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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불상 이미지 살린 법당
9일 상도선원을 찾았다.
숭실대학교 뒤편, 고층 아파트촌 아래 산뜻한 외벽의 상도선원 서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은 밖에서 볼 땐 깔끔하고 차분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느낌이 확 달랐다.
“여기가 갤러리야, 아니면 선방이야?” 싶었다. 법당은 지하 1층이었다.
내려가는 긴 계단은 운치가 넘쳤다. 바닥에는 붉은 부빙가 나무가 깔려 있고,
벽에는 불상 작품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불상을 감상하며 내려가다보니
긴 계단이 오히려 짧고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법당 문을 열었다. “우와!” 하는 탄성이 절로 터졌다. 처음 보는 법당 풍경이었다. 편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웠다.
앞쪽에 놓인 석가모니불상은 흔하디 흔한 금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은색에 가까웠다. 어찌 보면 돌의 느낌, 어찌 보면 금속의 재질감을 내뿜고 있었다.
불상의 선과 맵시도 파격이었다. 섬세한 옷주름과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는 모던한 맵시가 감돌았다.
상도선원 석가모니부처님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
법당 천장에 걸린 등(燈)은 한지 작품을 방불케했다.
산뜻한 등에는 영어로 쓴 외국인 이름도 달려 있었다. 김혜정 종무실장은 “외국인 신자도 더러 있다.
선원이 모던한 스타일이라 무척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얼마 전에는 신학생 몇 명이 왔다갔다고 했다.
“건물 밖에서 우물쭈물하더라. 타종교 이해에 관한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왔다고 했다.
‘사찰하면 울긋불긋한 문양이 낯설고, 약간 무섭기도 했는데 여긴 참 편안하다’고 하더라.
나중에는 법당에 앉아서 20분간 참선 체험도 하고 갔다.”
석가모니불 뒤의 벽면에는 450여 개의 조그만 불상이 걸려 있다.
표정과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미산 스님은 “멀찍이 떨어져서 보면 패턴이고, 가까이 다가가서 들여다보면 부처님 형상”이라며
디자인적인 시선을 설명했다.
상도선원 관세음보살
상도선원 관세음보살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입니다..()
상도선원 관세음보살
상도선원 관세음보살
상도선원 법당 입구의 풍경
서옹 큰 스님의 禪畵를 도예로 표현한 작품(日日是 好日)
상도선원 법당 가는 길
상도선원 일일시호일 작품
#변화의 징검다리로
2007년 11월에 완공한 뒤 상도선원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요즘은 사진작가를 비롯해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까지 찾아올 정도다.
선원 방문객들은 “다시 오고 싶다” “주위 사람에게 소개해야겠다” “편하면서도 고요하고 경건하다” 는 인상기를 남긴다.
도심 사찰을 새로 짓는 스님들에겐 아예 견학 필수 코스가 됐다.
상도선원을 찾은 스님들은 “신선하다” “이런 창조적인 변화를 진작에 누군가가 해주길 바랬다”고 입을 모은다.
김 종무실장은 “상도선원을 구경하려는 스님이 사나흘에 한 분씩은 찾아온다.
특히 젊은 스님이 많다. 지금도 상도선원의 디자인을 벤치마킹해 불사 중인 사찰이 여럿 있다”고 자랑했다.
디자인과 스타일에 있어 상도선원은 ‘아낌없이 주는 사찰’이다. 찾아오는 이 누구에게나 모든 자료를 공개한다.
건물과 인테리어에 대한 사진도 맘껏 찍고, 아이디어도 얼마든지 가져가도록 한다.
미산 스님은 “우리나라의 불교적 전통미도 소중하다.
다만 도심 사찰의 건축문화를 바꾸는데 상도선원이 징검다리 구실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500년 후, 1000년 후의 불자들은 상도선원의 디자인을 통해 ‘2009년 한국 불교의 디자인’을 기억하지 싶었다.
상도선원 신중탱
상도선원 신중탱
상도선원 신중단 불단
돈황석불을 연구한 동덕여대 서용 교수의 작품
다음은 상도선원 미산스님과의 일문일답이다.
상도선원 중창불사 이후 2년여 만에 낙성법회를 가지셨는데 소감?
▶이곳은 약 50년간 도심 불교포교의 중추적 역할을 해오던 백운암이 있던 자리다.
