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의(文義) 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너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는가
겨울 문의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1974)
[작품해설]
이 시는 , 시인이 신동문(辛東門) 시인의 모치낭 때, 충북 청원군 소재의 문의 마을에 가서 장례 절차를 주관한 체험에서 나온 작품이다. 이 시는 초기 시의 허무적 색채에서 벗어나 1970년대 중반, 시인이 민중 시인으로 변모하게 되는 중기 시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먼저 이 시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나타나는 ‘길’과 ‘죽음’은 가장 핵심적인 시어이다. 그러나 1연의 2행과 3행에서 등장하는 ‘길’은 그 의미가 각기 다르다. 즉 전자의 길이 화자가 문의까지 간 길을 나타낸다면, 후자의 길은 문의에서 다른 곳으로 뻗어나간 길을 의미한다. 5행에 나타난 ‘죽음’의 경우도 마찬가이다. 첫 번째 죽음은 작품 전체의 문면(文面)에 나타나는 행동 주체로서의 죽음이지만, 두 번째 죽음은 화자의 정서에 의해 착색된 죽음, 결국 화자가 느끼는 죽음이ᅟᅡᆮ.
화자는 문의에 닿는 ‘길’과 죽음의 ‘길’을 은유로 결합하여 ‘이 세상의 길’로 보여 줌으로써 죽음의 의미를 확대시킨다. 그로므로 문의와 세상이 연결되는 ‘길’을 통해 둔구 행렬이 지나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관성을 통해 길의 적막함은 곧 죽음의 적막함이 됨으로써 죽음은 삶을 거절한 채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죽음이 가는 길이자, 마을로 표상된 삶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 따라서 ‘길’과 ‘마을’은 서로 대립적 개념이며, ‘재’는 삶이라는 마을에 예비 되어 있는 죽음을 뜻한다.
화자는 이제 삶을 전제로 하지 않은 죽음은 없으며, 죽음은 결국 삶을 완결하고 통합시키는 것을 깨닫고는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 한 죽음을 받는 것을’이라고 말한다. ‘죽음이 죽음을 받는다’는 것은 죽음이 어느 한 개인의 죽음으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죽음과의 만남을 통해 모든 삶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임을 뜻한다. 또한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 저만큼’과 ‘돌아다본다’는 것은 죽음과 삶, 죽음과 자아의 관계가 모순적임을 뜻한다.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것은 왔다가는 멀어지고, 멀어지다가는 다시 가까이 오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마침내 화자는 ‘모든 것은 낮아서 /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음을 때닫게 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 중에서 죽음보다 높은 것은 없으며, 돌을 던져 죽음을 쫓아내려 해도 죽음은 온 세상을 덮어 버리는 눈처럼 피할 수 없는 숙명임을 깨닫게 된다.
이 시에서 죽음은 결코 절망적이거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친근한 대상으로서 화자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죽음은 삶에서 출발하는 것이므로 삶을 완성시키는 것도 죽음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화자는 한층 경건해진 삶의 자세를 지닌다. 그러므로 화자는 엄숙한 장례 의식을 통해 깨다데 된 죽음과 삶의 관계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라는 표현으로 알려 주는 것이다.
[작가소개]
고은(高銀)
본명 : 고은태(高銀泰)
법명 : 일초(一超)
1933년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52년 출가(出家)
1956년 『불교신문』 창간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전은사운」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2년 환속(還俗)
1975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1989년 장시집 『만인보』 발간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1998년 제1회 만해시문학상 수상
시집 : 『피안감성(彼岸感性)』(1960), 『해변의 운문집』(1963), 『신언어의 마을』(1967), 『세노야』(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부활』(1975), 『제주도』(1976), 『입산』(1977), 『새벽길』(1978), 『고은시선집』(1983), 『조국의 별』(1984), 『지상의 너와 나』(1985), 『시여 날아가라』(1987), 『가야할 사람』(1987), 『전원시편』(1987), 『너와 나의 황토』(1987), 『백두산』(1987), 『네눈동자』(1988), 『대륙』(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1988), 『그날의 대행진』(1988), 『만인보』(1989), 『아직 가지 않은 길』(1993), 『독도』(1995), 『속삭임』(1998), 『머나먼 길』(199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