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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79편)*
*수렴청정에 휘둘린 허수아비 임금, 순조(純祖)*
홍경래의 난, 반란인가 혁명인가.
1811년(순조11) 홍경래, 우군칙(禹君則)등이 중심이 되어 지방차별과 삼정의 문란에 항거하여 약 5개월간에 걸쳐 평안도 지역에서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 홍경래(洪景來)의 난이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선 봉건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앙법(移秧法)과 이모작
(二毛作)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 기술의 변화와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은 농민층의 분화를 가져왔다.
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지주와는 다른 서민 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 했으며,
이들은 사회, 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경제력을 바탕으로 교육의 기회가 늘어난 이들 부농(富農)들이 양반으로 입신(立身)하려는 경우가 점점 많아지자,
조선 조정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다.
하지만 종래의 관직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포용할 수 없으니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만 갔고,
입에 풀칠도 못하는 몰락한 양반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요대목에서 잠깐 김홍도의 자리짜기 한번 보고 갑시다~~^^
(김홍도의 '자리짜기'몰락한 양반의모습)
어린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맞추어 아버지는 자리를 짜고 어머니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아내고 있다.
아들은 낮에 서당에서 배운 천자문을 부모님 앞에서 자랑스레 막대기로 짚어가며 읽어 보이고 있다.
부모는 글 읽는 아들이 대견스러워 일을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른다.
<자리짜기>에서는 서민 가정의 유일한 희망을 읽을 수 있다.
더구나 19세기의 세도정치로 인해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게 모든 부(富)가 집중되어 국가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탐관오리 의 부정은 극에 달했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또한 상업의 발달로 부유한 상인들이 출현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부를 착취해 가는 권력층의 횡포에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삼정(三政)의 문란에 시달린 백성들은 종전의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항거, 봉기 등의 적극적인 방법으로 지배층의 부패에 대응했고, 이러한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조선은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이 심했다.
북쪽 국경선과 붙어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상 전쟁이 자주 발생 하는데다,
북방 출신의 사람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야만인이라고 차별 대우를 받았다
더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성리학의 보급이 느려 교육열이 약했던 탓에 과거합격자 배출이 드물었다.
홍경래의 난에 적극 참여한 계층은 몰락한 양반과 부를 축적한 신흥상인들, 그리고 일부 농민들이었는데, 당시 서북 지방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살았는지 의 기록을 보자.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300년 이래로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혹 과거에 합격한 자가 있더라도 벼슬이 현령에 지나지 않았다.
서울 사대부는 서북지방 사람과는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
(아니.. 조선사회에서 왕따를 당한겨?)
서북지역은 자원이 많고 수공업 및 광산업이 활발해 조선후기의 경제성장과 함께 그 어느 지역보다도 더 큰 경제적인 부(富)를 쌓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지는데, 사회적 지위는 낮아 차별대우가 심한 곳,
그곳이 바로 서북지역 즉 평안도 였으니 이런 요인들이 홍경래(洪景來)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이었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洪景來) 는 몰락한 양반집의 아들로서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계속 낙방했고, 늦게나마 낙방한 원인이 자신의 실력이 모자라 그런 것이 아니라 평안도민에 대한 지역차별임을 깨닫게 되었다.
키가 작았으나 다부졌던 홍경래 는 어릴 적부터 웅략이 있고 지혜가 뛰어났으며, 틈만 나면 검술을 배우고 날마다 200리 길을 걸었다.
출입할 때는 늘 장검을 찼고, 밤낮으로 병서와 술서를 공부해 병법에 능통했다.
과거 합격의 꿈에서 깨어난 홍경래 는 사회체제의 모순에 분노를 느끼고, 가산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양반의 서자 우군칙(禹君則)과 의기투합하여 10년간에 걸쳐서 봉기를 준비했다.
홍경래는 10년 동안이나 국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인정과 풍속, 산천과 도로 등을 면밀히 살피고 동지들을 규합해 가면서 은밀히 봉기(蜂起)를 준비했다.
