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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6월 29일 수요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오 16,13-19)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말씀의 초대
요한의 형 야고보는 헤로데에게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는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해 낸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때가 될 때까지 주님께서 보호해 주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순교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며 자신은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술회한다. 이러한 고백에서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주님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고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 그 반석은 영웅적인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나약한 한 인간을 떠받치고 계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약한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 교회를 떠받치고 계시는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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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나는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얼마나 정직하게 쓰여 있는 책인가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결코 번드르르하게 좋은 것만 쓰고 있지 않다. 오히려 약점, 치사한 점, 인간적으로 불리한 점까지도 낱낱이 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만 봐도 성경이 진실한 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 소설 『빙점』의 저자로 잘 알려진 미우라 아야코가 쓴 『빛 속에서』라는 책에서 인용한 글입니다. 미우라 아야코는 그리스도교를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투병 생활을 하면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는 약하고 허무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성경 말씀으로 힘을 얻어야 새롭게 살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 성경 말씀이 얼마나 진실한지 제자들의 모든 약점을 성경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도 알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사실 사도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예수님을 배신하고 달아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 가운데는 얼마나 겁쟁이였으면 그야말로 알몸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습니다(마르 14,52 참조). 특별히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는 어떻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무지와 무식, 배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 또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선봉에 섰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합니다.
어쩌면 『성경』이 집필될 무렵 초대 교회의 사도들과 목격 증인들은 교회 안에서 갖는 위치와 권위로 볼 때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는 적당히 숨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약점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는 오히려 자랑으로 여겨졌습니다(2코린 11,30 참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은 교회의 초석을 놓은 인간의 위대함을 기억하는 날이 아닙니다. 인간의 약함을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날입니다.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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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말합니까? 어떤 이들은 공자나 석가모니라 하고, 어떤 이들은 단군 할아버지나 계백 장군 또는 강감찬 장군이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제갈공명이나 관우 장군 또는 정 도령이나 미륵불이 환생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고백에 주님께서는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바오로도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돌려 드립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처럼 주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고, 바오로처럼 자신이 한 모든 일을 주님께 돌려 드린다면, 주님께서는 우리 하나하나의 어깨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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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64년 7월 18일 여름밤이었습니다. 로마 경기장 인근 가게에서 작은 불길이 솟았습니다. 그러더니 걷잡을 수 없는 화마가 되어 9일 동안 로마의 절반을 태웠습니다. 27세의 젊은 황제 ‘네로’는 뒤늦게 화재 진압과 이재민 구제를 진두지휘했지만 ‘황제가 방화를 사주했다.’는 소문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급해진 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불을 질렀다며 체포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 교회는 박해에 휩싸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붙잡혔고 재산을 잃었습니다. 원형 경기장으로 끌려가 십자가에 달린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굶주린 사자 앞에서 맨몸으로 저항하다 사라졌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 역시 이때 순교합니다. 초대 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를 지켰고 ‘거름이 되어’ 거대한 나무로 자라게 했습니다.
박해자 네로는 이듬해인 65년 자신을 독살하려는 음모에 정치적 불안을 느낍니다. 66년에는 재혼한 아내마저 처형하며 주변 사람들을 극도로 경계합니다.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린 그는 68년에 자살하고 맙니다. 31세의 한창나이였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응답을 증언하고자 순교했습니다. 초대 교회 교우들 역시 살아 계시는 예수님을 깨달았기에 박해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천국의 열쇠
- 남궁영미 수녀-
◆‘열쇠’ 라는 말 속에는 뭔가 문제의 해결책, 정답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열쇠만 있다면 삶의 모든 문제를 어렵지 않게 해결해 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단순하고 우직하고 벌컥 화도 잘 내고, 덤벙대며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눈빛을 상상해 보니 묘한 감동이 느껴집니다. 오래전에 읽은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가 떠오르는 이유와 같은 감동입니다. 주인공 치셤 신부의 삶을 통해 뚜렷이 기억하는 감동은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 앎이란 우리 머릿속 이해이거나 왜곡된 앎일 때가 많습니다.
구원에 대한 앎도 그렇습니다. 마치 구원이 우리의 행동에 달린 것처럼 때론 죄책감으로, 때론 비장함과 엄격함으로 자신을 몰아세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정의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정의를 우리의 행위라 한다면 사랑은 우리의 지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정의도 사랑의 한 부분이지만 종종 우리는 이분법적인 생각을 하는 듯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깊은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지향을 보시며, 우리 구원은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한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치셤 신부처럼 “나는 내 인생의 평판을 하느님께 맡기겠소.” 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는 명민하지도 너그럽지도 못한 때가 많습니다. 말이 행동에 앞서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관심하며 편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인간적 약점 가운데서도 천국의 열쇠를 받았듯 흔들리는 신앙의 여정 가운데서 우리도 천국의 열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모르는 겁니다.
-김기현신부-
가끔 제 자신을 보며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먼저 강론 할 때입니다. 어려서부터 사람들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해 본
적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려고 하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멀뚱히 서 있었던 적도 많았습니다. 또 평소에 말을
잘 하는 것도 아니어서, 대화에 흐름을 끊거나 찬물을 끼얹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제가 여러 신자들 앞에서
복음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설명 해 주는 것이 저에게는 참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또 부활성야 때 ‘용약하라 하늘나라 천사들 무리...’라고 시작되는 엑술떼 노래를 했을 때 신기했습니다. 제가 엑술
떼 노래를 불러서 신자 분들은 많이 힘드셨겠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제 자신이 마냥 신기했습니다.
제가 학부 1학년 때 잠깐 동안 별명이 ‘도’였습니다. 동기들과 성가연습을 하는데, 제 음역이 낮은 도에서 높은 도까
지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래방에 가도 제 주특기는 박수치기와 노래 듣기지, 노래는 거의 부르지 않았습니
다. 외우는 노래도 거의 없는데, 학부 1학년 때 선배 형이 캠프를 가서 노래를 시켜서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
다.’라고 노래를 불렀다가 밤새 그 형 옆에서 술을 먹어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신학교에 총장배 축구대회가 있는데, 제가 반대표 선수로 뛸 때, 신기했습니다. 물론 제 실력이 뛰어나서 대
표선수로 발탁된 것이 아닙니다. 저희 반 신학생들이 신학교를 많이 나갔는데, 나가는 동기들이 대부분 축구를 잘
하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2군이었던 제가 대표선수로 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3학년으로 복학하기 전에 유럽여행을 가는 제 모습을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행을 좋아한 것도 아니고, 학생부에 취미를 앉아있기라고 쓴 적도 있는데, 그런 제가 긴 여행을 가리라고는 생각
도 못했습니다. 혼자 여행을 했고, 어리버리한 제 모습 때문인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었습
니다. 그래도 다행히 무사히 다녀올 수 있어서 좋은 경험이 되었었습니다.
이런 제 모습들을 보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모르는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제 모습이나, 개인적인
능력들을 본다면 제가 했던 체험들 대부분은,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 안
에서 제가 하고 있고, 체험한 것들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은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대축일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분들입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으뜸 사도로서 흩어진 여러 교회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고, 바오로는 유다 민족에게만
전해지던 복음 말씀을 다른 민족들도 들을 수 있도록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바오로가 바위와 같은 신
앙을 갖게 되는 과정을 보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모르는 거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들이 받은 신앙이 하느
님의 선물이고 은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요한 복음 15장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
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니지만, 예수님을 믿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물 위를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보
고, 예수님의 ‘오너라.’ 라는 말씀에 따라 물 위를 걸어보기도 하지만, 이내 큰 풍랑이 두려워 물에 빠지고 맙니다.
그리고 수난 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형제들을 잘 돌보라고 하자, 베드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잡혀가시게 되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며,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
고 부인합니다.
그런 그가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 라고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베드로를 교회의
구심점으로 세우십니다. 또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신적 사명을 베드로에게 맡기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맡기신 사명에 따라 교회에 구심적 역할을 하고,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하기 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에 “나는 하느님의 교
회를 몹시 박해하여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라는 말씀과, 필리피서 3장에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사람이요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라는 말씀처럼, 바오로 사도 스스로도 그리스도교를 박해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율법을 철저히 공부했으며, 율법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
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율법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
다.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의 신앙에 따르면 하느님이 정하신
최후의 날에야 비로소, 죽었던 사람들이 모두 부활하여 하느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 믿음을 갖고 있던 바오로에
게 예수님의 부활은 자신들의 신앙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
고, 그의 열성은 그를 박해의 선두에 서게 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체험하면서 변화됩니다.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다
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
해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게
되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이 기쁜 구원의 소식을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합니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거듭남
을 통하여 다른 민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마태오 복음 21장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
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알 수 없고, 그저 놀랍기만
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결단을 내리는 것
입니다. 나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교회의 여러 가지 신비들에 대해서 신앙의 결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느님 나라에 동참할 수 있는 작은 봉사들에 대해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믿지 못하고 있는 교회의 신비들에 대해서 묵상 해 보고, 내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 해 볼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앞에 선 인간
-김민수 신부-
‘나와 잠자리의 갈등’이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가 기억납니다.
“다른 곳은 다 놔두고/ 굳이 수숫대 끝에/ 그 아슬아슬한 곳에 내려앉는
이유가 뭐냐?/ 내가 그렇게 따지듯이 물으면/ 잠자리가 나에게 되묻는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매우 짧은 시지만 깊은 화두 하나를 던져 줍니다. 잠자리에게 던진 물음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타자에게 던진 질문인데 곧 나를 돌아보게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성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은 창세기 이래 인간에게 향한
하느님의 원초적 질문입니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인간은 자신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피조물임을 아는 순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하느님 앞에 선 인간”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싸우고, 달리고, 믿었다.
-김찬선신부-
“베드로는 신앙 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방인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오늘 미사 감사송이 참으로 아름답고 축일의 의미를 꿰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는,
오늘 우리가 듣는 바로오 사도의 디모테오 2서도 아름답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생각해도 훌륭히 싸웠답니다.
이 말씀, “싸웠다”는 것의 뜻은 무엇이고
“훌륭히”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선 누구와 싸웠고 무엇과 싸웠다는 것일까요?
탁 떠오르는 것이 하느님과 씨름을 한 야곱입니다.
야곱은 약점이 참으로 많고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었지만
또한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놓치지 않고 하느님을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근성이 느껴집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러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완전히 만날 때까지 궁구(窮究)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까지 궁구했습니다.
다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세상과도 싸웠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기는 하였지만
세상이 하느님을 떠나 자기 논리대로 굴러가는 것을
가만 둘 수 없었고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무엇보다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하느님 뜻대로 하려고 할 때 자기 뜻대로 하고자 하는
또 다른 자기에 대해 한탄하며 그는 치열하게 그 자기와 싸웠습니다.
머리를 찌르는 고통을 면하기를 바라는 자신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열심히 치열하게 싸웠다고 하지 않고 “훌륭히” 싸웠다고 합니다.
