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일 전공조작이 몰아댄 전쟁영웅의 마지막 숨결
지금으로 부터 67년 전, 1950년 11월 14일, 6사단 7연대 1대대 1 중대장이었던
이대용 대위는 평북 순천 북쪽에서 압록강 남쪽 초산 풍장면의 중공군 사단 규모 기습에 기적적으로 같이 살아 나온 소수의 부하들과 보충오는 신병들로 어떻게 재편성을 해야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살아났다는 안도감은
거의 느낄 겨를도 없었다.
대대장 시절의 이대용 장군 -1952년. 대대에 카메라가 한 대도
없어서 미고문관이 촬영해주었다.
-----------------------------------------------------------
그의 부하 중대원들은 더 이상 국군 최강 6사단 7연대의 정예 병사들이 아니었다. 춘천 전투를 승리로 매듭하고 낙동강까지 후퇴하면서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던 고참병들은 압록강까지 진격했었으나 중공군의 참전후 1950년 10월 29일 자정에 기습을 당해서 정예 7연대 병력의 75%가 희생당하고 연대는 붕괴했었다, 이대용 대위는 전투를 거듭하며 겨우 20여명의 부하들만 구출해서 이 죽음의 포위망에서 탈출해 나왔다. 탈출해 나온 것은 불과 그 엿새 전이었다.아직도 연대장과 대대장은 중공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압록강에 진격후 참전한 중공군을 피해 철수하던 1950년 10월 29일 자정에
이대용 대위 부대인 7연대는 매복한 중공군 사단병력의 공격을 받고
붕괴되었다. 이대용 중대는 단 세끼의 식사만 했고 13회의 치열한 전투를 하면서 중공군와 북 내무서원의 추격을 따돌리고 9일만인 11월 8일에 탈출해나왔다. 이 탈출기는 1962년 KBS에서 36회 연속극으로 방영되었다.
------------------------------------------------------------
그때까지 100회 가까운 전투를 했었고 중상을 입고 40일 넘게 사경을 헤매기도 한 25세의 이 대용 대위 정신세계는 생과사를 초월한지 오래였다. 죽음이란 항상 언젠가는 사용할지도 모르는 필수품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날 1950년 11월 14일 이대위는 자기의 목숨보다도 훈련도 거의 받지 않고 보충되는 신병들을 어떻게 저 막강하게 몰려오는 중공군들로 부터 떼죽임을 당하지않게 편성해서 지휘를 해야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
이대용 대위는 훈련도 제대로 받지못했던 신병들과 신임 장교들로 중대를
편성해서 그 해 11월 20일,순천- 맹산 가도의 미륵 고개에서 중공군과 맞섰으나 중공군이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병력으로 공격해온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부대는 일찌감치 와해되어 버리고 신병들이 모두 도망쳐 버려 생존자가 많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몰랐다.바로 한달 전 압록강으로 줄다름 치던 정예 7연대 고참병들이었다면 죽음을 걸고 싸워서 또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이대용 장군의 말이었다.
-------------------------------------------------------
이 대용 장군은 그 후의 여러 전투에서도 생존했을 뿐더러 경제 공사로 갔던
월남이 패망할 때 미처 탈출 못하고 공산 월남군에게 5년 가까이 구금되어 있던 치화 형무소에서 뜰의 풀까지 뜯어 먹으며 버티며 끝내 살아남아
귀국하였다.
공산 월남의 악명높은 치화 정치범 형무소 시절, 40킬로까지 체중이 감소하며
죽음 일보전까지 가기도 했던 이대용 장군
----------------------------------------------------------------------
[아래는 지난 더운 여름 만삭의 몸으로 심일 전공 진실을 밝히기에 최선을
다한 군사 연구소 이 상미 소령이 국방일보에 올린 추모의 글이다.-> click!
-------------------------------------
6.25 전쟁에서 파도처럼 닥치는 위기들을 무서운 정신력으로 버티며 호국의 의무를 다했던 불사신 이대용 장군은 67년의 세월을 지난 바로 이 날 2017년 11월 14일, 저녁 8시 40분, 92세의 나이로 그 강한 정신력의 마지막 한방울을 다 소진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병약한 모습을 공개하는 것을 저 세상에 계신 이 대용 장군은 절대 반대하실 것이다. 돌아가시기 몇시간 전의 병상 모습이다.그러나 곧 나에게 곧 닥칠 마구잡이의 무시와 부정에 몰빵한 공세를 예상하고 어쩔 수 없이 공개한다. 이 사진은 이대용 장군의 일생 마지막 사진일지도 모른다.
------------------------------------------------------
이장군이 별세하던 날, 나는 전 육군 헌병감 김만기 장군님과 함께 이 장군이 계신 요양 병원의 병실을 찾아뵈었었다.
두 번째의 문안이었다.그 4 주전에 처음 찾아 뵈었을 때 있던 일반 병실이 아니라 중환자실로 내려와 있었고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나는 겁이 나서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기력이 너무 없으셔서---"말을 흐린다. 이날 오전에 기력을 다 잃고 의식을 놓아서 중환자실로 옮겼다는
말로 이대용 장군의 여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암시를 한다.
그래도 산소로 호흡하면서 이대용 장군의 표정은 전에 뵈었을 때 보다
편안해 보였다. "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를 해보면서 나는 손을 잡아드리며 빨리 쾌차하시기를 빌며 떠났는데 그 네 시간 쯤 뒤에 두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임종을 했다.
나는 학생시절 읽었던 이대용 장군의 저서 " 통곡하는 승리자"에
큰 감동을 받았었고 그 뒤에 이대용 장군과 인연을 이어왔었다.
전사작가로 일을 하면서 이 대용 장군의 많은 도움을 받아왔었다.
이장군의 별세에 즈음해서 쓰는 이 글은 단순한 추도의 글이 아니다.
이 장군은 -표현이 뭐 하지만- 마지막 전투라고 할만한 한 임무에
매진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태극 무공훈장을 받은 심일 전공의 진실에 대한 규명이다.
나는 무시당하고 외면당한채 저 세상으로 간 이대용 장군을 위해서
할 말을 하겠다는 각오로 이 글을 쓴다.
글을 시작하기 전 확실하게 밝혀놓고 지나갈 진실이 있다.
"심일의 전공은 선의에 의해 조작된 것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것은 엄정한 진실이다.
