할 임무가 있었던 것이다.
숙신이 고구려에 복속되지 않았음은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려본기에서 알 수 있다.왕건의 아버지 왕륭이 송악군을 들어 항복하면서 궁예에게 朝鮮 肅愼 卞韓의 왕노릇을 하고자 한다면 송악을 점거하여 왕건에게 그 주인을 맡겨야 한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쩝쩝 되도록 한단고기를 이용 안 하려 했는데...)
여기에서 조선이라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는 삼한 조선의 전체 황제국이던 진한을 말함이다. 진한은 위에서 말한 신라의 강역과 일치하는데, 한반도와 동북삼성 및 연해주이다.
후에 백제의 7제후국에 조선군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하북성과 요녕성에 걸쳐 있던 조선군은 원래 진한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신라를 秦韓의 유민이라 하면서 秦을 내세운 것은 실은 신라를 진나라의 방계로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바로 眞韓의 정통을 신라가 이었다는 것을.. 眞韓유민들이 세웠다는 것을 한 글자만 바꾸어 중국사로 만들어 버리려 한 것이다.
그리고, 숙신은 궁예 당시 남아 있는 유일한 9한의 멤버인 것이다. 즉 조선 9한의 일파인 숙신과, 조선인 신라, 그리고,중국의 백제의 영역인 변한을 전부 통일해야 동이 전체의 왕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고려가 대륙인 것 같애~~~~ 헷갈려!!!!
아 참~~ 청나라 황제의 이름이 愛新覺羅가 愛覺新羅의 변용자라는데, 뭐 신라를 사랑하고, 생각한다??
이를 어쩐다?? 참 수긍이 가는 기록인데..... 청나라가 신라의 후예를 자처했다는데.,
신라가 만주의 주인이었으니 청나라가 후예를 자처해도 별 이상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신라가 조선의 황제국인 진한의 후계이므로, 신라의 후계를 자처함은 곧, 마한 ,진한,번한 전체의 황제국이라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청이 신라의 후계를 자처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아참!!!
많은 이가 헷갈려 하는 거.....
고구려 집안현의 고구려 고분군들...... 이것들의 존재 때문에 신라가 만주를 지배했다는 기록을 왜곡이라고 바득바득 우기시는데......
진흥왕 이전까지의 만주 및 한반도의 대부분은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
따라서 고구려 고분들이 떼로 있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 또참.. 연개소문의 묘가 중국 어디에 있다는 것을 본 기억이 있는데... --:: 만주가 아닌 하북성 서쪽...
광개토 대왕비 참조.
진흥왕 이후 만주가 신라의 영토가 되고, 고구려가 이후 동북 부여성에서 동남 해유리까지 장성을 쌓아 신라의 서진을 막은 것... 즉 동신라와의 경계.
여기서 함정 조심. 상식과 편견에 사로 잡힌 분들이 이 장성이 당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바득 바득 우기면서 장안성이 지금의 평양성이라고 우기는데.... --:::::
우선 기록을 보면 동북과 동남이라고 나와 있다. 이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장안성이 장성 서쪽에 있으며 해유리(산해관인가??장춘에서 산해관으로 이어지는 장성이 현재 있다.) 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다는 얘기이다. 그래야 동남이 성립하니까...
東北自扶餘城東南海有里
이 기록이 신구당서에는 엉뚱하게 바뀌어 있다.
구당서
東北自扶餘城 西南至海千有餘里
신당서
東北自扶餘城西南屬之海
어떤가 ? 황당하게 바뀌지 않았는가?
신당서를 쓸 당시 구당서는 존재했었는데도 그 기록조차 일치하지 않는다.
구당서는 서남으로 바다까지 천리가 넘는다는 말이다. 장성의 끝이 어디인지 안 나와 있다.
신당서는 그래서 서남으로 바닷가에 이르렀다고 한 것이다. 어쨌든 끝은 있으니까?!!
그런데 이 멍청한 녀석들은 왜곡자체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이다. 뭐 지리상식의 부족때문일까?
위글을 제대로 왜곡하려면 아래와 같이 바꾸어야 한다.