백운암은 4천여 평이 넘는 제법 규모가 큰 사찰이었으나 아파트 개발로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었다.
백운암은 우리나라 역대 큰 스님들께서 주석으로 계셨던 의미 있는 사찰이라 꼭 보존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찰의 토지가 아파트 개발로 들어가 그대로 보존할 수가 없었고, 사찰 내에 있던 사가를 사들여
지하 1층, 지상 4층의 상도선원을 만들었다.
중창불사를 한 이후에도 신도수가 많지 않아 마음수양학교 교육을 하며
젊은 층의 신도들을 많이 확보 할 수 있었다.
그분들이 주축이 되어 기존의 신도들과 합심하여 낙성법회를 했다.
전통사찰이 아닌 현대식 건물로 중창 불사를 한 여유는 무엇인지?
▶문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신라시대 건축은 당시 사람들의 생각, 정서, 문화를 반영한 것이다.
전통사찰을 보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재 21세기를 살고 있다.
모든 문화가 현대식으로 바뀌고 있는데 옛 방식을 고집한다면 도태될 뿐이다.
이 시대 불교건축은 이시대의 정서, 생각, 이 시대 사람들의 느낌, 색감이 묻어 있어야 한다.
현대 건축은 효율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착안하여 불교사상을 넣으면 된다.
상도선원도 현대식 건물이지만, 불교사상이 다 들어가 있다. 정면에 유리가 108개다.
유리 중간과 양쪽은 삼존불을 의미하는 것이고, 불교교리의 숫자를 상징적으로 넣었다.
이곳은 제한적인 장소와 시간으로 인해 면밀하게 다 갖추진 못했지만
앞으로 불교건축은 창의력을 발휘하여 지어져야 한다.
우주 법괘를 다 현대 건축화하면 되지 않겠는가.
상도선원 구석구석 스님의 손길과 정성이 담긴 것으로 안다.
▶차를 마실 때 조화롭고 경건하며 고요함을 중시하는 불가의 정신을 살리며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법당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상도선원의 불상은 조각가 서창원씨, 불화는 화사 서용씨 작품이다.
백담사 만해 마을 한용운 동상 등을 제작한 서창원씨는 석굴암 본존불을 모델로
약간 날씬한 부처님을 첨단소재인 두랄루민으로 빚었다.
불상 뒤 광배(光背)를 비천상모양으로 만든 것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둔황에서 10여 년간 벽화를 연구한 서용씨는 둔황벽화 기법을 응용한 불화를 제작하였다.
불전함은 연꽃 모양으로 만들었고, 벽은 담양 대나무숯을 넣어 정화를 할 수 있도록 했다.
현대식 건물로 중창불사를 할 때 기존 신도들의 반응이 궁금한데?
▶처음에는 부정적이었다. 옛것에 친숙한 분들이라 법당이 지하로 들어가는 것을 반대했다.
부처님을 밟고 다니게 된다는 이유였는데, 부처님위에는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제가 이해를 시켰다.
쉽지는 않았으나 인내성을 가지고 꾸준하게 이해를 시켜드렸다.
사람과 사람들 관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잘 풀면 행복이 있고,
조화와 평화가 있다.
기존 신도들도 제가 이해를 시켜드리고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드리자 모두 좋아하셨다.
지금은 모두 자랑스러워하신다.
앞으로 상도 선원은 도심 불교 포교의 더 큰 축을 담당 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통사찰 느낌이 들지 않고 갤러리 느낌이 나서 그런지 젊은 층들이 많이 찾아오신다.
마음수행학교를 봄, 가을에 실시하고 있다. 봄은 직장인이 아닌 일반인을 대상으로 주간에 실시하고,
가을에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야간에 실시하고 있다.
30~50대의 직장인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이 많이 오시는데 이런 하드웨어를 위해 소프트웨어인
수행내용도 현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춰 현실적으로 한다.
불교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불교 수행은 삶이다.
삶을 떠난 불교 수행은 있을 수 없어 삶을 가지고 수행을 한다. 저는 불교의 가르침을
아주 쉽게 삶속에서 이해 할 수 있도록, 삶으로 돌아가면 활용을 할 수 있는 교육을 한다.
이곳 하드웨어에 맞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제가 12주간 강의하고 수련회를 통해 마지막에 수여식을 하는데,
중간정도 교육과정을 넘어가면 사람들의 얼굴이 변한다.
