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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묵상글 ( 성주간 화요일. -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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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024년 강론>
2024.03.26 04:54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오늘 이 말씀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눈에 쏙 들어오며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그러나’는 앞의 얘기와는 반전을 예고하는 표현이지요.
앞에서는 헛수고, 헛고생을 얘기하다가
그건 그렇지만은 않다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무엇이 어떻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은 나를 버리지만 하느님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나의 일과 노력은 인간적으로 그리고 일시적으로 헛수고가 되겠지만
영적으로는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영광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의 헛수고는 두 가지입니다.
일의 실패와 관계의 실패입니다.
보통은 공들인 일이 아무 성과가 없을 때 헛수고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지 않았을 때 그렇게 얘기하지요.
그런데 신앙인인 우리는 이 헛수고의 기준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결과가 나지 않은 것으로,
그러니까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지 않을 때 헛수고인 것으로 바꿔야.
그러니 우리 신앙인은 내가 원하는 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다를 때
그렇게 애쓴 것이 헛수고가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어떤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하느님 뜻과 달라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 곧 주님의 헛수고는 일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실패,
그러니까 제자 교육의 실패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자식 농사의 실패입니다.
3년 동안 당신의 제자요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으로 그렇게 애써 키웠는데
유다 이스카리옷은 당신을 팔아넘기고 다른 제자들은 다 배반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아주 심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 놓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 토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처럼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어서 터뜨리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심란하심이 우리와 같은 의미의 심란하심일까요?
물론 좌절감 곧 제자 교육이 내 뜻대로 안 된 것의 심란하심이 아니라
사랑의 심란하심 곧 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이해해야겠지요.
우리만 해도 자식 농사가 잘되지 않았을 때
내 뜻대로 안 된 것 때문에 심란하지 않고,
자식이 불행할까 봐 심란하지 않습니까?
어쨌거나 이제 주님은 제자들의 배반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당신이 죽어갈 때 제자들은 요한 외에 아무도 당신 곁에 없을 겁니다.
그럴지라도 당신 곁에 아버지 하느님이 계신다며,
당신의 죽음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그리고 제자들도 지금은 배반하지만
나중에는 참 제자로 바뀔 것이라며 심란하심을 추스르십니다.
‘그러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반전을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됩시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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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신부님 올해 3. 31. 자. 강론글 : 아직 /
성지 순례 중이시기에 강론글을 올리실 경우 12시 ~13시반에 올리셨는데
오늘 글 올리시면, 저의 개인사정으로 오후 늦게나 공유할 예정임
*** 26. 3. 30. 강론글은 올리지 아니하심. (26. 3. 30. 23:00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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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속죄 염소 만들기'라는 공동체적 의식(A Communal Ritual)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께서는 속죄 염소 메커니즘의 문제점을 드러내시기 위해 속죄 염소가 되셨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과 희생 염소 메커니즘의 종말
'속죄 염소 만들기'라는 공동체적 의식(A Communal Ritual)
2026년 3월 30일 월요일
리처드 로어(Richard Rohr) 신부는 유대교 속죄일(Yom Kippur)에 행해졌던 속죄 염소 의식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속죄 염소 만들기"라는 말은 레위기 16장에 묘사된 독창적인 의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유대 율법에 따르면,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한 마리 "광야에 쫓아 보내는" 염소 위에 손을 얹어 지난 한 해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모든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했습니다. 그 후 염소는 갈대와 가시로 된 채찍을 맞으며 광야로 내쫓겼고, 사람들은 기쁨 속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무고한 희생자에게 가해진 폭력은 집단의 죄책감과 수치를 잠시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속죄 염소 만들기의 역학은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단이라 여긴 이들을 화형에 처했을 때,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을 린치했을 때,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실 이 패턴은 동일하며,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죄인이 배제될 때마다 우리의 집단적 자아는 안도하며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뿐이며, 단지 환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반복해서 "이번에는 진짜 범인을 찾았다"는 거짓을 믿으며 우리의 양심은 점점 더 무뎌지고, 무지에 빠지며, 오히려 죄에 연루됩니다. 속죄 염소 만들기가 결코 악을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저기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누군가를 오염된 요소로 몰아내며 자신이 정화되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니며, 세상 절대 줄 수 없는 그리스도의 평화(요한 14,27 참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죄 염소가 되심으로써 속죄 염소 만들기의 보편적인 거짓됨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신 분이 되어, 선의로 가득한 사람들조차 얼마나 죄로 몰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빌라도(국가 권력의 대표)와 가야파(성전의 수장)는 모두 인위적인 이유로 그분을 단죄했습니다(요한 16,8–11; 로마 8,3 참조).