이대용 장군이 작고하기 전까지 매달렸던 화두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노력의 결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가신 이대용 장군의 작고와
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대용 장군이 90이 넘은 나이에 왜 그렇게 심일의 전공 조작을 밝히는데 몰두했었는지를 말해본다.주변에서 심일의 전공 조작을 그렇게 폭로하고자 몰두하는 이장군에게 부담을 느꼈었고 해당 기관에서는 이장군과 만남을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했었다.
성모 병원에서 안치 된 이대용 장군의 영정[影幀]. 장군들은 대개 정복입은
영정을 쓰는데 전투복 차림의 영정을 사용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2009년 6월 25일 촬영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이대용 장군의 의식세계가
아직도 총포탄이 난비하고 생과사의 고비가 수십번씩 교차하는 6.25 전쟁의
혈전장에 있었슴을 보여준다. 그 의식세계의 한 중심에는 전투복 차림으로
저 세상으로 떠난 수많은 선배 부하 전우들과의 미안한 만남을 기대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
심리학을 조금 공부한 나는 알고 있었지만 이대용 장군은 일종의 전쟁 증후군[war syndrome]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왜 국가는 우리의 희생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것이냐?' 하는 원망과
항의의 복합된 심정이다..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별다르게 인정을 받지 못한 숨은 전쟁 영웅들이라면
모두 가진 분노와 섭섭함의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심하게 나간 사람들은 큰 사회적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이대용 장군은 자신의 전공보다도 전장에서 먼저 떠난 전우들에 대한 미안함과 이의 정신적 보상이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는 낙동강 전선에서 소대장 3명과 선임하사를 다 잃었고 북진할 때는 앞서 소개한 초산 풍장 전투에서 무려 100여명의 중대 부하들을 잃었었다.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에 진격했던 이대용 장군의 1중대원중에
7개월의 전투를 치루고 1951년 5월 용문산 전투 직후,그때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고참병들. 이대용 대위는 부대대장으로 가고 서근석 소위가 중대장을 할 때다. 극심했던 사상율을 말해준다.
-------------------------------------------------
그는 선후배 전우, 특히 친형보다 더 따랐던 김용배 대대장의 전공을 알리기 위해서 40년간 노력했으며 또 자기가 음성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되고 나서 중대를 대신 지휘하다가 2 주 후에 미군기의 오폭으로
전사한 8기생 한도선 중위의 전공을 알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힘을 써왔었다.
이대용 장군은 아무리 군과 관의 문을 두드리며 호소를 해보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자 부당하게 뻥튀기 된 심일의 조작 전공 규명에
방향을 돌렸다.
그런 그가 봤을 때 한 것도 없는 심일이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은
영웅으로 계속 기억되고 추모되는 것은 크게 잘못 된 것이었다.
심일 전공의 사실은 심일의 부모가 심일을 포함해 자식들을 세 명이나 잃었다는 사실에 불구하고 국가가 아무 것도 해줄수 없는 실정에 7연대장으로서
심일의 상관이었던 임부택 대령[그때는 부사단장]과 6사단장 장도영 장군들이 노력해서 태극무공 훈장을 심일의 조작된 전공으로 수여하게 한 것이었다.
이것이 잘못 풀려가면서 그는 졸지에 국민 영웅이 되었고 그로 인해 일파만파의 후유증을 일으키고 있으니 이제 진실을 밝히자는 이야기다.
이대용 장군의 주장에는 태극 무공훈장이 심일 부모님에게 주어진 것이니 절대 삭훈하지는 말자는 기본 주장도 담고 있었다.
이대용 장군은 10여년 동안 이의 수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줄기차게 홀로해왔지만 이미 국민 영웅이 되어버린 심일의 이미지를 후유증을 감수하면서까지
건드려 보겠다는 기관이나 사람들이 없었다.
그러나 작년 2016년에 6월 17일 조선일보의 최보식 기자가 이를 용감하게 보도해서 사회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결과 일이 커지자 야당에서 문제 제기를 하였다. 국방부는 산하 군사 편찬 연구소[군편소로 통칭됨]가 심일 전공 진짜 주장을 굽히지 않자 국방부는 육군 군사 연구소[군연으로 통칭됨]에도 조사를 명령하였다.
결과 육군 군사 연구소는 이대용 장군의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는
결론을 내렸고 두 기관의 논의로 한 개의 진실을 도출하라는 국방부의
지시가 뒤따랐다. 이어서 두 기관의 주장을 분석해서 팩트를 가려줄 심일 전공 전공 확인 위원회라는 기구가 설치되었다.
여기서 잠깐 끼어들어 내가 아는바를 말해본다.
나는 이대용 장군과의 관계로 장군의 부하였던 참전 원로들과 자주 만났었다.
춘천 옥산포 전투 참전 원로들만 대여섯 분이나 된다.
여기에 대해서 옥산포에서 전투를 지휘했던 이대용 장군의 상관이었으며 친형과도 같은 국군 전사가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한 전쟁의 천재 김용배 대대장의 전투 직관력에 대해서 연구하는 바가 있어서 두 기관이 논쟁을 시작할 때 나는 이미 춘천 전투의 현장을 방문한 것이 20번이 되었고 그 후 -심일 논쟁중에만- 다섯 번이나 더 다녀왔었다.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하지만 김용배 이대용 대대가 방어선을 구축했던
2km의 164 고지 능선을 무려 네 번이나 종주하며 춘천 학생들이 판
참호들을 연구했었다. 증거로 이들 참호들의 사진을 제시한다.]
춘천 학생들이 판 참호는 상당 부분이 거의 다 메꾸어졌다.
-----------------------------------------------------------
나의 신념은 전투장은 진실을 알려준다다. 이들 방문을 통해서
현지민들의 증언과 지형 답사로 춘천 전투에 대해서 많은 사실들을 알아냈었다.여기에 더해서 일종의 부수적으로 얻어진 정보지만 심일에 대해서도 얻은정보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춘천 전투의 핵심인 옥산포 전투에 참가한 참전 원로들의 심일 공적에 대한 공통적인 태도는 '그런 것은 보지도, 들어본 바도 없는 픽션'이라는 무시로서 심일의 전공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조차 귀찮아 했었댜.
