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최고위, 혁신안 충돌… “시스템 공천 무시” vs “거부땐 낡은 존재”
공천 페널티-대의원제 폐지 내홍
냉랭한 野 지도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운데)가 11일 국회에서 열린 당 최고위원회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이날 비명(비이재명)계인 고민정 최고위원(오른쪽)이 전날 혁신위원회가 발표한 혁신안에 대해 “혁신위가 민주당의 시스템 공천을 완전히 무시했다”고 반발했다. 왼쪽은 정청래 최고위원. 김재명 기자
“혁신위원회가 더불어민주당의 시스템 공천을 완전히 무시하는 발표를 했다.”(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혁신을 거부하면 스스로를 낡은 존재로 만드는 길이다.”(서은숙 최고위원)
11일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전날 김은경 혁신위원회가 발표한 당 대표 선거 시 대의원 투표권 폐지, 현역 의원 페널티 강화 등을 놓고 비명(비이재명)계와 친명(친이재명)계 최고위원이 정면 충돌했다. 혁신안을 둘러싼 계파 갈등이 당장 지도부 공개회의에서 분출된 것.
민주당 내 친문(친문재인) 의원 모임인 ‘민주주의 4.0’과 의원 최대 모임인 ‘더좋은미래’가 혁신위 발표 하루 만에 반대 성명서를 잇달아 내는 등 비명계의 집단적 반발도 거세지고 있다. 반면 친명계와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층인 ‘개딸’(개혁의딸) 등은 “전당대회 1인 1표는 당내 민주주의를 위한 상식”이라며 혁신위를 옹호하고 나서면서 혁신안 수용 여부를 둘러싼 당 내홍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 혁신안 두고 지도부 회의서 충돌
비명계인 고 최고위원은 이날 최고위 회의에서 “(혁신안의) 대의원제 폐지는 총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 민생 관련 시급성을 다투는 일도 아니다”며 “오로지 당 대표와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이런 무리수를 둬야 하는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혁신위의 ‘현역 의원 하위 평가자 대상 공천 페널티 강화’ 제안에 대해서도 “총선 1년 전 공천 룰을 확정하도록 한 당규에 따라 이미 5월 공천 규정을 제정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친명계인 서 최고위원은 “‘차별받지 않는 동등한 권리’는 당이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맞받아쳤다. 전당대회 투표에서 대의원의 표 가치가 권리당원의 60배에 달하는 상황을 대의원 투표권 폐지로 ‘1인 1표’로 만드는 것이 혁신이라는 것. 서 최고위원은 “더 많은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혁신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최고위원 간 공방이 벌어지는 동안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이어진 비공개 회의에선 “시간을 내 긴 토론을 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만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표는 회의 이후 기자들과 만나 “일단 혁신안은 혁신위의 제안이기 때문에 당내 논의를 거쳐 합당한 결과를 만들어 내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비명계 잇달아 “혁신안 반대” 성명
민주주의 4.0은 이날 성명서를 내고 “혁신위가 ‘노인 비하 발언’ 등 논란으로 신뢰를 상실한 상태에서 발표한 혁신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더좋은미래도 입장문에서 “대의원제 관련 혁신안은 당내 갈등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총선 이후 논의하는 것을 지도부와 의총에 제안한다”고 밝혔다. 한 비명계 재선 의원은 “수용 자체를 거부하는 의원이 많아 논의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찬반 대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전날 혁신위가 ‘OB’들의 불출마를 종용하는 과정에서 지목된 천정배 전 의원은 이날 입장문에서 “중진 중에 능력 있고 깨끗한 정치인을 재발굴해 진정한 정치 복원을 해야 한다”며 혁신위의 용퇴 권고를 사실상 거부했다.
반면 혁신위원으로 활동한 친명계 이해식 의원은 KBS 라디오에서 “대의원제가 존속하는 한 ‘돈봉투’ 같은 부패 문제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어렵다고 봤다”며 혁신안에 힘을 실었다. 친명 원외 모임 ‘더민주전국혁신회의’는 기자회견에서 “혁신안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준엄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안규영 기자
혁신은커녕 분란만 일으키고 조기 종료한 김은경 혁신위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혁신안 발표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장(가운데). 김 위원장은 이날 혁신안 발표를 끝으로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그동안 부족한 말로 불편을 드린 점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린다”고 했다. 이훈구 기자
더불어민주당 김은경 혁신위원회가 10일 당 지도부 선거 때 대의원 비중을 없애는 대신 권리당원 비중을 높이는 내용의 혁신안을 발표했다. 현역 의원 중 의정활동 하위 평가자에 대해선 공천 페널티를 강화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당내에선 이 혁신안이 권리당원 입지 강화를 요구해 온 이재명 대표 강성 지지층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졌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친명-비명 간 전운이 고조되고 있다.
혁신위는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1표가 권리당원 60표에 해당하는 비정상을 개선한다고 했지만 대의원 문제는 1년 뒤 당 지도부 선거와 관련된 문제다. 내년 총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대의원 문제가 시급하게 다뤄야 할 혁신 과제인지 의문이다. 강성 당원 지지를 업은 친명계의 차기 당권 장악을 위한 포석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민주당이 시스템 공천을 위해 올해 5월 확정한 공천 룰을 혁신위가 굳이 손댄 것도 갈등의 불씨를 키웠다는 지적이다. 비명계 의원들은 “친명계 원외 인사들의 꼼수가 반영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잇단 설화도 분란을 자초했다. 노인 폄하 발언에 앞서 초선 의원 간담회에선 ‘코로나 초선’이라고 말했다가 사과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 위원장의 사생활 논란까지 불거져 혁신위의 위상은 바닥에 떨어졌다. 혁신위가 예정된 활동 기한을 한 달 정도 앞당겨 조기 종료한 배경일 터다.
김은경 혁신위는 민주당이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김남국 의원의 코인 거래 등으로 도덕성 위기에 직면하자 6월 20일 당 쇄신기구로 출범했다. 내로남불 등 민주당의 도덕 불감증을 쇄신하라는 특명을 부여받은 것이다. 혁신위가 민주당 당직자·보좌진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7%가 “우리 당 정치인이 비호감인 이유는 위선”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혁신안 중 이런 요구를 반영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말로만 혁신을 외쳤을 뿐 본질적 책무를 방기했다는 지적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은 혁신위가 방치한 도덕·윤리 쇄신 방안을 다시 논의해야 한다. 혁신안을 놓고 친명-비명 진영으로 갈라져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공방을 벌일 때가 아니다. 정부·여당의 거듭된 실정에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민주당 지지율이 여전히 정체 상태인 이유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2023. 08. 12 동아일보 사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