홍경래(洪景來)가 가장 먼저 사귄 동지인 우군칙(禹君則)은 사서삼경은 물론이고 천문지리에 능통한 비상한 인물이었으나,
서자인 까닭에 과거도 못 보고 집 안팎에서 괄시를 받자 집을 떠나 방랑하면서 지사로 자처하던 인물이었다.
홍경래 는 우군칙(禹君則)을 가산군 청룡사에서 만났는데, 당시 경래는 21세, 우군칙은 27세였고 그때가 바로 정조가 승하한 후 순조가 들어선 해였다.
다음으로 홍경래(洪景來)는 역관으로 부를 축적해 도내에서도 갑부로 유명한 이희저(李禧著)를 끌어들여 자금을 준비한 후 천연의 요새인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희저(李禧著)는 돈을 지르고 무과에 급제한 후 향안에도 든 인물인데, 진짜 양반들은 이희저(李禧著)를 양반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이꼴저꼴 더럽게 여기던 이희저는 홍경래(洪景來)와 우군칙의 회유에 넘어가 뒷돈을 대기로 하고 봉기에 가담했다.
다음 홍경래(洪景來)는 선비 김창시(金昌始)를 꼬셨는데, 김창시는 곽산 김진사로 통하는 인물로서 문장이 뛰어나 당시 평안도 선비 중에서는 제일로 쳤다.
그는 친구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해서 있던 재산 다 없애고 빚이 적지않았으나, 전혀 걱정하지 않고
평안도의 '이태백'으로 자처해 술만 취하면 소동파의 를 읊은 것을 낙으로 삼았던 인물로 홍경래(洪景來)의 재주에 반하여 봉기군에 몸을 담게 되었다.
홍경래(洪景來)는 다시 머슴 출신으로 장사인 홍총각을 회유했고, 재상출신으로 당시의 세도정권에 불만이 많았던 김재천을 비롯하여 평안도의 실력자들과 지방 관리들,
그리고 유랑농민들과 상인계층까지 광범위하게 지지세력을 끌어들였다
이렇게 유능한 인물들을 여럿 포섭한 홍경래(洪景來)는 다복동에서 금점을 한다는 소문을 내서 대량으로 장정을 모집했다.
그때 농촌에서는 3년 내리 흉년이 들어 길바닥에 나 앉거나 빚에 쪼들려 야반도주하는 집들이 무수했는데,
금점 인부를 모집한다고 광고하자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이 떼거리로 다복동에 다 모여들었다,
그들이 내세운 봉기의 명분은 다음과 같았다.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왕으로 세우겠다.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타도하겠다.
평안도에 대한 지역차별을 타파하겠다.
홍경래 (洪景來)는 봉기에 앞서 부서를 정했다.
자신은 평서대원수가 되고 부원수로 김사용을 임명했으며, 총참모는 우군칙, 부참모는 김창시 (金昌始)가 맡게 되었다
선봉장은 홍총각과 이제초, 후군장은 윤후겸, 군량과 군수품 총책인 도총관은
이희저(李禧著)가 각각 맡았으나, 홍경래군은 처음부터 문제를 안고 있었다.
선봉장인 홍총각과 이제초의 급진파와 참모인 우군칙, 김창시의 신중파의 의견 대립이 문제가 되어 원수인 홍경래(洪景來)가 난처한 입장에 빠진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군 내부의 화합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거..시작부터 조짐이 이상한데?)
드디어 봉기한 홍경래군(洪景來)은 10일만에 가산, 정주, 곽산 등 10여 개 지역을 휩쓸었다.