그런 관계로 나는 이번 심일 논쟁에 대한 관전평을 할만한 정보 자산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 시각으로 감히 말한다면 -다시 말하자면- 이번 심일 전공 논쟁은 육본 군사연구소의 완승이었다. 과거 십년간 이대용 장군이 수십 번 찾아와서 수정을 요청할 때는 상대조차 하지않던 군편소는 이제와서 이대용 장군이 그런 요구를 한 일이 없다고 부인하며 심일 전공 고수에 바빴었고 지금도 바쁘다.
그들이 기록들을 뒤져 심일 전공의 진실이라며 내놓은 증거들은 거의 페이크 들이거나 그 수준들이다. 이 페이크들은 소위 공적위를 통해 국방부에 제출되어 국가적인 심일 전공 진짜 고수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군편소는 이 페이크들을 진실의 증거로서 관철하기 위해서 여러 번의 꼼수를 부렸다. 이 꼼수들은 지난 1월 24일 무리하게 개최했던 공청회에서 최초로 나타났었다.
전대미문의 학문 야바우 놀음 초대장. 표면적으로는 공적위가 주최한다고 되어 있지만 관객 동원과 개판 진행의 주최측은 군사편찬연구소였다.
육본 군사연구소의 한 간부는 군편소가 그때까지 군연과 진실 공방을 여덟 번이나 하다가 밀리니까 이런 꼼수식 이벤트를 벌였다고 빈정댔다.
시골 장터 야바우꾼들에게 당한 기분이 든 방청객들이 반발했고 역시
기껏 초청받고 갔다가 눈뜨고 망신당한 것에 분개한 언론의 우박같은
비난 폭격을 받았다.
-----------------------------------------------------
이 공청회는 심일 거짓 전공의 대관식이었다. 또 군편소가 부려댄 야비한 여러 꼼수들의 출정식이기도 하였다.
그 야비한 꼼수들을 한번 열거해보자.
1. 맞 상대한 육군 군사 연구소가 전 연구원들을 풀어서 참전 원로의 증언을 위주로 진실 규명을 했던 방법을 "- 카더라"의 정보나 캐고 다니는 짓으로 매도했었다. 이 비아냥을 육군 군사 연구소장과 그 연구소 스텝들이 공정한 논쟁을 기대하고 참석했던 공청회 PPT 화면에 공공연하게 띄어놓고 해댔다..
-이것은 전사학자로서 해서는 안되는 궤변이다.도대체 사람을 안 만나고
어떻게 사람의 기록을 조사 할 수있단 말인가?-
2. 참전 원로들을 원색적으로 경멸했다. " 말이 수시로 바뀌는 고령의 ----"
이 것도 PPT화면에 크게 걸어 놨다. 내가 알기로 고령의 참전 원로 두어명이
참석했는데 다른 곳도 아닌 국가 기관에서 어떻게 애비도 ,애미도 어른도 몰라보는 이 패륜의 빈정댐을 해댈수가 있을지 한탄스럽다.
나는 이 비열한 술책들이 공청회 전 날부터 언론에서부터 나타나서 군편소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짓을 자제하라고 부탁했었다.
그랬더니 우리는 모르고 공적위에서 한 것이니 그곳으로 항의하라고
한다. --비열하긴
3. 참 한심한 짓이지만 공청회라는 야바우 놀음 때부터 끈질기게
언론 플레이를 해댔다. '심일 공적이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던가
'확정되었다'던가 하는 것이다.
이런 짓들은 지금도 인터넷에 심일 공적이나 심일 전공을 치면 언제나 검색되는 것들이다. 국민을 속이는 짓이었는데도 전혀 여기에 대한 징계가 없었다는 것은 기가 막힐 짓이다.
4.마지막은 이대용 장군의 이번 별세와 관계가 있다.
심일 전공 조작 폭로자인 이대용 장군의 인격을 깎아내려 심일 전공의 폭로의 신뢰성을 흐려버리자는 비열한 획책들을 이 엉터리 공청회에서 노골적으로 들어냈다.
그 뒤에 나온 여러 소문들은 이 대용 장군 공격을 심일 전공 고수의 한 술수로 확정한 주모자로 모 연구소 두어명의 인간들을 의심하게 하였다.
이날 이대용 장군은 정말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했다.
야바우 공청회에서 이대용 장군의 인신 공격은 세 사람이 해댔다.
이때도 교활한 군편소는 앞장서지 않고 공적위원을 내세워 뒤에서 조종했다.
연단에 올라간 김모라는 공적위 교수가 연단에서 이대용 장군 엿먹이기 초탄샘플로 이장군의 5-80년도의 저서 세개에서 옥산포를 공격해서 점령후 그곳에 머무른 시간이 조금씩 틀린 것을 가지고 이대용 장군의 신뢰성을 트집잡았다.
스톱 워치를 가지고 다니며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각각 틀리는 세 개의
시간 중에 터무니없이 짧은 한 개는 한 눈으로 보아도 교정 실수였다. 어쩔 수없는 오류라고 이해할만한 것을 가지고 화학 실험 때나 필요한 정교성의 잣대를 드리댔던 것이었다.
두번 째는 조금 뒤에 연단 아래에서 공적위의 허모 교수가 전투 개시일 옥산포에 출동했었던 이대용 장군과 16 포병대대 김장근 대령이 바로 뒷 좌석에
앉자 있었음에도 개무시하며 1950년 6월 25일 비가 오고 시계가 막혀있었는데 전투는 하지도 않고 어떻게 2km[?]나 떨어진 심일의 후퇴 모습을 볼 수가 있느냐고 떠들었다.[뭘 모르니까 용감했던 것이다.] 밀투가 빈정되는
것을 넘어서 질책하는 수준이었다.
술책의 뼈가 되는 이대용 장군의 주된 모욕은 외부에서 불러온 비육사 출신이
해댔다.신모라는 정치학자인데 왜 이런 곳에 나타났는지 그 배경이 궁금했다.
그날 그가 해댄 짓을 보면 야바우 판에 불러온 바람잡이로서 이대용 장군
저격의 특별 임무를 띄고 왔다고 짐작된다. 육사 총동창회 명예회장인 이대용장군를 모욕하기에 꺼끄런 육사 졸업생이 아니라 일반인을 불러왔다는 말을 누가 하던데 설마------
바람잡이로 모셔온 교수는 연단에서 이런저런 말을 해대다가 이대용 장군을 향하며 공공연하게 지목하며 모욕했다." 가슴이 따뜻한 --" 어쩌고 하며 사전 너스레를 떨더니 어떻게 심일의 퇴각을 도망이라고 할 수가 있느냐는 비꼬임을 했다.