마구잡이로 싸운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싸움을 하였고
열심히 싸웠을 뿐 아니라 잘 싸워 승리하였다는 뜻이겠지요.
지혜로웠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달릴 길을 다 달렸다고 합니다.
옆길로 새지 않고 달려야 할 길을 달렸다는 말씀이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달려할 길이 어떤 길입니까?
달려야 할 길은 주님께서 앞서 가신 길이고
수난과 부활의 길, 즉 사랑의 길인데,
수난 때문에 부활을 놓치지 않아 그 목적을 잃지 않았고
수난 때문에 주님을 놓치지 않아 그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바오로 사도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자기 믿음을 지켰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지도록
공적인 믿음을 수호했다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마치 싸움닭처럼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고 싸웠습니다.
심지어 처음으로 주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그래서 축일을 같이 지내는 사도 베드로하고도 싸웠습니다.
이렇게 자기 인생의 종착지에 도달한 바오로는
자신이 대견스럽고 승리의 월계관이 씌워질 것임을 확신합니다.
마라톤을 완주한 사람의 그 기분이고 그 토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얘기하면 바오로는 대단한 인간인지는 몰라도
대단한 신앙인은 아닙니다.
대단한 신앙인은 이 모든 것을
하느님에 의해(by),
하느님과 함께(with),
하느님을 위해(for)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해주신 것에 대해 과거적으로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어서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미래적으로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진실하고 진정한 신앙인은 이렇게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총과
자신을 통해 세상에 베푸신 은총을 보고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희망하는
흔들림 없는 믿음의 소유자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양승국신부-
<기막힌 반전>
많은 신앙인들이 꿈꿉니다. 지지부진한 현재의 신앙생활로부터의 탈출, 신앙여정의 대반전, 제대로 된 회심, 180도 유턴...
그러나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어쩌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커다란 강을 한번 건너갔다 돌아오면 크게 바뀐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인생여정을 묵상하다보면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 여정 안에서는 기막힌 반전이 있었습니다. 목숨을 건 회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두 사도 인생 안에 펼쳐진 정말 드라마틱했던 대역전 드라마는 우연히, 거저 일어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출발해보기 위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뼈를 깎는 자기성찰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극심한 고통을 수반한 끔찍한 바닥체험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위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그리스도의 갑옷으로 재무장한 새 인간 바오로였습니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새 인간 베드로였습니다.
삶의 가장 밑바닥에 앉아있던 그들을 가장 높은 정상까지 오르게 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너무나도 나약해서 쉴 새 없이 흔들리던 그들이었지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강건하게 재창조하신 은총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루 온종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 자신의 인생에 특별히 기대할 것이 없음을 알고 거의 자포자기해서 살아가던 사람, 출세의 눈이 멀어 뭐든 다 하던 사람을 당신 제자로 선택하신 파격의 하느님이십니다.
자비의 손을 펼치시어 그들을 일으켜 세우신 하느님, 보잘 것 없게 생각했던 자신이 인생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은총임을 알게 하신 하느님, 보다 높은 곳을 향해, 광활한 목장을 가리키시며 인생의 지평을 넓혀주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과거의 옷을 거두어가시고, 옛 인간을 사라지게 하시고, 새 인간이 되게 하신 하느님, 새 인생을 시작하게 하신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새 삶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훌륭히 싸운 두 사도, 최선을 다해 달릴 길을 다 달린 두 사도,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전파한 두 사도는 지금 밤하늘의 큰 별이 되셔서 우리 앞길을 환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옛날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를 일으켜 세우셨던 하느님께서 오늘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 다가오십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라고 권고하십니다. 의로움의 갑옷을 입으라고 당부하십니다.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정체성
-정명숙 수녀-
길을 가시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제자들이 확고한 정체성을
갖도록 초대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성령의 힘을 받아
이 고백을 한 이후 베드로 사도는 그분을 따르는 제자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여정이 시작됩니다. 이 정체성은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인격
전체를 통해 이루어야 할 존재적 소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야말로 곧 내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기 정체성을 하느님 안에서 찾습니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시고 저는 누구입니까?” 주님께 오상의 은총을 받은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끊임없이 던지신 질문입니다. 내 존재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 때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따라 자기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문제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아직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했다 해도 아직 그리스도인으로 시작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을 진실로
원하지도 찾지도 체험하지도 못하고 살아온 것이지오.
가장 하고 싶은 말
- 김현정-
고기 잡다 말고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 주겠다. ”는 예수님 말씀에 모든것을 뒤로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지금 나는 내가 소유한 모든 관계와 이익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을까?
그만큼 유다 백성에게 ‘그리스도’는 간절히 기다리던 구원자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지배자 로마와 그들의 앞잡이로부터 핍박받는 현실에서 해방될 거라는 희망으로 참혹한 삶을 버텨가고 있었으니까. 유다 백성이 간절히 바라던 ‘해방’은 어떤 것이었을까? 밥을 배불리 먹는 것? 부자가 되는 것? 성경에서는 구원을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 75)라는 말로 표현했다. 돈 · 권력· 계급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지 않고 주님 앞에서 거룩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읽은 칼럼이다. 하루아침에 전원 해고된 국립오페라단 단원들의 복직운동에 동참한 어떤 운동가가 음악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인 지휘자 모씨를 찾아가 동참을 호소했다고 한다. “한국은 합창단 해체해도 다음날이면 노래 잘하는 사람 500명 금방 모입니다. … 당신들이 나서서 지금 뭐하는 거예요? … 그거(서명운동)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 없어요. … 그렇게 불쌍한 사람들 돕고 싶으면 저기 아프리카나 가서 도와줘요. 아프리카에나 가라고. 기도하라고, 기도!!” 단편적인 몇 마디만 옮긴 것이지만 평소 그에게 갖고 있던 이미지와 달리 너무나 실망스러운 반응이었다.
잘난 사람만 잘 살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아픈 이들, 소외받는 이들의 편이셨다. 물론 아프리카에서 굶는 사람들을 도와야겠지만 그들보다 사는 처지가 낫다고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를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주님
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무엇인지, 우리가 꿈꾸어야 할 ‘해방’ 된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야겠다.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
-전삼용신부-
저와 이야기가 아주 잘 통하는 수도자 한 분이 계십니다. 저는 저희가 성격이 비슷해서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알았습니다. 기회가 되어 우리 서로의 MBTI (성격유형검사) 검사 결과를 놓고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서로 거의 반대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혼자 있으면 힘을 얻는 분이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꾸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내성적인 성격인데 반해 저는 외향적이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힘을 얻는다고 나왔습니다. 또 저는 지극히 이성적이라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데, 그 분은 매우 감성적이라 일을 판단할 때 감정적으로 결정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대신 그 분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느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동감하며 들어주고 또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는 말을 하지 않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개의치 않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하여 다른 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는 성격이었습니다. 그 분은 스스로 너무 자신을 이상적으로 생각해서 죄의식에 빠지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에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고쳐야겠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존중하며 함부로 말하는 것을 고치고 또 사람을 일보다 더 중요시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성향을 지녔는데 저는 그 분과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서로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가는 것을 느낍니다. 남자가 동시에 여자일 수는 없듯이, 또한 한 사람이 동시에 상반되는 성격을 지닐 수 없듯이 혼자 완전한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도 그래서 세 분이 한 몸이 되듯이, 인간 또한 본질적으로 서로 관계 맺으면서 완성되도록 창조 된 것입니다.
로마의 성당을 돌아다니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베드로와 바오로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당의 벽화나 모자이크, 심지어는 동상까지도 이 두 분은 마치 부부와 같이 함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분이 서로 합쳐져야 온전한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분은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신부터가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였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권을 지닌 바리사이파 출신이고 당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십자가형에 처해졌고 바오로는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칼로 목이 베어졌습니다.
베드로가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랐다면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사람이었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할 정도로 강하지 못하였다면 바오로는 열정 하나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바오로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으로 성경에 바오로 서간이 그렇게 많은 이유는 그 분이 편지를 매우 신학적으로 쓰셨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베드로는 자신의 민족을 사랑하여 유다인들을 위해 전교하기로 하였지만 바오로는 유다인들 외에 이방인들을 선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은 유다인을 또 한 사람은 유다인 아닌 사람들을 위해 사도가 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에 이 둘이 합하여져야 모든 민족을 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만으로도 바오로만으로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완전히 다른 이 두 사람이 합쳐져야 비로소 온전한 모든 인류를 위한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그 두 분은 영원히 함께 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끼리 서로 다른 것과 그 하는 행동이 틀린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합니다.
‘다른 것’은 둘을 더 완전하게 해 주고 ‘틀린 것’은 서로 바로잡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조화를 이루며 교회가 발전하도록 처음부터 섭리하셨습니다. 만약 우리 주위 신자가 하는 일이 틀린 것, 즉 죄가 아니라면 그것은 나와 다르더라도 교회를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니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틀린 것이라면 서로서로 바로잡아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한 번은 바오로가 베드로를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고 있을 때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자 베드로가 그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을까봐 밥 먹다 말고 살짝 자리를 뜨는 것을 바오로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더 이상 구약의 할례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도답게 행동하지 않자 바오로는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를 심하게 나무랍니다. 왜냐하면 그 행동은 사람에 따라 ‘다른’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틀린’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베드로와 바오로 축일에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부부처럼 함께 축일을 지냅니다. 그들이 작은 성인들이어서가 아니라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되어 함께 협력할 줄 아셨기 때문이고 그렇게 이 두 분이 교회의 기초를 닦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집단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 틀린 것들을 서로 바로잡아주면서 모두가 하나를 이루어가는 집단입니다.
혹시 주위의 신자가 죄짓는 것도 아닌데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등을 돌리고, 혹은 틀린 일을 하는데도 남 일인 것처럼 그냥 눈감아버린 일은 없는지 살펴봅시다.
빨리가 아니라 다 달렸다
-김찬선신부-
오늘의 이 축일로 바오로 해를 마감합니다.
저도 한 해를 바오로 서간을 중심으로 지내며
그 어느 해보다도 바오로의 풍모를 마음에 새긴 한 해였습니다.
한 해를 보낸 나에게 남은 바오로 사도에 대한 인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프란치스코와 관련해서
일부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보이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자신은 프란치스코를 사랑하여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이 되지만
자식이 프란치스칸 수도자가 되는 것은 반대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사는 것이 멋있기는 해도
너무 힘들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 남은 바오로에 대한 인상도 비슷합니다.
너무 치열하고 고단한 일생이었다는 느낌입니다.
쉼이랄까 삶의 즐거움은 전혀 없이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물러섬 없이 달려간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도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제는 작정을 하고 등산과 마라톤을 하였습니다.
지난 금요일, 마라톤을 조금 심하게 하여 다리가 뭉친 곳이 있어서
풀어주기 위해 또 등산을 겸하여 마라톤을 한 것입니다.