또한 일요일 가족법회는 부모와 청소년, 어린이 자녀가 공간을 나눠 각각 법회를 하고 있다.
서로의 눈높이에 맞게 해야 재미가 있질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신도 분들께 당부의 말씀이 있으시다면?
▶ 사찰은 공동체다. 공동체는 누구 한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분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저는 항상 열린 마음으로 창의적이고 참신한 의견이 있으면 받는다.
이 공간이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하고 이익을 줄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출처 : 상도선원카페
절을 바꿔 지어야 불교가 산다
원성
들어가는 말
절을 바꿔 지어야 불교가 산다
1. 절에 왜 갑니까?
2. 지켜져야 하는 승가의 룰
3. 타종교에서 배우는 해법
4.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물었더니
5. 이 시대에 필요한 절의 형식
6. 이런 공간이 있어야 이 시대의 절
7. 새로운 형식의 사찰, 제안 하나
8. 불교의 미래를 위한 불자건축가의 역할
1. 절에 왜 갑니까?
“절에 왜 갑니까?”하고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떤 대답이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습니까?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요.”라는 대답일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절을 떠올리는 건 ‘그곳에 가면 그냥 좋다’라고 하는 관념일 것 같습니다. 그 ‘절’이라는 건 아마도 산사일 것입니다. 산과 어우러지는 풍경 속의 절, 이건 아마 종교가 담긴 그릇으로의 절이기보다는 산의 풍경과 어울리는 분위기가 주는 느낌으로 와 닿는 친근감일 것입니다.
이미 산사 중 큰 절의 대부분은 수행자의 공간이기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관람의 대상으로 변한 지 오래입니다. 오히려 관람편의를 위한 쪽-작은 암자에 대형주차장이 설치되는 등으로 분위기가 바뀌어 가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을 따르는 사부대중을 위한 공간이기보다는 구경꺼리로 전락한 곳이 옛 절이라면 이제는 그야말로 수행처로서 이 시대에 어울리는 절은 어디에 있을까요?
“절에 왜 갑니까?”라는 질문에 이제는 이런 대답을 기다려야 합니다.
“공부하러 갑니다.”
불교가 새바람을 타고 있습니다. 사세寺勢를 키워가고 있는 절들의 공통점이 공부를 하는 절이라는 것입니다. 교양대학에서 시작하여 참선, 다도 등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절에 사람들이 몰려간다는 것입니다. 수백, 수천에서 심지어 수만 명의 신도를 수용하는 절들의 공통점입니다.
그 절들은 거의가 도시에 있습니다. 운치에 가까운 분위기를 필요로 해서 찾아가는 산사가 아니라 대도시 한복판에 배움의 열기만큼 사람들이 넘치는 차원이 다른 분위기가 있습니다. ‘무조건 믿어라, 엎드려라, 빌어라’고 하는 수동태 불교가 아니라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 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기 위해서’ 공부하는 능동태 불교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는 너무나 미미해서 불자들이 가까이에서 찾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있는 많은 절들은 아직 대웅전 하나 번듯하게 지어놓고 거기서 재나 올리는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회라는 형식을 갖춘 절에 몇 십 년을 다녀도 부처님이 어떤 분이며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설명하는 정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절에 가면 내용도 모르는 경을 따라 읽고 어떻게 삶에 적용하여 잘 살아야 하는 지도 모르는 법문을 듣습니다. 어려운 일 앞에서 사주팔자를 묻거나 부적이나 챙기려는 신도들도 적지 않습니다. 조상을 천도해야 집안이 평안하다면서 재를 올리는 것을 부추기거나 자식 잘 되라고 부처님께 매달리는 것이 신행의 전부로 알고 있는 분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기에 대웅전 하나 짓고 주지스님 방에 신도 카드나 잘 챙기고 공양간에 큰 방 하나면 족한 것이 이 시대의 불교 신행공간의 전부입니다. 아무리 큰 절이라도 이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제가 설계한 동네 한 가운데 지은 도시형 사찰의 공간입니다
인접한 뒷집과 건축물 사이에 작은 공간을 두고 탑을 모셨습니다
이 정원은 반대편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제대로 보입니다
공사비가 모자라니 인접대지의 담을 가리지도 못해서...