맨 처음 쳐들어간 곳은 정시가 군수로 있는 가산이었다
정시(鄭蓍)는 대표적인 탐관오리로서, 이희저(李禧著)에게 애매한 죄를 씌워 많은 돈을 울궈먹고, 이희저의 첩인 기생 연홍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이희저(李禧著)가 홍경래군에 가담한 이유도 홍경래의 재주에 반한 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정시(鄭蓍)에게 원수를 갚고 싶어서였다,
홍경래군의 봉기 소식을 접한 정시(鄭蓍)는 이미 도망가기에는 너무 늦은 것을 알고, 반란군이 들이닥치면 버틸 만큼 버티다가 적당할 때 항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가산을 점령한 성질급한 선봉 홍총각은 정시(鄭蓍)가 버티자 눈치도 없이 그와 그 아비까지 모조리 한 칼로 죽여버리고, 정시의 첩이 된 기생 연홍은 이희저의 얼굴을 봐서 살려주었다.
웃기는 것이 나중에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할 때, 돈만 밝히던 탐관오리 정시(鄭蓍)는 순절했다 하여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그의 첩 기생 연홍은 피하지 않고 뒷수습을 잘하였다 하여 계월향과 같이 제사를 지내게 되어, 둘 다 충신 열녀로 둔갑해 버렸다.
(이룬~ 🐕 같은 세상!)
어쨌든 홍경래군이 가산을 점령한 후 다음 작전계획을 검토하는데, 안주의 내응자인 김대린이 정주, 박천, 의주를 점령하기 전에 안주부터 공략하자고 작전 변경을 요청해왔다.
평안도에서 가장 큰 안주 병영으로 바로 쳐들어가면 내응 세력이 많이 있으니 쉽게 점령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참모장인 우군칙 과 김창시가 김대린의 작전이 너무 무모하고 뒤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반대하자 홍경래(洪景來)도 이들의 의견을 따라 김대린의 안주 공략안은 묵살되고 말았다.
(아뿔사~ 당시 안주에는 내응 세력이 제법 있어서 성을 함락시키는것은 무모한 계획이 아니었다.
김대린의 제안이 그때 당시는 최선이었고, 홍경래
(洪景來)는 김대린의 말에 따랐어야 했다. 아까비...)
그날 밤이었다.
안주성 공략안을 내세웠던 김대린은 홍경래군의 수뇌들이 그의 작전을 반대하자,
홍경래(洪景來)의 거사가 실패로 돌아갈 것을 예감하고, 측근 3명과 함께 홍경래를 죽여 그 수급을 가지고 관군에게 항복해 상을 받기로 작정했다.
설잠을 자고 있던 홍경래 는 수상한 소리에 잠을 깨었고, 괴한 4명은 홍경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몸이 빠른 홍경래는 손으로 칼을 막으며 비호(飛虎)처럼 밖으로 뛰쳐나갔다.
홍경래 (洪景來) 의 고함소리에 몰려든 위병들이 괴한들을 처치하였으나, 홍경래는 머리와 손에 중상을 입고 그때부터 출입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홍경래(洪景來)가 큰 부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수뇌부들은 병사들의 사기를 참작하여 부상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예정대로 안주를 향해 진군해 나가 여러개의 소읍들을 장악했다.
선봉인 홍총각은 정예부대원 100명과 함께 안주를 기습 점령하겠다고 청원했으나 참모인 우군칙의 반대로 시일만 끌다가 기습안은 불발되고 말았다.
이렇게 홍경래군이 평안도의 소읍들을 점령해 나가는 동안 한양에서는 이요원이 이끈 진압군 2,000명을 평안도로 파병했다.
안주 병사 이해우의 안주군과 합류한 진압군은 홍경래군과의 송립전투에서 대승하여 반란군을 쫓게 되었고, 부상으로 사인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전황을 살피고 있던 홍경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봉기한 지 한 달도 안되어 지리멸렬(支離滅裂)한 채 정주로 들어가 농성하기 시작했다
관군은 그간 홍경래(洪景來)가 점령했던 가산과 박천, 곽산을 수복하고, 홍경래(洪景來)의 근거지인 다복동을 점령하여 모두 불질러버린 다음 홍경래군이 농성중인 정주성 포위에 들어갔다.