안산을 한 시간 등산하고
그 중턱에서 한 시간 마라톤을 하기로 하였는데
등산을 빠른 속도로 마치고 30분 정도 뛰니 벌써 힘이 들었습니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계속 생기는데도 끝까지 뛰었습니다.
한 시간을 다 달리고 윗몸 일으키기까지 한 다음
하늘을 보고 한동안 그대로 누워있었습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가 오늘 독서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
이런 말은 자신의 정과 성을 다 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다른 데 한 눈 팔지 않고
힘도 남김없이 다 쏟아 목표를 향해 달리는 것,
그 하나에 오롯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마라톤을 하다 보면
처음에 힘이 있고 몸을 풀기 위해 천천히 뛸 때는
뛰면서 풍경도 보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지만
얼마 지나 힘도 지치고 제 속도로 뛰기 시작하면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뛰는 자신만이 남습니다.
다른 생각이 없이 오직 자신과 대면하게 되는 것,
이것이 있는 힘을 다 할 때
정성을 다 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뿌듯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대단히 교만한 말처럼 들리지만
겸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제 마라톤을 하는데 젊은 친구도 뛰고 있었습니다.
몸매나 뛰는 모습이 제대로 배우고 많이 뛴 사람의 그것이었습니다.
은근히 그 젊은 친구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마음이 생기는데
얼른 그런 마음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옛날 같았으면 느리게 달리고 남보다 뒤지는 저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할 수도 있었지만
어제는 느리고 뒤지는 저에 대해
훌륭히 해냈다고 칭찬을 할 수 있었습니다.
빨리 달린 내가 아니라
다 달린 나에게 만족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자기 인생을 사랑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 가치를 모르고
다른 사람의 채찍이 무서워 억지로 달린 인생은
이런 회고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랑 때문에 스스로 달리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자청한 사람의 인생만이
고통마저 사랑이 되어 더 할 수 없는 행복감 가운데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저도 바오로처럼 내 인생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
새벽을 열며
어제 우리 성당에는 음악 피정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조금 겁이 났지요. 왜냐하면 피정이 시작되기 전, 비가 너무나 많이 왔거든요.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퍼 붓는 비가 그렇게 매정하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음악피정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인데 날씨부터 도와주지 않네요. 설상가상이라고 잠시 뒤, 연락이 왔습니다. 음악을 담당하는 친구들이 차가 막혀서 늦게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꼬이는 상황에서 피정은 시작되었고, 잠시 뒤 모든 문제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글쎄 하루 종일 온다던 비도 그치면서 날씨까지도 점점 좋아졌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피정을 받기 위해서 한두 분씩 성당으로 모이셨고, 결국 피정을 마치는 음악 미사 때에는 300여명이 넘는 분이 함께 해 주셨습니다.
잠들기 전에, 아무런 문제없이 잘 끝났음에 감사드리면서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모든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신 텅 빈 성당 안에 서 있으니까 왜 이렇게 허탈한 느낌이 드는지요? 그러면서 스스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영광을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빈자리를 보면서 허탈감에 빠져있던 것이 아닐까요?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생활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나의 영광을 생각했던 적이 너무나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나를 있게 해주시고, 나에게 이러한 재능을 주시고, 또한 나에게 이러한 힘을 주신 분이 주님이신데도, 마치 내가 모든 것을 다한 것인 양 생각하는 이기심을 간직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맡기지 못했을 때, 우리들은 세상이 주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기념합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모두 처음에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지요. 한 명은 예수님을 배반했었고, 또 한 명은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둘 다 처음에는 자신의 영광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정 반대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이들이 이제 주님 안에서만 행복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변화됩니다.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순교자의 길을 기쁘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영광만을 생각했던 내 자신을 다시금 반성하여 봅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었음을, 만약 주님의 따뜻한 사랑이 없었으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음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삶을 지향하여 봅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처럼…….
주님께 맡기세요. 걱정까지도…….
빠다킹신부
하느님의 아드님
-박영봉 신부-
우리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분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영원한 아들이시고,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며’(요한 13,3),
‘하늘에서 내려오셨고’(요한 3,13),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고 고백합니다. 성령께서 움직여주시고 성부께서 이끌어주셔서,
우리는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바로 이 신앙 위에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이라고 하시며,
이 칭호를 통해서 당신께서 영원으로부터 계시는 분임을
확언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요한 3,18)을 믿도록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앞에서
백인대장이 한 고백에 나타나 있습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나의 고백
-엄재중-
오늘 복음은 가톨릭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교황 수위권 교리의 근거로 제시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우리에게 어떤 분명한 답변을 요구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이런저런 풍문을 전하자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에 대해 시몬 베드로는 정답 중의 정답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한다.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베드로의 고백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교회의 공식 선언문이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내가 그 질문을 피해 갈 수는 없다. 오늘 복음이 중요한 것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을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나는 정말로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고 있는가? 예수님은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시몬을 베드로, 곧 반석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다.
교회는 단지 땅 위에 있는 건물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우리의 인격과 영혼에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 위에 교회는 존재한다. 또한 그것을 알려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된다. 우리는 세례 이후 하느님 백성이 되어 매일의 삶과 전례 안에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또한 이미 화석화된 답변이 아니라 순간마다 다가오는 사건 안에서 그분을 고백한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 계시기에 우리의 고백 역시 늘 갱신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박근범신부-
우리는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잘 알 때가 많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우월감과 열등감 때문입니다. 저마다 알게 모르게 상대와 비교하는 면이 있습니다. 결코 비교해서 행복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청취자 분들도 알고 계시는 고사성어 중에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다’는 뜻의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곧잘 ‘나도 나를 모르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자기도 모르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은 생각과 관심이 어디 한 곳에 쏠려 있거나 빠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시쳇말로 마음이 딴 데 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깨달아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라고 하지 않았나? 여깁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대체 너희들이 나의 정체(正體) 혹은, 신원(身元)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 라고 묻는 것입니다. 한편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하느님은 성경(말씀) 안에, 성체(성사) 안에, 당신을 믿는 사람 안에, 그리고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하느님의 존재와 현존에 대해 의식하며 지내고 있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 ‘자기 자신에게 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스스로에 대한 ‘존재’의 물음입니다. 무엇보다 이 사실은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찾아나가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쩌면 ‘내가 누구인가?’ 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 주는 성숙된 인간의 진정한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분명히 우리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고통이 따를지라도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보살펴 주시고 이끌어 주십니다. 그러니 힘을 내시고 희망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르코 10,52) 이제 선택은 각자 자유 의지에 달렸습니다.
깊은 믿음과 주님 체험으로 살아간 사도 바울로
-경규봉 신부-
사도 바울로는 길리기아 지방의 다르소에서 태어났다(사도 22,3).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정통 히브리인이며 율법에 충실한 바리사이파 사람이었다(필립 3,5-6).
그는 다르소의 시민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사도 22,25-28), 부유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의 유명한 랍비 가믈리엘로부터 율법을 공부하였으며(사도 22,3), 천막 만드는 직업(사도 18,3)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여, 부제 스테파노를 처형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했다(34-36년 사이). 이 주님 체험은 그를 완전히 변화시켜 그로 하여금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아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지내다가 다마스쿠스에서 복음을 전하였다(갈라 1,17-18).
39년경에 예루살렘에 올라갔고, 바르나바의 도움을 받아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소속되었다(사도 9,27-29). 그 후 그는 다르소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으며, 43년경에 바르나바의 초대를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교사가 되어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11,25-26). 이것이 이방인을 상대로 하는 복음전파의 시초가 되었다.
45년경부터 바오로는 세 차례의 전교여행을 하였다. 45년부터 49년까지 키프로스,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에서 전교했고, 이 여행에서 사울이란 이름을 ‘바울로’라고 바꾸었다.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갔으며,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확인한다. 예루살렘회의에서 돌아온 그는 제2차 여행(49-52)을 시작하는데 이를 ‘12 사도들의 파견’이라고 표현한다(사도 15,36-18,22).
그는 제1차 전교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뒤, 유럽에 최초로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립비, 테살로니카, 베레아에 교회를 세웠고, 아테네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지만 뚜렷한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후 안티오키아로 귀향하여 다시 제 3차 전교여행을 계획하였지만(53-58년), 2년 동안 고린토 교회에서 사목하였고, 에페소 교회에서 봉사하였다.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60-61년 사이에 몰타 연안을 따라 로마로 이송되었으며, 63년 무렵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로마의 클레멘스에 의하면, 그 후 에페소,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지를 재차 방문했고(63-67년), 트로아스에서 또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서 67년, 사도 베드로와 같은 날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저술가로서 신약성서의 서간 대부분이 그가 보낸 편지이다. 로마서(고린토에서 57-58년), 고린토 1서(에페소에서 54년), 고린토 2서(필립비에서 57년), 갈라디아서(에페소에서 54년), 골로사이서, 필립비서, 에페소서, 필레몬서(로마에서 61-63년), 테살로니카 1,2서(고린토에서 51-52년) 및 사목서간인 디모테오서와 디도서를 보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실한 바리사이파사람이며, 율법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로는 주님을 깊이 체험하였다. 그 후 그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은총뿐이라는 점을 깊이 느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인간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서 자비로이 베푸시는 은총을 통해 구원된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
이 은총은 곧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래서 그는 오직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만을 선포하였다(1고린 1,22-23).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할 것 없이 이 은총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누구나 회개하고 주님을 믿으면 구원된다는 사실을 선포하였다.
주님 체험으로 일생을 살아간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였다(필립 1,21). 그는 예수님처럼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는 삶을 살았다(갈라 2,20).
그는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몽둥이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에 맞아 죽을 뻔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표류한 일도 있습니다. 자주 여행을 하면서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도시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짜 교우의 위험 등의 온갖 위험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노동과 고역에 시달렸고 수없는 밤을 뜬 눈으로 새웠고 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제쳐놓고라도 나는 매일같이 여러 교회들에 대한 걱정에 짓눌려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2고린 11,24-27)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고난을 당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그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하였다(로마 8,35). 그는 복음이 주는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하였으며, 다 같이 복음의 축복을 나누고자 했다(1고린 9,23).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랑하지 않았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1고린 9,16).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이 약해지는 것을 만족하게 여기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았다.(12,10)
이처럼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역경을 헤치며 누구보다도 열성적이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한 복음의 사도였다. 그가 그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모든 힘은 주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주님체험은 삶의 근원적인 힘이었다. 감옥에 갇히거나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힘과 용기와 위로를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시어 그의 힘이 되어주시고 생명이 되어주셨던 것이다.
물론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유혹에 시달렸을 것이며, 주님과 주님의 뜻을 완전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1고린 13,12) 겪는 갈등도 심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며 꿋꿋이 사도의 길을 걸어갔다. 신앙은 여러 가지 유혹과 갈등을 이겨내고 불현듯이 솟아나는 회의와 의혹을 이겨내는 하느님의 힘이며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사도 바울로와 같은 믿음을 주시기를 간구하자. 주님께 대한 깊은 체험과 깨달음을 통해서 주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하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찬란한 기쁨의 시간, 인생의 오후 4시>
독일 남부 한 시골 성당에는 이런 기도문이 새겨져 있답니다.