여기서보는 그림은 좀 시원찮지요?
신도 중에 누구라도 풀을 좀 뽑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출입문을 열면 작은 홀이 나오고
탑을 마주 하게 됩니다.
합장...^^
이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배우고 삶에 제대로 반영해가면서 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는데 그가 세상에 불교를 전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며 사회에 불법을 널리 전하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울 것입니다.
아직 이 정도라도 절을 차리기만 하면 신도들이 모여드니까 구태여 다른 형식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계속 그렇게 될까요? 만약 어떤 절에 젊은 신도들이 없다면 그 절은 곧 문을 닫아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인데 말입니다.
2. 지켜야 하는 승가의 룰
잘 지어진 대웅전 한 채, 잘 조성된 불상 한 구, 염불 잘 하는 부전스님 한 분만 있으면 절살림 꾸려가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불교교양대학마다 공부하기 위해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몰려들고 있으며 출가수행자가 아닌 재가수행자들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도시의 참선도량이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그 만만치 않은 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교양대학까지는 아니더라도 정기법회를 개설하고 어린이, 청소년, 청장년을 대상으로 불교를 가르치는 절만이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미 할머니를 주신도 층으로 하고 있는 사찰은 경영난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불전함과 49재, 천도재 올리는 것으로 주수입을 삼고 있다면 사찰경영은 아주 후진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공부하고 수행하는 재가 수행자들은 더 이상 그런 스님들을 외호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존경쟁을 넘어 생존을 위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 난국에 출가-수행을 통한 지도, 재가-경제활동을 통한 외호라는 승가의 불문율을 지키지 못하는 무늬만 스님에게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신도에게 무엇을 주어야 신도도 외호라는 의무를 기꺼이 다할 것입니다. 스님은 신도에게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업을 가르쳐 재라는 면죄부를 파는 거래는 이제 중단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정도를 나누어야 합니다. 무명을 밝혀 광명을 얻는 그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 룰만 지켜진다면 사찰의 경영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정도를 가르치는 스님이 있고 그것을 배우는 신도가 있는 사찰은 번창일로에 있습니다. 물질의 충족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불법을 통해 채우려고 하는 이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에서 최빈국最貧國중의 하나인 티베트의 불교가 최부국最富國인 미국의 정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불교야말로 현대인이 안고 있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대안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는 그 형식에 있어 시대적 상황에 제대로 적용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3. 타종교에서 배우는 해법
개신교의 경우 아무리 작은 교회일지라도 교육하는 공간을 꼭 만듭니다. 일주일이면 하루 이상 교회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새벽 예배를 비롯하여 휴일 예배는 꼭 참석할 뿐 아니라 어린이부터 청소년, 청년부, 장년부 등 연령 대에 맞는 모임을 만들어 예배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에서도 식사할 때 하는 기도부터 좋은 일, 나쁜 일을 막론하고 기도로서 감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 모든 근거는 성경에 있으며 성경의 구절대로 생각하고 실천하려합니다. 이러한 신행의 바탕은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 공부의 결과입니다.
매주 한번이상 두세 번을 참석하여 우리말로 된 성경책으로 아주 쉽게 공부를 하기에 일년이면 성경을 알게 될 것이고 십년내로 전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몇 십 년이 되면 그가 바로 목사와 다름없는 권한을 위임받는 장로가 됩니다.