심일이 도망갔다는 묘사는 최보식 기자의 글에서 최초로 나타났었다.
그것을 트집 잡았는데 이것은 그 이미지가 국민 영웅으로 각인되어 있는 심일을 비겁자로 묘사한 이대용 장군의 행위를 나쁘게 윤색해서 국민 분노를 유도하기 위한 치밀하게 기획된 술책으로 보인다.
---------------------------------
심일의 철수가 다 이유가 있었지만 중요한 5번 국도를 비워놓고 후방으로 피한 심일은 분명 전선 이탈의 잘못을 저질렀으며 측면 협조 부대원으로 이런 표현을 백번이라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
신모 교수는 계속해서 모욕을 이어갔다.
심일의 부모가 1.4후퇴후 전방의 6사단 7연대까지 찾아와서 아들의 행방을
찾았던 사실을 그 시절 후방의 부모가 어떻게 알아서 그 먼곳까지
왔으며 무엇을 타고 왔냐고 빈정댄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은 후에 심일의 태극무공 훈장의 진실을 호도하기 위한 사전 작업의 것이었다. 비열한 심뽀로 사전에 꾸민 유치한 모욕이었다.
신모 교수는 정도가 지나쳤다.
이대용 장군을 정신 이상자로 진단하는 황당한 말을 겁없이 해댄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회상성 기억조작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이 아닌데 그렇게 생 각을 오래 하다보면 사실로 굳어지는 경우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대용 장군의 심일 전공 조작 폭로가 이대용 장군이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한 정신병자적 행동이기 때문에 이를 구분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했다는 것이다.
위의 망언은 이대용 장군에 대한 중대한 명예 훼손 행위다.
이 대용 장군은 남들이 모르는 전쟁 증후군을 앓았다고 보지만
이런 정신병자는 절대 아니다. 이 신모 교수가 해댄 세가지의 모욕은 그 뒤에 공적위나 군편소의 술책에 여러번 나타났었고 나중에는 국방부에 올리는 보고서에도 포함되었다.
이 국방부 보고서에도 신모 교수가 이대용 장군을 정신 이상자로
올리는 글도 따라서 그대로 올라갔다. 바람잡이 신모 교수 뒤에
무언가 조직적으로 이대용 장군 모욕을 기획하고 추진한
무리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불려와서 손에 쥐어주는 시나리오를 읊은 느낌이지만 그런 간교한 컨텐츠를 쥐어준 인간들이 나쁜 놈들이고 천명을 아는 나이에 그런 애송이들에게 놀아나서 볼품없는 바람잡이를 한 그 교수도 별로 좋게는 안보인다.
면전에서 두 명의 공적위원들과 한 명의 외부 바람잡이에게 모욕을
당한 이대용 장군은 발언권을 얻어서 처연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 나를 부관참시[剖棺斬屍] 하시오!"
정말 보기에도 안스러웠다. 전쟁 영웅이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보다 못한 한미 안보 연구회 부회장 현광언 장군[소장]이 나서서
한마디 했다.
" 당신들은 가짜 영웅을 지키기 위해서 진짜 영웅을 모욕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 하지않고 진행하다가 소란한 항의 속에
공적위 이름으로 '심일의 전공은 진실임을 선언합니다!'하고 서둘러
끝을 맺었다.
참 한심한 꼴로 야바우 판은 파장했다.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모욕을 당한 이대용 장군의 표정은 비통해보였다.
그날 그 내용을 지켜본 한 분이 이번 이장군 영결식장에 와서 그 아사리 판을
회고하며 이렇게 표현한다. " 험한 꼴을 당하시고 가셨다."
오래 서있지도 못하는 노쇠한 이대용 장군은 모욕의 연타를 받고 처연한 표정으로 내가 '거짓말장이라면 나를 부관참시하시오'하고 있는 동안 야바우
진행을 담당한 온모 교수와 바람잡이로 불려온 신모교수는 연단에서
딴전을 피고 있다. 진짜 공청회라면 저런 추가의 바람잡이까지 동원한 더블 엠씨는 전혀 필요 없었다. 그저 뭘 모르고, 또 그래서 용감해서 전쟁 영웅을
저격할 저격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
엉망으로 진행되어서 다수의 신문들로 부터 욕을 얻어먹은 시골 장터 야바우 식 공청회와 이대용 장군이 모욕을 떠나서 공정성 면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였다.
심일 공적 확인 위원회라는 것은 조사 동안에는 중립적인 태도가 제일 중요하다. 충분한 자체 조사 후 결론을 낸 뒤에 양쪽 연구소를 만나서 토론을 해보고 양쪽 다 승복한 그 결과를 국방부에 올리면 되는 것이었다. 즉 판결을 맡은
재판관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립을 지켜야할 공적위가 이런 세상의 웃음꺼리가 된
공청회 개최에 군편소의 동업자로 나서서 명의를 빌려주고
바람잡이 역할까지 하며 이대용 장군을 모욕하는 하수인 노릇을 했었다.
협조의 단계를 넘어 동업내지 하청업을 해댄 것인데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할만한 이대용 장관의 배경이 있었다.
3, 4년전부터 이대용 장군 주변의 참전 원로들이 계속 세상을 떠났었다.
3 중대장이었던 김명익 대령, 1 소대장이었던 서근석 중령, 중화기 중대장 최종석 중령, 그리고 압록강 진격당시 구출해서 같이 탈출해나온 적십자 간호고등 학교생 박태숙씨등이 연달아 세상을 떠났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낀 이대용 장군은 옆에도 보아도 강박관념이 느껴질만큼 심일의 조작된 전공 규명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대용 장군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절벽을 느낀 이 대용 장군은 국방부 담당부서에 직접 전화해서 책임 간부를 접촉했었다. 그러나 몇 번의 통화가 있던 후에 그 간부는 휴가를 갔다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곧 이장군의 귀에 한 루머가 들려왔다.