“천주의 성모님, 감사합니다. 당신께서 18년 동안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오히려 저에게 많은 시련과 실망을 통해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오늘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입니다. 두 사람 역시 오랜 세월 거듭되는 시련과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던 주님의 사도였습니다.
두 분은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충실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의 약속에 성실하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수시로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늘 남보다 먼저 일어섰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희생했습니다. 남보다 더 많이 인내했습니다.
오랜 단련 끝에 온전히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 바오로 사도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느님 사업을 위해 고통 받는 것은 곧 은총입니다.”
두 분의 인생역정을 묵상할 때 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그분들의 생애는 예수님으로 인해 참으로 큰 고난으로 점철된 생애였지만 그에 못지않게 예수님으로 인해 정녕 행복했던 생애였습니다.
두 분의 생애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물론 인생의 전반전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만 살아왔던 날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도 팍팍했습니다. 그리도 힘겨웠습니다.
그러나 은혜롭게도 두 분은 인생의 하프타임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분과의 만남으로 인한 고통과 상흔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인생의 전반전 동안 열심히 쌓아왔던 그 소중했던 삶의 기반들을 모조리 허물어트려야 했습니다. 출가를 위해 사랑했던 가족들을 뒤로 하고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손가락질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이 출발하기까지는 반드시 영혼의 어둔 밤이 필수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이 캄캄해진 후에야 비로소 필요했던 새 인생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에 있어 먹구름은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도 서볼 필요가 있습니다.
축구시합의 승리를 위해 전반전도 중요하지만 후반전은 더욱 중요합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인간의 지혜를 던져버리고 하느님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나 혼자 외롭게 길을 걷는 시기가 아니라 아버지와 손잡고 걸어가는 행복한 시간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은 내 안에 더 이상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시는 기간입니다.
오후 4시는 무슨 일을 시작하기엔 늦고 집에 들어가기는 이른 시간입니다. 인생의 오후 4시 마찬가지입니다. 막연하고 어정쩡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시간입니다. 곡절 많고 쓸쓸한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오후 역시 소중합니다. 한 칼럼니스트는 ‘인생의 오후’가 찬란한 기쁨의 시간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오후는 아침이 꿈에도 그려보지 못한 일들을 안다’는 스웨덴 속담도 있습니다.
이 소중한 보너스 시간을 사도 베드로와 바오로처럼 ‘주님의 시간’으로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 한 인터넷 프로그램에 몇 가지 요구사항을 입력했습니다. 생년월일이나 질병유무, 흡연이나 음주 유무, 주중 운동 횟수... 그랬더니 남아있는 수명을 계산해주더군요. 그때는 ‘아직 많이 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 가만히 따져보니 그리 많이 남지도 않았습니다.
계산해보니 대충 1/3정도가 남은 것 같습니다. 이미 지나간 첫 1/3때는 저밖에 몰랐습니다. 저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 돌아볼 여유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주님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 맞이한 1/3, 때로 하느님을 위해 살기도 했습니다. 때로 이웃을 위해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을 극복하는데 사용된 에너지 소모가 엄청났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려 보니 답이 나오는군요. 앞으로 남은 1/3은 오직 주님만을 위한 날들이어야 한다는 답 말입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조욱현신부-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오늘의 복음 말씀은 주님 생애의, 그리고 그분의 직무의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점이 되고 있다. 이 직무, 메시아적 사명은 성령의 세례에서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의 복음의 선포에 함께 있는, 하느님 나라의 업적들에 따라오는 이 사명은 인간적으로 실수한 것이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을 당신과 함께 선교사로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곧바로 모두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외로운 상태에 계시다. 그리고 이제 국경 너머 팔레스티나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 계시다. 벌써 그분에게는 오직 불확실한 열두 제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그러나 주님께는 그들이 필요했다. 그들의 신앙이 필요했다. 주님께서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즉 십자가 그리고 세상에 열매를, 즉 성령을 전해주시는 일을 이루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루가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그것은 힘이 없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참된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주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들을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그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제자들에게 주님은 누구였는가? 여기서 베드로가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대답한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한 말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게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이름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사도들의 손들을 통하여 구원의 모든 권능을 주실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제 아버지께서는 부활을 미리 체험케 하고 또한 십자가를 위해 아들을 확실하게 하여 그분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고, 영광의 구름, 전능하신 성령 하에서 제자들과 함께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커피 머신).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울로의 축일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하느님을 따랐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진정 증거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자.
<가톨릭 신자만 아니었다면>
-양승국신부-
언젠가 참으로 기구한 일생을 살아오면서도 신앙 안에서 잘 극복해내고 계신 한 자매님에 대한 사연을 전해들었습니다. 큰 감동과 더불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너무나도 안 풀리던 고통의 세월이었습니다. 어찌 그리도 안풀리는 인생이었는지요. 계속되는 남편 사업의 실패에다 젊은 시절부터 얻게 된 병고로 극심한 고통을 겪던 와중에 사랑하던 자녀들마저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마지막 보루였던 남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자매님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습니다.
가슴엔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바위덩어리 하나가 들어앉게 되었지요. 때로 그 바위덩어리를 안고 걸어가기가 너무 힘겨워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지요. 너무도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에 몇 번이고 죽음을 생각했답니다. 그때마다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 하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었지요.
너무도 고통스러워 울부짖던 어느 날,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자매님의 인생을 위로하셨습니다. 자매님의 처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느님은 다음과 같은 응답을 주셨답니다.
"나로 인한 이 세상 고통의 가시밭길은 아버지 나라에서 향기 가득한 꽃길로 변할 것이다."
물론 그 후 자매님의 삶은 180도 바뀌었지요. 더 이상 눈물도, 방황도, 고통도 없는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다시금 일에 몰두하면서, 성서공부에 전념하면서, 봉사활동에 매달리면서 걱정하고 고민할 시간이 없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자매님은 성서 봉사활동을 통해 친구들도 사귀고, 예전의 쾌활함을 되찾았고, 하루하루 기쁘게 살다보니 건강도 회복되는 은총을 받았답니다.
그 모든 변화는 결국 예수님으로 인한 변화였습니다, 그 모든 상황전이는 예수님의 위로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은총은 결국 예수님께 맡김으로써 얻게 된 은총이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삶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분의 삶은 예수님으로 인해 고통도 많았고 슬픔도 많았지만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 행복했던 삶이었습니다.
두 분의 삶은 한때 예수님으로 인해 쫄딱 망했던 삶, 종친 인생으로 여겨졌었는데, 결국 예수님으로 인해 대박을 터트린 삶,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삶이었습니다.
연약한 질그릇과도 같았던 두 분의 인생에 예수님께서 개입하시면서 삶의 판도는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보잘것없어 보이고 나약하게만 보이던 자신들의 질그릇 안에 예수님의 빛이 스며들면서 너무도 강건하고 아름답게 변화된 자신들의 모습에 두 사도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 두 사도는 이제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우리 매일의 삶 안에서 예수님을 선택함으로 인해 받게 될 고통도 크겠지만 예수님으로 인해 받게될 위로는 훨씬 클 것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는 너무도 크고 감미로운 것이기에 죽음과도 같은 세상의 고통조차 이겨 낼 힘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 위로를 받게 되면 그 어떤 공포 앞에서도 겁먹지 않고 담대하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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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결핍 앞에서>
베드로 사도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마태오 26, 75)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베드로가 수제자가 되고 나서 기고만장했을 때, 자신은 절대로 죄에 떨어질 리가 없다고 장담했을 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우겼을 때, 사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 앞에 자신의 죄와 인간적 부족함,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고백할 때, 사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가장 높은 단계로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제대로 된 수제자가 된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였고, 순수 혈통의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였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의 미래는 장밋빛이었습니다.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그 때 당시 그는 가장 하느님과 멀리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신 하느님 손길을 체험한 후에 바오로는 자신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알고 되고 마침내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 24)
고되고 힘겨운 오랜 신앙 여정 끝에 마침내 자신의 결핍을 솔직히 인정하게 된 두 사도에게 하느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삶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시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한계, 나약함, 결핍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고, 그 순간 우리는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께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그토록 우리가 원망하는 우리의 결핍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은총의 도구였습니다.
내 결핍, 내 가족의 결핍, 내 이웃의 결핍 앞에서 우리가 지녀야 할 시각은 한 가지입니다.
결핍은 축복입니다. 결핍은 은총입니다. 결핍은 새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우리들 삶의 길목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결핍을 체험하게 될 때 마다, 뿐만 아니라 내 결핍을 확인하게 될 때 마다 우리는 외쳐야 합니다.
“저 결핍이야말로 은총입니다. 저 결핍은 우리를 성화에로 인도합니다. 저 결핍을 통해서 우리는 구원됩니다. 저 결핍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내게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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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주춧돌이신 예수님
-배광하신부-
지상에서 교회의 사명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현대세계의 그릇된 구원관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세계의 지배질서를 부인하고 몰락을 통해 구원받기를 희망하는 묵시록적인 경향은 결코 단 한 번도 완전히 사라진 적이 없었다. 18세기부터는 종교와 별도로, 혹은 종교에 반대하면서 이러한 경향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된 경우를 우리는 마르크시즘에서 보게 된다.”
그런데 빠르게 변화되는 세계 안에서 이제는 비단 마르크시즘 만이 아니라 더 많은 무신론과 다신론적인 경향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가히 다원주의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교회가 나아갈 방향은 분명 하느님 말씀 안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리 3, 20)라고 가르치고 있으며,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사실 땅 위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올 도성을 찾고 있습니다”(히브 13, 14).
그렇다면 교회가 지상의 평화가 아닌 미래에 오게 될 하느님 나라만을 꿈꾸며 지상의 삶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가르쳤는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구약의 야곱은 천국 사다리의 꿈을 꾼 뒤 하느님 말씀을 들었을 때 이렇게 외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도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세 28, 16~17).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이 지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그 참된 평화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같은 노력 뒤에는 수많은 반대 세력과 유혹이 있어 왔습니다. 또한 많은 이단과 박해를 견디어 내면서도 평화를 심으려 하였습니다. 고난 가운데에도 끝내 중심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견디어 올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 희망의 말씀을 언제나 교회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8).
하느님의 힘으로
하늘나라의 열쇠는 반드시 베드로 사도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분명 가톨릭 교회의 우뚝 솟은 두 거봉은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러나 두 분 사도의 출생과 성격은 너무 대조적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어부 출신이며 많이 배우지 못한 분이신 반면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당대에 있는 집안의 출신이며 정통 바리사이인으로 배움으로는 수도 예루살렘에서 가말리엘을 스승으로 모시고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은 분이셨습니다.