녀석들은 장안성이 장성 동쪽에 있고 장성 서쪽은 당의 영토라는 것을 심기에 급급하여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바로 장안의 위치이다. 평양이 곧 호경이고 장안며 유경이라는 기록에서 평양이 일반명사인 것을 이해못한 자들의 무지때문이다.
완벽한 왜곡을 하려면??
北自扶餘城北西至海라고 해야 한다.
그 이유는 평양과 장춘은 똑같이 125 ̊~ 126 ̊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리지식이 부족해 저지를수 있는 실수라 해도 더욱 큰 실수가 남아있다. 바로 서남이라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장성이 장춘에서 황해도바다로 연결되어야 한다.
만일 위기록이 사실이라면 장안의 위치가 조정되어야 한다. 최소한 요동의 바다보다 올라간 위치에 장안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말이 안된다는 것을 여러분들 모두가 느끼고 있겠지만........
遼史 권 38
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암연현의 동쪽 경계는 신라이고,옛평양성은 현의 서남에 있다, 동북으로120리를 가면 해주에 이른다.
여기서 질문!! 海州는 모두 황해도중의 황주 해주 중의 해주입니다.즉, 평양성의 동북에 암연현이 있고, 이 동쪽은 신라이고, 동북으로 120리를 가면 해주가 나옵니다.
아???? 해주는 지금의 함경도였을까요???
푸하하하하~~~~~~~~
그리고, 요사지리지
東沃沮盖馬大山之東盖馬縣名在今平壤城西
동옥저는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개마현은 이름으로 지금의 평양성서쪽에 있다...
국사에서 동옥저의 위치가 아주 재미있었죠.함경도에 남북으로 길쭉하게 있었죠.. 푸하하하~~
쉽죠? 백두산이 있고,현재 개마고원도 있으니까.... 그런데... 이를 어쩐다?? 여기가 개마현인데.... 평양성이 동해에 있겠네???
반론 들어오겠죠?? 평양성 서쪽에 그냥 이름뿐인 개마현을 덩그라니 놓았다고...
우?? 이를 또 어쩐다??? 그래도 황해 바닷속인데????
신구당서 공통
卞韓苗裔也在樂浪之地 여기는 신라가 묘의 후예라고 나오죠... --;;
최치원
卞韓百濟也
사기
三苗江淮刑州
자 이 기록에서 진실은 무엇일까요????
상식을 그대로 믿는 이들이 진땀을 흘리는 기록이랍니다.
그냥 믿어버린다고???
우이~~쓰! 그럼 신라의 남쪽에 있다는 변한이 낙랑땅이었다는 건??? 그럼 신라가 진나라의 방계라는 것도 그냥 믿겠네??
최치원은 그냥 바보라고?? 아~~~ 글을 적는 부식이가 잘못 썼다고>..... 아~~하!!
사기기록은 왜 썼냐고???
푸하하하~~
자 변한이 묘의 후예이면서 낙랑의 땅이다. 삼묘가 양자강,회수,형주(하북이거나 복건,호남일 가능성..)에 있었다는 사실에 유의. (현재 묘족은 운남성 광동, 광서성을 비롯한 양자강 이남에 대부분이 살고 있다. 그리고, 섬서,감숙,청해,호북계에도 조금 살고 있는데, 이들이 이주를 한 것인지 원래 토박이인지는 잘 모르겠다.)
묘는 치우와 연관의 많다. 치우의 청구와 구려인 ,남국인들이 중화인들과 혼혈을 거쳐 탄생한 민족이 묘족이다.합쳐셔 삼묘이다.
청구는 산서,하남,안휘 남국은 산동,절강,강소성.
그리고,구려는 양자강 이남 대부분.... 치우가 구모액국인들을 데리고, 장당경으로 이주한 후 남은 청구인들이 구려와 남국에 섞이면서 삼묘가 탄생...
그래~~~서!!!! 치우를 묘족의 천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지금 중국인들이 황제를 제치고 치우를 국조로 만들려고 수작을 하는 것이 산서,하남등지의 청구인들이 은나라를 비롯한 중국국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에 치우를 국조로 삼으려는 것임..(자동서기- 나에게 묻지마요!!)
