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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 되리라[창세기 22장 1~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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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신년 두 번째 주일 말씀으로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그리고 그 믿음을 계승한 이삭을 통해 우리가 한 해동안 지녀야 할 온전한 믿음과 순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워낙 많이 듣고, 보고, 잘 아시는 말씀이라 굳이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스토리는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이지만, 오늘 본문이 오기 전의 아브라함의 상황을 잠시 설명을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와 조카 롯 그리고 아내 사라와 함께 처음 고향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무려 1,000km가 넘는 메소포타미아 북부 밧단아람 지역의 하란 성읍으로 이동하여 거주하다가, 75세 되던 해에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고 조카 롯과 아내를 데리고 다시 700km가 넘는 가나안 땅으로 이동을 합니다.
우여 곡절 끝에 가나안 남부지역인 헤브론에 정착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서 아들이 날 것이라는 약속(언약)을 맺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87세에 첩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 이라는 아들을 낳았고, 100세 되던 해에 드디어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습니다. 첫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 차이는 14살 이었습니다.
이삭이 젖을 뗄 무렵 큰 잔치를 벌렸는데 이 때 이스마엘은 동생인 이삭을 놀리게 되고,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내 보냅니다. 이스마엘은 광야에서 활쏘는 자로 자라나게 되고, 하갈은 이스마엘과 애굽 여인과 혼인을 시켰고, 나중에 이스마엘의 딸이 에서의 아내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이 안정되자 아브라함은 블레셋의 왕인 아비멜렉(바로, 가이사와 같은 블레셍 왕의 공식 호칭)과 화친을 맺고 거기에 있던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맹세의우물)라고 불렀으며,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가정적으로,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어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을 것 같은 평안의 순간에 아브라함에게 상상하지 못한 일생 일대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이 위기는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내면의 믿음을 시험해 보시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다뤄 가시는 고 난이도의 과제 였습니다.
여기까지가 배경 이야기이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 1~2절을 읽어 드립니다.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멘.
1절에 “그 일 후에”는 앞서 들려 드린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들을 총 망라하는 일들을 말하는 것이며, 가깝게는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 집에서 쫒아내고 블레셋 왕 아비멜렉과 평화 조약을 맺은 그러한 일들이 벌어진 후에라고 이해 하시면 됩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서의 시험은 단순한 시험이 아닌 신앙의 최종 테스트라고 보면 됩니다. 이런 시험이 있기 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조금씩 빌드업(성장) 시켜 오셨습니다.
신앙인들은 전부 다 이런 크고 작은 시험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러한 시점이 언제냐를 눈여겨 보십시오. 내가 가장 안정적이고 평안을 얻으며 가정적, 경제적, 외세적으로 전부 부족함이 없이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시험을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이것은 지금까지 내가 누리고 사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로 온 것임을 온전하게 신뢰하는지를 물어 보시는 것이며, 그렇다면 내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줄 수 있느냐를 결정 할 수 있는지를 점검해 보시려는 겁니다.
어차피 내게 있는 모든 것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그것을 요구하면 망성림 없이 순종함으로 내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험은 점점 그 강도가 쎄질 것이고, 최후의 시험은 예수님에세 하셨듯이, 너의 목숨까지도 네게 줄 수 있겠느냐는 시험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던져진 갑작스런 시험은 우리 모두에게도 던져질 수 있으며. 이 문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자신의 답을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 하시려고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즉시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답변합니다. 시험 문제를 내기도 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는 답변속에서 이미 아브라함은 무슨 문제든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는 들을 준비, 순종할 준비가 갖추어진 상태였습니다.
사무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삼상 3:16) 라고 청종하려는 자세를 보였고, 이사야도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라고 굳세게 대답 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청종하려는 마음 자세가 온전하게 갖추어진 사람들이었으며 하나님은 이렇게 빌드업으로 믿음이 준비된 자에게 나타나셔서 시험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시험하신 내용은 충격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멘.