성격으로 말하자면 베드로 사도는 우유부단함과 덜렁거림과 쉽게 판단을 내리며 겁이 많았던 분으로 성경은 소개합니다. 반면 바오로 사도는 깐깐하며, 다혈질적이고 끈기가 있었으며 타협을 모르는 불같은 성격을 지닌 분이십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께서 천국의 열쇠를 쥐고 계시면 아마도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많지 않을 듯 싶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께서 천국의 열쇠를 쥐고 계시기 때문에 나약하고 쉽게 유혹에 빠지는 죄 많은 우리들에게도 실낱같은 구원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허황된 말장난에 불과하지만 부족한 인간 가운데에서 당신의 엄청난 구원 역사를 이룩하셨다는 것은 약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 나약함도 나약함이지만 그토록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이 모여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교황님을 중심으로 2천 년이라는 긴 세월 교회를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며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원하십니다. 획일적인 강제성 안에서의 일치는 원하지 않으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의 성격이 있는 것이고, 바오로 사도는 바오로 나름대로 성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서로 다른 장점과 단점 중에서 키울 것은 키우고 보완할 것은 보완하며 하느님의 집을 지키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교회의 반석으로 불림을 받았지만 결국 중심 주춧돌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돌을 중심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모이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 2,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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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재구성, 삶의 재창조
-양승국신부-
주님께서 우리 삶에 가장 결정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이 언제인가 묵상해봅니다. 제게 있어 그 시점은 역설적이게도 인생 곡선의 가장 밑바닥 지점, 제로 시점이었습니다.
그간 제가 지녀왔던 허무맹랑했던 기대와 뜬 구름과도 같았던 희망과 최후의 보루라고 여겨왔던 그 모든 신기루들이 다 무너지고 난 다음 순간, 삶의 가장 밑바닥을 체험한 절망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주님께서는 슬슬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나락으로 내동댕이쳐진, 비참할 대로 비참해진 제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하고 난 순간, 그래서 결국 최종적으로 의지할 분,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주님뿐이라는 것을 절절히 확인한 그 심연의 바닥에서야 겨우 하느님 자비의 눈길을 마주칠 수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 당대 유다 사회 안에서 촉망받던 젊은이였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고, 앞길이 창창하던 열성 유대교 신도였던 바오로였습니다. 유다인 가운데 유다인, 바리사이파 사람 가운데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습니다.
원로들은 바오로의 탁월한 언변과 출중한 학식, 대단한 문장력을 눈여겨봤습니다. 대중들은 바오로에게서 자신들의 미래를 이끌어갈 큰 지도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한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면에서 나는 내세울 만한 것이 많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오로에게 도저히 용납 못할 일이 한 가지 발생합니다. 주님께서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기고만장하던 바오로를 단칼에 내려치십니다. 순식간에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지속적으로 상승곡선만 그려오던 바오로의 생애는 인생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맨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위풍당당하던 바오로, 거칠 것 없는 탄탄대로를 달려가던 바오로, 모든 이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바오로는 한 치 앞도 못 보는 시각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혈기왕성하던 바오로, 검투사 대회에 나가도 전혀 꿇릴 것이 없을 정도로 강건했던 바오로, 왕성한 체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던 바오로는 이제 도우미 없이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캄캄한 인생을 맞이합니다. 잠시였지만 바오로가 당시 느꼈을 처참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롭게도 바오로는 자신의 인생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바닥에서 쩔쩔매고 있는 바오로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지만 바오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그토록 저주하고 박해하던 대상이었던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자, 자신을 비참함에서 구해주실 구원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도달한 바오로는 드디어 이렇게 외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다 장애물로 여겨집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그 잘나가던 바오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바오로가 이렇게 자신을 공개적으로 낮춥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줄 것입니까?”(로마 7, 24).
예수 그리스도 앞에 명명백백히 드러난 자신의 비참한 현실, 그리고 그러한 비참한 현실로부터 자신 스스로 해방될 수 없음을 탄식한 바오로는 마침내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해주십니다”(로마 7,25).
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처절하리만치 견디기 힘든 바닥체험을 시키십니다. 납득하기 정말 힘듭니다.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모릅니다. 자존심은 상할 대로 상합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배짱도 똥고집도 사정없이 짓밟으십니다.
그러한 고통스런 체험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 삶의 재구성, 우리 삶의 재창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뒤틀리고 어긋난 우리 삶의 방향을 되잡아주기 위함이 분명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만이 내 생의 전부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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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신부-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부르심을 생각할 때
바오로 사도의 부르심은 수긍할 만하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부르심에는
고개를 갸우뚱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처음에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박해까지 하였지만
신앙적인 열성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어부의 일을 하다가 갑자기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보다
훨씬 더 열렬한 신앙인이었고
스승 가말리엘 밑에서 제대로 된 신앙수업을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오로 사도는 대단히 명철한 분이셨습니다.
많은 서간에서 볼 수 있듯이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그 핵심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체계화하신 분입니다.
사도 바오로 덕에
그리스도교가 이방인에게까지 널리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는 이론과 실천,
냉철함과 열성을 두루 갖춘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갖춘 분이었기에 교만이 그를 늘 따라다녔습니다.
어찌 보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바르나바와 심하게 다투고 갈라서기까지 하였으며(사도16,38-39)
교회의 기둥이라 할 베드로 사도에게도
거침없이 면박을 주는 독선적인 면도 있었습니다(갈라2,11-14).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가시로 찌르는 듯한 고통 때문에
세 번이나 그 고통을 없애달라고 기도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자기가 교만하지 않도록
이 고통을 없애주지 않으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2코린12,7-9).
바오로 사도에 비해 베드로 사도의 부르심은
참으로 하느님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1코린1,26)는 말씀처럼
베드로 사도는 바오로 사도처럼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었고
유력한 사람도 가문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어부 출신에 신중하지도 심지가 굳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Leadership이나 주님께 대한 사랑은 어땠을까요?
이 면에서 출중하여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시고
교회의 반석, Leader로 삼으신 것일까요?
그의 사랑과 Leadership이 믿을 만하여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고 매고 풀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일까요?
당신의 양떼를 치도록
주님께서 사랑을 베드로 사도에게 요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베드로 사도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Leadership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는 이런 능력이나 품성을 가지고
그를 교회의 기둥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강하고,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1코린1,27-28)
베드로 사도를 으뜸 사도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사도로 뽑힌 것이 인간이 잘 나서가 아니라,
교회가 존립하는 것도 지도자들이 잘 통치해서가 아니라,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도 인간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인간이 그럴 자격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하시는 것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믿고
부르심에 응답하고 직무를 수행해서는 안 될 것이며
인간의 능력이나 성덕을 보고 목자를 따라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사를 보면
도저히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교황의 역사가 있습니다.
권력을 탐한 교황, 사치스러웠던 교황,
윤리적으로 타락했던 교황, 잔혹했던 교황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가 존속되는 것은 교회를 통치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증거일 것입니다.
악을 가지고도 선을 이루시는 하느님은 이들을 통해 통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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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잡고 가라
-김기성신부-
탐진치(탐욕, 성냄, 음란)로부터 나오는 모든 못된 것을 끊어버리는 것이 죽음이고, 착한 것(眞善美)을 꽉!!! 잡고 가는 것이 다시삶입니다. 택선고집(擇善固執)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것, 선한 것을 택해서 고집스럽게 붙잡고, 곧이 곧장 하늘 길을 가는 것이 부활의 삶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그랬고, 모든 성인들과 현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마태 17, 5; 사도 9, 5-6). 그들은 하늘나라를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눈으로 세상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고, 세상을 정화시키고 변화시키는 소금이 되었습니다.
착한 것(眞善美) 외에 다른 것에 고집부리는 사람들은 똥고집 센 사람들입니다. 똥을 택하지 않고, 선(善)을 택하는 것이 깨달은 이의 삶입니다. 나라와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거나 분열을 일으키고,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시기하는 것에 고집부리는 것은 똥잡고 사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하여 빨간색, 검은색 칠을 하고 심지어 사탄이란 이름으로 배척하려는 거짓 지도자들도 똥잡고 사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천민(賤民)이라 무시하는 이들도 똥밖에 모르는 이들입니다. 물질과 세속의 들어올림과 권력을 우상처럼 껴안고 사는 것은 똥속에 사는 것입니다. 탐진치에 사로 잡혀, 잠에서 깨어나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탐진치로부터 벗어나 잠에서 깨어난 이는 얼굴에 그 정신이 서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의 얼, 속 알이 드러나는 골짜기가 얼골(얼굴)입니다. 온화하고 부드럽고 편안하고 겸손하고 상냥하고 미소 띤 얼굴입니다. 똥 잡고 사는 사람은 얼굴에 맑은 속 알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찌푸리고 화내고 욕하고 불만 많고 비난하고 남 탓하고 거만합니다. 그래서 똥 잡고 사는 이들의 얼굴은 얼골이라 하지 않고 그저 골통(꼴통)이라 합니다.
요즘 베드로나 바오로 사도같은 분들보다는 똥물 속에 살고 있는 분(糞-똥을 뜻함)들께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를 바꾸고 나라를 팔아먹으려 하는 이분들을 어찌 지도자라 할 수 있을까요? 촛불 들고 어둠 밝히는 어린 학생들에게 창피할 따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어떤가요? 우리 교회도 하늘의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가요?
사도들이 이 세상과 우리 모두를 보고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십시오. 똥물에서 뛰쳐 나오십시오. 탐진치의 욕정을 벗어버리십시오. 그것이 죽음입니다. 선을 꽉!!! 잡으십시오. 속 알을 살찌우십시오. 덕(德)을 쌓으십시오. 그리고 곧이 곧장 하늘 길로 걸어가십시오. 그것이 삶입니다. 그것이 천민(天民)의 삶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오늘 미사의 마침성가로 부른 신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하늘나라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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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서공석신부-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에 이어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오복음서의 이 말씀은 16세기에 개신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면서, 두 교회 사이에 많은 논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생각하는 가톨릭교회는 이 복음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당신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우셨다고 주장하였고, 개신 교회들은 예수님이 교회를 베드로 위에 세운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 위에 세웠다고 반박하였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이 논쟁은 필요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성서학의 발달로 오늘 복음 말씀의 해석이 과거와는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베드로에게 하신 약속이 아니라, 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가 발상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자들이 함께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교회를 세우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생애를 회상하여 기록한 복음서들이 그 사실을 모두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은 마태오복음서에만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교회라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습니다. 마태오복음서를 기록한 공동체는 베드로 사도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서를 기록하는 시기에 발전하고 있는 교회를 보면서, 사도들을 초석으로 설립된 교회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그들은 베드로를 등장시켜 오늘의 복음 말씀을 기록으로 남긴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의 활동으로 발생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도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그 생명을 우리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가까이 두셨던 열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열두 제자의 대표로 처신하신 분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토 사람들에게 쓴 편지에서 부활에 대해 말하면서, 예수님이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게파, 곧 베드로에게, 그 다음 열둘에게 나타나셨다.”(1고린 15,4-5)는 말로 베드로를 열두 사도들과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또 바울로는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한 후 선교활동에 나서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를 만나 보름을 함께 묵었다고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하고 있습니다(1,18). 베드로는 이렇게 사도들을 대표하는 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 가서 활동하다가 기원 후 64년부터 68년까지 있었던 네로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 후 100년경에 기록된 요한복음서는 베드로가 순교한 사실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허리띠를 띠고 원하는 데로 걸어다녔습니다. 그러나 늙으면 두 손을 내밀 것이요, 다른 이가 허리띠를 매어 주고는 그대가 원하지 않는 데로 데려갈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암시하셨다. 이 말씀을 하신 다음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시오.’ 하고 이르셨다.”(요한 21,18-19). 베드로가 순교하여 예수님을 따랐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공동체가 하는 말입니다.
