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 토요일에 전주 국제발효식품엑스포에 다녀왔습니다. 여태까지 다녀본 우리나라 지역행사 중 가장 만족스럽고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회덕분기점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접어들어 달릴 때만해도 날씨가 조금 흐린 외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논산을 지나갈 무렵부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가을 비 치고는 좀 과하다고 생각되는 소나기였습니다. 그간 심한 가뭄을 생각하면 단비라고 해야겠지만 그런 단비가 하필이면 저희가 별러서 가족여행을 하는 시간에 내리는 것에 야속했습니다.
윈도우브러쉬를 급가동하고 라이트를 켜고는 서행운전을 했습니다. 다행이 전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갈 때에는 빗줄기가 많이 약해지더군요. 그래도 덕진공원 산책은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전주월드컵경기장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천막이 연이어 쳐있는 엑스포장을 둘러보았습니다. 국내관에서 지역 특산물을 관람하고, 간단히 시음도 했고, 해외관에 들러서 남미산(우루과이) 와인을 두 병 사고 치즈를 몇 조각 샀습니다. 사실은 저희 큰 딸과의 인연으로 해서 축제에 가게 된 것이랍니다. 우루과이 주재 한국기업체 사장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고 선물로 와인을 또 한 병 포장해 주셨습니다^^
다음에는 차를 달려서 한국전통문화전당으로 갔습니다. 마침 인근도로변에 승용차 한 대 들어갈 자리가 막 비어져 있더군요. 축제기간이라서인지 경찰관이나 운영요원들이 도로변 주차를 묵인해 주셔서 고마웠습니다(차만 주차하고 나도 외지 구경에서 이미 절반은 성공한 셈이지요^^)
광장 두 곳에 의자와 무대가 꾸려져 있는데 진행요원들이 그곳에서 오후 두시까지 공연을 하고나서 비빔밥을 나누어줄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아내와 막내 딸이 거기서 공연을 보고 기다리다 비빔밥을 얻어먹고 다른 곳으로 출발하자고 했지만 제가 완강하게 우겼습니다. '비빔밥을 제대로 먹으려면 시식이 아니라 정식으로 만드는 전통 비빔밥집에 가야 한다'는 이유를 댔습니다^^
제가 연잎과 연근으로 만든 사찰음식만 간단히 시식하고 자리를 옮기려고 한 데는 나름의 꿍꿍이속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주의 명물 동문거리에 있다는 헌책방에 빨리 가고 싶은 조바심으로 해서였습니다.
헌책방! 생각만해도 마음이 들뜨고 설레어지는 곳입니다. 그곳에만 가면 어린시절로 돌아갈 수도 있고, 꿈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지요... 누렇게 바랜 책 빛깔과 퀘퀘한 냄새가 언제나 좋습니다.
아내와 막내에게 보고싶은 책은 얼마든지 사라며 통큰 체를 했지만 둘은 시큰둥했습니다. 저보고 혼자서 책방을 실컷 돌아다니라고 핀잔을 주고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한옥마을 방향을 묻고는 그냥 가더군요...
그리 서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혼자서 마음껏 책을 볼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습니다.
한가네서점에 들어가서 여강출판사 발행 주역본의와 청계출판사 발행 동파역전을 찾았는데 집나간지 오래 된 모양이더군요. 온화하고 마음씨 좋아보이는 주인 아저씨가 다른 주역 책을 보여주셨는데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아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빈말이 아니고 다음에 전주에 가면 좋은 책을 찾으러 꼭 다시 들릴 예정입니다.
그 다음에 태양서림은 문이 닫혀있더군요. 불이 꺼져있는 것으로 볼 때 주인이 출타중인 듯 했습니다. 별러서 찾아왔는데 세 곳 중 한 곳을 둘러볼 수 없어서 무지 서운했습니다.
일신서림은 입구가 엤날 중국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도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가운데 격자 유리 비슷한 출입문이 반가웠습니다.
들어가보니 책방 안이 생각보다 넓더군요. 많은 책이 정리가 잘 된 채로 서가에 빽빽이 꽃혀있고 일부는 가지런히 쌓여있었습니다. 살 책이 없어 한 동안 서가를 둘러보고 그냥 나오는 데도 주인 내외분이 친절하시더군요. 헌책방의 특성상 사지않고 구경만 하고 가는 손님이 많은 것에 달관하신 듯 했습니다.
새책방인 홍지서림은 공간활용이나 조명 같은 것이 더 나아보였고, 손님도 더 많았지만 그래도 헌책방처럼 정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편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비로소 아내에게 전화를 하여 위치를 물었습니다. 책 실컷 샀느냐고 퉁명스런 말이 들려오더군요. 경기전 지하로 오라네요...
입장료는 삼천원이었는데 금방 너무 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소장품 관람이 아니더라도, 소중한 사람과의 고즈넉한 산책공간을 그처럼 넓게 가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왠만한 사찰이나 국립공원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시대 몇몇 왕들의 진영도 보고, 책들도 보고, 가마와 다른 전시품들도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에 사는 듯한 느낌이 되어 운치있는 자리를 찾아 사진도 몇 방 찍었습니다. 그 중에 인상적인 장면 하나... 한옥마을 하늘 저 편에 성당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대비, 옛과 이제의 대비가 이상하면서도 그런대로 조화가 되어보였습니다. 막내에게 그 건물 윗부분을 배경으로 꼭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산책을 하는 즐거움도 비길 바가 아니었습니다만 제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은 전주사고본 보관을 보여주는 건물에 들어가고 부터였습니다.
