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13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마르코 8,14-21
육체의 욕망과 세상 걱정과 충돌하면 영적인 말씀임을 확신해도 좋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육적으로 알아듣고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수군거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4천 명을 먹이시고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그들을 다 먹이고 남은 빵조각도 4천 명은 일곱 바구니, 5천 명은 열두 바구니로 더 많은 이들을 먹일 때 더 많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은 빵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선 육체적 걱정을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누구나 욕망하는 것만 보이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영적인 말씀을 간직하려면 육체적 걱정이 없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듣는 말이 영적인 말인지, 육적인 말인지.
영적인 말씀은 반드시 내 육체의 욕망과 세상의 걱정과 충돌합니다.
이것을 보며 그것이 나에게 유익한 말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플레이밍 핫’은 리차드 몬타녜스가 매운맛 치토스를 개발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떨어진 신발을 껌으로 붙이고 학교에 다닐 정도로 가난하게 살고 아내가 길거리에서 아기를 업고 음식을 파는 돈만으로는 월세도 낼 수 없었습니다.
리차드는 멕시코계 미국 이민자 2세이고 공부도 못하고 문제아였기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80년대에 이런 사람을 취직시켜주는 데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리차드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펩시콜라 자회사인 치토스 과자 공장
청소부로 취직합니다.
리차드는 펩시코의 회장인 로저 엔리코의 “CEO처럼 생각하라”는 말에 영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소만이 아니라 기계 설비에 관해 공부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백인 관리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이러저러한 많은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펩시의 재정 악화로 공장의 문을 닫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른 노동자들은 다른 일거리를 찾아 공장을 나갔습니다. 그러나 리차드는 사장처럼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장 개척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맛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매운 것을 매우 잘 먹는 것을 보고는
“저거야!”라고 무릎을 칩니다.
그때부터 리차드는 적은 월급으로 타서 팔 수 없는 과자들을 공장에서 사 와서 집에서 이러저러한 양념을 버무려가며 실험합니다.
아내도 아이들도 적극 도와주어 양념을 과자에 입히는 과정까지 완성합니다.
그러나 공장장은 신제품 개발에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아느냐며 나무랍니다.
리차드는 멈추지 않습니다.
반대가 심할수록 왠지 CEO처럼 생각하는 게 맞는다고 여기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는 로저 엔리코 회장의 전화번호를 몰래 알아내 직접 전화를 겁니다.
회장 비서는 회장에게 리차드의 말을 믿고 전화를 연결해 줍니다.
아마도 사장처럼 생각하는 청소부라 여긴 것 같습니다.
회장은 그의 말을 믿어주고 만든 것을 맛보고는 시장성이 있을 것 같아 일단 그 공장에서만 시험적으로 만들어보라고 합니다.
본사의 마케팅 이사는 그런 것을 위해 1원도 쓰지 않습니다. 몇 주가 지났지만, 아무도 매운맛 치토스를 사지 않았습니다.
청소부가 헛된 생각을 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의 자녀들 또한 아빠를 응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그 맛을 알게 하겠다고 공장 직원 모두가 매운맛 치토스를 차에 싣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러 다녔습니다.
그랬더니 조금씩 잘 팔리게 되었고 6개월 뒤에는 전 미국으로 생산이 확대되었습니다.
회장은 마케팅 이사를 경질하고 리차드를 마케팅 이사 자리에 앉힙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어떤 말씀이 나를 움직일 때 이것이 하늘에서 오는 뜻인지, 나의 뜻인지
구별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말씀은 반드시 세상과 육신과 반대되어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육체가 힘들어지고 세상의 박해가 심해진다면 그건 멈추어서는 안 되는 영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박해를 반드시 받을 것이라 예고하셨습니다.
꺼진 촛불을 계속 켜는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반드시 영적인 열매와 육적인 열매, 세상에서의 영광까지 다 얻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3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8,14-21
우리도 예수님처럼 큰 꿈을 꾸고, 큰 그림을 그립시다!
수도 생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수련자 시절 수련소 공동체는 한 주에 한 번 오후 소풍을 다녔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하루 소풍을 갔는데...늘 버스타고 다녔습니다.
다들 배낭에는 점심 식사를 위한 식자재며 버너며 식기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무등산이나 송광사,
선암사, 보성, 해남 등등을 참 많이도 다녔습니다.
다들 기다리던 점심 식사 시간, 짐들을 펼쳐놓는 순간, 수련자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쌀을 안 가져왔다든지, 양념에 잘 재어놓은 제육볶음을 안 갖고 온 경우가 많았습니다.
수련장님 눈치를 보며 이 일을 어떡하지?
야 네가 당번인데, 정신 똑바로 안차리냐? 하면서 서로 수군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늘 제자단 가운데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장거리 전도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는데, 제자들 가운데 빵 당번이 깜빡하고 빵 챙기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다들 배에 올라타고 배가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순간에야 제자들은 아차 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파악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교육을 시키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이유는 깜박하고 빵을 챙겨오지 못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불신앙과 완고함, 미성숙을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게 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환호성을 올렸고, 스승님이 세상만사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능력과 지혜로 충만하신 메시아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탄 배 위에 앉아 계시는데, 웃기게도 제자들은 오늘 하루 먹을
양식 걱정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와 세상 만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큰 꿈을 꾸시고, 큰 그림을 그리시는데, 제자들은 발등의 불도 끄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상태와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잘 돌아볼 일입니다.
눈앞에 당면한 일에만 치중하고 혈안이 된 나머지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큰 계획은 안전에도 없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 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화요일 강론>
(2024. 2. 13. 화)(마르 8,14-21)
<‘기억’의 문제가 아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4-21).”
14절의 ‘잊어버려’ 라는 말과 18절의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 때문에,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일을 기억하지 못해서’ 혼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기억력이 부족한 것을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이해가 부족한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여기서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깨닫지 못하느냐?”입니다.
열두 제자가 모두 건망증 환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는가?”에 관한 이야기, 즉 신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 이야기는 요한복음 6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셨을 때, 사람들은 그 기적에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는데(요한 6,15), 아마도 그때 열두 제자도 군중의 그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군중과 분리시켜서 호수 건너편으로 보냈습니다(마태 14,22; 요한 6,22).
‘기적의 빵’을 받아먹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빵’만 보고 그 빵을 주신 ‘예수님’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즉 ‘육신을 배부르게 하는 빵’만 생각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는 아무 관심도 없고, 그저 날마다 배불리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태도는 오늘날에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혼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빵이 없는 것을 걱정해서 혼난 것이 아니라, 군중이 그랬던 것처럼 육신의 배고픔만 생각하고
영혼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난 것입니다.
사실 제자들이 빵이 없어서 걱정한 일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긴 하지만, 걱정 자체는 크게 잘못한 일도 아니고, 그렇게 혼날 일도 아닙니다.
‘빵의 기적’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지 못해서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그런 것이 진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것은, 당신을 ‘생명의 주님’으로 계시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려면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입니다(요한 6,51).
예수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하느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착각하는 사고방식에 물들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에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은
지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하느님의 복’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잘 살고 있는 것을 자랑하면서 잘난 체 했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의 사고방식에 물들어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자들도 처음에는 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재물’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모두 모아서 보면,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반대쪽에 있는 가르침들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가르침(마태 6,24),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라는 가르침(루카 6,2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가르침(마르 10,25)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들을 불편해 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지상에서(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상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신앙생활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빵만으로’ 라는 말은, ‘빵’도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빵은 유한한 육신의 생존을 위한 것일 뿐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요한 6,68).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