로마 베드로대성전은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교황청은 1940년부터 베드로 대성전 지하층을 발굴 조사하였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으로 그 작업은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20년이나 걸린 큰 작업이었습니다. 그 지역은 본시 로마 상류층의 무덤이었습니다. 호화스런 많은 무덤들 사이에 아주 소박한 무덤 하나가 대성전 본 제대 바로 밑에서 확인되었습니다. 그 무덤에는 옛날 순례자들이 다녀가면서 남겨 놓은 낙서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낙서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베드로 사도와 함께 기억하는 바울로 사도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한 분입니다. 그는 유대교 율사였고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열렬히 박해하였습니다. 그는 39년 경 다마스커스에서 극적으로 전향하였습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았으면, 그리스도 신앙은 유대 문화권을 넘어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바울로는 당신의 친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이스라엘 민족의 한 사람으로...율법을 지키는 바리사이로서 교회를 맹렬히 박해했으며 율법에 의한 의로움에서는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이익이 되었던 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고귀한 인식 때문에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으며 쓰레기로 여깁니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기 위함입니다 .”(필립 3,5-9).
바울로는 회심한 후 안티오키아를 근거지로 지중해 연안 로마제국 도시들을 세 번이나 여행하면서 선교하여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였습니다. 기원 후 58년, 예루살렘에 들렸다가 유대인들로부터 배신자로 린치 당하고 로마 군인에 의해서 구금되어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는 가이사리아에서 2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 소지자였기에 로마 황제의 재판을 요구하였고,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그 압송과정을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 27장과 28장입니다. 그 시대 지중해 연안의 여행 여건을 상세히 알려 주는 여행기록입니다. 바울로는 로마에서 2년 동안 연금되어 있다가 네로 황제의 박해 때에 역시 순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두 분 사도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그분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한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노력이 있어서 그 시대 지중해 연안 곳곳에 그리스도 신앙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교회는 그런 헌신적 섬김이 있어서 설립되고 성장하였습니다. 신자들에게 군림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 회당에서는 높은 좌석 차지하기를 좋아하고”(마태 23,6), 신자들의 박수갈채나 탐하면서 교회 안에 일하는 우리들이라면, 심각하게 반성할 것을 촉구하는 오늘의 두 분 사도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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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계에 복음의 씨를 뿌린 사람들"
-이기양신부-
오늘은 가톨릭교회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축일이 함께인 것은 두 분이 같은 날에 순교해서라기보다는 유해를 옮겨 모신 날이 같은 6월 29일이기 때문입니다. 본명 축일을 맞으신 분들께 축하 인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본명을 갖는 이유는 그 성인을 본받고 따라 살기 위해서입니다. 본받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존경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도 없이 모두 싫고 밉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겠지요. 믿고 본받을 만한 사람들이 있는 시대가 행복한 시대입니다. 우리 시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이유 중에 하나는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인물이 드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는 모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그분들 이름을 본명으로 삼으며 본받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전 세계적으로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사람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도 못한 사람들이었지요.
베드로 사도는 성격상 결점이 많고 배운 것도 없으며 신의도 못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인 그를 용서해 주셨으며 큰 믿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사도는 주님의 용서와 신뢰에 힘입어 예수는 구원자이심을 선포하였으며,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5)는 말씀대로 신자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제1대 교황이 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했던 인물로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 함께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열렬한 유다교 신봉자였던 바오로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 33년경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고 고백하며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선포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위대한 사도로 거듭나지요.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자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6-8).
이렇게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가 67년께 로마 네로 황제에 의해 참수되어 목숨마저 주님께 봉헌하기까지 신약성경의 반 가까이를 집필한 저자이기도 합니다. 올해는 바오로 사도 탄생 2000주년을 그리는 '바오로의 해'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오로 사도의 일생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사도의 뜻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초대교회 두 사도의 일생을 바친 선교는 그리스도교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밖에서 복음을 전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민족들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에 퍼뜨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이며 과연 지금 우리는 사도들의 무엇을 본받아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투신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했던 두 사도는 스승의 마지막 유언인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라'(마태 28,18-20 참고)는 말씀을 일생을 바쳐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전한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를 통해 터키와 유럽으로 퍼져 갔고,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거쳐 1784년에는 우리나라까지 들어왔습니다.
소중한 신앙의 불꽃을 받아들인 선조들은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역시 목숨을 바쳐가며 복음의 불꽃을 지키고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신앙의 불씨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의 무엇을 본받아 실천해야 할지 확연히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유산은 미사 때마다 확인됩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제들이 매 미사 때마다 신자들을 향해 외치고 있지요.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오늘도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고 파견된 여러분은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후예들입니다. 다시 한 번 축일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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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신앙과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
-변종찬신부-
오늘 우리는 2천 년 교회 역사와 함께하며, 특별히 로마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입당송에서도 고백하듯, 그들은 육신을 지니고 사는 동안 자신들의 피로 교회를 세웠으며,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진정 교회의 위대한 두 등불이며 굳건한 신앙으로 빛나는 두 사도에게 교회는 오늘 깊은 찬송을 드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의 어부였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삶의 터전이었던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인물입니다. 이에 반해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정통한 학자요 스승이었습니다. 또한 스테파노가 순교할 때, 그의 겉옷을 갖고 있었으며 계속해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인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울로 불리던 그가 어떻게 회개하였는지 잘 알려 줍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주님께서는 당신의 목소리를 통해 완고했던 그의 마음을 땅에 떨어지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사울이 박해한 그리스도교와 자신이 하나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사울이 주님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하나니아스에 의해 선포된 복음과 안수를 통해 비로소 보게 되고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이 전해 주듯, 특별히 이방인들의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 바오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고백하는 베드로.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라고 대답하신 예수님. 이토록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두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여기에 하느님 생각과 인간 생각의 큰 차이가 드러납니다.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와 그리스도인을 체포하여 감옥에 넘기는 일에 앞장섰던 바오로의 모습과 이들이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연결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느님께서는 인간적 연약함 혹은 사람의 눈에는 보잘것없이 보이는 것도 당신의 일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기도에서 말하듯, 모든 일에서 교회의 기초를 놓아 준 그들의 가르침을 이제 교회가 충실히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곧 연약하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도 그들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하듯, 주님께서 온갖 두려움에서 우리 자신을 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 늘 주님에 대한 찬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주님을 칭송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 기리자고 권유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겸손한 믿음과 바오로가 지닌 세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우리의 신앙은 숨을 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명이 끝난 후 우리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하고 있듯, 우리 역시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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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강지숙-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은(13절) 헤로데 대왕이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를 위해 신전을 지어 바친 곳입니다. 이곳 지명을 굳이 명시한 것은 로마 황제의 영향력과 권력을 암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몸담고 있는 종교와 문화 전통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서 당신의 신분에 관한 대중의 견해를 물으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자신의 정체성을 이 낯선 곳에서 드러내고자 하십니다. 바로 이 도시에서 세상의 권세와 구별되는 자신의 정체를 확인하십니다.
군중은 아직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오락가락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14ㄱ절) 세례자 요한이라 한 것은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 때문입니다. 기적을 일으킬 만한 능력은 죽은 자가 부활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의인이 억울하게 죽으면 다시 살아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ㄴ절) 아직 예수님의 메시아성은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아의 선구자 정도로 봅니다. 엘리야가 아닐까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유다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승천한 엘리야가 재림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말라 3,23; 집회 48,9-10). 군중은 예수님을 그동안 왔다 간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 그 신비로움에 그저 감탄만 했을 뿐 신뢰나 신앙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정해진 사고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군중의 여론과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 대화 형식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질문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호기심에서도 아니고 떠도는 풍문이 궁금해서도 아닙니다. 이제 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다짐받고자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그러면’이라는 말에는 제자들한테서 다른 대답을 듣고 싶다는 예수님의 소망이 숨어 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원이 밝혀집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베드로의 고백은 백 점짜리였습니다. 초대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머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로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예수님의 신적 기원이자(1,18-25), 하느님에게서 예수님께 넘어간 메시아적 권한입니다(3,13). 예수님의 이 비밀은 오직 하느님 자신께만 열려 있었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17절) 살과 피가 아닌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이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아들을 알려주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아버지께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이제 고난의 길이라는 일상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 길은 사람의 아들이 가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고난과 순교를 각오하지 않은 하느님의 아들 고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전형적인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태오복음에서 다른 제자들보다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베드로의 체험은 제자들이 겪는 체험과 상황을 대변합니다. 그는 스승이신 예수님께 묻고 가르침을 받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상반되는 여러 모습을 보이기는 합니다. 예수님께 맹세해 놓고 한편으로 부인하며 후회합니다(26,69-75). 믿음이 흔들려 물에 빠질 뻔하기도 합니다(14,28-31). 예수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만 고난을 두려워하여 반석과 사탄 사이를 오갑니다(16,23). 그래서 베드로는 전형적인 제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제자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부름을 받은 자로서(4,18-20; 10,2) 예수님과 처음부터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부활 이후 교회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주요 지도자인 야고보나 바오로와는 또 다릅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마태오복음에서는 처음으로 ‘교회’라는 낱말이 등장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여기서 이스라엘에서 탄생한 제자 공동체가 어떠한지 드러납니다. ‘내 교회’, 이는 옛 교회인 이스라엘과는 구별됩니다. 16,21-23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고난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여 사탄으로 위축되고 말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반석’이라 부르십니다. 일찍이 이사야는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28,16)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교회를 상징하는 성전의 기초라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특별한 속성이나 다른 인물보다 뛰어난 존재라서 반석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첫째 제자이고 교회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제자이기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14,33에서 모든 제자가 했듯이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13,16 이하에서 예수님이 모든 제자를 축복하셨듯이 베드로를 축복하십니다. 베드로에게 매고 푸는 권한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는 권한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옛 제자들은 그렇다 치고, 그러면 너희에게 나는 무엇이더냐?’ 베드로 사도처럼 반석과 사탄 사이를 오가기만 해도 다행입니다. 불현듯 한 번씩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치열한 삶이 그분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심을 절절히 깨우쳐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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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향한 바오로의 선교 열의
-정영식신부-
필리피, 테살로니카, 베로이아, 아테네, 코린토, 에페소, 마케도니아, 그리스, 트로아스, 밀레토스…. 바오로 사도의 열정은 놀랍다. 사도행전 16~20장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활발한 전교 여정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군데 빠진 곳이 있다. 바로 로마다. 당시 세계(유럽인들이 생각하던 세계)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 선교가 가장 중요했다. 로마를 선교하는 것은 곧 세계를 선교하는 것이었다. 로마를 회개시키면 세계가 회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수 차례 로마로 갈 것을 시도하지만, 풍랑 질병 등 여러 이유로 로마에 가지 못한다. 그런데 뜻밖에 로마로 갈 기회가 생긴다.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성전에서 체포를 당한 것이다.(사도 21, 27~36 참조) 여기서 바오로는 “나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다”라고 강변한다. 로마 시민이니까 로마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태어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법정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오로를 재판할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로 압송된다. 이 내용이 바로 사도행전 21~27장까지의 이야기다. 그런데 로마로 가는 길도 만만찮다. 풍랑을 만나고 배가 부서지고 몰타라는 섬에 표류하는 등(사도 27, 13~44;28, 1~10)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로마에 도착한다. 로마에서 선교하겠다는 바오로 사도의 소원이 풀린 것이다.(사도 28, 17~31 참조)
여기까지가 사도행전 내용의 끝이다. 사도행전 중반부와 후반부를 통해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과 깊은 하느님 사랑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의 왕성한 활동은 그의 서간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약성경의 서간 21편중에서 바오로 서간은 무려 14편에 이른다. 그만큼 바오로 사도가 많은 편지 선교활동을 펼쳤다는 의미다. 이 14편 중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쓴 친서가 8편이고,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 쓴 서간이 6편이다.