중국이 치우를 국조로 삼으면 왕검선군은 명함도 못내밀겠군.......
으~~음 심각해~~~ --;;;;
따라서, 낙랑은 현재의 하북성에 있었다!!! 중국인은 낙랑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조선의 역사를... 특히 번한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둔갑시켜버린 것이다.
참고로 낙랑은 조선 9한의 하나.....
최치원은 번한을 말한 것이다. 번한의 정통을 백제가 이었다고 한 것이다.
진서에 산서성 요의 동쪽인 요동에 고구려와 백제가 함께 있었다는 기록은 한치도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동백제도 엄연히 존재하였음에 유의...
삼국유사 말갈발해편
辰韓의 북쪽에 南北黑水가 있다. 흑수를 한반도에서 찾으려는 사람들은 바보......
흑수의 후보지는 여러군데.... 감숙계,내외몽고계, 흑룡강성계
나??
나는 남흑수는 지금의 흑룡강성 북흑수는 시베리아 그 무슨 강인데.... 잊었다... --;;죄송!!
근거?
송나라 동파 소식의 지장도...
만리장성 북쪽에 흑수가 있고,장성 이남에 옥저가 있었다....
송때의 장성의 위치?? 몰라!! 아뭏든 명대의 장성보다는 못하니까...
자 여기서 질문!! 진한의 넓이는 과연 얼마일까요?? 삼국유사 기이 1권에 삼한이 모두 72국 또는 78국이며 각각 영토가 사방 100리였다고 했걸랑요? 즉 나라 하나가 한변 200리이니까?? 에~~ 고..곱하기..가..?
으음! 어렵군!! --;; 72국으로 해서 14400리이고, 1리를 한대니까?? 400m! 곱하니?
5760Km!! 우와~~ 이게 얼마야??? 부산에서 백두산까지 대략 1000Km 정도니까??
그것도 정방형이니까??
우와???? 아~~하 한반도는 동서의 길이가 5400Km였구나~~~~
푸하하하~~~~~ 우습다!!
이중 진한이 12개국이었으니까? 2400리! 그래서?! 960Km!!!
어~~ 땀난다!! 정방형으로 960인데??? 아하!! 대지각변동으로 땅이 가라앉았나 보다!! ^^
경상남도에 위치한 가야와 지금 국사교과서에 주장하는 백제의 영토를 다스린 동백제를 제외한 진한의 크기이다. 즉, 신라의 크기라는 말이다.
사실 이는 조선중의 진조선인 진한의 기록이다. 실제 크기는 한반도,동북삼성,하북성일부이고... 이 중 한반도에는 동백제,동신라, 가야가 있었고, 광개토 대왕 당시 한반도의 대부분이 고구려 영토에 편입되었다가 후에 신라가 만주까지 영토를 점령하여 진한의 영토 대부분을 찾았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반쪽통일이라 주장하는 것은 왜곡자들의 교육이 훌륭한 성과를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백제,가야,고구려, 서백제 전부를 통일 했고, 나당전쟁은 서백제의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반도에 없는 전쟁지명이 중국에는 많이 있는 것을 보아도 안 믿는 이는 안 믿을 테지만....
그랬다가, 대진국에게 고구려의 강역을 빼앗기고, 서백제영토를 가지고,빼앗기고 빼앗는 전쟁을 치룬 것이다.
어디서더라?? 신라군이 천산산맥에 정벌전을 하러 가는 기록이 있었는데....
그리고,서신라의 존재는 어지간히 머리가 아픈데.... 산동의 신라방이나 나전칠기의 섭라(신안)등은 백제의 영토였고, 서신라가 있다면 섬서성, 감숙성,하북,산서,,이 부분인데... 감숙에 금성이 있기는 있는데....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이 부족하고.... 맞는 것은 장안인데... 기막히게 금성의 기록과 일치점이 많단 말이야????
아~~하!! 서신라의 국호는 신라. 수도는 금성.
동신라의 국호는 계림. 수도는 서라벌!!!
