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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 기후에 보험 생태계도 진화… 印-日-美 ‘폭염 보험’ 출시
[토요기획] ‘지구 열대화’ 시대, 폭염이 바꾼 글로벌 보험 시장
인도서 ‘파라메트릭 보험’ 주목
폭염으로 일용직 근로 불가능할 땐
기온 등 일정 조건 맞으면 보상
극심한 폭염이 지구촌을 달구고 있다. 올 7월 전 세계 평균 기온은 기상 관측 이래 최고인 섭씨 16.95도를 나타냈다. 1990∼2020년 7월 평균기온보다 0.72도 높다. ‘지구 온난화(Global Warming)’에서 더 나아간 ‘지구 열대화(Global Boiling)’라는 표현까지 등장한 이유다. 유엔이 지난해 10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기온이 섭씨 2도 높아질 경우 폭염 발생률은 14배 높아진다.
폭염 빈도가 급증해 만성화되면 경제적 손실로 이어진다. 글로벌 컨설팅 업체 맥킨지는 폭염 등 기후위기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2020년 글로벌 국내총생산(GDP) 총합의 2%였지만 2050년에는 4% 이상으로 치솟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폭염 등 기후변화에 가장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는 건 글로벌 보험업계다.
● 손해 따지지 않는 ‘파라메트릭 보험’ 각광
최근 글로벌 보험업계에서 폭염 등 기후변화를 계기로 주목 받고 있는 것은 ‘파라메트릭(Parametric) 보험’이다. 개별 사고에 대한 평가 없이 특정 지수에 도달하면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주는 상품이다. 폭염의 경우 가입자가 실제로 당한 피해 정도와 관계없이 기온 등 객관적 지표가 계약 당시 조건을 충족하면 보험금을 지급한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개별 가입자에 대한 손해 사정 절차가 별도로 필요 없다 보니 빠르게 손해 보상이 이뤄져 대규모 자연재해에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개발도상국에선 폭염 피해가 큰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파라메트릭 보험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인도에서 올 5월 폭염으로 일용직 노동을 할 수 없는 저소득층 여성 근로자에게 판매를 시작한 상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자선단체 록펠러재단 등이 출시한 이 상품은 보험금 지불 기준을 충족하는 기온(평가 알고리즘에 따라 변동)이 되면 보험 가입자의 계좌에 3달러(약 3950원)가 자동으로 지급된다. 가입 대상은 염전이나 폐기물 재활용업, 노점상, 농부 등 다양한 저소득층 여성의 직종을 아우른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인도 도시권의 건축 현장에서 일하는 여성 근로자의 하루 일당은 4달러(약 5270원) 정도. 보험 가입자 입장에선 일당의 상당 부분을 보전받을 수 있는 셈이다. 보험 가입자가 내는 금액은 한 달에 10달러(약 1만3200원)가량이다.
인도에선 봄철인 지난해 3월 평균 최고기온이 섭씨 33.1도로 1901년 기상 관측 이후 121년 만에 가장 높았다. 수도 뉴델리의 일부 지역에선 지난해 5월 섭씨 49.2도가 기록될 정도였다.
세계은행(WB)은 지난해 11월 보고서에서 “인도 일부 지역은 인간의 생존 한계선을 넘어서는 기후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발도상국보다 기후 변화에 대한 책임이 큰 선진국들이 파라메트릭 보험의 재원 마련에 동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비영리단체들이 선진국에 파라메트릭 보험의 재정 지원을 촉구했다.
선진국에서도 농업 피해를 보상하기 위한 파라메트릭 보험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 영국의 보험사 엔에프유뮤추얼은 올해 5월 낙농업자를 대상으로 폭염 피해를 보상해주는 보험 상품을 내놨다. 스위스의 재보험사인 스위스리에서도 인공위성을 사용해 토양의 수분 정도를 측정하고, 가뭄 위험을 보장하는 파라메트릭 보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리서치앤드마켓은 파라메트릭 보험 시장이 연평균 성장률 9.6%로 2028년까지 214억 달러(약 28조700억 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 일본선 ‘열사병 보험’ 출시 봇물
글로벌 시장에선 가입자의 피해 정도를 판별해 보상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폭염 보험도 줄줄이 나오고 있다.