바오로 사도 친서들의 집필연도가 대략 50년에서 58년 사이로 보인다. 50년은 바오로 사도가 2차 전도여행 때이고, 58년은 로마서를 쓴 시기다. 1차 2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문제가 생긴 교회에 대해 2차 3차 전도 여행시에 편지를 쓴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친서는 로마서다. 그래서 로마서가 중요하다. 죽음을 앞두고 세 번의 전도여행을 모두 종합하면서 정리한 종합 논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바오로사도의 사상과 경험 모든 것이 다 녹아 들어있다고 보면 된다. 이외에 바오로 사도의 이름을 빌려 쓴 가명서간은 대략 70년에서 100년경의 것이라고 보면 된다.
친서는 테살로니카 전후서, 코린토 전후서, 갈라티아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로마서다. 그런데 이 친서 중 필리피서와 필레몬서는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옥중서간이다. 일단 이 친서들로부터 설명을 시작하고자 한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대체로 한편 불편한 심정에서, 다른 한편 연민의 마음에서 썼다고 보면 된다. 바오로 사도는 수 차례 전도 여행을 통해 누누이 하느님 자녀로 살라고 이야기했다.
예비신자를 만들고, 공소회장도 세우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정작 사도가 떠나고 나면 각 공동체에 말썽이 생겼다. 애써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가 없으면 공동체는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화가 나겠는가 나지 않겠는가. 당연히 바오로 사도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또한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선에 대해 연민의 마음도 컷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연민스러우면서 속상한 심정으로 펜을 들어 편지를 쓴다. 우리는 당연히 편지의 맨 앞부분이 꾸짖고 추궁하는 글이 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의 편지는 항상 은총과 복을 기원하는 축복의 인사로 시작한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2테살 1,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금의 이 악한 세상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갈라 1, 3~5) 등이 그 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고 나서 침착한 어조로, 각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하나 지적하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사람
-류해욱신부-
오늘 성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대축일을 보내며 우리가 두 사도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두 사도는 어떤 인물입니까?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불리는 두 사람은 참 서로 다른 사람이지요. 간략히 두 사람을 살펴볼까요?
베드로는 원래 시몬이라는 이름의 어부였지요. 요한복음 2장에 의하면, 요한의 제자였다가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고 외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던 두 사람 중의 하나인 동생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만나서 함께 하루 밤을 보냅니다. 그 후 형인 시몬에게 가서 자기들이 메시아를 만났다며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루가 복음 5장에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먼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배를 저어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게 합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그물을 오른 편에 던지라는 한 마디 말씀에 고기가 엄청나게 많이 잡히자, 시몬은 그만 겁을 먹고 “저는 죄인입니다. 제게서 떠나 주십시오.”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후 베드로는 제자가 되었고, 늘 제자들의 맏형이며 대변인 역할을 하는 인물이지요. 풍랑 속을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달려가다가 거센 물결을 보고 겁을 먹고 물에 빠지기도 하고, 결코 배반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 치다가 그만 죽음 앞에 두려움으로 세 번이나 배반을 하는 등의 늘 덤벙대고 약함을 보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듣는 것처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나서서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바위라는 뜻인 베드로가 된 사람입니다.
바오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가므리엘 선생이라는 당시 최고의 석학이었던 학자의 제자로 뛰어난 언변과 학식을 지닌 인물이고,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이던 골수 바리사이파 사람이었지요.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올 권한을 받아가지고 다마스코스로 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다마스코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춥니다. 놀란 그는 엉겁결에 땅에 엎드리지요. 그때 부드럽게 타이르는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묻지요.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분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이다.” 사울이 박해한 사람이 예수님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이 온전히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일러줍니다.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이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울에서 새롭게 변모된 인물 사울이 되기 위해 다마스코스 시내로 들어가서 아니니아를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신비롭게 아나니아에게 나타나시어 사울을 이끌어주도록 안배하십니다. 사울은 아나니아에 의해 멀었던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을 뜨게 되는 체험은 실제 사건이지기도 하지만 깊은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눈이 멀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었지요. 이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돕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감옥에 갇힌 베드로에게 쇠사슬이 떨어져 나가면서 자유롭게 되었듯이 사울에게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면서 영적으로 눈뜨게 되고 내적으로 자유롭게 되고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오로가 됩니다.
간략히 베드로와 바오로라는 두 인물을 살펴보았는데 참 서로 다른 인물이지요. 소위, 출신 성분이나 자란 환경이나 학식이나 성격 등에서 전혀 다른 두 인물을 주님께서는 놀랍게 조화시키시며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데 주춧돌과 대들보로 사용하십니다. 두 사람 다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커다란 나무들인데 이들이 지닌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들이 지닌 공통점 안에서 우리가 이들로부터 배워야 할 중요한 포인트를 찾고 싶습니다.
첫째는 두 사람 모두 ‘회심의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상처를 안고 살아간 인물이지요. 베드로는 평생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하였던 아픔을 지니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픔을 치유해 주시기 위해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세 번이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지요. 그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어느 정도 상처가 치유되었겠지만 평생 그 아픔을 잊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베드로에게 그 아픔이 주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더구나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찬동했던 아픈 기억은 지울 수 없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오로가 세 번이나 없애달라고 간청했지만 계속되었다는 마치 가시로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나 바오로처럼 주님을 배반하거나 박해하는 것과 같은 아픔이나 죄의 상처가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늘 주님께 나아가고 믿음을 깊여가는 디딤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회심의 인물이라고 말씀드렸는데 회심은 한번 일어나고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지요. 평생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계속해서 그분께 의탁을 드릴 때 그분이 약함을 강함으로 서서히 바꾸어 주십니다. 오늘 제 2독서에서 바오로가 고백하지요.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주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굳세게 해 주십니다.
두 번 째로 두 사람 모두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났을 때, 믿음을 지니게 되었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의 영예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감히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다고 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바오로는 세 번이나 목이 튀는 참수형을 받았습니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어떻게 믿음을 지켜갈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이들이 지닌 주님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믿음의 사람’은 바로 ‘사랑의 사람’이기도 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교회의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세 번 째로 저는 두 사람을 떠올리며 두 사람에게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헌정하고 싶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다시 한 번 약함을 드러내며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지요.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네가 떠나는 로마로 간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울며 로마로 돌아간 베드로는 천성적으로 약하지만 끊임없이 주님께 의탁하며 풀잎처럼 약한 마음을 바위로 바꾸어 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돌 세례를 받고, 몰매를 맞고, 태형을 당하고, 옥에 갇혀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불굴의 의지로 신자들을 격려하는 놀랍도록 수려한 편지를 썼던 바오로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두 사람 모두 교회의 초석이요, 기둥이 된 큰 인물이요 아름다운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만 아름다운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두 기둥만으로 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루듯 교회는 베드로나 바오로 같은 큰 나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나무나 바위가 아닐지라도 작은 나무이거나 모래알 같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소중합니다. 우리 모두가 베드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 모두가 바오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지요. 때로 죄를 짓는 약함에 빠지지만 그저 소박한 믿음을 지니고 하루하루 주님께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베드로나 바오로가 되지 않더라도 그들에게서 배우야 할 점이지요. 그렇게 할 때 우리 모두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변모해 갈 것입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들은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성선 시인의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시를 들려 드립니다.
아름다운 사람
-이성선-
바라보면 지상에서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늘 하늘빛에 젖어서 허공에 팔을 들고
촛불인 듯 지상을 밝혀준다.
땅속 깊이 발을 묻고 하늘 구석을 쓸고 있다.
머리엔 바람을 이고 별을 이고
악기가 되어온다.
내가 저 나무를 바라보듯
나무도 나를 바라보고 아름다워할까
나이 먹을수록 가슴에
깊은 영혼의 강물이 빛나
머리 숙여질까
나무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나무처럼 외로운 사람으로 살고 싶다.
혼자 있어도 놀이 찾아와 빛내주고
새들이 품속을 드나들며 집을 짓고
영원의 길을 놓는다.
바람이 와서 별이 와서 함께 밤을 지샌다.
여러분, 우리 모두 작은 나무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로 해요.
베드로의 열쇠와 바오로의 칼
-박상대신부-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교를 바치고 있는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를 공경하는 대축일이며, 초대 교황 베드로의 좌(座)를 이은 266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1978-현재)를 위해 기도하는 교황주일이기도 하다.