(?? 헷갈리다!! 자..잠깐.. 으...음~~ 금성 동쪽에 시림이 있었고, 거리에서 닭이 울어서 계림이 되었으니까.. 에엥?? 서신라의 국호가 계림인가?
동신라가 신라이고??? 지증마립간이 신라,사로,사라 등의 국호에서 신라로 확정한다 함은??)
나중에 연구....
에엥? 이게 뭐야?? 서라벌이 나라 이름이지 어째 수도냐?? 라고 물으시겠지요??
그런데... 고전문학을 배우셨으리라 봅니다만...
이상한 점 안 보입니까?
고전문학시간에는 서라벌에서 라가 사라져 서벌이 된다 했거든요? 그 이상하게 생긴 (벌이 없어서... --;;하여간 벌입니다.) . 그 서벌이 서블이 되고,서울이 된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서울의 어원이라면서....
그런데, 금성도 우리말로 쇠와 울타리이니 쇠울이 변해서 서울이 되거든요?
둘다 서울을 가리키는 말인데, 어째 서라벌은 국호가 되었느냐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질문!!
國과 囗(이것도 나라국자입니다.)자 안에 王자가 들어간 나라국은 과연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틀린 것일까요??
정답은?? 상식으로는 囗안에 玉자가 들어간 것과 같이 나라국의 속자라고 외치니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 저는 같게 안보이거든요??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國과 王이 들어간 국을 구분해서 쓴 것 같거든요..
이것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일정한 법칙이 없이 왔다갔다하는 어휘의 사용 때문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자기 혼자 볼 책이 아닌 왕께 바칠 책인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한마디로 두서가 없다는 말인데, 유방이나 당태종이 보면 너 죽어라 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죠.. 소위 왕을 능멸한다는.... 만약 어휘를 혼용했다면 어휘표라도 하나 만들어 이는 속자고,이는 옛날 글자이다 등등 하는 것이 들어가야 함에도 그런 것이 없었죠...
생각했죠.. 김부식이 목숨이 두개 세 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띠리리 띠리리~~~ (머리 돌아가는 소리.. 으음~~불량이군!!)
김부식은 용어를 구별해서 썼다. 현대의 학자들이 한학에 있어서는 바보다라고....
아니나 다를까 두 국자의 쓰임이 보이더군요.
우선 왕이 들어간 국자는 글자 그대로 왕이 사는 울타리 안이니까 왕도 또는 왕이 직접 관할하는 직할지이더군요..
그리고, 國은 域(다른 제후들이 다스리는 지역들)이 모두 모인 囗울타리이니까 나라 전체를 의미하더군요....
즉 왕도와 나라 전체의 차이... 이를 알고서 보니까 아니나 다를까 모든 의미가 통하더군요.. 즉 써야될 곳에 글자를 구분해서 썼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왜 이글을 머리아프게 쓰느냐??
님들이 國號라고 생각하는 서라벌이 원문에는 왕이 들어가는 국자를 썼다는 얘기입니다.
그 의미는 왕이 사는 경도의 이름을 서라벌이라 했다는 것이었죠.
서라벌이 서울의 어원이 되어도 하등 이상할게 없죠??? 그렇죠??
이래서 동신라와 서신라가 확실히 존재하는구나 하는거죠..
그리고 기림닛금(니사금의 이두식발음. 지금도 닛금,잇금이라 하죠?? 여기서 임금이 생겼다나 어쨌다나...) 조에 腹國號 新羅라는 기록이 나오죠..
어 이상하다?? 언제 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했길래 다시 국호를 신라로 한다는 거지??
이 의문점이 안 생긴다면 문제 있습니다.
더욱 이상한건 진흥이냐? 법흥이냐? 하여간 6세기에 어느 왕이 신라를 국호로 정한다는 이상한 기록이 나온다는 겁니다.
도저히 하나의 국가라면 나올 수 없는 기록이죠...
그리고, 중국 기록인 당 영호징의 신라국기에는 진평왕이 30대왕으로서 모든 왕들이 왕이라는 호칭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이를 어쩌죠? 삼국사기에는 지증왕이 마립간으로 22대.. 그리고 진평왕이 26대왕이거든요?? 4대는 어디로 도망갔을 까???