관군은 운제와 방신거 등 공성무기 들을 제작하여 공성을 계속 했으나 성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홍경래(洪景來)의 반란군과 농민들의 사투로 성은 지킬 수 있었으나, 식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식량이 떨어지자 말을 잡아 먹었고, 무기도 부족해 솥을 부수어 탄환을 만들고 집을 부순 나무로 밤을 밝혔다.(거참..사투를 벌였던 남한 산성 영화가 생각나네..)
정주성 공략이 지지부진하자 관군은 광부들을 시켜 밤에 몰래 성 밑을 파서 1,700근의 화약을 매설한 후 성벽을 폭파시킴으로써 성 안으로 대거 진입했다.
홍경래, 홍총각, 김사용, 우군칙, 이희저 등은 모두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2,983명이 포로로 잡혔다.
관군은 이 가운데 10세 이하의 남아와 여자 1,000여 명을 제외한 장정 1,917명을 모두 처형했다.
이로써 4개월 여에 걸친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백성들에게 홍경래는 죽은 인물이 아니었다.
홍경래(洪景來)가 살아 있다.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다."
"홍경래(洪景來)가 우리를 도우러 온다." 등의 이야기가 이후 10년이 넘게 떠돌아다녔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꿈을 대신 실현하려다 좌절한 한 영웅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꿈은 죽지 않은 홍경래의 환영 속에 영원히 살아 있었을 것이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반란일까, 혁명일까.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이려면 그 전까지의 모든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체제와 비전을 제시하는 혁명 공약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홍경래(洪景來)의 난에는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하기는 했으나, 체제부정이 왕조체제 타도가 아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타파였고,
혁명 후의 구체적인 사회개혁안과 청사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이 아닌 '난(亂)'으로 그치고 말았다.
결국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수뇌부의 내부 분열과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다.
어쨌든 아깝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성공했으면 조선은 어찌되었을까?
홍경래(洪景來)의 난은 조선 말기의 신분제도를 허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후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홍경래 의 난이 진압된지 3년 후 1815년 서북지방 백성들을 달래기 위한 특별과거가 실시되었으며, 합격자에게는 낮은 벼슬이 주어졌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으로 얻어진 것은 이게 전부였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 (80편)*
8세에 즉위한 어린 임금,헌종(憲宗)
어린 임금과 풍양조씨(豊壤趙氏)
1834년 순조가 45세에 죽자 8세의 어린 원손 이환(李烉)이 왕위에 올랐다.
헌종(憲宗)은 요절한 효명세자의 외아들로, 그의 나이 4살 때 아버지가 22세로 세상을 뜨고 할아버지마저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자, 서둘러 왕세손으로 책봉된 후 불과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조선의 왕 중에서 최연소로 즉위한 왕이 되었으며, 그의 재위기간은 약 15년, 승하한 나이는 23세, 결국 그 역시 아버지 효명세자 처럼 요절했다.
헌종(憲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관례에 따라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던 할머니인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안동김씨)가 수렴청정을 했다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神貞王后)는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으로 추승되자, 조대비가 되어 훗날 고종을 왕으로 지명한 풍양조씨(豊壤趙氏)가문의 사람이었다.
순조 때 처가였던 안동김씨 의 세력이 강했다면 헌종 때는 외척이었던 풍양조씨 가문의 권세가 높았다
헌종(憲宗) 역시 순조와 마찬가지로 세도가들의 방해로 제대로 된 정책을 실시하지 못했다.
15년간의 치세 내내 수재가 발생하고, 이양선들이 출몰하기 시작한 내우외환
(內憂外患) 의 급박한 시기였다.
이럴 때 모두 정신차려서 나라의 위기에 대비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뿔도 아니하고,
왕(王)은 그저 여색을 탐해 궁녀들 방이나 부지런히 드나들고,
세도가들은 '어디 좀 더 뜯어낼 데 없나?'하는 궁리들만 하고 자빠졌으니
나라 꼴이 아무나 집어먹게끔 잘 썰어놓은 생선회 꼴이었다.
