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아침에 장대비 내리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누가 창문에다 도토리 수천 알을 쏟아붓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가 들렸거든요.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침대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나갔습니다. 우려했던 것처럼 난 이파리가 거센 빗줄기에 맞아 휘청대고 있었지요. 마룻바닥에 난을 내려놓으니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닦아내며,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고맙다는 인사 같은 건 없지요. 그냥 나 혼자 저를 어여삐 여기며 꿈결인가, 하며 바라보았어요.
장마예요. 길고 지루한.
어릴 땐 습하고 눅눅한 기운 때문에 장마가 싫었는데 요새는 퍽 좋아합니다. 장마 때 혼자 집에 가만히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은둔자가 된 것 같이 느껴지거든요.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비로소 숨을 만한 곳을 겨우 찾은 은둔자의 긴장 섞인 안도감, 이어 느껴지는 조금의 지루함과 피로.
이런 기분 재미있잖아요?
새우처럼 등을 말고 누워 당신을 생각합니다. 사실, 편지를 시작하기가 힘들었어요. 예전의 당신과 내 모습을 회상해보다 왠지 치아 사이로 스산한 바람이 들어오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기도 했어요.
꼬박 보름을 망설이다 이렇게 펜을 들었네요. 아마도 어리석고 철없던 내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은 까닭이겠지요. 그때 나는 어렸고, 오래 죽어 있었고, 가끔 살아나면 소란스러웠지요. 당신은 나를 오래 보았죠. 물 밖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파닥이며 요동치던 나를 알아봤지요. 하필.
하필이라고 말을 하고 보니 참 좋네요. 어찌할 수 없음, 속절없음이 사랑의 속성일 테니까. 사랑을 표현 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있을까 싶네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어찌할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할게요.
바보 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요. 850년 전 개암나무 그늘 아래서 낮잠을 자다 개암 한 알이 이마에 톡 떨어져 그만 잠에서 깨어났는데, 그때 알았다고요. 먼 먼 훗날, 내가 당신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오래 어두워질거라는 사실을요.
실제로 당신을 만나고 퍽 좋았던 나는 어찌할 도리 없어, 흙 속에 두 손을 깊이 넣었던 것 같아요. 열 개의 손톱에 흙이 촘촘히 박히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흙냄새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고요. 흙은 손을 부드럽게 덮어주었고, 그게 내 사랑의 뿌리가 되었지요. 나는 주저앉은 채로 자랐고, 기어코 초록이 되었고, 꽃도 피웠지요.
그래요. 나는 사랑이 자신의 몸을 통째로 써서 나무를 심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토록 오랫동안 당신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도 나무의 견고한 부동성 때문이겠지요. 그건 '깊은 일'이었던 것 같아요. 제대로 설명할 순 없지만요. 헤어지고 나서 혼자 방 안을 둘러보며 당신이 앉았던 자리를 손바닥으로 더듬어보았지요.
내 손, 잘린 사랑의 뿌리로 자리를 더듬어보며 바랐던 것 같아요. 당신이 내내 생생하기를, 그래서 어여쁘기를, 그 시절 혼자 괴로워하다 참기 힘들어지면, 이런 제 심경을 친구에게 메일로 전한 적도 있었는데요. 그 때 메일을 보니 나는 이렇게 썼더군요.
그 사람이 너무 빨리 늙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만진 몸 구석구석이
너무 빨리 사그라지지 않고
내내 건강하기를 바라.
나와 별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내내 생생하게 나쁘기를 바라.
나는 그 사람 삶이
캄캄하고 축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아.
나는 지나치게 나이를 많이 먹지 못했다는
비밀을 하나 갖고 있지만,
사실은 굉장히 늙었단다.
사람들은 모르지, 내 백발을.
가끔 그 사람의 생각이 들려.
그리고 귀를 잊지.
사랑했었던 것 같아.
달리 할말은 없어.
/박연준, 하필이라는 말 中
첫댓글 너무좋다 고마워
고마워!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