그리고,혁거세에서 소지까지는 한호칭만 사용되었는데, 지증에서 경순까지는 2개가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법흥왕은 原宗입니다. 결코 이름이 아닙니다. 시호입니다.
한 왕에게 두개의 시호가 내려진다??? 어떨까요??
干
고구려,신라,가야
韓
고구려
汗
유연,돌궐,글안,몽고
邯
신라
모두 지배자의 명칭입니다. 조선의 일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목민족의 경우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기는 합니다만.....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말갈이 북에 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도 서백제의 기록을 한것이다.
이만 하고 다음항으로 넘어가야겠다.
호동이라.... 우선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라고 나오죠... 갈사왕이라면 해두왕을 죽이고 왕을 빼앗은 파렴치한으로 부여의 대소의 막내동생이죠...
부여가 멸망한 후 도망간 자인지라 고구려와는 원수 지간인데, 느닷없이 사돈이 되어 등장합니다. 서로 교류를 가졌다는 기록도 혼인을 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더욱이 왕비와의 혼인 기록도 없는 상태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2비입니다.
한마디로 어이 없는 일입니다.
대체 대무신왕이 존재한 인물이 맞나요?
어머니도 유령인물... 왕비와 첩도 느닷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최리가 사위로 맞아들이니 사위는 아내를 꾀어 나라를 멸망시키게 하고, 아버지는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는데, 호동은 아쉬워 하거나 미안해 하지도 않고, 왕비는 아들이 대자자리를 호동에게 빼앗길까봐 호동을 모함하고, 마침내 내목숨을 내놓겠습니다. 하여 왕이 호동에게 벌을 받아라 하니 ... 어떤 사람이 왜 오해를 풀지 않냐고 했더니 오해를 풀어 왕비를 더러운 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고 하며 자살하여, 에미의 가슴에 못박고, 아버지를 자식을 죽이는 패륜아로 가볍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 역사에 자식을 죽인 패륜왕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유리명왕에 이어 아들인 대무신왕.. 벌써 둘이다... 이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유리명제도 대무신제도 위대한 고구려의 명황제들이다. 그런 그들을 깍아내리기 위한 중국인들의 피눈물나는 작업의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다.
중국과 별 연관이 없는 이라면 이러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호로 미루어 업적을 짐작할 수 있으니 유리명제도 대무신제도 중국인들의 질시와 미움의 대상이었기에 이런 식으로 깍여진 것이다.
업적과 왜곡이 정비례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형편없게 기록된 인물일 수록 중국에 막대한 피해를 준 인물이라는 것이다.
김부식은 예까지 들면서 아비도 자식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독설을 퍼붓는다..
대무신왕과 유리명왕조사이에 4대가 삭제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의 차이) 즉 120년을 없애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수가 등장하는 듯 합니다.
황당한 것은 이해 12월에 해우를 대자로 삼아 한에 사신으로 보내 조공을 바치니 왕이 이름을 다시 복귀시켜준다. 광호제라는 왕이 .... 무 8년이다.(호가 武를 피해서 썼으면서 왜 바로 뒤에 무자를 쓰나??)
이걸 고구려 스스로의 기록으로 믿는 이들은 .... 글쎄....... .......
고구려는 황제국이었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도 신라도 황제국이었다.
조선의 삼조선인 마조선,번조선,진조선은 각기 삼황이 다스리니 바로 일황 2부황제 체제였다. 조선당시에 중국인들은 속으로는 자신들이 황제라고 생각했지만 감히 드러내어 사용하지 못하였다.(이는 추리일 뿐이다. )
자동서기에 의하면 남선군,여선군(부부관계가 아님.)의 6황체제였다 하나 여기서는 다룰 상황이 안되고....
