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307
■ 1부 황하의 영웅 (307)
제 5권 해는 뜨고 해는 지고
제37장 첫 출정 (7)
진(晉)나라의 남양(南陽) 땅 확보와는 별개로 진문공(晉文公)의 이번 주왕실 분란 해결은
그에게 여러가지로 의미 있는 행적이었다.
후세의 사가들은 이때의 진문공의 공적을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진문공(晉文公)이 주양왕을 복위시킨 것은 의(義)를 실천한 것이요,
원(原)땅을 공격함에 있어서 약속을 지킨 것은 신(信)을 보여준 것이다.
이것이 진문공이 패업을 성취하게 된 첫 사업이다.진문공(晉文公)의 주왕실 내분 해결과
남양(南陽) 땅 확보를 패업(覇業)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그다지 무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진문공은 군사 부문과 정책 부문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 정의(正義)와 신의(信義)백성들을 다스리고 복종시키는 비결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19년의 유랑 생활에 비하면 이것을 실천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해낼 수 있다.‘아마도 이때 그는 천하를 호령하는 맹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보았을 것이다.이번 사건을 통해 진(晉)나라는 중원에서의 위치가 부쩍 상승했다.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유랑자에 불과했던 중이(重耳)가 한순간에 진나라 군위에 올라
주왕실의 분란을 해결하고 남양(南陽) 땅을 차지한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아니 경탄을 금치 못했다.- 꿈인가.싶을 정도로 진문공(晉文公)의 변모와 활약은 눈부셨다.
제(齊)나라의 몰락이 더욱 진문공(晉文公)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 초(楚)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오로지 진(晉)뿐이다!진문공에 대한 중원의 여러 제후국들의
기대감은 그만큼 진(晉)이 중원으로 진출할 기회와 명분을 제공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놓치지 않고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람은 호언(狐偃)이었다.
진문공(晉文公)은 유랑 시절 당했던 수모를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남양 땅을 확보하고 돌아오자 좌우 신하들에게 물었다."이제 과거의 빚을 갚고 싶소."
위(衛), 조(曹), 정(鄭)나라를 치고 싶다는 뜻이었다.그러나 호언(狐偃)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닙니다.“"어째서 아니라고 생각하오?“
"군주 된 자로서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군사를 동원하면 백성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조만간 때가 올 것입니다."- 조만간.이라고 호언(狐偃)은 장담했다.
진문공(晉文公)은 호언(狐偃)의 말을 믿었다.과연 그 '조만간'이라는 것이 현실로 닥쳐왔다.
초(楚)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했고, 송(宋)나라가 진(晉)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진문공(晉文公) 으로서는 두 번째로 중원으로 출정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그 경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당시 초성왕(楚成王)은 여전히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였다.
홍수싸움에서 송나라를 격파한 이후 그의 위세는 중원을 집어삼킬 듯하였다.
정(鄭), 채(蔡)나라는 물론 노(魯), 위(衛) 나라까지 초(楚)나라를 종주국으로 섬겼다.
- 내가 중원의 주인이다.초성왕(楚成王)은 자신이 중원의 실질적인 지배자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미진한 점이 있었다.제(齊)와 송(宋)나라가 아직 초(楚)나라의 영향권에 들지 않았다.
'제와 송만 제압하면....‘초성왕(楚成王)은 명실공히 천하를 호령하는
패공(覇公)의 위업을 달성하는 것이다.그 무렵, 제(齊)나라 군주는 제효공(齊孝公).
제환공(齊桓公)의 아들이다.
제효공 역시 아버지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하여 그 자신 패공이 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뿐.현실이 따라주질 못했다.제(齊)나라는 어느 틈에 이류국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 잘난 아비, 못난 아들.제효공(齊孝公)은 제환공 시절의 영화를 되찾으려고 애썼다.
그런 그의 신경을 가장 먼저 건드린 것은 이웃 나라인 노(魯)였다.
노희공(魯僖公)이 보란 듯이 위(衛), 거(莒)나라와 동맹을 맺고 초(楚)나라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었다.
'괘씸한 놈들!‘제효공(齊孝公)은 화가 났다.- 까불지 마라. 아직 제나라의 위용은 죽지 않았다.
BC 634년(진문공 2년) 여름, 그는 군대를 동원해 노(魯)나라를 침공하였다.
