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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마태오 18,15-20
교회 공동체 개인 간의 연결이 은총의 흐름에 끼치는 영향
: 커뮤니티(교회) = 카리스마(성령) + 커넥팅(연결 시스템)
오늘 복음 말씀은 교회의 공동체성과 교회에 맡겨진 권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안 되면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냥 무시해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곧 당신 자신으로 파견하십니다. 교회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아니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파견하시며 당신의 모든 권한, 곧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교회는 결코 한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도 성부와 성자, 그리고 두 분이 당신을 내어주실 때 선물 전달자의 역할을 해주시는 성령, 이렇게 세 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많은 본당이 성사 생활을 하는 신자수가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다시 나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커넥팅이 잘 된 이들입니다.
어떤 단체에 속해서 활동하던 분들은 대부분 다시 나오지만, 혼자 미사만 다니던 분들은 상당수가 계속 냉담해하고 있습니다.
성사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공동체에 속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자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언니가 마귀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풀리면서 성당에 나가려고 해도 성당 생각만 하면 머리가 아프고 성당 가까이 가면 몸이 굳어 식은땀이 난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성당에 데리고 나왔지만, 새언니는 전혀 더운 날씨가 아니었는데도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렸다고 합니다.
어찌어찌 고해성사를 보게 하고 성체를 영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갈 때도 성당 모든 신자가 알아볼 정도로 몸이 마구 흔들렸습니다.
성체 한 번 영하게 하는데 그런 고생을 하면서
시누이도 진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이때 성모님께서 깨달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자기 혼자 새언니를 도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혼자 안되면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레지오 하시는 분들에게 말해서 언니를 레지오에 입단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몇 주 사이에 악령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왜 예수님께서 혼자 안 되면 공동체의 도움을 청하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의 출신 본당의 본당신부님께서도 이와 같은 일을 겪으셨었습니다.
미국에서 교포 사목하실 때인데 어떤 분이 악령에 시달린다고 신자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신부님은 겁이 났습니다. 자신은 마귀를 쫓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끌려가다시피 해서 도착해보니 마귀는 당당히 신부님을 노려보며 신부님의 죄를 상세하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창피해서 더 듣고 있을 수 없었지만, 또 오기가 생겨서 싸워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힘이 아닌 공동체의 힘을 빌려보기로 한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빙 둘러앉게 만들어 묵주기도를 함께 바쳤습니다.
처음엔 비웃었지만, 한 단씩 늘어나며 악령도 힘들어하는 기색을 보였습니다.
식은땀을 흘리고 소리를 지르다가 5단에 다다르자 마귀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그 사람을 놓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교회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 능력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는 마치 그물과 같습니다.
공동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만큼 많은 물고기를 놓칩니다.
지금 소공동체 시스템 안에서는 소외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세포처럼 어디엔가 다 속해 있게 만들어야 교회의 힘이 강해집니다.
우리 각자는 세포와 같고 그 세포들이 다 몸에 연결되어 있을 때 그 몸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소공동체 시스템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이 연결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역량으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8월16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에제키엘 9,1-7; 10,18-22
마태오 18,15-20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때로 공동생활을 하면서, 때로 한 단체를 동반하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꾸려가면서 정말이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는 그 누구든 인간적 약점과 나약함, 실수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들 불완전하고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완해주면서 완전함의 ‘끝’이신 하느님께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무한한 인내도 정말 필요합니다.
한없는 기다림도 필요합니다.
그러려니 하는 큰마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진심에서 우러난, 솔직한 ‘형제적 교정’입니다.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의 심각한 약점과 중대한 결핍 앞에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가 아니라 바로 당사자 그와 일대일로 만나 그의 잘못과 죄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야기해주고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에, 또 때로 엄청난 반발이 예상되는 일이기에, 때로 더 큰 상처와 소란함을 유발하는 일이기에 정말 신중하게 접근해야 되는 일이며 다른 무엇에 앞서 많은 기도가 선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파악하고 계셨기에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 앞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당사자 ‘단둘’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일, 그가 말을 듣지 않더라도 분노하거나 낙담하지 말고 다음 단계를 밟으라는 것입니다.
그를 진정으로 한 가족, 한 형제로 여기면 절대로 한번 시도해보고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 지혜로운 사람, 너그러운 상담자, 깊이 있는 영적 지도자와 함께 또 다시 그의 회개를 위해 합심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사회 공동체 안에 아무리 막가는 사람,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하는 암적인 존재가 있다손 치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한번 권고해서 안 된다고 해서 단칼에 그를 매장시키려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써보고 안되면 또 다른 방법을 써보고,
최선을 다한 후에 안 되면 그때는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특히 부족한 이웃들 앞에서,
그들의 교정과 성장을 위한 조언의 과정에서, 인내와 겸손, 신중함과 기도가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연인데, 얼마나 보석 같은 관계인데, 단칼에 끝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강론>
(2023. 8. 16. 수)(마태 18,15-20)
<형제, 형제애>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
여기서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네 형제가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을 네가 알게 되었거든”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다툼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께’ 죄를 짓는 상황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단둘이 만나” 라는 말씀은,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단죄하는 상황을 만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타일러라.” 라는 말씀은, 좋은 말로 타이르는 것과
꾸짖고 야단치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은 “그가 회개하면”입니다.
여기서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되찾으신 것이다.”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온 일은, 아버지 입장에서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은 일이었고, 큰아들 입장에서는 잃었던 동생을 되찾은 일이었습니다(루카 15,32).>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이르겠다고 나섰다가 그를 함부로 심판하는 죄를 짓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의 죄를 지적하고 타이르기 전에 먼저 할 일은 나 자신을 반성하고 살펴보는 일입니다.
형제를 회개시키기 전에 먼저 나 자신부터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죄 속에 있으면서, 또 자기는 회개하지 않으면서, 형제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이고, 위선이고,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죄를 짓는 형제를 타이르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또는 죄를 짓고 있는 죄인의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형제를 타이르는 상황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형제가 와서 나를 타이르는 상황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죄인이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네 형제가 와서 죄를 짓고 있는 너를 타이르거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자격을 회복할 것이다.”가 됩니다.
<왜 항상 형제를 죄인 쪽에만 두고, 자기 자신은 의인 쪽에만 두는가?
정말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고 있는가?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처지의 죄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타이르는 것은, 그는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 회개하여라.”가 아니라, “우리, 함께 회개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모든 일을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6-20).”
잃은 형제를 되찾는 일은, 또는 내가 형제 자격을 잃었다가 그것을 회복하는 일은, 개인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1코린 12,12-31).
그런데 회개하라고 타일러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형제애를 거부하는 것이고,
공동체에 속해 있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라는 말씀은, 그를 ‘파문’하라는 뜻인데, 실제 상황을 보면 교회가 파문하지 않아도, 또는 파문하기도 전에, 그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를 떠납니다.
“...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교회와 사도들의 파문 권한을 확인해 주신 말씀이기도 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은 하늘에(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나 자신’에게 하시는 경고 말씀으로도 생각해야 합니다.
“만일에 네가 형제의 말도 듣지 않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그러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죄 속에서 살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너는 결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형제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회개하는 것,
나 자신이 구원의 길을 잘 걸어가는 것입니다.
회개와 구원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