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나해 5월23일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주님께서 원하시면”하고 말해야 합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4,13-17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38-40
◈ [서울] 연중 제7주간 목요일
2018년 나해 5월23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 의학입니다. 서양의 의학과 동양의
의학은 사람의 건강을 돌보는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서양의 의학은
아픈 곳을 찾아서 치료하려고 합니다. 장점은 효과가 빠르고, 치료의
시간도 단축되는 것입니다. 질병이 발생한 곳을 찾기 때문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습니다. 동양의 의학은 아픈 원인을 찾아서
치료하려고 합니다. 장점은 부작용이 적고, 재발하는 경우가
적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동양의 침, 뜸, 보약과 같은 치료 방법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동양 사람들은 수술, 처방전, 의료기계를
사용하는 치료 방법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는 유행성 출혈열과
골절이 있었을 때 서양 의학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깨와 목, 허리,
다리가 아팠을 때는 동양 의학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건강을
돌보고, 아픈 곳을 치료할 수만 있다면 서양의 의학도, 동양의 의학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 수련’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영신 수련 23항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유익하면 기쁜 마음으로
사용할 것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유익하지 않으면 바로 버려야
합니다.” 재물, 권력, 능력은 그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을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
사용한다면 소중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한다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들을 나의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한다면 필요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것들을 빼앗는 데 사용한다면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재물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이웃을 착취해서 얻은 재물은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재물을 사용한다면 그런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될
것이고 주님의 이웃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눈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이 탐욕을
찾는 데 쓰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귀는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귀가 감언이설에 놀아나서는 안 될 것입니다.
손은 어려운 이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그 손으로 이웃을
고통의 늪으로 밀어 넣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하느님을
찬미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나라를 볼 것입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 안에서 드러내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인간 존엄성의 원리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성을
지닌다는 원리입니다. 인간은 성적인 차별, 피부의 차별, 신분의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자유와 지성과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이 존엄성은 결코 함부로 훼손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보조성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상위집단이 하위집단에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며 하위집단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보조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원리입니다. 예를 들어, 중앙정부는 지방자치단체가
할 수 있는 일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지방자치단체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 보조적으로 개입해서 해결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연대성의 원리입니다. 모든 인간이 개개인으로 존엄한
인격체이지만 인간은 또한 사회적 존재이므로, 자신의 행복과
안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서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대성의 원리는 개인적 이기주의나
집단이기주의를 반대하여 공동선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라고
요구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크신 주님 바람 앞에 한 줄기 연기인 우리들
2018년 나해 5월23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크신 주님 바람 앞에 한 줄기 연기인 우리들
최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LG그룹 구본무 회장님에 대한 훈훈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 듣습니다. 모그룹 총수처럼 조폭이나 수전노
같지 않으셨답니다. 제왕적 갑질이나 비인간적 횡포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답니다. 정도(正道) 경영, 투명 경영을 주창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었답니다. 가까운 사람들, 특히
직원들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 돋보였답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숨은 자선도 많이 하셨답니다.
직원들을 하인 부리듯 줄줄이 일렬로 총집합시켜놓고, 군기잡고
호통쳤던 어떤 재벌 총수와는 달리, 구회장님은 언제나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사셨답니다. 과한 의전과 복잡한 격식을 멀리한
소탈했던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장례식도 아주 소박하게
치러졌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 조차 떠들썩하게 과시하는 한국
사회의 장례문화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가 남긴 몇몇 어록들은 다른 재벌 총수들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겨야 할 귀한 말씀들입니다.
“국민과 사회로부터 존경 받는 기업이 됩시다. 우리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모든 일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경영 환경이 어렵다고 사람을 안 뽑거나 기존 인력을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 협력회사와의 갑을 관계는 없습니다. 협력회사에 단순히
도움을 주겠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협력회사의 성장이 곧 우리의
성장임을 인식하고 실행해주기 바랍니다.”
대기업 오너였지만 검소하고 조용하게 세상과 이별한 모습, ‘이웃집
아저씨’ 처럼 따뜻하고 품격있는 그룹총수로서의 모범을 남기고,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우리 곁을 떠나신 회장님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이 아침 야고보 사도의 권고 말씀이 비수처럼 제 마음에
꽂힙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장 14절)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후 산전수전 다 겪으셨던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스승님의 정체와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쳤던
그였습니다. 때로 주님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도 겪었고, 주님 때문에
깊이를 알수 없는 바닥 체험도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심오한
스승님의 뜻, 그분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그의 표현이기에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티끌보다 작은 것에 목숨걸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큰 인물들, 나라 전체를 쥐락펴락했던 거물들도
노화로 인한 쇠락 앞에 정말이지 초라한 모습으로 변화되더군요.
마침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쉰 날, 확인하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덧없고 보잘 것 없더군요.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바람에 우리를 내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한 줄기
작은 연기같은 우리를 당신 크신 사랑과 자비의 바람에 합류시켜
주실 것입니다.(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 40)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8년 나해 5월23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 40)
예수님의 이름으로 삶을 사는 것이 공통된 우리의 자세입니다.
언제나 근본적인 줄기와 맥락이 중요함을 다시 깨닫습니다.
줄기와 맥락은 모든 희망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멈출 수 없는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일은 믿음과 함께하는 우리의 존중입니다.
존중은 각각의 다양성을 서로의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화합과 연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서 찾아야합니다.