국방부 최고 고위층이 이대용 장군의 심일 전공 확인 노력을
불쾌하게 생각하고
" 그 사람 못 오게해라 . 야당이 알면 귀찮아진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은 이후 그 국방부 최고 고위층을 무척 원망했었다. 새까만 후배에게 무시를 당했으니 그건 당연했을 것이다. 그 전의 장관 김관진 장군을 좋게 평가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여기서는 완곡하게 표현하겠지만 최고 고위층은 문자 그대로 국방부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다. 심일 논쟁에서 그 분이 '역할을 했던' 기능들이 믿어지지 않아 익명으로 처리한다.]
그 말이 그냥 루머가 아닌 것은 직후 국방부 기무사 준위가 찾아온 사실로
증명된다. 대단히 노련한 그 준위는 이대용 장군에게 예의 바르게 대하며
" 이 문제는 제가 꼭 바로 잡도록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하며
위로하는 연기를 아주 능숙하게 했었다.
준위는 이대용 장군을 달래서 최고 고위층의 심기를 더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임무를 받고 나타난 것이 분명했던 사람인데 이대용 장군은 예의바른 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심일 문제를 가지고 방문했던 여러 기관에서 수없는 박대를 받았던 90대의 이 장군은 이런 정치적인 제스추어에도 감동할만큼 마음이 심약해졌던 것이었다.
작년 6월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가 폭로한 뒤에 만천하에 심일 조작의
허상이 알려진 후에는 이대용 장군은 자기의 목표가 이루어 졌다고 안심한듯 국방부 최고위층에 더 이상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조작의 진실이 다 밝혀졌으니 신경쓸 것 없다는 생각인듯했다..
그러나 부하들 앞에서 심일 전공을 밝히려는 이대용 장군을 비하해서 무색하게 된 그.최고 고위층, 슈퍼 파워가 과연 심일의 전공이 밝혀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었을까?
앞에서 1.24 공청회에서 해댄 엉뚱한 역할로서 공청회를 소개했었다.
그 면모를 더 자세히 말해보겠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육본 군사연구소가 심일 전공을 진위를 두고 다투자 국방부가 주도해서 두 기관의 다툼을 판정해줄 심일 소령 공적확인 위원회[이하 공적위]를 급조했다. 소위 전문가라는 위원 일곱명중 세 명은 군편소에서, 세명은 육군 군사연구소에서 추천했고 나머니 한 명을 국방부 최고 고위층이 추천했다. 거의 다 박사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이 공적위의 육군 군사 연구소에서 추천했던 세 명까지 모두 심일 전공은 진실이다라고 주장하는 군편소와 짝짜꿍하는 쪽으로 돌아버렸다.
---이럴 수가?
적어도 군사 연구소가 증언을 청취했던 분들은 모두 만나보고
춘천 현지 조사도 몇 번에 걸쳐 치밀하게 하는 것이 그 박사들만의 기구가 했어야 했던 정상적인 수순이었다.
그러더니 이 공적위는 1.24 공청회라는 해괴한 심일 소령 공적 선포식의 바람잡이 역할을 했었다. 나는 그때서야 뭔가 거대하고 보이지 않은 손이 이 기구를 콘트롤 하고 있다는 직감했다.
거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을 때 국방부의 최고 고위층은 그 권위가 막강했을
때였다. 박대통령이 탄핵으로 날아갈 것같은 가능성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런 막강한 힘의 그늘에서 충성심을 보여주고 자기 이익을 챙길 마음을 먹어 본 사람이 공적위에 충분히 있을 법한 구도였다.
이 직감은 바로 그 사람 최고 고위층이 임명한 허모 교수가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만나서 심일의 전공은 진실이다라고 역설한다는 말을 듣고 틀림없다는 확증을 얻었다.
진실을 밝혀야 할 중요한 의무가 있는 공적위원이 기자들이나 만나서 저런 언론 플레이를 하는 것은 비난을 백번 받아도 부족한 부도덕한 짓이었다. 그는 '누구'를 의식한 오버 액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국방부 최고 고위층이 지명한 사람이 저런 짓을 하고 있으니 거대한 그 무엇의 정체에 대해서 알듯말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시간이 지난 얼마 전 또 한 소문을 들었다. 즉 국방부에서 심일 전공은 사실이다를 발표하고 나서였다. 육군 사관학교의 한 특정학과 출신들이 심일 전공을 진실이라고 고수하기로 했다는 말이었다.
바로 이대용 장군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최고 고위층이 그 학과 출신이고 또 아무 것도 모르면서 여기저기 좌충우돌했던 허모 교수, 그리고 공적위의 누구누구도 그 육군사관학교 특정학과 학맥이라는 것이었다.
난장 공청회 뒤에 이대용 장군은 비로소 누구에게 보이는듯한 과잉 행동을 하는 그 허모 교수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심일 논쟁에 군편소를 일방적으로 응원하며 나타난 공적위에 부는 거대한 바람을 비로소 실감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대용 장군은 나에게 허모 교수에 대해서 두어번 여러 가지를 물어 보면서 한마디 했었다. " 그 사람은 xxx과 자주 만나겠네"
XXX는 물론 최고 고위층의 이름이다.
되풀이해서 말한다. 이해못할 공적위의 행동과 엉망진창인 페이크들의
덩어리가 심일 전공 판단의 자료로 선택 된 것에 뭔가 있었다.
이대용 장군은 항상 말하던 것이 있었다.
"진실은 꼭 이긴다."
그러나 그의 신념이 무너지기 시작한 사건이 있었다.
이장군은 2년 전 강원도 모 방송국의 최모 PD가 심일의 전공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사실을 폭로하려다가 못난 보스의 불허 방침에 불발에 그친 일이
있었다 .그 때 무척 실망한 이대용 장군은 장탄식했었다.
"이대로 가면 난 거짓말장이로 남겠군."라고 말했었다.
이 장군은 그런 상황이 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지 않나하는
막연한 짐작이 든다. 그는 자기에게 감정이 안좋은 국방부 최고 고위층이 좌지우지할 가능성도 있는 상황에서 직감적으로 심일 논쟁이 어떻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몇주 후 밤 11시 이대용 장군은 엄청나게 격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해왔다.나는 이대용 장군이 그토록 크게 화를 내는 것을 처음보았었다.
이 장군은 월간 조선을 정기 구독했었다. 이번에 받아본 3월 호에 특집으로
오동룡 기자라는 사람이 쓴 심일 전공의 진실을 옹호하며 이대용 장군의 양심에 큰 상처를 내는 거짓말장이로 몰아부친 악의적인 기사가 실렸다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은 얼마 전 공청회에서 수모당한 감정이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런 국민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망신을 당하는 메가톤 급의 음모가 진행될지는 전혀 몰랐었다.