하여간 마조선의 뒤를 이은 고구려가 황제 칭호를 사용안할 리가 없다.(한단고기에는 항제로 기록되 있다.) 그리고,번조선의 뒤를 잇는 백제도 마찬가지이고, 진정한 황제국인 진한의 뒤를 이은 신라야 말할 나위가 없다. 신라의 거서간이나 마립간등은 바로 황제의 칭호이며 차차웅은 신정일치의 수장을 뜻하니 선군이나 한웅등과 비슷한 의미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런 기록이 어디 있느냐고 펄쩍 뛰겠지만 우리 나라 역사의 진실이 많이 가리워져 있는 지금 필요한 것은 왜곡된 것을 가려내는 혜안과 그것을 재구성할 수 있는 추리력과 상상력이다.
학문탐구에 위와 같은 것을 사용해서 안된다는 골수 실증주의 학자들은 문서기록을 중요시 하면서도 자신들에게 해가 될만한 기록을 무시해버리니 이야말로 진짜 사이비 학자인 것이다.
그리고,최리가 나와서 항복하고, 왕성이 함락되었다면 낙랑은 멸망한 것이다.
그런데,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낙랑을 멸망시킨다는 기록은 무엇인가??
그리고, 27년의 기록은 왜곡의 확실한 증거가 드러나 있다.
가을 구월 한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취하고는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의 땅이 한의 땅이 되었다.
渡海 이 구절이 문제이다. 그리고,살수 이남이라는 구절도...
여기서 얼핏 떠오르는 것은 낙랑이 평양에 있고,살수 이남인 청천강 이남까지 한의 땅이라는 것이다.
나참~~ 이런 것을 믿는 안목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어!!! 쩝쩝쩝!!!
이 기록은 중국인들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바로 일본인들이 왜곡한 구절이다.
낙랑이 살수 이남에 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여기 있기는 하지만.....
더욱이 바다를 건넌다는 단 두글자로 인해 역사지명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게 된다.
두 글자이기에 그만큼 왜곡하기도 쉽다.
한마디로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얘기이다.
결국 313년의 낙랑은 여전히 하북성에 존재하며.... 최리가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에 완전히 복속하지 않고, 자치를 계속 했다는 사실밖에 되지 않는다.
9한중의 낙랑과 한나라 전체가 전쟁을 벌인다 해도 한이 오히려 멸망할 만한 전력을 가진 것이 낙랑이다.
(자동서기에 의하면 기원전 1000년 경 낙랑의 인구는1300만이었다 한다. 9한의 총인구는 1억 4108만이었다 한다. 이것을 보고 허무맹랑하다고 비웃겠는가??
한단고기 14세 선군인 고불 선군 재위56년 을해년에 (기원전 1666년.정확한 연대는 더 연구가 필요. )호구조사를 벌였는데 1억 8000만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 이 기록을 말했더니 반박하는 말이 참 가관이더군요...
그정도 인구라면 한반도야 당연하고, 중국전체,시베리아 전부를 합쳐야 나올 수 있는 숫자라고 하면서 어떻게 단군조선 좁은 땅에서 그런 인구가 나올 수 있냐고 반문하더군요... 그것도.. 당당하게.. 저로선 참으로 딱했습니다. 왜 단군 조선의 영토가 중국은 물론 시베리아를 차지했다는 식으로는 생각을 안하느냐고.... 물었죠..
의식의 전환이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아무튼 낙랑을 정벌하면서 바다를 건널 필요는 전혀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이쯤에서 나올 질문....
평양 어느 무덤에서 나온 낙랑태수라는 인장은 그럼 무엇이냐??? 이 비슷한 질문이지요.
그에 대한 기록을 예전에 읽고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기억이 있습니다.
그 무덤이 일본인들의 필생의 역작이라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평양의 낙랑 유적에 대한 것을 신경도 안씁니다.
너무나 허술한 유물 유적들을 천고의 보물 같이 떠받드는 사학자들이 한심하다 못해 이완용과 같은 등급으로 보인다고 하시면 저를 욕하시겠지만 진짜로 그런 심정이 든답니다.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고, 어용사학자들은 민족의 정신을 팔아먹으니까요...
물론 어용학자가 아니라고 박박 우기겠지만요...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유적(선사시대유적을 제외하고...)들 중 일본인의 입김이 안들어 간 유적이 하나라도 있는 줄 아십니까?
오죽하면 무녕왕릉이 하수도 공사인지를 하다가 발견되었는데 ..
