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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자카 다이스케(松坂大輔). 1980년 9월13일 도쿄도에서 태어나 요코하마고의 에이스였던
그는 98년 봄 고시엔(센바츠)과 여름 고시엔(선수권) 및 우리나라의 전국체전에 해당되는 국민체육대회 등 3개 대회를 모두 석권하며 초고교급 투수로 각광받았다. 일본 고교야구 사상 전국대회 3관왕은 마쓰자카의 요코하마고가 처음이었고 당시 요코하마고는 44연승을 기록하였다. 특히 여름 고시엔대회 결승(대 京都成章전)서는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79Cm 75Kg인 마쓰자카의 주무기는 강속구와 고속 슬라이더. 우투우타인 그는 고교 1학년때 구속이 136~140Km, 2학년때는 145~148Km, 3학년때는 150~153Km를 기록했고, 프로에 들어와선 평균 150Km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서 열린 아시아 AAA 야구선수권대회 한국과의 2차 예선 경기서 5회부터 등판해 퍼펙트로 마무리하며 대회 MVP와 베스트 우완투수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한국팀 투수는 백차승-권오준-마일영-송승준 등.
우여곡절 끝에 계약금 1억엔을 받고 세이부 라이언즈에 둥지를 튼 그는 '과연 프로 첫해부터 통할까?'란 주위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승승장구하고 있다. '타격의 천재' 이치로(오릭스 블루웨이브)와 처음 맞대결해선 KO승을 거두기도 했다. 8월14일 현재 11승에 방어율 1위. 그가 등판하는 경기엔 관중들이 빼곡히 들어찬다. 올시즌 일본 프로야구는 소위 '마쓰자카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리그 신인왕은 따논 당상이고, 다승과 방어율, 승율 타이틀도 노리고 있는 그는 통산 최단기간 200승 이상을 거둘 기대주로 꼽히고 있다. <1999. 8.14> 내용
1. 개요
신장 : 182cm
체중 : 85kg
투타 : 우투우타
출신지 : 도쿄
혈액형 : O형
입단경위 : 요코하마고 - 세이부
프로입단년도・드래프트순위 : 1998년(1위)
영어표기 : MATSUZAKA
추정연봉 : 3억3000만엔(2006년)
수비위치 : 투수
등번호 : 18 (소년시절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리타선수를 동경했기 때문이라고 함)
2. 내력・인물
도쿄 에도가와구의 리틀리그 출신. 고교시절은, [게으른 마쯔]라고 불릴만큼 연습을 싫어했었지만 2년차때 여름 고시엔리그 예선에서의 대 요코하마 상업고교전에서 자신의 폭투에 의한 사요나라패 이후 분발. 최고 151km 의 호구속과 날카로운 슬라이더, 커브, 체인지업을 무기로 초고교급의 투수로서 괴물 이라고 칭해진다. 마지막 여름 1998년의 전국고등학교 야구선수권 대회에서는, 준준결승에서 가미시게 사토시선수가 속한 PL학원을 상대로 연장17회라고 하는 장시간의 시합에서 250구를 던져 완투승리. 결승전에서는 59년만에 사상2번째 노히트 노런. 압도적인 활약으로 봄,여름 연패를 달성했다.
1998년도 드래프트 회의에서는, 지명순위1위로 세이부, 요코하마, 니혼햄의 3구단이 경합을 벌인 끝에, 세이부가 교섭권을 획득. 당초 드래프트직후의 회견에서는 “제가 가고싶은 구단은 요코하마입니다” 라고 말했지만 세이부에 입단했다. 덧붙여, 후에 잡지등에서 그가 처한 입장상 겉치레말일 가능성이 있고 진의가 확실치는 않지만, 처음부터 세이부를 지망했고 지명직후부터 입단의지를 굳히고 있었다고 말했다.
첫선발전이었던 1999년 4월7일 대 니혼햄전에서는 155km의 직구를 보여주고, 8회2실점의 호투로 첫승을 기록. 확실히 강렬한 데뷔전을 장식했다. 그 시합에서의 片岡篤史(도저히 해석불능-.-)의 호쾌한 헛스윙은 프로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 괴물몸짓을 보여주는 영상자료로서 지금도 자주 방송된다. 그 다음시합인 오릭스전에서는 이미 프로야구계에 있어서 고고한 존재였던 이치로와의 첫 대결이 화제가 됐었지만, 이치로를 4타석3삼진1볼넷 으로 거의 완벽하게 제압했다. 시합후의 히어로인터뷰에서 “저 자신이 확실히 변했습니다” 라고 한 말은 프로동기로서 같이 강렬한 데뷔를 장식했던 요미우리의 우에하라의 “잡초근성” 과 함께 그해의 프로야구를 상징하는 유행어가 됐다. 결국 프로1년차부터 16승을 올려, 최다승에 빛나는 등 그 실력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입단당초의 약점이었던 荒れ玉(죄송-_-;)를 개선. ツーシーム(-,.-), 컷트볼, 포크볼등도 마스터, 더욱더 레벨높은 투수로 변모.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타이틀에 빛나는등 굉장한 업적을 남기고 있는 일본을 대표하는 선발투수이다. 현대 야구에서는 그 수가 적은 완투형 선발투수이기 때문인지 결승타를 맞고 패전투수가 되는경우도 자주 있다. 시드니올림픽과 아테나올림픽에서 일본대표로 참가. 2006년3월에 개최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도 일본대표로서 출전. 참가 투수 중 최다인 3승을 올려, 세계1위에 지대하게 공헌. 대회의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 이렇듯이 공공연히 일본의 에이스라고 불리고 있다.