출입구 문을 열면서 작은 홀을 만납니다
이 홀에서 이 작은 절의 분위기를 봅니다
칼...금강도입니다^^
탑을 보며 합장을 하고 예를 올린 뒤에 뒤로 돌아섭니다
그리고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납니다
위에서 떨어지는 찬란한 빛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이제는 부처님을 만납니다
찬란히 떨어지는 빛
그리고 부처님
깊고 높은 공간에서 떨어지는 빛입니다
우주 대광명
석가모니 부처님
그리고 좌로 돌면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납니다
2층은 요사채에 해당하는 신도들의 공간입니다
공양간, 입식의 주방과 식당이 있고 대중방이 두칸 있습니다
3층은 법당입니다
한층을 다 쓴다고해도 면적은 서른 평이 못됩니다
연면적이 100 평에 없는 것이 없습니다 ㅎㅎㅎ
계단을 밝히는 천창입니다
도시 사찰의 여건상 전면으로는 창을 거의 두지 않았지만
천창으로 떨어지는 빛이라 더 밝은 공간-별 세계입니다
3층에서 4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입니다
4층은 스님의 공간입니다
신도들과 구분해서 스님의 사생활이 보호되지요
3층에서 2층을 내려다 봅니다
깊고 높은 통로를 따라 세상을 잠시 잊을 수 있을지요
작은 절이지만 깊은 절입니다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신도들의 공간이 교회에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이제는 중규모 이상의 교회를 신축할 때는 신자는 물론이고 마을의 사람들까지 이용할 수 있는 탁아시설, 공부방, PC방 등의 편의시설을 제공하여 교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올 수 있도록 합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올 때부터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통해 사회화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지금은 무료급식을 통한 사회사업에 참여하는 등의 대 사회 활동에 너무나 적극적입니다. 그 모든 것이 시대에 맞는 방법이 아니면 외면당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일지라도 세상에 나올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독교를 10이라고 보고 불교를 100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기독교는 10 중에서 8이나 9를 세상에 맞추어 쓰고 있지만 불교는 100 중에서 4나 5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할 것입니다.
신도들이 머무를 수 있는 공간, 배우고 익히는 공간, 세상과 나누는 공간이 절에 있어야 합니다. 대웅전은 엄청 화려하게 장엄을 해 놓지만 여름이면 덥고 겨울이면 추우며 절하고 기도하는 데만 맞게 되어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침대에서 잠자고 식탁에서 밥을 먹으며 책상에서 공부합니다. 가부좌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법당에 다리를 틀고 앉는 그 자체가 고역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을 절로 불러들여도 생활습관에 맞지 않는 공간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가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간에 익숙해지지만 절에 왔을 때는 시작부터 끝까지 불편할 뿐입니다. 마음을 내어서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익숙해지는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한발 뒤진 포교방법입니다.
할머니 불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신행공간을 바꾸려하지 않는 것은 왜 입니까? 불상 주변만 잘 장엄하면 절하나 먹고 사는데 큰 지장 없다는 거드름을 아직 부리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그에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불교에는 거의 모든 것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제 바꾸어야 합니다. 절도 현대식으로 바꾸고 경전도 한글로 읽고 가르치며 세상이 불교에 바라는 모든 것을 제공해야 합니다.
그 답은 다른 종교에서 배우면 가능합니다. 교회는 오래 전에 뾰족탑의 형식을 버렸습니다. 절도 기와집의 형식을 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한글로 가르치고 편한 말로 세상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절에서도 경전부터 한글로 독송하고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어야 합니다.
찾아오는 이 막지 않고 가는 이 잡지 않는다는 거만한 포교 방식을 버리고 교회처럼 찾아가는 전도를 배워야 합니다. 마당에서 추위와 더위를 참으며 법회를 하는 방식을 지양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환경을 제공해야 합니다.
이제 바꾸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부처님을 외면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4.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물었더니
젊은이들에게 종교를 물었습니다. 무교라고 대답하는 사람 중에 많은 이들이 부모님은 불교지만 자신은 종교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독교라고 대답하는 이는 모태신앙이라고 얘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가족이 모두 자연스럽게 매주 교회에 다니게 되기에 종교의 선택여지가 없이 기독교를 종교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반면에 불교가 집안의 종교이지만 할머니나 어머니만 절에 다닐 뿐 다른 가족들은 초파일이나 절에 가볼 뿐이니 종교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불교의 가정입니다.
이 모든 이유가 사찰이 시대에 맞지 않은 건축물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정기법회가 개설되어 있는 경우일지라도 그들 입장에서는 뜻 모를 한자로 된 경을 중얼거리고 다리를 포개고 앉아 몇 시간을 참아내어야 하는 인고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한 번 따라 나섰다고 해도 다음은 없을 것입니다.
법당에 피아노가 있는 절이 많지만 찬불가를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절이 얼마나 있습니까? 몇 권 분량의 많은 찬불가가 있지만 정해진 몇 곡 이외에 따라 부를 수 있도록 가르치는 절이 없으니 기껏 원력을 내어 만들어진 찬불가도 무용지물이 되고 있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분위기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건물의 형식이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 없기에 어릴 때부터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적습니다. 장엄한 대웅전은 아이들에게 맞는 환경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다리를 틀고 앉는다는 것 자체가 고문일지도 모릅니다.