느닷없는 제효공(齊孝公)의 침공에 노희공은 당황했다.
아직 드러내놓고 제나라와 앙숙관계로 지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그 해에는 가뭄이 들어 싸움을 감당할 여력이 없었다.노희공(魯僖公)은 강화를 생각했다.
대부 장손신(臧孫辰)을 불러 물었다."누구를 보내어 제나라 마음을 달래면 좋겠소?“
장손신이 한 사람을 천거했다."유하(柳下) 땅의 전획(展獲)이라면 능히 주공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고
제군을 물러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전획(展獲)은 노희공의 부름을 거절했다.
- 몸에 병이 있어 출사할 수가 없습니다.장손신(臧孫辰)은 다시 노희공에게 말했다.
"전획의 종제(從弟) 중 전희(展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록 벼슬은 낮으나 언변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전희를 전획에게 보내어 제군(齊軍)을 물리칠 계책만이라도 받아오게 하십시오."
노희공(魯僖公)은 장손신의 말대로 했다.전희(展喜)는 유하로 내려가 전획을 만나 청했다.
"적을 물리칠 대책을 알려주십시오.“전획(展獲)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제(齊)나라가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은 제환공의 패업을 계승하려는 뜻에서다.
대저 패업을 성취하려면 왕실에 충성해야 한다.그러니 너는 제군 진영에 가서 선왕의 말씀을
나열하고 그들을 책망한다면 어찌 제효공(齊孝公)이 물러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희(展喜)는 총명한 사람이었다.얼른 전획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도성으로 돌아와 노희공에게 아뢰었다.
"신(臣)이 능히 세 치 혀로 제나라 군사를 물리치겠습니다.“
노희공(魯僖公)은 기뻐하며 곡식과 비단, 술과 가축을 예물로 내주고 전희를 제나라 진영으로 보냈다.
그때 제군의 선봉 부대는 국경을 돌파하기 직전이었다.
전희(展喜)는 제군의 선봉장 최요(崔夭)의 안내를 받아 본영으로 가 제효공을 알현했다.
"우리 주공께서는 군후께서 친히 옥보(玉步)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소신을 보내 대군을 영접하라
명하셨습니다."제효공(齊孝公)은 오만한 눈길로 전희를 내려다보았다.
"노(魯)나라 사람들은 우리 제군(齊軍)을 두려워하고 있음인가?“
전희(展喜)가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일부 소인배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하하, 흉년이 들어 들판에는 푸른 풀 한 포기 볼 수 없고, 백성들은 배가 고파 신음하고 있음을
나는 다 알고 있다.지금 노(魯)나라는 속이 텅 빈 껍데기뿐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인가?“"군후께서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십니다.
우리 노(魯)나라는 예로부터 믿는 것이 있습니다.다름 아닌 선왕(先王)의 분부이십니다."
옛날 주무왕(周武王)은 강태공에게 제나라를 내렸고, 주공 단(但)에겐 노나라를 분봉했다.
그때 주무왕(周武王)은 강태공(姜太公)과 주공 단의 손을 잡게 하고 하늘에 맹세케 했다.
- 대대로 두 집 자손은 해치지 말지어다.그 기록은 지금도 맹부(盟府)에 보관되어 있다.
지난날 제환공(齊桓公)은 열 세 번이나 회맹을 주도했지만 그때마다 노(魯)나라를 가장 높이 대우했다.
지금도 우리 주공은 늘 말씀하신다.
제효공(齊孝公)은 제환공(齊桓公)의 패업을 계승하여 언젠가는 반드시 맹주의 지위에 오를 것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제(齊)나라를 두려워할 까닭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제(齊)나라를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전희(展喜)는 거듭 강조하여 말했다.
제효공(齊孝公)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한참 동안 전희를 내려다보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는 돌아가 노희공에게 전하라.
나는 노(魯)나라와 친목을 원할 뿐 다시는 군사를 내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그 날로 군대를 돌려 임치성으로 돌아갔다.재미난 일화다.
전희(展喜)의 말장난에 놀아난 제효공(齊孝公)의 우쭐거림과 어리석음이 눈앞에 선하다.
하긴 이때만 하더라도 이런 낭만이 통하던 시대였다.
30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