오늘 대축일의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설명은 미사의 고유 감사송에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 후손들 가운데에 초대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방인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만백성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음으로써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감사송) 그렇다고 해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신앙고백만 하고(16절), 사도 바오로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을 밝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릇 신앙(fides)이란 신앙의 행위(fides qua)와 신앙의 내용(fides quae)을 다 포함한다. 따라서 신앙이란 행위(行爲)는 내가하고 내용(內容)은 네가 밝히는 것일 수 없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바오로는 바오로대로 각자의 삶을 통하여 <소명-추종-선교-순교>의 온전한 신앙을 살았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체, 즉 신앙 전체를 떠받드는 두 기둥으로서 사도 베드로는 신앙행위(고백)의 모범이 되고, 사도 바오로는 신앙내용(신학)의 모범이 된 성인(聖人)으로 존경하며, 같은 월계관을 받아 쓴 분들로 알아모시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오로에 관한 중세기의 성화(icon, 聖畵)에는 베드로의 손에는 열쇠가, 바오로의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베드로의 손에 있는 열쇠는 그가 예수께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제 베드로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18절)라고 하시면서 직접 건네 준 것이다.(19절) 물론 쇠로 만든 열쇠를 실제로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열쇠는 사도들 가운데 수위적(首位的) 역할과 직무를 의미한다. 베드로는 이 직무를 깨닫는데 생애 전부와 마지막 목숨을 그 값으로 지불하였다. 그 직무는 권위(權威)가 아니라 봉사(奉仕)였다. 바오로가 손에 든 칼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로마제국의 시민이었던 바오로는 목이 잘리는 참수형(斬首刑)을 받았다. 바오로는 그가 믿었고 전파하였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증언한 것이다. 바오로의 칼은 엄격함을 의미한다. 불이 열광과 열정을 뜻한다면, 칼은 엄격함과 단호함을 뜻한다. 바오로는 사울이었을 때 유다교를 신봉하고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갈라 1,14), 개종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열정적이었다.(2고린 11,23) 그렇다고 바오로가 열광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단호한 엄격주의자이다. 그래서 그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 것이다.
베드로의 열쇠와 바오로의 칼이 가지는 상징적 신앙의 태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참여한다. 열쇠는 열고 잠그는 데 필요하고, 칼은 자르고 가르는 데 필요함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열쇠를 가졌다면 그 열쇠를 잠그는 데 쓰지 말고 여는 데만 쓰자. 그리고 누가 칼을 가졌다면 그 칼을 가지고 남을 자르고 가르는 데 쓰지 말고 자신의 신앙에 경고와 단호함의 도구로 쓰자.
<하늘 나라의 열쇠>(마태16,13-19)
-유광수신부-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열쇠란 무엇인가? 열쇠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기구이다.
열쇠가 없으면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는 곳이 다르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고 들어 가지 못하는 곳이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는 문을 열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살아날 수 있었는데 열쇠가 없었다. 아무리 문을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아서 결국 안에서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질식사를 하고 불에 타서 죽었다. 자동차 열쇠를 잃어 버리면 차가 있어도 차를 움직일 수 없다. 아파트 열쇠가 없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금고 열쇠가 없으면 돈을 꺼낼 수도 넣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열쇠에 달려 있다. 그리고 어떤 열쇠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열쇠를 이용할 수 있는 용도가 다르다.
나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생겼는가? 어떤 열쇠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인가? 하늘 나라의 열쇠는 내가 만들 수는 없다. 하늘 나라의 주인만이 만들어서 나에게 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신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열쇠는 하느님이 만들어서 준 열쇠인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야 하늘 나라 안으로 들어 갈 수 있다. 즉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내가 하는 일이지 하느님이 하실 일이 아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열쇠를 주셨다는 것은 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나에게 달린 것이지 하느님께 달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하늘 나라의 열쇠인가?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어떤 것인가? 내가 아무리 하늘 나라의 열쇠라고 생각하더라도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열쇠가 아니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하늘 나라의 열쇠란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예수님을 알아 본 그 믿음이 바로 하늘 나라의 열쇠이다.
"요한 세례자"나 "엘리야", "다른 예언자"라는 열쇠를 가지고는 하늘 나라의 문을 도저히 열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가 아무리 좋은 열쇠라고 하더라도 하늘 나라의 문에 맞지 않는 열쇠인데 어떻게 열 수가 있는가?
어느 열쇠이든 열쇠는 반드시 맞는 열쇠가 있는 법이다. 또 열쇠가 모조품도 많고 불량품도 많다. 열쇠란 비슷하다고 해서 열리는 것이 아니다. 조금만 틀려도 열리지 않는다. 열쇠는 모양이야 어떻게 생겼든 반드시 구멍에 맞아야 한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모조품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정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직접 매고 풀 수 있어야 한다.
매고 푼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내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즉 구세주라고 고백했다면 그분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풀고 맺어야 한다. 내가 풀려고 하지 말고 또 돈이나 권력으로 풀고 맺으려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맺고 풀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는 어디 계시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통해서 맺고 푸는 것인가? 그것은 복음을 통해서 맺고 푸는 것이다.
즉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결정하든지 또 무엇을 생각하든지 모두 다 복음으로 맺고 풀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으로 생각하고 복음의 가치로 보고 판단하고 복음의 잣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복음 따로 나 따로 생활 따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든 존재를 복음으로 맺고 풀어야 한다. 즉 복음에서 답을 찾고 복음에서 길을 찾고 복음에서 기쁨을 얻고 복음에서 힘을 얻고 복음에서 희망을 보고 복음에서 위로를 받고 복음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맺고 푸는 것이다.
그럼 하늘 나라의 열쇠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겼는가?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그 모양은 말씀해주셨다. 즉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미래 동사를 사용하셨다. 따라서 그 다음 말씀을 보면 하늘 나라의 열쇠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가 있다. 즉 하늘 나라의 열쇠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고난과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왜 베드로보고 반석이라고 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는가?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니, 엘리야니,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했으나 베드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대답한 베드로의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교회를 세워도 열쇠가 없어서 또는 맞지 않아서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쇠로는 아무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오직 베드로가 고백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열쇠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반석은 가장 밑받침이 되는 주춧돌이다. 반석이 약하면 또 반석이 본래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면 그 위에 아무리 튼튼한 집을 짓는다 하더라도 무너지고 만다. 견뎌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신앙의 주춧돌이 되기도 하고 또 나의 신앙으로 영향을 받는 다른 이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즉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 가에 따라서 그 위에 세워진 교회는 안식교도 될 수 있고 개신교도 될 수 있고 가톨릭 교회도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신앙에 따라서 다른 이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자녀들에게도 이웃에게도 친척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과연 지금 내가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늘 나라의 열쇠는 어떤 모습의 열쇠인가? 나는 어떤 하늘 나라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어느 반석 위에 나의 신앙을 키웠는가? 즉 나의 신앙을 받쳐주고 있는 반석은 어떤 반석인가?
열쇠는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다. 복이다. 따라서 이 복은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 복은 본래 받아들이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노력할 때 하느님이 그곳에 당신 은총을 채워 주시는 것이지 내가 복음 담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만 만들고 그 그릇에 복을 담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 담아주시는 것이다.
† 베드로와 바오로 : 신앙의 두 기둥 †
삶이란 길을 가는 것과도 같다. 그것도 수없이 많은 길 가운데 오직 하나의 길만을 가야한다. 아무도 두 길을 한꺼번에 갈 수 없다. 인생의 길은 이렇게 수없이 많은 길 중에서 하나의 길을 택하여 가야하는 것이다. 하나의 길을 선택하기 전에 망설이고 갈등하며, 선택한 길을 가면서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며, 저만치 가고 난 뒤에는 결과를 놓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갔던 길을 돌아올 수는 없다.
그래서 인생은 갈등과 고뇌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통감한다. 인간은 아무도 자기 스스로에게 인생의 길을 미리 알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을 미리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고 절망적이지는 않다. 우리에게는 참된 인생의 길을 알려주신 분이 계시다.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한 14,6)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길이신 예수를 밟고 걸어간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삶은 우리 인생의 길에 좋은 본보기가 된다.
오늘은 우리 그리스도교를 바치고 있는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를 공경하는 대축일이다. 오늘 대축일의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설명은 미사의 고유 감사송에 잘 나타나 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 후손들 가운데에 초대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방인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만백성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음으로써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되었나이다."(감사송)
그렇다고 해서 사도 베드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신앙고백만 하고(16절), 사도 바오로는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을 밝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릇 신앙(fides)이란 신앙의 행위(fides qua)와 신앙의 내용(fides quae)을 다 포함한다. 따라서 신앙이란 행위(行爲)는 내가하고 내용(內容)은 네가 밝히는 것일 수 없다.
베드로는 베드로대로 바오로는 바오로대로 각자의 삶을 통하여 소명(召命)->추종(追從)->선교(宣敎)->순교(殉敎)의 온전한 신앙을 살았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교 전체, 즉 신앙 전체를 떠받드는 두 기둥으로서 사도 베드로는 신앙행위(고백)의 모범이 되고, 사도 바오로는 신앙내용(신학)의 모범이 된 성인(聖人)으로 존경하며, 같은 월계관을 받아 쓴 분들로 알아모시는 것이다.
베드로와 바오로에 관한 중세기의 성화(icon, 聖畵)에는 베드로의 손에는 열쇠가, 바오로의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베드로의 손에 있는 열쇠는 그가 예수께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께서 "너는 이제 베드로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18절)라고 하시면서 직접 건네 준 것이다.(19절) 물론 쇠로 만든 열쇠를 실제로 주었다는 것이 아니라, 열쇠는 사도들 가운데 수위적(首位的) 역할과 직무를 의미한다. 베드로는 이 직무를 깨닫는데 생애 전부와 마지막 목숨을 그 값으로 지불하였다. 그 직무는 권위(權威)가 아니라 봉사(奉仕)였다.
바오로가 손에 든 칼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로마제국의 시민이었던 바오로는 복음 때문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斬首刑)을 받았다. 바오로는 그가 믿었고 전파하였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증언한 것이다. 바오로의 칼은 엄격함을 의미한다. 불이 열광과 열정을 뜻한다면, 칼은 엄격함과 단호함을 뜻한다. 바오로는 사울이었을 때 유다교를 신봉하고 조상들의 율법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갈라 1,14), 개종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으며 열정적이었다.(2고린 11,23) 그렇다고 바오로가 열광주의자는 아니다. 그는 오히려 단호한 엄격주의자이다. 그래서 그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원래 어부였다.(마태 4,18) 어부란 직업에 많은 생각이나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숙련된 감각이 요구된다. 어부의 도구는 그물이다. 매일같이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로 나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았던 베드로가 이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
바오로는 원래 천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졌다고 한다.(사도 18,3) 그는 칼로 천의 필요한 부분을 잘라 바늘로 기워 천막을 만들었을 것이다. 바오로는 이제 복음과 신학의 칼을 손에 쥐고 있다.
베드로와 바오로, 이 두 사람은 각자의 삶의 기로에서 "길" 자체이신 예수께서 이끌어 주시는 길에 자신을 맡겼다. 그 결과, 두 사람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길을 걸어간 것이다. 베드로와 바오로의 길이 우리 자신의 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길을 인도하고 이끌어 줄 수 있는 본보기가 된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열쇠와 바오로의 칼이 가지는 상징적 신앙의 태도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참여한다. 열쇠는 열고 잠그는 데 필요하고, 칼은 자르고 가르는 데 필요함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누가 열쇠를 가졌다면 그 열쇠를 잠그는 데 쓰지 말고 여는 데만 쓰면 어떨까. 그리고 누가 칼을 가졌다면 그 칼을 가지고 남을 자르고 가르는 데 쓰지 말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경고와 단호함의 도구로 쓰면 어떨까...........◆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