보험연구원이 지난달 펴낸 ‘글로벌 폭염 보험 동향’에 따르면 한국에 비해 여름철 기온이 높은 일본에서 이러한 보험들이 잇달아 출시됐다. 출발은 지난해 4월 일본의 보험회사인 스미토모생명이었다. 이 회사는 전 세계 보험업계 최초로 열사병 특화 보험을 출시했다. 이 상품의 보험료는 하루 100엔(약 915원). 지난해 일본에선 6월 날씨로는 처음으로 섭씨 40도가 넘는 폭염이 발생하는 등 ‘극한 기후’가 발생하자 같은 달 29일부터 3일 연속 하루 6000건 이상의 상품이 팔리는 등 인기를 끌었다.
그러자 석 달 뒤 경쟁사인 손포저팬보험도 열사병으로 사망하거나 입원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상해보험 특약 가입 조건을 기존 23세 미만에서 전 연령대로 확대하며 맞불을 놨다. 이러한 상품의 주된 고객은 온열질환에 취약한 노년층이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열사병 특화 보험들은 현재 일본 인구의 30%에 육박하는 65세 이상의 연령층이 주로 구입했다”고 전했다.
폭염이 기승인 여름이 휴가철이다 보니 여행자보험 시장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지난달 3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본사를 둔 여행보험사 센서블웨더는 여행지에서 폭염이 발생하면 보험금을 주는 상품의 출시를 예고했다. 닉 캐버노 센서블웨더 최고경영자(CEO)는 영국 아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섭씨 35도 이상이면 총여행비의 50%를 주고, 섭씨 40도 이상이면 100%를 보상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회사는 이미 ‘폭우 보험’ 상품을 판매하며 기온과 관련된 보험 상품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고객이 총여행비의 10%를 보험료를 내고, 오전 8시에서 오후 8시 사이에 2시간 이상 비가 오면 당일 여행비를 보험금으로 지급해 주는 방식이다.
국내에서도 사람의 폭염 피해에 특화된 상품이 올 들어 출시됐다. 삼성화재가 지난달 24일 출시한 ‘계절맞춤 미니보험’은 열사병 등의 진단을 받은 경우에 보험금을 지급한다. 다만 국내 보험시장에선 아직 폭염 피해를 보상해주는 상당수의 상품이 농작물 등에 집중돼 있다. 현재 NH농협손보, KB손보, DB손보, 한화손보, 현대해상, 삼성화재 등 6개 손해보험사가 가축 재해보험에 폭염재해보장 추가 특약을 넣은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 보험업계 “기상이변, 위험도 예측 어려워”
보험사들은 발 빠르게 대응한 상품을 내놓고 있지만 고민도 크다. 폭염 등 자연재해에 대한 정밀한 예측이 어렵고, 보험 가입자가 겪은 일에 폭염뿐만 아니라 다른 변수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손해율(보험료 수입 대비 보험금 지급 비율)이 치솟을 수 있다. 일본의 주요 보험회사 관계자도 아사히신문에 “열사병 특화 보험은 기상 상황과 함께 다른 요인들이 병의 확산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보험사 입장에선 위험도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했다.
미국에선 기후변화에 대처하지 못해 신규 보험 가입을 중단한 보험사가 등장했다. 올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최대 규모 보험회사 스테이트팜은 잇따른 산불 등을 이유로 주 전역의 주택보험에 대한 신규 손해보험 가입을 중단시켰다. 기온이 오르며 숲속의 습도가 낮아져 대규모 산불이 자주 발생하고, 주택 피해로 연결되자 주택보험 가입을 막은 것이다. 이미 올스테이트, AIG, 처브 등 캘리포니아주 소재 보험사들도 산불로 인한 보험 손실이 커지자 주택보험의 신규 계약 체결을 중단한 상태다.
폭염은 아니지만 이미 자연재해로 보험회사들이 ‘줄도산’한 사례도 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선 2020∼2021년 4차례에 걸친 허리케인으로 인해 230억 달러(약 30조2200억 원)의 보험 손실이 발생해 12개 보험회사가 파산했다.