다음 날 일찍 서점에 가서 책을 사본 나도 기가 막혔다. 어떻게 대언론 기업에서 이렇게 한 쪽 말만 듣고 그런 황색지 수준의 거짓 기사를 쓸수가 있을 지는 몰랐었다. 그래서 좋은 말로 위로를 해드렸는데 이대용 장군은 일주일 동안은 분노를 진정시키지 않았었다.
그리고 월간 조선의 기사를 본지 2 3 주쯤 흘렀을까 ?
전방 철원 6사단7연대에서 부대 창설 기념일에 참석하십사하는 연락이 왔다.
이대용 장군은 일년에 두 번 6.25 전쟁에서 싸운 모부대인 7연대의 창설기념일과 압록강 진격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큰 낙으로 알고 있었다.
매번 내가 철원으로 모시고 가는데 이번에도 전화를 한즉,
" 출발하는 날 내가 서울대 병원에 예약이 있어서 오전에 그곳으로
가니 오후 한 시쯤 그 곳으로 오게나. "했었다.
그리고 출발 당일 아침 세차를 하고 있는데 이대용 장군의 전화가 왔다.
서울 대학 병원에 있는데 의사가 증세가 심상치 않다고 급히 입원하라고 하니
혼자 갔다오라는 말씀이었다.
나 혼자 철원에 가서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와 전화를 드리니까 안면 신경에 문제가 생겼는데 다행히 뇌신경과는 무관하니 며칠간 입원하다가 퇴원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집에서 요양하는 이장군에게 또 전화를 해보니 이상했다
혀 끝에 약간 마비가 온 것 같았다.
그것을 지적하지는 못하고 병원에 자주 가시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불안했다.
이 대용 장군은 그러고 열흘 쯤 뒤에 안면신경 마비가 빨리 진행되어서
조만간 말을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한다. 깜짝 놀랐다.
며칠 뒤에 나와 마지막 대화를 할 때 이대용 장군은 마치 로보트 기계음같이 한자 한자 힘들여 말을 했다."내.가. 일.어.나.면. 이.것.을 .어.떻.게.든.바.로. 잡.아.야.겠.어." 이장군이 말하는 '이것은' "심일 전공은 진실이다"라는 쪽으로 굳어져 버리고 있는 상황을 말한다.
이 전화 이후 이대용 장군의 안면에 전면 마비가 오고 통화가 되지 않았다.
전화가 안되어 한참을 지내다가 집전화 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했더니
막내 아드님이 받았다.
' 아버님이 안면마비도 그렇지만 기력이 급격히 떨어지셔서 거동을
못하고 있습니다.의식은 있으시지만 필담으로 겨우 대화하고 있어요"
나는 이대용 장군의 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말을 그냥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안면 신경마비는 물리 치료를 받으면 좋아질 것이고 기력이
떨어진 것은 충분한 휴양을 하고 치료를 하면 곧 회복되리라고
안이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기력이 떨어지는 증세의 시작은 이대용 장군의 상태가 임종으로 가고 있는 인생 마지막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이 대용 장군이 병석에 있는 동안 최순실 사건으로 박근혜 정권의
끝장나는 정국이 되었다. 국방부 최고 고위층도 곧 물러나야 되는
상황이 오고 있었다. 그때부터 소위 군사편찬연구소와 밀착했던
심일 전공 확인위원회는 독주하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기는 것 같았다.
예의적으로도 심일 전공 조작을 주장하는 계룡대의 육군 군사연구소와
소통을 해야함에도 자기들만의 만남을 갖더니 국방부 정책실에 심일 전공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진실이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물론 그 야비한 언론
플레이가 또 나타나 측면 지원을 했었다.
참으로 한심한 작태였다.
국방부 정책실은 형식적으로 육군 군사 연구소에 의견없냐는 물음을 두어번 묻기는 물었지만 군사 연구소가 초지일관 심일 전공은 조작된 것이 맞다는 태도를 견지하자 발표를 예고하고 한 주일 뒤에 국방부 이름으로 심일 전공은 진짜다라고 발표하였다.
내가 왜 이런 사람들을 전문가라고 불러서 구성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몇번씩 했던 변태적인 행동을 일삼던 심일 소령 공적 심의위원회라는 기구는 해산했다.
이 최종 결정후 국방 최고위층은 곧 정권교대와 함께 물러났다.
그 내막을 잘아는 모 기자가 국방부 알박기를 했다고 맹렬히 공격했지만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국가가 한번 알박기를 해버린 것은 북한산처럼 요지부동이었다.
이때 이대용 장군이 집에서 앓고 있었을 때고 의식도 비교적 뚜렷했을
것이니 병문안 오는 후배들을 통해서 분명이 조작된 심일 전공이 알박기로
진실로 되어 버린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압록강 진격의 중대장이었고 김일성 승용차를 노획한 전공을
세웠고 춘천 전투와 음성전투 신녕전투의 영웅인 그가 공산 월남의 악명높은 치화 정치범 형무소에서 북한의 세뇌 공세를 버티고 지조를 지킨 그가, 이제 여생을 얼마 안 남긴 시점에 국가가 자기에게 남의 전공이나 음해하는 거짓말장이의 누명을 씌워놓았으니 얼마나 통분하며 분루를 삼켰을 것인가?
조금 뒤에 이대용 장군의 상태가 나빠져서 요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들려왔지만 집안 식구들이 그 요양원의 위치를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짐작컨대 이대용 장군이 자신의 병들고 약해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로 세월이 가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석 후에 이장군
집근처의 병원을 뒤지다가 결국 입원한 요양원을 알아내서 방문했다.
이대용 장군은 희미한대로 의식은 있었다. 그러나 말도 못하고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힘들 정도로 쇠약해있었다.식사를 못해서 뼈만 남을 정도로
수척해있어서 찡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병실에 머무르고 있는동안 이대용 장군은 내 손을 꼭잡고 놓지 않았었다. 그리고 힘들게 남겨준 글이 육군의 군사연구소장 한설 장군은 보고싶다는 글이었다.
한설 장군 보고싶소.
-------------------------
내가 한설 장군이 꼭 병문안차 찾아뵙고 싶지만 계신 요양원이 어딘지를
몰라서 아직 오지 못한다고 했더니 더듬더듬 메모지와 연필을 찾아서
잘 움직일 수없는 손으로 적어준 글이었다.