저는 읽고난 후에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아멘”이라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이 말씀이 실제인지 꿈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을 겁니다. 씩씩하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을 했지만, 그토록 어렵게 100세에 얻은 아들의 목숨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 시험이었습니다. 이 요구에 대해 아브라함이 즉각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아무런 기록도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느껴야 했던 충격과 고뇌와 상실감, 슬픔, 좌절감 등은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족 아닌가요? 내 아내와 남편, 아들과 딸들이 가장 소중한 보물일텐데 단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은 차라리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즉각 반응한 이야기가 없이 아무런 말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브라함이 엄청난 영적 전쟁을 하는 과정이었음을 그저 공백으로 남겨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침묵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반항, 자기 자신에 대한 무력감과 자책, 그리고 사라의 품에서 아들을 데리고 와야하는 엄청난 중압감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 여러분을 대입해 보십시오. 울고 불고 부르짖으면서 내가 죽으면 죽었지 아들을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저항하면서, 불순종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나는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아마도 열이면 열이 다 그런 선택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 밖에 주시지 않는 분이며, 아무나 시험하시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지금 이러한 막중한 시험을 감당할 만한 믿음의 정도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기에 그에게만 이러한 시험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한 언젠가는 누구라도 시험의 대상이 될겁니다. 아직 이런 큰 시험이 없었다면 내 믿음이 연약하여서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 신년 주일에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인이 헌신과 충성하는 가운데 고난을 받는 다는 것은 믿음을 크게 인정 받고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커지고 강해지면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시험 문제를 들고 우리를 찾아 오실지 모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순종하느냐를 언제든지 통과할 만한 시험 수준을 요구 받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어떤 고난과 눈물의 밤을 보냈는지 기록이 없지만 이 부부의 인생에 있어 가장 기나긴 어두운 밤이었을 겁니다. 치열한 영적 전쟁의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결단을 내리고 이를 즉각 실행에 옮깁니다. 본문 3~9장 앞부분까지 읽어 드립니다.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아멘.
하나님이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다음 날 아침 아브라함은 이삭과 종들과 함께 시내산으로 향합니다. 제 삼일에 시내산 아래에 도달하였고, 아브라함은 시내산에 올라가서 예배드리고 오겠으니 종들은 산 아래에 있으라고 한 후에 불과 칼을 들고서 이삭과 함께 산에 오릅니다. 마치 과거에 모세가 홀로 또는 여호수아와 함께 시내산에 오르던 장면과 유사합니다.
산에 오르면서 삼일 만에 부자 지간에 첫 대화가 짧게 이어집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는 대화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잘아는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시리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어린 이삭이었지만 번제를 드리러 예배하러 가면서 제물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겼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본능적 느낌이 들었던 겁니다. 부자 지간에는 더 이상 대화가 없었고 그들은 묵묵히 산에 오르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이 삼일 전에 인생에서 가장 기나긴 어둔 밤을 지났다면, 이제 이삭에게는 그 어린 나이에 가장 큰 고뇌와 두려움을 지닌 무거운 발걸음이 시작 된 겁니다. 이삭 역시 믿음의 조상의 아들로서 겪어야만 했던 죽음이라는 가장 큰 시험을 눈 앞에 둔 것입이다. 피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제가 오래 전에 제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만약 길을 가다가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이 살려 달라고 발버둥치는 것을 보게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구해주려고 시도하는 것은 좋은데 그러면 자신의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임에도 과연 물에 뛰어들어 구하려는 시도를 하겠느냐 였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나는 할 것 같은데, 해야만 될 거 같은데”라고 대답했으며, 제 아내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 나는 무서워서 힘들 것 같아” 라고 말하며 저를 쳐다 보았습니다. 저는 “어차피 사람은 다 죽잖아, 당장 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선이고 그러다 죽으면 죽는 거지 뭐, 나쁜짓 하다 죽는 것 보다 사람 살리려다 죽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낫겠지”라고 말했습니다. 제 아내는 잠시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웬지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라고 대답한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은 했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두려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당장 일어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말만 해 놓고 비겁하게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들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실제로 저에게 그런 시험을 주실 거면 제가 그 시험을 넉넉히 감당할 믿음도 함께 주옵소서, 그리고 그런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믿음대로 잘 살아가다가 부르시면 언제든지 잘 죽을 준비를 해 나가도록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그 기도의 마음은 변함이 없으며, 날이 갈수록 더 간절하기는 진짜로 잘 죽을 준비를 할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 거룩하고 정결한 몸과 마음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그 때보다 수십배, 수백배 더 커진 상황입니다.