지금, 인터넷에서 무녕왕릉의 발굴기록을 검색했습니다.
우습군요.. 발굴당시 왕릉의 성급한 발굴로 원형을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기록이 없다고 나오는 군요....
무녕왕릉은 최소한 6개월 이상의 발굴기간을 잡는다 해도 부족한 유적입니다.
그런 왕릉이 어떻게 성급하게 발굴되었는지 아십니까??
성급이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지금 강단사학계의 거두라는 폐물입니다. 김운용? 김원룡?? 지금 얼핏 떠오르는 이름인데 맞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에 그 망할 놈이 어쨌는지 아십니까??
단 하룻밤만에 모든 발굴 조사를 끝마쳐 버렸습니다.
조수를 수백명 데려 썼냐구요??
천만에요. 단 혼자였습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세계 고고학사에 영원토록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유물들이 환장합니다.
강단사학계는 진짜 국보라고 환장하고,재야사학계는 조작된 유적이라고 환장합니다.
매지석?? 묘지명??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도기에 새겨진 묘지명이라?? 그것도 유치원생 수준의 글빨로???
부여융의 묘지명과 비교해 보십시요...
왕의 묘지명이 그런 식으로 쓰여질 수 있는가...
평민의 묘지명을 쓴다해도.. 더 나을 정도니 할 말 다했지요...
하여간 하룻밤만에 비밀리에 끝난 발굴 덕분에 무녕왕릉은 풀 수 없는 미스터리를 가지게 되었지요. 다행인가요?
저로선 다른 부장품들은 몰라도 묘지명과 매지석은 발굴괴수가 몰래 만들어 숨기고 가서 놓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 식민사관의 약발이 한참 떨어질 때였는데, 무녕왕릉 발굴로 강단사학계는 다시 힘을 얻습니다.
과연 일본인들이 이 릉을 몰랐을까요?? 웬걸요??
한국에서 발굴된 유적중에 일본인이 몰랐던 것은 1%도 안 될것입니다.
실제로 해방후 많은 유적이 일본인이 지목한 곳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무녕왕릉은 조작되었다는 의심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신문기사를 찾았습니다.
참 말은 좋죠~~~
기획/연재] 2001년 06월 11일 (월) 17:30
우리 나라의 역사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2천여년간 많은 왕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을 제외하면 그 이전 왕들의 무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 천년 고도인 경주에서 지금까지 신라금관이 무려 다섯 개나 발굴됐지만 주인공을 알 수 없어 학술용어로 천마총이니 금관총이니 하고 있을 뿐이다.
무덤 주인공의 이름이 전해 내려오거나 무덤 앞에 비석이 있어서 알려진 신라 임금의 무덤은 불과 몇 기 되지 않는다.
백제는 초대 온조왕에서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무려 30명의 왕이 있었지만 왕릉의 주인이 밝혀진 것은 제25대 무령왕이 처음이자 현재까지론 마지막이다.
대학에서 고고학을 배우고 사회에 나온 뒤 지금까지 고고학과 관련한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내게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바로 무령왕릉 발굴 조사다.
참여는 무엇보다 큰 행운이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두 번 다시 발굴조사를 할 수 없는 왕릉 발굴조사에 말단 실무자로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고 감격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일이 우리 고고발굴사에 있어 큰 불행이었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발굴작업이 허물을 씻을 수 없을 정도의 졸속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지금으로부터 꼭 30년 전인 1971년 우연히 발견됐다. 공주 송산리의 구릉 위에 모여 있는 백제시대 무덤 중에는 무덤 내부 벽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소위 송산리 제6호분이 있다.
이 무덤 내부 벽면은 여름이면 습기가 차 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이 습기를 어떻게든 막아야 했고 이를 위해 무덤 뒤편을 가로지르는 배수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해 7월 5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날이 바로 작업 인부에 의해 무령왕릉이 발견된 날이기 때문이다.