나는 가슴 속에 울컥하면서 올라오는 슬픔이 느껴졌다.
이 장군은 흐릿해지는 생의 마지막 의식속에서도 심일 전공 다툼에서 당한
수모와 좌절은 진하게 남아있었다. 국가를 비롯해서 세상 사람들이 다 돌아 앉아있다고 좌절하고 있을 때 진실을 꿋꿋이 고수하며 이장군 옆에 서준 한설 군사연구소장에게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고마워 하고 있던 것이다.
나의 연락을 받은 한설 장군은 윤중인 중령과 같이 이대용 장군에게
달려와 병문안을 드렸었다.
------------------------------------------------
여기서 비화 하나를 소개한다.
이것은 참전 원로들을 만나 증언을 채집하는 육본 군사 연구소의 조사방식을
"-카더라"라는 정보나 캐러다니는 것으로 비하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문서 기록에서 발견한 페이크들을 잔뜩 들고나와 제시하였던 국방부 군사 편찬 연구소의 모함 수준의 폄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대용 장군과 한설 장군의 첫 만남은 그렇게 좋게 시작하지 않았다.
조사를 시작했을 때 한설 장군이나 육본 군사연구소 스텝들은 국민영웅
심일의 전공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믿지않았다고 한다.
한설 장군은 네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와 이대용 장군을
만나자 범죄자 취조하듯 매섭게 몰아부치며 진실을 캐어물었다.
" 나 오늘 곤욕 치룰 뻔 했네!" 이대용 장군의 말이다.
그러나 두어 시간 심문 형식의 조사를 해가면서 군사연구소 측은 모두 '이것 뭔가 있구나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한설 장군은 이대용 장군을 집에까지 모셔다 드리는 공손한 태도를 보이자 이대용 장군은 섭섭했던 마음이 다 녹았다고 했다.
" 그래도 내 말을 다 듣고 믿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은 나쁘지 않았네"
이대용 장군이 자료가 많다고 나를 추천해준 덕에 일도 볼겸
겸사겸사 자료를 들고 계룡대에 찾아갔던 나는 이장군 보다
더한 곤욕을 치룰뻔 했었다.
찾아온 나를 다짜고짜 남녀노소 연구원들을 다 모아넣은 세미나 실에 몰아넣고 한설 장군이 중앙에 앉아 예의건 뭐건없는 인민재판식 설문을 벌였다. 죽창만 없었지 그건 6,25 때 빨갱이들 패거리가 양민 족치는 것과 별로 다를 바없었다.
내가 제공하는 자료가 빈약하거나 신빙성이 별로 없었다면 나는 그대로 망신을 당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그래도 20번이나 춘천 북방 옥산포에 쫓아다니며 쌓은 내공때문에 겨우 망신을 면했었다.
나는 후에 도대체 그 여자 아이돌 이름을 가진 군사연구소장의
정체가 궁금해서 수소문 해봤다 나는 그가 혹시 본 병과가 헌병이며 범죄 수사대에 근무하며 심문이나 취조의 훈련을 받지 않았나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공부도 많이 한 엘리트였지만 학자라기 보다 야전군 지휘관같은 무지막지한 강골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여기서 다시 지적한다.군편소 측은 군사 연구소의 증인 발굴과 증언 채집의
방법을 카더라 방식을 폄하하고 빈정댔다.
그러나 군사연구소의 조사 방법은 무슨 전설의 고향 시나리오 작가가 민담 발굴하러 다니는것과 달리 치밀했었고 정확했었고 그래서 거기에 트집잡을 건더기가 없었다.
81년도에 육본 인사국 차장이었던 박경석 장군[월남전의 재구대대 대대장]은퇴역 직전 심일의 전공 확인의 민원을 받고 그때만 해도 생존하고 있던 수십명의 춘천 전투 참전자들을 조사하고 그의 전공이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심일 태극 무공훈장 삭훈을 건의했었다.
박 경석 장군은 그 무렵의 참모총장인 이모 장군은 사회적 물의가 우려된다고 이를 덮어두라고 해서 명령에 순종하여 따랐던 것이 못내 아쉬워 했다.
박장군은 6.25전쟁, 월남전을 거치면서 무수한 전투를 한 역전의 용사고
불의를 보면 못참는 소문난 강골이었다. 그런 그가 무능한 관료주의에
굴종했던 것에 뒤늦은 후회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배경의 박 경석 장군은 한설 장군의 타협하지 않는 지조를 크게 평가하며 현대의 조선 명사관이라고는 긍정적이라는 글을 썼었다.
그러자 군편소 쪽의 특공대 노릇을 하는 모씨가 을지문덕의 시까지 동원해서 조롱하는 글로 답신을 했다. 끝까지 좁쌀스런 행실머리를 놓지 않는 그 짓이 혀를 차게 만든다.
81년에 아직 춘천전투 참전용사들이 많이 생존하고 있을때 수십명을 조사해서 심일의 전공이 조작이라는 것을 밝혀내고도 이를 상부의 명령으로
밝히지 못하고 군을 떠나야 했던 박경석 장군[오른쪽]은 이에 한같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박장군은 여전히 집필 활동을 하면서 한설[왼쪽]장군의 진실 규명에 변하지 않는 지조로 임하는 것에 크게 감탄하여 자주 글을 올리며 응원했었다.두 사람이 생김새에서 부터 많이 닮았다.
---------------------------------------------------------
춘천 전투를 완전 개판으로 뜯어고친 만행을 저지르는 군편소측을 옹호한 관료주의에 진실을 가지고 브레이크를 걸었던 한설 장군은 조만간 군사 연구소의 소장직을 떠나서 퇴역한다. 그는 너무 수고하였고 역사적으로 정말 큰일을 하였고 이대용 장군의 명예를 끝까지 지켜 준 것에 대해서 나는 그저 감사, 또 감사를 올릴 수 밖에 없다.
------------------------------------------------
말을 다시 이대용 장군이 가시던 날로 돌린다.
나는 이대용 장군이 별세 하시던 날 전 이대용 장군의 후배인 전 헌병감 김만기 장군을 모시고 찾아뵈었었다고 글 앞머리에서 말했었다.