예수님을 속죄 염소로 경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속죄 염소 만들기를 멈추는 법을 배워야만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임의로 희생자를 만들어 자신이 악에 연루된 책임을 피하려 합니다. 권위는 좋은 길잡이가 아님을 역사가 보여주었지만, 많은 이들은 권위자에게 의지하며 성숙한 양심을 형성할 책임을 내려놓기 일쑤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따르며 그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은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반복되는 보편적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벌을 내리는 최상의 존재"로 오해하는 시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폭력이 필요하고 심지어 선하다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하는 폭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폭력은 절대 구원을 이루지 못하며, 단지 모든 폭력의 희생자를 파괴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를 "구원하는 고통"의 진리로 대체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고통을 붙들고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보여주셨습니다.
Story From Our Community
원수를 사랑하라는 묵상(The meditation)이 제 마음을 깊이 꿰뚫습니다! 제 삶 속에서 제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저를 강하게 자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에게 겉으로는 대체로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로 대하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원망과 우월감이 폭발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나아가 제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켜 달라고 청할 수는 있습니다.
—Mary W.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CONSPIRE 2016: Everything Belongs,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6). Unavailabl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ishak Pilai,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벽에 새겨진 저 거친 십자가는 우리가 희생 염소를 지목하려는 인간적 충동의 표지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지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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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사람이 둘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 '목숨'까지 내놓으며 따르겠다고 장담하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가 특별히 더 큰 죄를 지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에사오가 겪었던 유혹을 경험합니다. 그는 한 그릇 음식 때문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습니다(창세 25,33). 우리의 경우, 장자의 권리는 어떤 사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돈 삼십 닢에 팔았고(마태 26,15), 베드로는 고통을 피하려고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박해를 피하려고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께 침묵으로 응답하는 것도 결국은 그분을 팔아넘기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유다나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팔거나 팔아 넘길 때가 있지 않은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우리 존재의 원천이신 '사랑의 하느님'이 아닌 '나', 즉 '에고'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팔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배반과 성령강림 이전 베드로의 부인은 우리에게서도 '에고' 중심의 삶과 두려움 속에서 되풀이됩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은 우리 안에도 자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오는 두려움은 현실에 대한 직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느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선조들과 모세, 여호수아, 이사야,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들에게 종종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창세 26,24; 이사 45,3).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2).
"힘과 용기를 내어라.…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신명 31,23).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 1,8; 15,20 등)
이 확언은 예수님에게서도 반복됩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지만 이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확언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모두 불확실성의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밑받침해 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에고'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나' 중심의 삶은 '나' 이외에 다른 이가 참된 인격과 인격의 관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홀로 있음 안에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존재와 생명과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은 물론이고 하느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모든 존재와도 연결되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 저자가 묘사하는 유다의 행동을 한 번 잘 살펴봅시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유다가 택한 것은 '외떨어짐'과 불확실함의 '어둠'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에고 중심의 삶, 즉 '내' 관심사와 '내' 계획에만 집착되어 있는 삶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베드로의 모습을 한 번 봅시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기는 하였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가긴 했지만, 예수님과 함께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에 동행하였고, 예수님이 신문을 받던 순간에도 그분을 따라가기는 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배반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확실함 속에서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불확실함은 우리가 '에고' 중심의 삶에서 온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현실 속에서는 하느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고 우리의 삶의 여정 힘을 실어 주시며 동반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고자 하는 참된 현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 사이트에 나오는 [오늘의 묵상]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말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 삶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나는 조금씩 더 이타적인 삶을 시작했는가? 모든 일에서 내 뜻만을 고집하지 않게 되었는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더 이상 투덜거리거나 낙심하지 않는가? 나 자신만을 위해 돈을 낭비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가? 가족과 가정이 내 관심과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하는가? 나는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삶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있는가?'