서로의 일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열린 참신앙인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린 소통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봉사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기도와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격려와 응원으로 나갑시다.
신앙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길은 예수님의 일을
우리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좋은 일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으면
2018년 나해 5월23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좋은 일을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으면>
복음: 마태오 1,1-25
중국의 어느 시골길에서 한 청년이 2시간 가까이 기다려 44번 버스를
탑니다. 출발한 버스는 얼마 가지 않아 2인조 강도의 습격을
받습니다. 승객들의 금품을 빼앗은 강도들은 젊은 여자인 운전사를
성폭행하려 하고, 청년은 이를 막아보려 고군분투하지만 흉기를 가진
강도들에게 간단히 제압당합니다. 다른 승객들은 방관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폭행을 당하고 돌아온 운전사는 경멸하듯 승객들을 돌아보고,
돌아와서 버스에 타려는 청년을 타지 못하게 한 다음 버스를 몰아
떠나버립니다. 도와주려고 한 건 자기뿐인데 자기만 버려두고
떠나버린 것에 대해 청년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히치하이킹을 하여 길을 계속 가는데, 경찰이 교통사고 현장을
조사하는 것이 보입니다. 조금 전까지 청년이 탔던 44번 버스가 언덕
밑으로 굴러 운전사와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경찰관들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됩니다. 청년은 쓴 웃음을 짓습니다.
우리는 고해성사 때 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것에만 집중해서
성찰합니다. 하지만 해서 지은 죄보다 하지 않아서 지은 죄가 더
많습니다. 하는 행위는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행위는 매우 많습니다. 하지 않았기에 죄처럼 느껴지지
않더라도 마지막 때에는 분명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하면 신자들의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더 이상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귓속말로 충고를 해
주시는 고마운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성경은 여전히 돈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좋아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 빠져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고, 성경이 옳다면 당연히 부자는 하늘나라 못
간다고 여겨야 합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는 반드시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6,24 참조). 바오로 사도는 모든 악의 뿌리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했습니다(1티모 6,10 참조).
약 5초마다 한 명씩 굶어 죽는다고 합니다. 그들의 한 끼 식사는
50원이면 충분합니다. 그들이 라자로처럼 굶어 죽어가는 데도 우리는
여전히 부자이고 배부르다면 어찌 우리 마음에 사랑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있으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고, 사랑이 있어야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아프리카는 너무 멀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지 않습니다. 다만 가난해지기
싫어서 눈을 감고 있을 뿐입니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9살 아이. 얼마 후 그는 지구의 한 축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았습니다. 북극. 한때, 북극곰들의 보금자리였지만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목숨을 위협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북극곰을 사랑했던 펠릭스는 ‘더 이상의 방관은 ‘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변화시킬 ‘결심’을 내립니다.
“북극곰을 위해 나무 100만 그루를 심겠다. 그럼 지구 온난화를
반드시 개선할 수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의 말을 비웃었습니다. 펠릭스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친구들을 모집했습니다. 친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앞장을
섰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캠페인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독일 전역에서 어린이들의 유행처럼 퍼져나간
것입니다. 3년 뒤 총 50만 그루의 나무가 어린이들에 의해
심어졌습니다. 어른들은 그제야 펠릭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UN에 초대된 그는 어른들에게 일침을 놓았습니다.
“어린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이 환경위기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러나 우리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왜
이렇게 방관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1조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습니다. 1조 그루 나무심기 캠페인을 시작해야 합니다.”
펠릭스의 연설은 어른들을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는
펠릭스의 ‘나무심기 캠페인’에 동참했습니다. 한국도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이 참여하고 있는 이 캠페인은 지금까지 전 세계에 150억
그루의 나무를 심었습니다. 북극곰을 구하겠다는 9살 꼬마의 꿈이
지구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 땅위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차이’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잊지 마세요. 모기 한 마리는 코뿔소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천마리의 모기는 코뿔소의 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출처: ‘나무 150억 그루 심어 지구의 축을 바꾼 9살 꼬마’, 포크포크]
사랑하면 항상 줄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줄 방법도
있습니다. 9살짜리 꼬마도 한 번도 직접 본 적 없는 북극곰을 위해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 각자에게는 얼마나 더 큰 잠재력이
숨어있을까요?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주님 앞에 가면 한 탈렌트를
땅에 묻어놓고 살다가 주인을 만나러 가는 게으른 종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야고 4,17)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기타] 암을 이기는 10대 수칙 : 오늘의 능력말씀
2018년 5월23일 수요일
암을 이기는 10대 수칙
오늘은 “암을 이기는 10대 수칙”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 말씀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서울대병원 암통합케어센터 윤영호교수님은
암을 이겨낸 220명의 사람으로부터 건강회복
프로그램 10대 수칙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1. 긍정적인 마음 2. 적극적인 자세 3. 규칙적인 운동
4. 올바른 식습관 5. 금연과 절주 6. 정기적인 건강검진
7. 과로는 금물! 8.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기
9. 마음 베풀기 10. 종교생활이었습니다.
사실 이 열 가지는 대단한 내용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암을 이겨낸 220명은 바로 이 수칙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곤경에 빠져도 넉넉히 이겨내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작은 어려움에도 팍팍 쓰러지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머리로는 아는데 몸은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부터라도 다 안다 말만 하지 말고 아는 것 하나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저희라는 이기주의를 넘어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8년 나해 5월23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마르9,38-40)
저희라는 이기주의를 넘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
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말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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