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省墓)
고은
아버지, 아기 남북통일이 되지 않았습니다.
일제 시대 소금 장수로
이 따을 떠도신 아버지
아무리 아버지의 두만강 압록강을 생각해도
눈 안의 선지가 생길 따름입니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두만강의 회령 수양버들을 보셨지요
국경 수비대의 칼날에 비친
저문 압록강의 붉은 불빛을 보셨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남북의 마을을 다니시면서
하얀 소금을 한 되씩 팔았습니다.
때로는 서도(西道) 노래도 흥얼거리고
꽃 피는 남쪽에서는 남쪽이라
밀양 아리랑도 흥얼거리셨지요.
한마디로, 세월은 흘러서
멈추지 않는 물인지라
젊은 아버지의 추억은
이 땅에 남지도 않고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남북통일이 되면
또다시 이 땅에 태어나서
남북을 떠도는 청청한 소금 장수가 되십시오.
“소금이여”, “소금이여”
그 소리,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듣게 하십시오.
(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 1974)
[어휘풀이]
-선지 : 짐승을 잡아서 받은 피, 여기에서는 눈에 핏발이 섬을 의미한다.
[작품해설]
이 시는 시인이 사회적 ⸱ 역사적 책무를 절감하고 민중적 각성의 시인으로 변신하면서 내 놓은 작품으로,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비극적 현실에 대한 확인’[1~5행]⤑‘수난의 근대사로 인해 고난을 겪어 온 우리 민족의 과거에 대한 회상’[6~20행] ⤑ ‘통일에 대한 염원’[21~25행]의 과정으로 구성되어 통일 시대를 지향하는 문학이라는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가 아버지의 무덤에 성묘를 가서 아직도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아버지께 알려 드리는데서 이 시는 시작한다. 화자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에 압록강, 두만강 국경 지대를 넘나들던 소금 장수였다. 소금이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그것을 전국을 무대로 하여 공급하는 아버지의 삶은 매우 가치 있는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때의 소금은 생계 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외형상으로는 아버지의 생계 수단이지만, 고통의 시대를 지탱하게 하는 힘이자 정신적 가치로까지 확대되고 상징화된다. 화자는 분단으로 인해 남북을 오갈 수 없게 된 이후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아버지는 하얀 소금이 떨어져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화자의 말을 통해 우리는 소금이 역경 속에서도 아버지를 살아가게 했던 어떤 알 수 없는 힘이나 정신적인 가치였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국토 분단과 함께 그 같은 ‘소금이 떨어져’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청청한 소금 장수로 다시 태어나는 날을 기원하면서 시는 끝맺는다. 그 날이란 바로 남북통일의 날로, 화자는 통일의 날이 오면, 분단의 비극적 현실 속에서 그간 잃어 버렸던 가치들이 다시 회복되리라는 기대감을 그 속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소금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매개체요, 나아가 남과 북을 하나이게 하난 민족의 총제적인 얼을 상징하는 것이다.
[작가소개]
고은(高銀)
본명 : 고은태(高銀泰)
법명 : 일초(一超)
1933년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52년 출가(出家)
1956년 『불교신문』 창간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전은사운」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2년 환속(還俗)
1975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1989년 장시집 『만인보』 발간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1998년 제1회 만해시문학상 수상
시집 : 『피안감성(彼岸感性)』(1960), 『해변의 운문집』(1963), 『신언어의 마을』(1967), 『세노야』(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부활』(1975), 『제주도』(1976), 『입산』(1977), 『새벽길』(1978), 『고은시선집』(1983), 『조국의 별』(1984), 『지상의 너와 나』(1985), 『시여 날아가라』(1987), 『가야할 사람』(1987), 『전원시편』(1987), 『너와 나의 황토』(1987), 『백두산』(1987), 『네눈동자』(1988), 『대륙』(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1988), 『그날의 대행진』(1988), 『만인보』(1989), 『아직 가지 않은 길』(1993), 『독도』(1995), 『속삭임』(1998), 『머나먼 길』(199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