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간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이라는 불온한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누더기가 됐다. 그동안 한반도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위기설'이 나돌았지만 이번만큼 정말 전쟁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린 적은 없었다. 기분이라도 바꾸려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8월 초 펴낸 정책구상집(『보수정치인 우리 정책, 우리 천명』)을 꺼내 읽어보니 이시바 총리가 강연 때마다 청중에게 소개하고 있다고 강조한 책 『쇼와 16년 여름 패전』에 흥미가 끌렸다.
이 책은 80여 년 전 일본이 저지른 뼈아픈 「판단 착오를 다루고 있다. 미일 개전을 앞둔 1940년 9월 일본 정부는 「국가 총력전 방안을 연구해 국책에 기여」할 목적으로 「총력전연구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모인 사람은 육해군과 내무성·대장성·상공성 등 정부 부처, 일본제철·일본우선·동맹통신(현재의 교도통신의 전신) 등 주요 국책기업에서 활약한 30대 중초반의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개전을 눈앞에 둔 1941년 7월부터 탁상연습(시뮬레이션)을 진행해 「초반에는 일본이 우위를 점하겠지만 점차 미국의 산업생산력 등이 발휘되고 소련도 참전해 3~4년 후에는 패배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런 결론이 나왔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東条英機) 육군대신이 강하게 반대했다. "너희들 얘기도 알겠지만 러일전쟁 때도 그랬듯이 전쟁은 해봐야 안다". 결국 12월 8일 진주만 공습이 이뤄졌고 젊은 엘리트들의 예측대로 3년 8개월 만에 일본은 항복했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일본은 '개전' 전부터 '패전'한 것과 같았다.
국가정보원의 18일 발표 이후 북한군의 러시아 파견이 사실로 확인되자 정부 안팎에서는 험한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을 검토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고, 신원식 국가안보실장과 여당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한기호 의원은 「우크라이나와 협력해 북한군 부대를 폭격」했으며, 이 자료를 「심리전에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는 내용의 문자 대화도 나눴다. 혈맹관계를 회복한 북-러 동맹을 상대로 당장 전쟁을 치를 기세다.
격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윤 정권이 추진해 온 한미일 3자 협력 강화 노선 전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다. 이 정권의 요직에 오른 자들이 유능했다면 북중러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정책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일이 입에 올리는 아름다운 찬사에 취한 윤 정권은 폭주할 뿐이었다. 상대방의 지나친 칭찬에는 언제나 '괜찮겠지? 결국엔 그쪽이 책임지는거야'라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우려했던 대로 윤정부 출범 2년 반 만에 남북관계는 파탄나고 북-러 동맹이 부활하면서 30여 년간 공을 들였던 북방외교는 수포로 돌아갔다. 조태열 외교장관은 24일 중국에 북핵 문제와 불법적인 북-러 공조에 적극 대응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지만 자신들은 원하는 대로 행동해 놓고 상대방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23일 한국의 살상무기 지원에 대해 "엄중히 대처할 것"이라면서도 "러시아와 한국은 훌륭한 교류와 상호 이해와 협력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24~25일 6월 서명한 "북-러 포괄적 전략적 파트너십 조약 제4조(상호원조)를 언급하며 어떻게 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유엔헌장 51조가 허용하는 집단적 자위권에 따라 우크라이나가 8월 점령한 러시아 영토인 쿠르스크 주를 탈환하기 위해 북한의 원조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런 변명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러시아가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80년 전 도조(東条)처럼 "해봐야 안다"는 모험주의로는 곤란하다. 상대방이 한국에 줄 수 있는 최악의 조치를 생각하고 치밀한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러시아가 받는 고통은 일시적 국면적 전술적이지만 우리는 북한이라는 증폭장치를 통해 영구적 전면적 전략적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북-러 군사협력 정도에 따라서는 미국이 제공해 온 확장억제(핵우산)가 어긋날 가능성도 있다. 폴란드나 발트 3국에는 북한과 같은 존재가 없다. 이대로 가면 다음 전쟁터는 틀림없이 한반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