뜻 모르는 반야심경을 외우도록 강요하는 것도 또 다른 고문이겠지요. 기독교인에게 주기도문은 불자에게는 반야심경 일터인데 주기도문은 그냥 내용을 알게 되지만 반야심경의 뜻을 아는 불자들은 얼마나 되나요? 반야심경의 뜻을 물으면 몰라도 암송만 하면 그 공덕이 무량하다면서 배우려는 의지를 꺾어 버립니다.
우리의 삶에는 심오한 경지를 깨닫는 것보다 쉽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가르침이 더 필요합니다. 스님들이 득도한 알지 못하는 한자게송보다는 절에 틀어 놓은 법구경 테이프 구절이 힘든 세상을 이겨나가는 데는 약이 됩니다.
팔만사천법문이 중생의 근기에 맞추기 위한 약방문이라면서 그 처방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없기에 약으로 쓰지 못해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약방문이 한글로 되어 있다면 마음의 병으로 야위어가는 이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기사회생할 약으로 쓸 것인데도 한자라는 포장지에 싸여서 서고에 잠자고 있습니다.
한자로 된 팔만대장경은 CD로 만들고 동판으로 만들어 길이길이 보전하면서도 한글로 만든 대장경은 만들었다는 얘기는 들었으나 절 어디에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한자로 된 글을 한글 음으로 옮겨서 독송하기는 하지만 왜 한글로 풀어놓은 가르침은 외면합니까?
한글을 만들 때 언문이라고 소홀하게 대접을 받은 것처럼 한자로 읽어야만 독송 공덕이 있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부처님은 배우고 익혀 실천해야만 공덕이 있다고 금강경에서 누누이 강조하셨건만 가르치지 않으니 배우기 어렵고 배우지 않았으니 익히지도 못해 몇 십 년을 다닌 할머니는 아직 사주팔자를 절에서 묻고 스님께 부적을 달라고 합니다.
이제 배우고 익힐 공간을 만듭시다. 그렇게 만든 공간에서 스님들이 정재淨財로 공부한 그 가르침을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부대중이 청정한 승가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조상을 천도해서 자손이 무탈하고 사업 잘되는 기도가 영험한 산사에 운집하는 신도가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배우고, 제대로 된 삶의 길을 깨달은 스님에게 공부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라야 이 시대의 정법도량이라 할 것입니다.
이 도량에서 젊은 불자들이 끝없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5. 이 시대에 필요한 절의 형식
목탁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구청에, 동사무소에 접수됩니다. 그 옛날 낭만처럼 들리던 교회당 종소리는 이제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동네에 들리는 목탁소리를 사람들이 참아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계속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절에도 가끔 절에 접해있는 아파트에서 찾아와 시끄럽다고 크게 항의를 하곤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 교회나 절을 지으려고 하면 그렇게 민원이 빗발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시내에서 열리는 야단법석은 바로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됩니다. 다종교 사회에서 내 종교를 위해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대웅전을 짓고 마당에서 부족한 공간을 해결하는 법회방식을 바꾸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몇 사람이 참석하는 사십구재나 천도재 정도만 해결하고 초파일이나 큰 법회에는 마당에서 신도를 수용하는 그런 사찰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교회나 성당처럼 법회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집회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2층으로 들어가는 계단의 자리입니다
왼쪽에 요사에 해당하는 대중방 두칸, 남녀 화장실, 셔워장과 식당이 있습니다
위에서 떨어지는 빛으로 이 공간은 늘 밝지요
왼쪽에는 작은 공간이 있는데 외관 정면의 까만 돌이 있는 자리입니다
계단 공간의 심심할 수 있는 여지에 리듬을 주지요
난 한 분이 그 자리에 앉고 불화 한 점이 벽을 채웁니다
식당 공간의 전경입니다
주방 왼쪽에 작은 대중방이 있고 맞은 편에 더 큰 방이 있습니다
넓은 테이블이 스무 분이 함께 공양을 할 수 있습니다
주방은 오픈 카운터와 함께 두어서 간단하게 공양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절은 공양주가 없어서 모두 셀프 서비스입니다
차려서 먹고 설겆이까지 스스로 해결합니다
집은 조촐하게 지었지만 주방의 기기는 고급입니다
스스로 차려 먹고 설겆이를 하지만 즐겁게 할 수 있도록...