폭염 등 자연재해가 보험료 인상을 비롯해 물가 상승을 부채질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에 따르면 전 세계적인 기후 리스크 심화로 재보험회사의 약 40%가 2020년 이후 보험료율을 연평균 7.5%가량 인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도 이달 초 “기상 이변이 보험사들로 하여금 주택 소유자에 대한 (대출) 금리를 인상하게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 과학 기술 발전이 이러한 문제점을 상당 부분 해결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장윤미 보험연구원 연구원은 “파라메트릭 보험의 경우 정보통신기술(ICT)이나 위성, 드론 등의 발달로 위험도 측정에 관한 지표 개발이 쉬워지고 있다”고 했다.
황성호 기자
전 세계 덮친 ‘히트플레이션’… 물가-성장률에 악영향 우려
[토요기획] ‘지구 열대화’ 시대, 폭염이 바꾼 글로벌 보험 시장
경제 위험으로 떠오른 폭염
극한 기후에 식량 부족 등 위험
‘폭염이 성장 억제’ 전망 잇따라
극한 폭염이 글로벌 경제 전반에 구조적인 위험 요인이 되고 있다. 뜨겁게 달아오른 지구가 식품 물가를 끌어올리는 ‘히트플레이션’(열+인플레이션) 현상이 본격화돼 결국 전 세계 성장률을 끌어내릴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폭염으로 인한 만성적인 신체 위험이 2100년까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을 최대 17.6% 위축시킬 수 있다고 전망했다. 폭염이 글로벌 경제의 성장을 가로막는 중대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저스틴 맨킨 미국 다트머스대 지리학과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5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게재한 논문에서 기후변화와 슈퍼엘니뇨가 결합한 폭염의 영향으로 2023∼2029년 최소 3조 달러(약 3954조 원) 규모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황유선 국제금융센터 책임연구원은 “글로벌 폭염 현상은 물류 및 생산 차질, 전력 및 식량 부족 위험을 더욱 확대시킨다”며 “경제 성장에 추가적인 하방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한국도 폭염과 관련된 위험에서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기상청에 따르면 9일 기준 올해 폭염일수(하루 최고기온이 33도 이상인 날)는 15일로 30년 평균(8.8일)을 훌쩍 넘어섰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온열질환 환자 수도 급증하는 추세다. 질병관리청이 응급실 표본조사를 시작한 5월 20일부터 8월 8일까지 발생한 온열질환 환자 수는 총 2085명이었다. 관련 표본조사를 시작한 2011년 이후 세 번째로 많은 수치다. 환자 중에서 사망한 사람은 27명으로 2018년(48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았다.
이렇다 보니 경제 상황이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폭염이 부정적인 변수가 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폭염으로 인해 전반적인 물가가 상승하고, 이것이 소비를 위축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계절적 요인이나 일시적 충격에 따른 물가 변동분을 제외해 산출하는 ‘근원물가’는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에 따르면 올해 1∼7월 누계 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지수(근원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4.5% 상승했다. 이는 외환위기였던 1998년 1∼7월(6.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1∼7월(4.2%)과 비교해도 높았다. 통계청 관계자는 “물가 상승 기여도 측면에서 보면 외식 물가를 필두로 개인 서비스 분야의 기여도가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외식 물가가 높아진 건 채소를 필두로 한 원재료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이달 첫째 주 배추 10kg 도매 가격은 1만6171원으로 한 달 전(5649원)보다 약 186% 상승했다. 무 20kg 가격도 2만997원으로 지난달 초(1만30원)에 비해 109%가량 높아졌다. 장마철 직후 이어진 전례 없는 폭염으로 농산물 가격이 치솟은 것이다.
문제는 하반기로 예정된 공공요금 인상, 폭염 및 태풍으로 인한 작황 부진, 유가 상승 압박 등으로 연말에도 물가 상승 가능성이 높다는 데 있다. 한국은행도 6월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근원물가의 상승 위험이 적지 않은 상황이며 목표 수준(2.0%)을 웃도는 오름세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폭염이 계속되면 소비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소비가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으면 정부가 목표로 하는 성장률(1.4%) 달성도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강우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