백제는 지금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초기 한성백제가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개로왕이 잡혀 죽임을 당한 뒤 웅진(현재의 공주)으로 도읍을 옮겨야만 했다. 백제 역사에서 가장 참담했던 이른바 웅진백제 시기, 백제 증흥의 기틀을 잡은 임금이 바로 무령왕이다.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던 백제의 왕릉이 실로 1천4백50여년의 잠을 깨고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우리나라 대학에 고고학과가 마련되고 10년 만의 일이었다. 고고학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는 61년에 와서야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되고 65년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국립박물관이나 문화재관리국에 몇몇이 근무하고 있었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내가 대학 졸업과 군복무를 마치고 69년 문화재관리국에 몸담은 지 2년 만의 일이었다.
그 해 7월 6일 갑자기 공주 송산리 고분발굴 현장으로 가라는 출장명령을 받았다. 현장은 원인도 모르는 채 서울에서 내려온 언론사 기자들과 사진기자들, 지방지 기자들,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경찰관들, 그리고 조사대원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백제무덤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주에서 전돌로 축조된 무덤이 온전하게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우선 '왕릉일 것' 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쨌든 사람들은 제일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간 김원룡 중앙박물관장과 김영배 공주박물관장이 나와 자초지종을 확인해 주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무덤 밖으로 나와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는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이라고 발표했다.
왕릉이 발견됐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어떻게 된 것처럼 흥분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무덤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아우성이었고 사진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먼저 내부를 촬영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었다. 마치 무령왕이 환생한 듯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조사단에서 부랴부랴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우선 TV기자와 사진기자의 촬영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또한 먼저 무덤 안에 들어가 촬영하고자 하는 각자의 욕심에 아수라장 일보 직전까지 갔다. 겨우 내부를 조명할 수 있는 기자재를 갖춘 방송기자를 먼저 들여보내는 선에서 양해가 이뤄졌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발굴조사가 이뤄지기 전에 조사요원보다 기자가 먼저 들어가는 주객이 전도되는 꼴이 됐다. 그 결과 무덤 내부의 널 길에서 무령왕과 왕비의 관을 지키고 있는 돌짐승의 머리에 꽂혀 있는 철제 장식이 부러지고 바닥에 흩어져 있던 청동숟가락 하나가 밟혀 부러지는 불상사가 발생했으나 모두들 홀렸는지 정신이 없어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사진기자들의 촬영이 끝났다.
무령왕릉의 발견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전해지고 세상의 이목이 온통 공주로 쏠리게 됐다. 더구나 방송이 나가고 나서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굴순서와 방법의 의논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한시바삐 내부조사를 끝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야간작업을 하기로 결정하고 결국 하룻밤 사이에 발굴조사를 마쳤다.
세계적으로 고고학 발굴사에 남을 수 있는 왕릉 발굴을 이렇게 해서 하룻밤 사이에, 어처구니없이 졸속으로 끝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나라 발굴사에 두고두고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됐다.
나의 스승이자 당시 발굴책임자였던 김원룡 선생은 무령왕릉 발굴에 대한 사죄와 반성의 글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나는 사람들이 더 밀려오기 전에 어서 발굴을 끝내기로 작정해 밤을 새우며 발굴작업을 진행시켰다. 이 바람에 고분이 갖고 있던 많은 정보들을 나의 실수로 영원히 모르게 하고 만 것이다. 이 중요한 고분의 경우는 한해 이태가 걸리더라도 모든 정성과 신중을 다해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얻어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무령왕릉에 대한 나의 실수는 비단 나 자신만의 아쉬움에 그친 것이 아니라 나라와 국민에 대한 큰 죄가 되고 말았다. "
하지만 이 일이 어디 발굴단장만의 책임뿐이겠는가. 나 역시 조사에 참가한 한 사람으로서 책임을 면할 수 없고, 그 후 지금까지 발굴조사 때마다 반성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내게 무령왕릉 발굴은 뜨거운 환희와 뼈저린 교훈을 동시에 경험케 했고, 그 후 줄곧 고고학 인생을 걷고 있는 내 마음속 첫째 자리에는 무령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조유전
▶1942년 경남 마산 출생
▶66년 서울대 고고학 석사
▶87년 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
▶90년 문화재 감정위원
▶94년 국립민속박물관장
▶99년 문화재위원
▶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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