이삭은 자신의 운명이 어떠할지 도무지 예측이 되지 않은 채 산에 오르고 있었지만 죽음을 직감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에게 전달되어 자신에게까지 온 것임을 깨닫게 되어 아마도 아버지 몰래 눈물 흘리며 걸었을 수도 있습니다.
순종이 어려운 이유는 죽을 것 같이 힘든 피 눈물을 흘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밤을 지새며 순종의 눈물을 흘렸듯이, 이삭은 산에 오르면서 동일하게 그 순종의 눈물을 흘렸을 겁니다.
이 눈물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흘렸던 눈물과 정확하게 일치 합니다. 믿음의 길, 고난의 길, 순종의 길, 죽음의 길이 이토록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먼저 이 순종의 길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하셨기에, 얘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도 순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준비된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순종의 시험으로 찾아 오실 것입니다.
이 산 정상에 올라 제사를 드리려는 절정의 장면이 나옵니다. 9절 중간부터 14절까지 읽어 드립니다.
“9.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멘.
내용은 일일이 설명 드리지 않아도 다 아실 겁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잡히셔서 심문과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불필요한 말을 일체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기도하셨던 장면과 너무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삭을 예수님의 예표(미리 보여 주신 증표)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고 했는데, 진실로 우리 모두의 믿음도 이삭과 같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 온전한 수준에 이르도록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순종하려는 마음만 갖추어진다면 우리도 그런 수준에 이르도록 성령이 이끌어 주실 겁니다.
천사가 나타나 아브라함을 제지하였고 그가 독자 아들까지 드리려는 그 마음을 보시고 그제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경외‘라는 말을 많이 살펴 보았고 그 뜻도 반복하여서 잘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경외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경외‘라는 단어가 얼마나 고귀하고 위엄어린 단어인지 실감이 되실 겁니다.
이삭 대신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번제물인 숫양으로 예배를 드린 후에 아브라함은 그 땅을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뜻으로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이 내용은 수 백번을 읽고 묵상해도 그 때마다 감동이 크고, 그 때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은헤와 순종의 마음이 충만해 짐을 새삼스럽게 느껴집니다.
오늘 이야기의 결론인 15~19절을 일겅 드립니다. “15.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아멘.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복을 주신 장면이 창세기 15장, 17장에 이어서 22장에서 세 번째로 나오는데, 여기 22장 17, 18절에 나오는 복이 가장 크고 광대하신 언약의 말씀입니다. 언약이 나오는 세 부분을 비교해서 읽어 보시고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22장이 실로 엄청난 언약을 복으로 주셨음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복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이 쌍방언약의 이행을 준수 했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8절에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는 이러한 순종이 있은 후에 큰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는다는 개념이 이렇습니다.
순종하지도, 청종하려는 자세조차 갖추지 않았는데 일방적인 복을 내려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서 순종하여 복 받고, 청종하여 더 복 받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같이 순종의 눈물을 흘리며 기꺼이 죽음까지 드릴 수 있다면 가장 큰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가장 큰 복은 우리를 믿음이 있다 여겨 주시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겨 주시고, 그 의로움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목표는 바로 이런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2025년 우리의 신앙여정은 이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는 다 아는 내용이지만 그 안에서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과 순종의 자세와 여건이 어떠한지를 살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올 한 해동안 이 말씀을 통하여 나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려는지 하나님의 일하심과 뜻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본문 중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라,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는 말씀들을 연결하며 읽어 보십시오. 나의 믿음이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2025년 한 해를 시작하여 둘째 주일에 살펴본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가 내 믿음의 여정을 이끌어 가는 믿음과 순종의 말씀으로 역사하여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언제든지 대답할 준비를 하시고,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확신으로 오직 순종의 길로만 묵묵히 나아가시는 승리의 한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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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을 보았으니, 이제 우리의 믿음도 강하고 담대함에 이르러 온전한 순종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범사에 청종하려는 겸손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