매일은 성화의 길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날입니다. 내가 그 진보를 눈으로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마음을 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뜻을 따르고자 하는 단순한 소망을 우리의 마음에서 찾으십니다. 비록 내가 한 일이 부족하거나 흠이 있어 보일지라도, 하느님께는 그것이 그분께 드리는 제물로 비쳐집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 우리는 종종 비틀거리는 발걸음의 약함만을 의식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씩 위로 오르고 있으며, 그 길 끝에는 장엄한 풍경과 더 큰 은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나약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꾸준한 성장을 보실 뿐 아니라 힘을 실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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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성삼일>을 이틀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절망과 어둠이 더해가는 이야기입니다. 빛으로부터 떠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간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두 개의 밤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개의 배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다의 밤’이요, 또 하나는 ‘베드로의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캄캄한 어둠이 짙어져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닭이 울음과 함께 새벽이 밝아져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이 제자들을 덮치자, 마음이 산란하시어 드러내놓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요한 13,21)
사실, 예수님께서는 배반하는 제자를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빵을 적셔서 그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적셔서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끝까지 베푸는 충실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랑을 등지고서 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면밀히 계획한 바를 어둠 속에서 행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장담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베드로는 주님을 배반할 의향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약한 순간에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 어둠은 밝아질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나친 자기 과신으로 넘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넘어질 때는 가장 약할 때가 아니라, 가장 강할 때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가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것입니다(2고린12,10).
그렇습니다. ‘유다의 밤’은 어둠과 악으로부터 오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약함과 과신으로부터 오는 밤입니다. ‘유다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도 더 짙은 어둠으로 빠져들어 멸망으로 가는 밤이요, ‘베드로의 밤’은 죄를 깨닫고서는 어둠을 헤치고 빛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같이 곧잘 넘어집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넘어지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일어서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혹 넘어진 사실을 까달아 알고 뉘우친다고 해서, 일어선 사람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단지, ‘넘어진 채로 넘어진 자신을 본 것’일 뿐, 일어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일어서서 넘어졌던 자신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 속으로 건너와서 어둠을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일어선 자만이 빛나는 새벽을 만날 것이요, 일어선 자만이 빛 속에 들 것입니다. ‘먼저 베풀어진 그분의 사랑을 만난 자’만이 그분의 빛 속을 걸을 것입니다.
하오니, 빛이신 주님! 저를 비추소서! 제가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오늘 제가 비록 넘어지더라도 일어나 빛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8)
주님!
어둠에 휩싸여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빛을 비추어 주소서.
넘어지기도 전부터 베풀어진 당신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일어나게 하소서. 당신 빛 안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일어나 빛 속을 걷게 하소서.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빛을 받았으니, 빛을 비추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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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울뜨레아 모임에서 장기 자랑이 있었습니다. 한 팀이 준비한 연극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버스에 예수님이 타고 계셨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정류장마다 사람들이 탔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이 탔습니다.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이 탔습니다. 일에 중독된 사람이 탔습니다. 도박과 알코올에 빠진 사람이 탔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씩 예수님을 뒤로 밀어냈습니다. “제가 급합니다.” “제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뒤로, 더 뒤로 밀리다가 결국 버스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버스에 사탄이 올라탔습니다.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버스는 빠르게 지옥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웃으면서 본 연극이었지만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목자가 버스 운전사와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버스 운전사는 승객을 가려 태우지 않습니다. 외모로, 직업으로, 재산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 태웁니다. 사목자도 그렇습니다. 열심히 한 신자만이 아니라, 신앙이 약한 사람도, 상처 입은 사람도, 교회를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도 모두 받아들여야 합니다. 버스에는 정해진 노선이 있습니다. 운전사가 기분에 따라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사목자에게도 노선이 있습니다. 그 노선은 복음입니다. 세상의 유행도 아니고, 사람들의 기대도 아니고, 숫자와 성과도 아닙니다. 복음이 노선입니다. 그 길이 때로는 좁고 험해 보여도,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버스는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너무 빠르면 위험하고, 너무 늦으면 신뢰를 잃습니다. 사목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급함은 사람을 다치게 하고, 미루는 태도는 공동체를 지치게 합니다. 하느님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버스 운전사는 난폭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급정거와 급가속은 승객을 다치게 합니다. 사목자도 말로 사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권위로 밀어붙이는 것도 난폭 운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운전대를 세상 욕망에 넘겨주어서도 안 됩니다. 울뜨레아 연극에서 결정적인 장면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뒤로 밀려났을 때,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 자리를 지키기에 바빴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내려오셨고, 그 자리에 사탄이 올라탔습니다. 방향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성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은 영광의 길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노선을 지키셨습니다. 아무도 그분을 운전석에서 끌어내리지 못했습니다. 끝까지 아버지의 뜻이라는 노선을 붙들고 가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누가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을까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다고 했지만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는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레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이들이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와 유다의 삶이 전혀 달라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였으며 또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희망을 버렸던 유다는 용서받을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유다는 쓸쓸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유다와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지만, 절망을 버렸습니다. 마음 안에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통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용서받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완벽하게, 깨끗하게 살 수만은 없습니다. 우리는 잘못과 허물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잘못과 허물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정화해 주시는 하느님께로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절망을 버리고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또한 민족들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저도 돌아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뒤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효율과 성과라는 이름으로 복음의 속도를 바꾸고 있지는 않은지. 오늘 성주간에 다시 운전대를 주님께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제 사목의 방향을 붙들어 주십시오. 예수님이 제 삶의 맨 앞자리에 계시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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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없이 배신을 거듭하더라도...