괜찮습니까?
3층으로 올라왔습니다
내려다보면 작지만 깊은 공간을 더 깊게 느낄 수 있지요
위에서 떨어지는 빛이 신선합니다
법당의 이름은 智悲光殿입니다
지혜롭지만 모든 걸 거둘 수 있는 마음을 밝은 빛으로 키우는 곳인가요?
그래서 이 절은 빛이 좋습니다
법당의 전경입니다
불단도 조촐하게 차렸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모셨습니다
스님의 품성이 느껴집니다
1층의 작은 홀에 있던 금강도,
그리고 단아한 공간...
3배를 올리고 돌아서면 법당이 그야말로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절은 재를 올리지 않습니다
항상 법을 논하는 법석이 펼쳐집니다
남쪽에서 들어오는 빛
문살에 비치는 빛이 한가롭습니다
정적이 흐르지만 법을 담는 열정은 늘 뜨거운 곳이지요
이 절의 이름은
새(元) 밝은(曉)의 중심(center)
원효센터입니다
여름에는 비와 더위, 겨울에는 추위에도 항상 신도들을 좋은 환경에서 신행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앞이니까 더위와 추위도 이겨내야 한다고 강요하는 구태를 버려야 합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차마다, 직장마다 에어컨이 있는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현대인에게 지금의 사찰환경은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그래야 매주 법회가 열릴 수 있습니다.
신도들만을 위한 환경이 많이 필요합니다. 지금 사찰에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 있기는 합니까? 대웅전에서 삼배 올리고 공양간에서 밥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대중방 이외에 어떤 공간이 있습니까? 다른 종교에는 크고 작은 교육실에 신도회를 위한 사무 공간, 탁아실, 성가연습실, 독서실 등등 신도들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할 수 있는 각종 공간에 편의시설까지 풀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도 사찰에는 그 어떤 서비스도 제공되고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아직 불교신도가 2000만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면 부처님의 복덕은 정말 대단한 것입니다. 정말 2000만 명의 불자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사찰을 지으면서 대웅전 장엄하는 정재를 산 부처를 위해서 지출이 되어야 합니다. 사찰건축을 도시에서도 무조건 목조로 지어야 한다는 편견-우선 돈이 엄청 들어가면서 실용성이 떨어집니다-을 버리면 해결방법은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콘크리트로 지으면서도 목조의 형식을 따르게 되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사찰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훌륭한 건축가들이 많이 있지만 이 기와집이라는 사찰 형식을 고수하는 불교계의 분위기 때문에 시대에 맞는 좋은 사찰을 작품으로 표현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형식을 타파한 서울 양재동의 능인선원의 경우 훌륭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나 성당의 경우에도 뾰족탑을 포기함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새로운 형식이 계속 지어지고 있습니다.
6. 이런 공간이 있어야 이 시대의 절
할머니 불교가 아니라 모든 이의 불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재를 지내는 공간이 아니라 법회와 교육이 열리는 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합니다. 새로 지거나 중창되어지는 절에서 동양최대의 불상이니 천불전, 만불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느 경전에서 부처님의 모습을 크게 만들거나 화려하게 만들면 공덕이 클 것이라 되어 있습니까? 사구게 하나라도 제대로 전하면 그 공덕이 갠지즈 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금은보화로 공양하는 공덕보다 많을 것이라 하셨건만 아직도 절을 치장하고 큰 불상이나 많은 불상을 조성하는데 정재를 쏟아 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이 시대의 불교는 그 미래를 어디에 근거를 두고 열어가고 있습니까? 수행자의 처소나 의복, 음식은 비를 가리거나 몸을 가리며 건강을 유지하면 족하지만 가르침을 전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개선되어야 합니다.
가르침을 전하고 배우며 익히는 공간은 전무하다시피하고 자꾸 불상을 모시고 조성하는 공간만 화려하고 거창하게 만든다면 불교의 미래는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산 부처이며 미래의 부처인 신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승가의 새로운 면모를 만들어나가야 될 때입니다.
신도들이 산 부처이며 미래의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뒤집어쓰고 있는 무명이라는 껍질을 벗게 하여야 합니다. 그 작업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 수행의 공간이 강당이며 참선방이며 모임을 위한 각종 장소입니다.