사서를 훼손되지 않게 보관하기 위해 궤짝 안에 책 위와 책 사이사이에 기름종이를 넣고,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기위해 약재를 넣었으며, 악귀를 쫒는 의미로 붉은 천으로 감싸고, 년중 상당한 기일 중 책에 일일이 바람을 씌어주는 일 등...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임진왜란 때 책을 지키기 위해 산속에서 소등에 양쪽으로 걸망을 씌워 이동시키는 그림이었습니다.
사서를 진귀한 보물처럼 대하는 선조들의 자세에서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온갖 지식 뿐만 아니라 신의 지혜까지도 녹아들어있는 책!
실록을 객관적으로 기술하여 후세에 전하기 위해 왕이라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초에 손을 댈 수 없도록 하였다는 것에 비추어 요즘의 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가 생각했습니다......
경기전 바깥을 오손도손 걷는 것도 아주 좋았습니다. 전통문화전당에서부터 비가 일찍 그친 것이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세 시가 다 되어가는데 그제서야 배가 고파왔습니다. 하루 전 고슴도치탁구클럽에 문의를 했을 때 '초원의 별'님께서 친절히 일러주신 식당으로 갔습니다. 가고보니 전주에서 몇 번 비빔밥을 먹었을 때 그 중 한 번 들렀던 곳이었습니다. 이층이었고요.
놋그릇에 담긴 비빔밥 세 그릇은 진수성찬이었습니다. 옜날의 임금과 중전도 이런 음식을 드시지 못했겠지요?
다시 전통문화전당으로 오니 공연과 요리경연, 시식은 이미 끝났고, 광장에서 이태리 요리사 두 분이 나와서 요리시범을 보여주고있었습니다. 카메라로 찍어서 정면의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었는데 요리를 참 쉽게도 잘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자 사회자가 영어로 질문하고 다시 우리 말로 통역을 해서 들려주는데 영어가 어찌나 유창한지 그것에도 반했습니다. 목소리 톤이 아주 쫗고 발음이 깔끔한 분이 외국어를 유창하게 하니 금상첨화였습니다.
얼마나 부럽던지요. 난 그런 분들을 볼 때 대학을 나왔다는 게 무척 챙피합니다. 영어를 제대로 못하는 것 보다 그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고 빈둥빈둥 놀았다는 게 챙피한 겁니다.
시내를 걷다보니 태평소 소리가 경쾌하게 들립니다. 노란색 옛 악대 차림의 일단과 그 뒤로 가마의 행렬, 이어지는 악대와 임금의 진영, 그 뒤로 두 대의 농악대...
예전에 태평소의 음역대가 그처럼 높은 것에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 의장대대회에서 태평소로 연주를 하는데 다른 나라의 악기들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웅장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아름다운 소리. 기립박수 받는 모습에 가슴이 울컥했었죠.
저는 국악대가 행진할 때는 향피리와 태평소가 주는 경쾌함과 들썩임이 늘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월드컵경기장 주변에 있는 체험관으로 와서 우리나라와 외국의 특산물을 잔뜩 샀습니다. 전주모주, 복분자주, 오미자주, 귀리, 사탕수수가루, 쌀국수, 와인, 치즈, 생강편, 추어탕과 소스... 그리고 아내가 혼자 산 것 등등...
깜깜한 밤, 돌아오는 길에 아내에게 핸들을 주고 여러가지 생각에 잠겼습니다.
책을 소중히 다뤄야 한다는 것, 무슨 책이든 제대로 우려내어 내 것으로 체득하려면 적어도 백 번은 읽어야 한다는 것, 지나쳐 갈 책과 끝까지 곁에 두고 읽을 책을 구별할 것...오래 전에 던져버린 책의 진가를 뒤늦게 알고 다시 구하려 하니 절판되어 찾기가 힘들더군요.
오늘 굳게 결심한 사항인데요... 해마다 전주에서 축제가 있다면 참석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많고많은 축제 중에서 단연 최고입니다.
하천변이나 외곽지 등 어느 일정 지역에서만 하는 축제가 아니고 도심 넓은 지역을 망라하여 축제를 하는 점, 행사내용이 유익하고 다양한 출품과 체험이 있는 점, 쏠쏠한 재미에 많은 볼거리와 먹거리...아내도 여지껏 외지에 가서 물품을 잔뜩 구입한 중에 돈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기는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좋은 점은 전주 사람들이 친절하다는 것입니다. 길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을 묻는 것에 대해서도 거절하거나 귀찮아 하지않고 성의껏 알려주셨습니다. 외지라는 어색함이 들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옛 고을 선비님들의 정성과 친절 덕분에 보람있는 나들이를 하고 왔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첫댓글 기행일지 잘 읽고 갑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다니 기쁩니다.
전주에 꽤 오래 살았는데 칭찬하는 글을 보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
전북에 대회가 많으니 참가하시고 전주도 들리시면 좋을것 같습니다. 저는 현재 남원에 있지만 전주는 제 2의 고향입니다.
언제나 정겹지요^^
혹 엑스포 홈피에 후기공모가 있다면 대상감입니다.
시원찮은 책 두 권보다 훨씬 좋은 글입니다.
이 가울의 독서를 마음자리님의 이 글로 대체하면 너무 게으르단 소리 듣겠지요?
즐겁게 즐기시다 가신거 같아서 제가 기분이 좋네요 ~ ㅎㅎ 자주자주 놀러오세요
가고 싶어지네요. 언제까지인가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