저는 수난 복음을 읽고 묵상하다가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기적과 치유 활동이 셀 수 없이 거듭되는 당신 일생의 절정기, 가장 잘 나가던 공생활 기간에만 우리 인간에게 극진한 사랑과 특유의 측은지심을 발휘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던 수난의 때에도 우리를 향한 측은지심의 시선을 여전히 지니고 계시며, 그 시선을 인간에게 보내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갈 무렵 베드로는 예수님께 장엄하게 약속을 드립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되시고 대사제 관저로 압송된 직후 베드로 사도의 태도는 즉시 돌변합니다. 그나마 베드로는 수제자인지라 책임감을 느꼈던지, 멀찌기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날씨가 쌀쌀했던지라 베드로 사도는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이자도 저 예수라는 자와 함께 있었습니다.”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아니라고, 또 아니라고. 또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 부인하던 순간,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바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던 순간, 예수님께서는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째려보는 시선? 비웃는 시선? 분노로 가득 찬 시선? 아니었습니다.
그 시선은 여전히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시선이었습니다. 대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눈빛으로도 대화를 할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건네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많이 힘들지? 속도 많이 상하고. 그래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거라. 세 번 배반했다고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그래도 나는 괜찮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세 번 배신했다고 너를 저버리지 않는다. 배신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네 편이란다.”
그런 예수님의 눈빛에 베드로는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처절히 참회합니다. 밖에 나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은전 서른 냥에 팔아넘긴 유다는 그 예수님의 눈빛을 마주치지 못했기에, 그 사랑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안타깝게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그 눈빛, 죽어가시면서도 베드로 자신을 측은히 여기시는 그 눈빛으로 인해 회심을 하고 다시금 수제자의 자리로 복귀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배반 사건 이후 수시로 울었답니다. 그래서 그의 눈가는 늘 짓물러 있었답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유다는 배신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배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이 늘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비록 두려움에, 인간적인 나약함과 비겁함으로 인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지만, 베드로의 시선을 늘 예수님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배신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고, 수제자의 위치도 회복되었으며, 불멸의 수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죄를 짓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의 상반된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길을 가버린다면 우리 역시 유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죄의 구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할지라도,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예수님께로 향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될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중죄를 저질러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큰 죄를 지어도 주일 미사에 나오셔야 합니다. 대죄를 지어도 아침, 저녁 기도를 계속 바쳐야 합니다. 수없이 배신을 거듭하더라도 주님과의 마지막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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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3,21ㄴ–33.36–38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해지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 것이다.”
제자들은 서로 바라보며 당황합니다.
사랑의 식탁 한가운데에
배신의 그림자가 들어옵니다.
이어 예수님은 유다에게
그가 하려는 일을 하라고 하시고,
유다는 밤으로 나갑니다.
복음은 짧게 말합니다.
“그때는 밤이었다.”
이 문장은 시간의 묘사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드러내는 말처럼 들립니다.
배신은 언제나 ‘밤’의 언어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말이 흐려지고, 마음이 숨고, 책임이 뒤로 밀립니다.
대 바실리오는
공동체의 신앙에서 가장 무서운 적이
바깥의 박해만이 아니라
안에서 자라는 이중성이라고 경고하듯 말합니다.
한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다른 마음으로는 자기 이익을 붙잡는 순간,
공동체는 조용히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이어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없다.”
베드로는 다시 고집스럽게 말합니다.