(서양 세력들이 냉큼 한입 드시게 생겼네~ ㅉㅉ)
.!
경빈김씨(慶嬪金氏)를 향한 헌종의 사랑, 낙선재(樂善齋) 8세에 왕위에 오른 헌종(憲宗)의 외모는
지금 태어나도 훈남으로 극찬을 받을 만큼 헌칠한 키에다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수려해 믓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궁녀치고 헌종의 성은(聖恩)을 입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헌종(憲宗)은 여성편력이 많고 자유분방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헌종 은 재위 1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거시기를 너무 많이 쓴 탓이오? 푸하하~)
헌종(憲宗)에게는 두 명의 왕후가 있었다.
정비 효현왕후 김씨가 헌종(憲宗)과 혼례를 올린지 2년만에 세상을 달리하자,
곧 계비 효정왕후(명헌왕후)홍씨를 간택하여 왕후로 들였지만 헌종(憲宗)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따로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순화궁 경빈 김씨(慶嬪金氏)였다.
(경빈 김씨 - 뭬야? 요건 경빈 박씨)
헌종은 경빈 김씨(慶嬪金氏)를 지극히 사랑하였는데,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 잘 알 수 있는 흔적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헌종은 사랑하는 경빈 김씨를 위해 궁궐 한 모퉁이에 낙선재를 짓고 그녀의 처소인 석복헌을 지어 선물을 하였다.
창덕궁의 동남쪽에 위치한 낙선재 는 '선한 일을 즐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석복헌(錫福軒)은 '복을 준다'는 뜻으로 후사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명문대가인 김재청의 여식으로 태어나 자란 순화궁 경빈김씨는 조선왕조에서 그 어느 여인보다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헌종(憲宗)이 승하하자 궁궐의 법도대로 사가로 내쫓기게 되니, 그녀의 운명은 행복과 화려함속에서 순식간에 불행과 처절함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파란만장한 생(生)이었다.
그녀는 낙선재(樂善齋)에서 쫓겨나 인사동 사가에서 지내다가 나이 77세에 세상을 등졌다.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요대목에서 잠깐 오가작통법 이란 무엇인가알아봅시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조선 시대에 시행된 일종의 호구 조사 및 사회 통제 제도입니다.
다섯 집을 하나의 ‘통(統)’으로 묶어 서로를 감시하고 돕게 한 체계로, 오늘날의 반상회나 주민등록 제도와는 결이 다른 강력한 연대 책임 시스템이었습니다.
연대 책임
조직 구성: 다섯 집을 1통으로 묶고, 그 수장을 '통주(統主)' 또는 '통수'라 불렀습니다.
다시 5통을 1리(里)로, 여러 리를 면(面)으로 조직하여 체계적으로 관리했습니다.
상호 감시: 통 내에서 범죄자가 발생하거나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이 생기면 나머지 집들이 공동 책임을 졌습니다.
목적
조세 징수: 농민들이 땅을 버리고 떠나는 유망(流亡)을 막아 국가의 세수(전세, 군역 등)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려 했습니다.
치안 유지: 도적이나 역모를 꾀하는 자를 색출하고, 수상한 외지인이 들어오면 즉시 보고하도록 했습니다.
통제: 특히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강력하게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도입: 세종 대에 처음 논의되었고, 성종 대에 『경국대전』에 명문화되며 기틀이 잡혔습니다.
강화: 임진왜란 이후 사회가 혼란해지자 인구 파악을 위해 숙종 대에 '오가작통사목'을 제정하며 더욱 구체화되었습니다.
변천: 구한말 근대적 행정 구역이 도입되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애국반'이나 현대의 '반상회' 조직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오가작통법은 국가가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그물망 같은 행정 조직이었습니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서로 돕는 공동체적 성격도 있었지만, 동시에 서로를 감시해야 하는 심리적·경제적 부담이 큰 제도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순조대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엄하게 벌하고, 대대적인 숙청과 귀양을 단행했습니다.
