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이완弛緩
홍순길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 아무나 볼 수 없으나 마음을 열고 보면 선명하게 보이는 손이다. 혼자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이웃을 생각하는 나눔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곁에 두고 살피는 인정의 손이다. 그 손은 두 개일 필요는 없다. 굳이 두 개라고 해서 더 많은 것을 손에 잡거나, 더 많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손으로도 충분하다. 나머지 손 하나는 오롯이 나 자신만을 위해 써도 좋다.
돌이켜 보건대 비록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두 손은 나의 욕심만 움켜쥐고 아무것도 놓지 않으려고 아귀에 힘을 잔뜩 준 채 살아오다 보니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손마디가 굳어오고 아파진다. 움켜진 아귀의 힘을 빼야 할 때다. 손 마디 마디의 틈새로 움켜진 욕심이 빠져나가도록 무심히 지켜보아야 할 때다. 그럴 때 두 손은 보이지 않는 한 손과 다름없다.
어깨가 굳고 근육이 뭉쳐 한 달여간을 고생하고 있다. 한의원이다, 병원이다 열심히 쫓아 다녔지만 좀체 낫지를 않고 애를 먹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깨에 너무 힘을 주고 살아서 그런 걸까? 돌이켜 보면 별 가진 것 없고, 이루어 놓은 것 없이, 자랑할 것도 없는데 웬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며 살아왔을까? 무얼 믿고 목과 어깨에 힘을 주며 경직을 시켜 왔나 반성해 본다. 퇴근길 동료들과 한잔하고 혼자 흐느적거리며 집으로 걸을 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낯선 중년 남성의 허우적거림이 앞을 방해한다. 그의 행동에 괜히 목에 힘을 주며 지긋이 노려보게 된다. 살아가면서 가끔 있는 일들이다.
아픈 어깨 근육은 혼자서 스트레칭으로 풀 수도 있고, 안마기에 몸을 맡겨 풀 수도 있다. 비록 안마기에 비해 시원함은 덜 할지라도 옆 사람에게 뭉친 어깨를 맡겨 잠시나마 아픔을 들어 낼 수도 있다. 요즘은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 작은 도움도 기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안마기에 몸을 맡겨 몸의 피로와 위안을 받게 된다. 나도 저녁밥을 먹고 나면 온종일 혼자 무료하게 지냈을 안마기로 달려가 몸을 맡긴다. 어깨 근육을 풀어 경직된 몸과 마음을 유연하게 할 때 주변이 한층 원만하게 돌아간다.
한동안 눈에 무언가 들어간 것 같이 껄끄러워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생활한 적이 있다. 간지러움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세게 비비고 나면 벌겋게 충혈된 얼굴의 낯선 이가 거울 속에 있다. 정녕 보지 말아야 할 무엇를 보고 말았던 것일까? 화재 사고로 수십 명의 목숨을 잃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TV로 알게 된 게 엊그제 일인데, 또 운전자의 실수로 귀중한 생명이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세상은 온통 위험과 사고로 뒤덮여 있는 것 같다. 그 속에서 누가 누가 살아남나 경쟁하듯 살아가고 있다. 앞만 쳐다보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 항시 주변을 살피며 위험과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경계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자연스레 눈이 얼마나 피곤하랴.
우리는 눈의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간편하게 인공 눈물을 쏟아붓곤 한다. 작은 양의 인공 눈물이 눈의 이물질을 완전히 없애 주지는 못하지만, 그나마 작은 평안은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위안과 평안을 원한다면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맡겨보자. 어느 골짜기 흐르는 차디찬 계곡물에 두 눈을 부릅뜨고 얼굴을 담가보자. 그제야 눈을 괴롭히던 찌꺼기들이 모두 씻겨나가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리라. 멀쩡한 시야로 올바른 방향 키를 잡으리라.
세월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어 갈수록 우리 몸은 조금씩 웅크려지고 굳어 간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키도 줄어든 것을 발견한다. 아침에 일어날때 손마디가 굳거나, 어깨가 뭉쳐 저려오거나, 눈이 뻑뻑하여 불편함을 느끼는
날이 조금씩 늘어난다. 그런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 이제는 마음에 여유를 담아야 할 때이다. 그 여유로움으로 남은 시간들을 채워 나가야겠다. 그렇게 할 때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져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