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술
- 문하 정영인 수필
술은 무릇 한 잔부터 시작한다. ‘한 잔 하지, 한 잔 꺾지, 한 잔 술에 눈물 난다, ….’
한 잔의 양은 술의 종류나 잔의 크게 따라 달라진다. 막걸리 한 잔과 소주 한 잔이 다르듯이. 김삿갓에 대한 노래를 들어보면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이라 했다.
이젠 우리나라도 잔술 판매를 허용한다고 했다. 사실 잔술을 사 먹는 것은 우리 술문화에 익숙하지 않다. 전에는 개피 담배를 팔기도 했지만…. 잔술의 대표적인 모양새는 아마 서부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서양 술문화에서는 익숙하다. 서부영화에서 건맨들이 위스키 한 잔 달랑 입에 털어 넣고 백동전 한 개 탁 던지고 가는 모양이 근사하기까지 하다. 서양 술문화에는 맥주도 ‘맥주 한잔 ’ 잔술로 마시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우리 술문화는 잔술로 마시지 않고 병술로 마시는 경우가 허다하다.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등.
술잔은 술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소주는 소주잔에, 맥주는 맥주잔에, 와인은 와인잔에 마신다. 막걸리는 큰 대접이나 작은 대접으로 마신다. 나는 막걸리를 생맥주잔에 마시는 것을 보면 영 술 맛이 안 날 것 같다.
대개 투명한 술은 유리로 만든 투명한 잔에다 마시는 것이 정설일 것 같다. 소주, 맥주, 와인 등의 술잔은 대개 투명한 유리다. 또 막걸리 같은 탁한 술은 불투명 술잔에 마셔야 제격이다. 속이 모이지 않는 대접 같은 잔에다 마셔야 제격일 것이다. 또 안주도 술의 종류에 따라 대표적인 안주가 있게 마련이다.
음식을 오감으로 먹듯이 술도 오감으로 마신다. 코로 술 냄새를 맡고, 눈으로 술을 모며, 손으로 술잔을 잡으며 감지한다. 입으로 술의 진미를 느끼며, 마지막으로 귀로 술맛을 보기 위해 술잔을 부딪친다는 것이다. 흔히 술꾼들이 으레 하는 말 중에 1, 3, 5, 7로 마신다고 한다. 다 술을 더 마시기 위해 하는 말이겠지만 짝수보다 홀수를 중시하는 동양 수문화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나라마다 술의 주도(酒道)가 있다. 한국은 아랫사람이 술을 받을 때는 술잔을 두 손으로 쥐고 받아야 한다. 또 아랫사람이 술을 마실 땐 약간 고개를 돌려서 술을 먹기도 한다. 혹은 서양에서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잔을 부딪칠 때는 아랫사람이 윗사람보다 약간 아래로 부딪친다는 말도 있다. 또는 한국에서는 처음 술을 배울 때는 어른 앞에서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제대로 주도를 배우고 바른 술버릇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당들이 하는 우스개 소리로 ‘월요일은 월래 수 마시는 날, 화요일은 화끈하게 마시는 날, 수요일은 수도 없이 마시고, 목요일은 목이 메도록 마시는 날이며 금요일은 금주 없이 마시며 토요일은 토하도록 마시고, 일요일은 일찌감치 마신다’ 라고 한다.
한국인의 술문화도 많이 바뀌고 있다. “어때, 오늘 술 한잔 하지”하면 그 말을 한 당사자가 술값을 내개 마련이다. 지금은 대개 술값은 뿐빠이한다고 한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만나 산책 후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 모임이 있다. 월요일 모임은 각자도생이다. 자기가 먹은 만치 밥값과 술값을 각자가 낸다. 수요일 모임은 돌려가며 낸다. 다 그게 그것이지만 사람의 성정에 따라 의견을 달리 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돌려가며 내는 것이 부담이 가거나 자기 성질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술을 먹는 사람과 안 먹는 사람과는 성정의 차이가 있다. 또 술을 먹어봐야 그 사람의 숨겨진 성정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하여간에 술을 먹는 사람은 좀 여유롭고 안 먹는 사람은 빡빡하기도 하다. 일장일단이 있게 마련이다.
술을 먹는 것은 유전적인 요소가 있다. 생전에 부친은 술이 안 받는 체질이셨다. 어쩌다 꼭 마셔할 자리에서 술 한 잔이라도 드시면 온 집안이 난리였다. 추워서 벌벌 떠시니 방에 불을 때랴, 여름에도 이불을 덮으랴, 오이즙을 해내랴. 그런데 오형제 중에서 큰 형은 부친을 닮아 한 자도 못했다. 셋째형은 외탁을 했는지 술을 좋아했다. 외할아버지가 말술이셨다고 한다. 어떤 친구는 술을 아주 좋아한다. 처음에는 알딸딸하다가 그러다 거나해지고 황홀경 단계까지 들어가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원래 술을 좋아했나 보다. 조선시대는 술의 피해 때문에 개신교에서는 아예 술을 먹지 못하게 한다. 하기야 시골에서 품앗이 모내기를 하면 참에도 술, 점심에도 술이 나가야 한다. 모내기를 일을 막걸리로 배를 채워야 허리가 펴지고 힘이 나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처럼 술 인심과 담배 인심이 후한 나라는 없을 것이다.
잔술을 팔면 소주 한 잔에 얼마나 할까? 소주 한 병에 7잔이 나온다고 한다. 소주 한 병에 식당에서 보통 5,000원 받으니 한 잔에 1,000원 정도 받지 않을까 한다. 우리도 서부영화의 건맨처럼 소주 한잔 입에 탁 털어 넣고 천 원짜리 한 장 달랑 내던지고 가는 풍경이 보여질까.
퇴근길에 한 잔 하던 술문화도 없어진지 오래다. 그저 먹고 싶으면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 뜯는 혼술시대니 말이다. 그래도 술은 자작술보다는 대작술이 술맛이 나게 마련이다. 그래도 우리 꼰대들은 일주일에 두어 번 얼큰한 동태찌개에 소주나 막걸리 한 잔 쭈욱 들이키고 떠들 말이 있게 마련이다.
과연 잔술문화는 성공할까? 잔술 한 잔에 소주는 1,000원 받는 곳도 있고, 비싼 와인 잔술 한 잔에 45만원 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사람이 술을 먹고(人呑酒), 술이 술을 먹고(酒呑酒), 술이 사람을 먹는(酒呑人)’ 다고 했다. 어느 아버지가 자식에게 가르친 주도(酒道)에 이런 말이 있다. “술을 마시지 말고 인간을 마셔라” 그런 술문화는 많이 지나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도 인간을, 우정을 마시게 위해서 오늘도 술 한 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