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마음’ 과 깨달은 이의 ‘마음’
정말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달은 무소득(無所得)의 경지라면
불쌍한 중생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일어나고, ‘나’를 위해서 할 일이 없지만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할 일이 많고 잠도 자지 않은 자비심이 있게 됩니다.
오직 남을 위해주는 ‘자비심’ 어두움이 없는 ‘밝은 지혜’,
중생들을 모두 괴로움으로부터 건져내고야 말겠다는 ‘위대한 원력’
이것이 ‘깨달은 이’의 마음이고, 불보살의 마음이며, 무소득의 경지입니다.
중생들의 괴로움은 모두 소득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지식을 얻어야겠다. 재산을 모아야 하겠다. 미인을 얻어야겠다. 권력을 얻어야겠다.” 하는
욕망이 일체고(一切苦)를 가져옵니다.
가령 세계에서 가장 좋은 보석을 한 개 선사 받았다고 하면, 그날 밤부터 잠을 못 잡니다.
도둑이 언제 담을 뛰어넘어 올지 모르고, 언제 어디서 강도를 만날지,
택시를 타고 가도 안심이 안 되고 비행기를 타고 가도 안심이 안 되기 때문이죠.
이와 같이 마음에 소득이 있으면 안심이 안 됩니다.
무엇을 얻었든지 어떤 미인(美人)하고 연애해도 마음이 편치 않고
미남(美男)하고 연애해도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여자하고 좋아하는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가 싶어 마음이 항상 불안합니다.
이런 소득에 관심이 없으면 잠이 잘 오고, 소화도 잘되고 항상 편합니다.
어디를 가도 구애 될 것이 없고,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그러니 아무 소득이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부처도 필요 없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나의 생사가 두려워서 그러는 것이지
진실로 부처가 좋아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생사를 초월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결국 부처도 열반도 구하지 않는 무소득의 ‘마음자리’를 찾는다는 결론이 됩니다.
‘마음’은 본래 구애가 없습니다.
아무 데도 거리낄 게 없는 진공과 같은 ‘마음’, 불법을 닦아야 할 필요도 없고,
망상이 없으니, 망상을 떼어내 버릴 일도 없고, 아무 데도 걸릴 데가 없습니다.
지구만 한 보석이 있다고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 데도 내 ‘마음’ 걸리고 거북한 데가 없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을 이끌어 얽매는 것이 재물입니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큰돈을 벌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이런 줄 아는 사람은 세계를 다 준다고 해도 귀를 씻게 됩니다.
세계를 다 차지해서 그 번뇌 덩어리를 맡아 잠 못 자고 ‘마음’만 흔들리는데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이는 그들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라는 뜻입니다.
세계 미인(美人)을 몽땅 데려다준다 해도 그것이 다 귀찮고,
미인이면 미인이지 육체가 아닌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계행을 지키고 정진(精進)해야 합니다.
그래서 ‘반야’의 ‘마음자리’를 깨치면 하지도 않고 안 하지도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되고,
그러고 나면 하면서도 안 하게 되고 안 하면서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 청담 스님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에서 발췌한 어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