(공산국가가 따로없네 )
헌종(憲宗)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오가작통법
(五家作統法)'의 시행이다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은 말 그대로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하나의 통(統)으로 보았던 제도로,
다섯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나머지 네 집도 엄하게 벌을 받았다.
원래 오가작통 은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사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웃을 서로 감시하게 함으로써 국가가 백성을 쉽게 통솔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에도 치안 유지와 행정적 편의 등의 이유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실시했었다.
하지만 헌종(憲宗) 때는 이러한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의도가 변질되었다.
오가작통법의 정보가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고 체포하는데 사용된 것이었다.
더욱이 조선후기에는 막대한 세금이나 부역을 피하고자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오가작통법 을 통해 이웃에 연대책임을 물어 사회를 통제하고자 한 것이었고,
이렇게 오가작통을 이용해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으니,
그게 바로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다.
이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천주교를 박해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시파(時派)인 안동김씨로 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벽파(僻派) 풍양조씨가 일으킨 것이다.
요대목에서 잠깐 기해박해(己亥迫害)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기해박해(己亥迫害)는 1839년(헌종 5년)에 발생한 조선 시대의 두 번째 대규모 천주교 박해 사건입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 속에서 교세가 확장되던 천주교가 다시 한번 큰 타격을 입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배경: 정치적 갈등과 '오가작통법'
정치적 상황: 순조 때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안동 김씨 세력이 물러나고, 보수적인 풍양 조씨 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천주교를 탄압함으로써 반대파인 안동 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척사윤음(斥邪綸音): 헌종은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이를 배척해야 한다는 공식 문서인 '척사윤음'을 내렸습니다.
오가작통법 강화: 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히 찾아내려 했습니다.
박해의 범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신자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서양 신부들의 순교: 조선에 몰래 들어와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이들은 신자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관가에 자수하기도 했습니다.
평신도 순교자:
정하상(바오로),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조신철(카롤로) 등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을 포함해 약 100여 명이 넘는 이들이 순교했습니다.
특히 정하상은 이 시기에 천주교의 정당성을 알리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집필하여 조정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교세의 위축: 많은 지도자와 신자를 잃으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서구 세력과의 접촉: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은 훗날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책임을 묻기 위해 강화도로 침입하는
병인양요(1866년)의 먼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시성: 이때 순교한 103명 중 70여 명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기해박해는 단순히 종교적 탄압을 넘어, 당시 조선 사회의 보수적인 유교 질서와 새로운 근대적 사상(서학) 사이의 격렬한 충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1834년 헌종이 8세에 즉위하자 순조의 비(妃) 순원왕후(純元王后) 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왕대비를 적극 보필한 사람은 그녀의 오빠 김유근이었다.
1836년부터 병으로 말조차 못하던 그는 1839년 유진길(劉進吉)의 권유를 받고 세례까지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동김씨의 천주교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김유근의 은퇴로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이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변하였다.
형조판서 조병현 으로부터 그동안의 천주교 전파 상황을 보고 받은 그는 1839년 3월 입궐하여 천주교인은 무부무군(無父無君)으로 역적이니 근절하여야 한다는 천주교에 대한 대책을 상소하였다.
그리하여 서울과 지방에 다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세워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고,
사헌부의 정기화 는 원흉을 잡지 못하면 천주교의 근절을 기할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따라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된 천주교인은 43명이었으며, 그 중 대부분이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나 남명혁, 박희순 등 9명은 끝내 불복, 사형되었다.
5월25일 에는 대왕대비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내려졌으며, 천주교 박해는 전국적 으로 확산되었다.
이 사건으로 세도가문은 안동김씨에서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천주교 박해를 이용해 정권을 차지하려 하다니... 이룬 뜨그랄~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