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야매(野梅)
화엄사 대웅전 뒤 계곡 따라 구층암으로 간다. 울퉁불퉁 모과나무 그대로 기둥 삼은 암자다.
장독대 오른쪽으로 대숲 길을 가면 언덕에 의상암(옛 길상암)이 서 있다. 단아한 한옥을 지리산 자락이 싸 안았다.
하얀 산벚꽃과 노랗고 불그레한 새잎, 새 움이 파스텔화를 그린다.
이름 모를 새가 "쪼로롱 쪼로롱" 맑디맑게 운다.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기만 해도 퍼드득 날아가 또 운다.
선경(仙境)이 따로 없다.
홍매·백매·산수유꽃 만발한 마당 끝, 대숲을 등지고 이끼 낀 고목이 기우뚱 서 있다.
꼬인 듯 뒤틀린 등걸이 강인한 사내의 근육 같다. 살집 없는 몸이 거친 힘을 뿜는다.
사백쉰 살을 넘은 천연기념물 화엄매다. 매화는 대개 접을 붙여 키운다. 아주 드물게는 사람이나 짐승이 매실을 먹고 버린 씨앗이 싹을 틔워 자란다.
화엄매가 바로 그 들매화, 야매(野梅)다. 천연기념물 제 485호로, 흰 꽃을 피워서 백매(白梅)라고도 부른다. 매화의 정령(精靈)이 노고단 넘다 숨 한번 고르고 간 흔적일까. 사람 손 탄 매화보다 꽃이 작고 성겨도 향기는 더 진하다.
화엄사 올벚나무
또 한 그루 화엄사 명목(名木)을 만나려면 일주문을 나서야 한다.
계곡 다리 건너 왼쪽 언덕에 지장암이 있다.
여염집처럼 수더분한 암자 뒤 동백숲 속에 버티고 선 벚나무 하나. 삼백쉰 살 천연기념물 올벚이다. 일찍 거두는 올벼, 올밤처럼 일찍 꽃이 핀다 해서 올벚이다. 이 올벚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8호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서운할 법도 하지만, 올벚나무는 의연하게 봄기운을 흰 꽃에 담아낼 채비만 하고 있다.
벚나무 껍질 화피(樺皮)는 활에 감아 습기를 막고 탄력을 키운다. 칼자루, 마구(馬具)에도 썼던 옛 군수물자다.
인조는 오랑캐에게 짓밟힌 치욕을 다시 겪지 않으려고 벚나무 심기를 장려했다.
화엄사를 다시 일으킨 의승장(義僧將) 벽암 대사가 심은 벚나무 중에 혼자 살아 남은 것이 지장암 올벚이다.
광복 직후 태풍에 줄기가 꺾이고도 두 곁 줄기가 12m로 자랐다.
풍파에 망가진 몸을 시멘트로 때운 채 앳되고 청초한 꽃을 피워 올린다.
흔히 올벚나무를 피안앵(彼岸櫻)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 열반세계에 도달하는 나무’란 뜻이다. 그 오랜 세월 봄마다 세간의 이목을 모두 받는 흑매화를 언덕에서 바라보면서도 피안앵은 시기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을 것이다.
화엄사 부속 암자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