“주님을 위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누가 배신자냐’를 가려내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마음 안에 있는
밤과 낮의 싸움을 보여 줍니다.
유다의 배신이든
베드로의 부인이든
그 핵심은 같습니다.
사랑보다 두려움과 계산이 먼저 올라올 때
사람은 무너집니다.
영적 성찰 주간의 화요일,
대 바실리오의 눈으로 우리는 이렇게 성찰합니다.
• 내 마음이 밤으로 기울 때는 언제인가?
• 나는 사랑을 지키기보다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 그리고 성령께서 오늘 내게 주시는 작은 ‘빛’은 무엇인가?
복음은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배신과 부인을 예고하시면서도
제자들을 떠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고,
그 연약함을 통과해
다시 사랑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찰은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무너질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성령이신 주님,
제 마음이 밤으로 기울 때
숨지 않게 하시고
당신 앞에 서게 하소서.
두려움과 계산이 아니라
사랑으로 선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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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130788&menu=4770
2026. 03. 30. 13:37 ㅣNo.188801
■ 생활묵상 : 사람의 손길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
저는 어제 따끔하고 무서운 하느님 체험 같은 걸 했습니다. 이게 하느님 체험인지 아니면 그냥 인간 체험인지는 모른다고 해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설사 그게 그렇다고 해도 그걸 하느님의 경종으로 여기면 제 신앙에도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 것도 가히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공교롭게도 전에 소개해드린 그 자매님만큼이나 어린 자매님이십니다. 어젠 제가 주일미사 봉헌하고 집에 가는 길에 간단하게 롯데리아에서 점심을 먹다가 서로 톡을 주고받았습니다. 이분과도 다양한 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대화를 하다가 저도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다가 그만 남의 이야기를 인용해 전해드렸습니다.
처음엔 그 자매님께 이해를 드린다고 하는 측면에서 선의로 했는데 이게 그땐 선의였는데 나중에 되돌아 온 답변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가 어떤 선을 넘은 답변이었던 것입니다. 그 답변을 보고서 이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니 순간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 자매님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게 엄청 큰 실수였던 것입니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근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문자 내용이 단순히 그 자매님이 말씀하신 건 맞는데 자매님이 하신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그 자매님의 손을 통해 저에게 전해주시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 이게 엄청 두려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때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왠만해선 울지 않습니다. 딱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깊은 연민이나 동정심에만 눈물을 흘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울컥하는 그 정도입니다. 어젠 정말 제가 부모님 돌아가셔도 그 정도 눈물을 흘리진 않았습니다. 사실 그 문자 내용은 자매님이 하신 것이지만 그게 마치 하느님의 음성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게 눈물이 났던 것입니다. 단순히 어린 자매님이 보냈다고 한다면 그냥 미안한 감정만 들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제가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또 왜 그렇게 했는지에 대해 최소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에 대한 제 진심을 말씀드리기 위해 눈물이 날 정도로 실수를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하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한다고 했었습니다. 나중에 거듭 사과를 하니 저녁에는 어느 정도 용서를 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낮에 또 그 일과 관련해서 다른 내용을 전해주셨습니다.
어제 마지막에 간단하게 어떤 메시지를 저녁에 주셨는데 이건 또 마치 성모님이 하신 말씀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치 아버지는 야단을 치시고 그 야단을 들은 아들의 마음을 또 엄마가 달래주시려는 듯한 그런 묘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느낌을 오늘 오전에 그 내용에 다시 감사함을 전해드렸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그 사건이 이름없는 순례자 책에서 본 내용이 생각나 다시 한 번 더 그 내용을 찾아 제가 그 부분을 사진을 찍어 보내드렸습니다. 그외 다른 주고받은 내용도 있지만 그건 공개하긴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이런 내용도 보내주셔서 이제 제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그런 말했다고 삐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걸 보고 이제 휴 살겠다 싶었습니다. 어젠 하느님의 음성 같았고 오늘은 한 인간 사람인 자매님의 말로 들린 것입니다. 이 일을 보고 하느님 체험이란 화두로 묵상을 해봤습니다.