덧붙여서 말하면, 고교시절에는 한신 고시엔구장에서 15연승, 피홈런0이라고 하는 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2005년5월18일의 교류전(대한신)에서 프로야구선수로서 첫 등판 했을 당시, 한신의 桧山進次郎선수에게 선제투런을 맞고, 시합도 3-2로 패배. 고시엔에서의 피홈런0이라고 하는 기록은 끊어지고, 연승기록도 15에서 멈춰버렸다.
배팅도 능숙한 것으로 유명하다. 고교시절에는 4번을 맞고 있었던 시기도 있으며, 고교통산14홈런을 기록. 타격에 고전하고 있는 야수에게 타격 어드바이스를 해주는 일도 있다고 한다. 퍼시픽 리그에 소속된 투수는 타격연습을 거의 하지 않지만 마쯔자카는 트레이닝 메뉴에에 타격연습을 넣고 있다고 한다. 고교시절의 은사인 요코하마 고교의 와타나베 감독은 마쯔자카가 타자로서 활약했다면 요미우리의 다카하시를 능가할 타자가 됐을것 이라고 말했다. 2000년8월7일 오릭스전에서는 9회2사만루 상황에서 타자로서 등장. 쿠리야마 사토시로부터 파울로 끈질기게 늘어진 뒤, 7구째를 센터앞 히트로 연결, 2타점을 올렸다.
지명타자제 시행이후 투수안타는 4명째이다. 또, 2002년 일본시리즈에서는 7번을 맡았다. 2006년6월9일 교류전(대한신)에서는 다윈 쿠비안의 조금 높은 듯한 공을 받아쳐 홈런. 지명타자제 시행후 퍼시픽리그의 투수로서는 4명째의 기록이 됐다. 본인은 “1,2,3에서 쳤더니 맞았다” 라고 말했지만 한편에서는 “교류전에서의 첫안타는 홈런을 치고 싶었다” 라고도 말한걸로 봐선 홈런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006년6월16일 교류전(대요코하마)에서, 에가와 스구루(193시합만에 100승)를 재끼고 드래프트제도 도입 후 가장 빠른 191시합만의 100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2006년8월25에 우에하라가 같은 191시합만에 대한신전에 100승을 달성하여, 마쯔자카의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다.
2006년10월7일 퍼시픽리그 플레이오프 제1스테이지 첫경기에 선발. 심한 인코너 공략으로 4개의 데드볼을 내주었지만 소프트뱅크의 에이스 사이토 카즈미와의 치열한 투수전을 제압하고 완봉을 기록. 4개의 데드볼을 내주고도 완봉을 한것은 프로야구사상 최초라고 한다. 팀은 그 후 2연패로 제1스테이지에서 탈락. 그 시합 종료 후, 라이트스탠드에 남아있던 팬 앞에서 9명의 선수들이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마쯔자카는 늦어서 마지막에 혼자서 인사를 했다. [메이져리그로 이적. 팀을 떠나다] 라는 의미의 인사로 여겨졌지만 마쯔자카 자신은 “유니폼을 갈아입고 있었기 때문에 늦었다” 라고 말했다.