나는 요양원의 수간호원들로부터 비로소 이대용 장군을 인생의 막바지로
모셔가고 있는 병의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이장군은 암이나 간질환같은 질병으로서 작고한 것이 아니었다.
이장군은 그런 큰 병도 없었고 생리적으로도 즉 혈압이나 맥박등도 약해졌지만 거기에 이상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아드님이 말한대로 기력이 너무 약해진 것이 임종의 원인이었다.
내가 첫번 방문 때 간호사에게 회복의 가능성이 있으신지 물었더니
간호사는 머리를 저었다.
" 너무 기력이 떨어지셔서 ----"
불가능 하다는 말이었다.
중환자 실에 옮기신 날 다른 수간호사는 말했다.
" 생리적으로 이상은 없지만 완전히 의식을 잃으셨어요."
내가 이 장군이 앞으로 어떻게 될것인지 물었지만 그 간호사는 입을 다물었다.중환자실로 이동을 했고 이제 곧 운명을 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대용 장군을 돌아가시게 한 "기력의 소진"에 대해서 아는 한의사에게
물어봤다. 그는 알기 쉽게 이야기 했다. 한의학에서는 그 기력을 원기[元氣]라는 이름으로 분류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마다 축전지의 전기처럼 생명을 지탱해주는 원기가 있는데 이 건전지의 남은 전기에 해당하는 원기를 다 소진하면 세상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원기의 소진은 노쇠함이나 큰 병과 같이 온다는 것인데 소진이
시작되는데 다른 심리적인 쇽크도 원인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국민적인 전쟁 영웅으로서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평가를
받던 이대용 장군이 공청회에서의 모욕과 월간 조선의 중상적인 기사,
그리고 국가로 부터 남의 전공을 음해하는 허언증 인간으로 매도받은
사실을 말해주었고 원기의 소진이 시작되기 전 여러 번의 쇽크를 받았다는
것을 설명했더니 그 한의사는 그런 것들이 원기의 소진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장군이 언어를 잃기 전 나와의 마지막 통화나 한설장군에게 보내는 메모등을 끝으로 임종으로 다가갔다는 사실은 그 의사의
진단이 정확하다는 것을 확신 할 수가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학자의 양심과 전문성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몰인정하기까지 했던 무리들이 구사한 보신주의와 이기주의 덩어리였던 저질 관료주의가 전쟁 영웅 이대용 장군을 영웅[심일]을 모해하는 누명을 씌워서 죽음으로 가는 내리막 길로 몰아댔다.
이제 내가 해야할 일을 말하겠다.
나는 지난 4월 공적위에서 올린 심일의 공적은 진짜다라는 보고서에 의거해서 국방부가 곧 심일의 전공은 진짜다라는 알박기 발표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놀랐다.
오류와 무지와 억지 투성이의 이 보고서는 역사적 판단 기준이 결코 될수가 없는 것이었다.나는 생각타 못해 국방부에 민원을 넣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내가 조사를 더 철저하게 해서 진짜 보고서를 올리겠다는 것이었다.
별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이미 결정이 되었으니 어쩔 수없다는
답신이 왔다.
맥이 풀렸으나 나는 이때부터 내가 알고 있는 심일의 조작된 전공에
대한 분석 보고서를 써갔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발표를 할 생각이었다.
나는 지난 몇달간 정말 많은 양의 글을 썼었다.
나에게 시간만 주어졌다면 지금부터 소개할 심일전공 조작에 대한
글들이 국방부에 제출되어 규명에 한 방향을 주었을 것이다.
한가지,
앞으로 하나하나 분석해가겠지만 군편소 주장의 모순 두 가지만 밝히겠다.
진실부터 이야가 하자면 문제의 6.25일 옥산포 북방 5번 국도로 출동한
심일의 57mm 포 앞에 자주포같은 것은 나타날 수도 없었고 나타나지도 않았었다.그 자주포들은 북한군 보병의 먼 뒤에서 곡사로 국군 후방을 때리며 후속하고 있었다.이것은 심일 심일 특공 신화가 이루어 질 수가 없는 팩트의 기본 구도다 .
또 있다.
현재 국방부에 들어가있는 공적위의 보고서는 오류 투성이지만 우리 국방사에 한 오점이 될 6월 26일 오전 소양교를 두고 심일이 전투를 했다는 거짓은
오류중에서도 크게 문제가 될 거짓이다. 즉 이것은 명백하게 국방사를
오염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혀 있을 수도 없는 이 전투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그 30분 후 -춘천대첩의
핵심인- 옥산포 돌격 전투를 있을 수가 없는 것으로 깡그리 무시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호국의 도시라는 춘천의 명예는 허상이 되고 만다.
소양강 전투라는 허구의 전투는 토마스 맥페일이라는 전공 도둑 근성을 가진 한 저질 고문관에 한국과 미국이 놀아난 추태의 산물이다.
나는 6년 전에 이 저질의 행태를 미리 알고 한 기관 블로그에 그 못난 행태에
대해서 썼었는데 그 글을 찾아 보니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개가 보아도 비웃었을 이 인간이 심일 전공 조작 옹호의 중심에 있어 국가를 망신시키고 있다.
심일 전공의 조사 분석 보고서를 얼마 전 완성을 했지만 군편소 측의 인사들이 자기들의 '존엄'을 감히 건드리는 글만 뜨면 개떼처럼 몰려들어 공격을 해대는 것을 보고 엮기기가 싫어 지금까지 미적미적하며 시간을 끌어왔다.
그러나 이 개떼들의 짓을 해대는 무리들에 의해서 이대용 장군은 밀리다가 세상을 떴다.
이제 내가 뭘 망서리겠는가 ?
내가 아는 심일 전공 조작의 모든 것을 차례차례 털어놓겠다.
진흙탕에서 개싸움을 하다가 같이 사법기관에 끌려 가는 것은 나도
환영한다.
이번 심일 전공 사건의 본질은 '논쟁'이 아니라 '사건'이다.
일부 부패한 보신주의나 관료주의가 끼어들 것이 아니라 차라리 조사 전문성이 높은 군검찰이나 감찰 기관의 참여와 사법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나는 이로서 6.25 전쟁 영웅 이대용 장군의 명예를 조금이라도 되찾아 돌아가신 그 분을 진혼[鎭魂]을 했으면 한다.
[출처] 심일 전공 조작이 몰아댄 전쟁 영웅의 마지막 숨결|작성자 울프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