우리가 보통 하느님 체험 이런 말을 할 땐 직접 그 내용은 일대일로 하느님과 뭔가 모르지만 직접 교감을 하는 걸 대부분 말합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저는 어제 그 사건이 하느님 체험과 전혀 무관한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이웃 형제 속에서 발견을 하듯이 하느님의 손길도 그럼 이웃 형제자매님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를 떠나 여자분의 말씀이라 그런지 마치 어떤 대목에서는 엄마의 훈계 같은 느낌이 들어 어제 오늘은 하느님과 성모님께서 공동 연출을 하셔서 만든 공동작품인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사실 어제 잘 땐 기진맥진했습니다. 이젠 생기를 회복한 느낌입니다. 저한텐 의미 있는 체험이었습니다.
이젠 인간적인 시각으로 돌아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자매님 나이는 어리지만 사람 혼쭐을 빼는 재주가 아주 탁월한 것 같습니다. 제가 그래서 좋은 의미로 자매님이 무섭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도 이야기이지만 더 중요한 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이라면 그 사건을 신앙의 눈으로 잘 이해하고 또 그게 성모님처럼 그 속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며 그 속에 하느님 뜻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지를 묵상하는 것도 자신의 신앙을 좀 더 고양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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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40 추가.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1)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끝까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그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신 것은, 그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예고 말씀들은, 바로 앞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3,19).” 이 말씀은, 원래는 유다의 배반에 연결되는 말씀이지만,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일이 나의 예고대로 진행되는 것을 보면,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도들이 그렇게 확신하게 된 것은 수난 때가 아니라 부활 후입니다. “내가 나임을”은, “내가 메시아임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은 모르고 당하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도 아니고, 메시아로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주는 일이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모든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셨다면, 나쁜 일들을 미리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막지 않으셨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전지전능’은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입니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간에.>
2)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일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여기서 “예수님을 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 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모른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안 믿는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일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부정한 일이고, 또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은 대단히 ‘큰 죄’가 되는데, 그 일을 ‘배반’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유다의 경우는,
예수님을 떠나서 적의 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배반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적의 편으로 넘어간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도 아닙니다.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정말로 본의 아니게 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일반적인 의미의 배반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3)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는 주님이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위해서, 또 우리보다 더 많이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를 도와주겠다.”보다 훨씬 더 강력한 약속입니다.>
누구든지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넘어졌지만, 금방 다시 일어섰습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일은, 베드로 사도 자신의 고백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큰데, 그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 자체가 그의 ‘통회’를 나타냅니다. 베드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마저도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나약한 우리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일이고, 큰 교훈이 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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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31. 성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2:30 추가.
요한 13,21ㄴ-33.36-38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히시기 전 날 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를 지목해서 비난하거나, 그가 당신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억지로 막지 않으십니다. 한 번 돌아선 마음은 스스로 되돌리지 않는 한 누가 억지로 바꿀 수 있는게 아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듯, 예수님도 우리가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으로 당신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당신을 배신할 거라는 사실만 언급하실 뿐,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유다에게 마지막으로 마음을 바꾸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즉 회개할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고집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잘못된 길을 고집합니다.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진리의 빛, 구원의 빛을 향해 나아가지 않고, 캄캄한 죄의 어둠 속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유다의 모습에 가뜩이나 산란했던 마음이 더 착잡해지려는 순간, 이번에는 당신이 ‘수제자’로 뽑으신 베드로에게서 미성숙한 모습이 보입니다. 주님 앞에 놓인 고통과 시련이 얼마나 큰 지 가늠조차 못하면서, 그분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괴로운 죽음을 맞으실 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약한 존재인지를 망각한 채로,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겁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게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그런 ‘영적 교만’이지요.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을 잘 모르기에 자기 앞에 놓인 고통과 시련을 온전히 마주할 준비, 그렇게 마주하여 극복할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세상의 거센 풍랑에 휩쓸리면 주님을 굳게 믿고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깊은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되지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영적이고 육적인 몸의 상태가 따라주지 못하기에, 의도치 않게 주님을 배신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그분 뒤를 충실히 따를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생략되었는데, 예수님은 그 비결로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단순히 ‘사랑한다’라는 듣기 좋은 말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미워하거나 다투지 말고 서로 사랑하라는 ‘뻔한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조건 없이, 제한 없이, 차별 없이, 끝까지, 최선을 다해, 후회가 남지 않도록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게” 되기에, 내가 이웃 형제 안에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 되기에, 그분을 배신할 일도, 그분의 사랑에서 떨어져 나올 일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 큰 사랑을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 형제를 힘껏 사랑해야겠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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