메이져리그를 향한 의지가 강해서, 2005년 시즌 종료 후에 포스팅시스템을 통한 이적을 희망했었지만 구단은 반대. 한 때, “단념했다” 라는 정보도 흘렀지만, 마쯔자카 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내년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일에 관하여는 작년 오프시즌때, 당시의 구단주 쓰쓰미 요시아키와의 사이에서 약속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다이스케의 저주
마쯔자카는 아마츄어시절 고교야구 연패등 빛나는 전적에 비해, 프로입단 후부터 우승과 올림픽 메달등 큰무대에서 자주 무너져, 우승에 인연이 없는 투수였다. 게다가 마쯔자카가 부상으로 빠져있던 2002년에 세이부가 우승, 팬들 사이에서는 [다이스케의 저주] 등으로 불리어졌다. (소프트뱅크의 마쯔나카 와 함께 [역(逆)시즌 사나이] 라고 불리웠다고 하기도..) 하지만 2004년에는 올림픽 준결승에서 호투하고도 타선빈약으로 패배, 리그 페넌트레이스에서는 순조롭게 성공을 거듭, 특히 약하다고 평가된 포스트시즌에서 플레이오프 다이에전(무슨팀인지 모르겠네요)과의 최종전에서 호투해 세이부를 리그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직후의 쥬니치와의 일본시리즈에서는 제2시합에 선발등판해 6점의 타선도움을 받았지만 7회에 집중타를 맞고 KO, 역전패. “또다시 저주인가..” 라고 생각 했지만, 승부수를 던진 제6차전에서 선발등판, 초반리드를 빼앗기는 등 고전했지만, 결국 2점으로 막고 본인의 첫 일본시리즈 승리투수가 된다. 게다가 다음날 제7차전에서도 릴리프 등판하여, 우승에 공헌. WBC에서도 일본 우승에 최고의 투구로서 공헌하여 MVP 획득. 큰무대 에서 진다는 저주를 완전히 불식시켰다.
::)에이스 니시구찌
세이부에는 마쯔자카 입단 전부터 퍼시픽리그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던 니시구찌가 있었다. 마쯔자카는 프로에서도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지만 [다이스케의 저주]라고 불리어지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3년 연속 최다승으로 빛났음에도 불구, 세이부의 에이스는 니시구찌라고 하는 소리가 뿌리깊었다. 니시구찌 본인이 원래 그런 일에 구애 받는 성격이 아니라고 하고, 마쯔자카가 저주를 불식시킨 일도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그러한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게 되었다. 또 [일본의 에이스 마쯔자카, 세이부의 에이스 니시구찌] 라고 하는 매스컴의 마쯔자카를 향한 야단스러운 취급에 대한 비아냥거리는 말도 일부에 있다.
::)기대를 담은 사와무라상..
마쯔자카는 2001년에 사와무라상을 획득했지만 그 해에 리그 최악의 15패를 했다(승률은 5할로 이것은 사와무라상 사상 최악). 또 방어율도 3.60으로 사와무라상을 획득했던 투수의 방어율로서는 1978년 마쯔오카의 3.75에 이어 나쁘다. 다른 항목은 모두 기준을 만족시키고 있었고, 이 밖에 다른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수상했지만 선별위원은 방어율과 승률의 나쁨에 관해서 쓴말을 남겼다. “다음번의 기대를 담은 선출이다. 아무 불만 없는 성적으로 다시한번 선출되는것을 기대한다”
그 뒤, 마쯔자카는 2006년에 투구횟수 이외의 모든 항목에서 기준을 만족시키는 불만 없는 성적을 남겼지만, 이 해의 사이토 카즈미(후우오카 소프트뱅크)가 대부분의 숫자에서 근소하게 앞섰기 때문에 마쯔자카의 수상은 되지 않았다.
6. WBC에서의 에피소드
WBC에서 MVP가 된 마쯔자카는 MVP 트로피를 받은 직후 1998년 여름의 전국 고시엔 PL학원전에서의 상대투수였던 카미시게 현 일본TV아나운서와의 인터뷰에서 “MVP가 됐습니다만.. 이것(트로피의 원반모양 장식) 벌써 떨어져버렸네요. 이 부분이 미국스러운데 말이에요. 나중에 제가 아론아루화 로 붙여서 고칠래요”라고 농담을 했다. 그 후, 판매처인 동아합성으로부터 마쯔자카에게 아론아루화가 보내졌다. (아론아루화가 뭔지는 잘 모르겠네요)
또, 우승을 축하하는 샴페인축제에서도 카미시게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고, 마쯔자카는 “(샴페인축제중인데) 왜 정장을 입고 있는거야?” 라고 카미시게를 추궁했다. “기합 들어가있네, 정장을 입고말이야.. ” 라고 말하는 마쯔자카에 대해서 카미시게는 “마쯔자카씨의 오늘 피칭도 기합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지만, 여기서 마쯔자카는 일본귀국후 개막하는 퍼시픽리그의 페넌트레이스를 완전히 잊고 있었는지, “뭐 그거야..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올해 마지막이니까..” 라고 무심코 말해버렸다. 카미시게가 “올해마지막이 아니에요” 라고 지적했더니, “그정도 気持ちを入れてたってことです(해석못하겠어요 ㅠ_ㅠ). 돌아가서도 확실히 해낼겁니다.” 라고 자기지원. 마쯔자카와 친한 카미시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인터뷰였다. 또한 요미우리의 우에하라가 마쯔자카의 안면에 샴페인을 부었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2006/ 12/15
첫댓글 마일영.. 간만에 들어보네요.. 현대에서 왼만큼 이름좀날린것같더니 요즘은 뭐하는지 궁금하네요..
마일영 군복무 마치고 올해 복귀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