그 장소는 옛날의 마루바닥이 아니라 책상이 놓여지고 컴퓨터, 오디오 등 첨단 교육기자재가 설치되어지는 이 시대의 새로운 사찰환경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마루바닥에서 절 만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명상이나 요가가 아니라 수행으로서의 참선이 이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교육되고 실수實修되어야 합니다.
불교는 우리의 전통과 함께 해왔습니다. 다도, 꽃꽂이, 전통음악 등 이 시대의 문화로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교육 또한 포교의 한 방법으로 아주 훌륭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육을 위한 공간이 만들어진다면 포교사나 강사는 신도들이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간이 없기에 하기 어려운 일상 속의 수행이나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포교, 필요한 공간만 갖추어진다면 명포교사, 명강사로 그 역할을 다할 인재들이 묻혀 있습니다. 해마다 수백 명의 포교사가 지역의 불교교육기관에 배출되지만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불교문화를 통해 포교에 기여할 문화포교사들도 그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천만 불자들이 부처님의 법을 올바르게 배우고 배운 바를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시급한 것이 그에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맞는 사찰의 전형을 만드는 것이 그 어떤 불사만큼 시급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 불교계에서 목조기와집이나 콘크리트로 만드는 가짜 목조 기와집의 형식만 포기할 수 있다면 이러한 기능을 담은 작은 규모의 포교당에서 대형 사찰까지 자유로운 형식으로 설계하여 포교의 새 시대를 열 수 있습니다. 포교의 새로운 시작을 새 그릇에 담아 열어 보기를 발원합니다.
7. 새로운 형식의 사찰, 제안 하나
도시에는 너른 마당을 가진 절을 짓기가 힘이 듭니다. 땅값이 워낙 비싸기 때문입니다. 확보 가능한 땅에다 3층 이상 집을 지어야 합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당을 두고 좌우로 요사채를 놓는 전통사찰의 모습에 익숙한 불자들은 한 건물에 사찰의 기능이 다 들어와 있는 사찰을 받아들이기에 어려울지 모릅니다.
우선 1층에는 주차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주차장이 없이는 1가구 1차량의 시대에 맞는 포교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능한 만큼 많이 확보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차장을 만들고 난 뒤에는 진입공간을 독특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일주문의 개념입니다. 차안과 피안을 나누면서 하나로 만드는 공간이죠. 불이의 장不二의 場이라 이름을 짓습니다.
2층은 요사채 영역입니다. 종무소와 공양간, 스님의 처소, 대중방 등이 들어갑니다. 이 층에는 다목적 공간이 들어가야 합니다. 공양도 하고 차도 마시며 문화 강좌도 할 수 있는 홀을 중심으로 다른 실들이 배치됩니다. 신도들이 함께 어우러져 만남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입니다. 바라밀의 장波羅密의 場이라 칭합니다.
3층은 법당이 들어갑니다. 기존 전통사찰의 전각은 횡으로 긴 평면을 가지고 있어 공간 활용에 있어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는 불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종으로 긴 형태로 바꾸면 같은 면적으로도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1평이면 약 2사람을 수용할 수 있으니 30평의 공간이 있으면 60명 정도의 법회를 할 수가 있습니다. 50평이면 100명은 함께 법회를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정혜의 장定慧의 場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바라밀의 장을 두개층으로 나눌 수 있으면 동적 공간과 정적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2층은 신도들의 공간으로 쓰고 3층은 스님의 공간으로 확보를 합니다. 신도들의 공간은 공양간과 다각실 및 대중방을 넣어 다소 자유로운 공간으로 만듭니다. 스님의 공간은 스님들의 처소와 다목적 공간 및 도서실 등을 배치하여 수행의 공간으로 구성하게 됩니다.
이제 층으로 나누어진 공간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이 장치는 바로 계단실입니다. 흔히 계단은 수직으로만 생각하지만 길이 방향으로 펼치면 아주 극적인 공간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마치 산사의 경사진 각 공간을 연결하는 계단처럼 만들어내면 아주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산에 접한 대지일 때는 2층에 마당을 만들 수가 있고 도심에서는 옥상을 이용하여 외부공간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글을 통해 설명이 충분하지 않겠지만 바라밀의 장을 제대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제안하는 내용 중에서는 가장 중요합니다.
건축가라는 직업을 가진 저로서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고민해 왔습니다. 물질이 우선인 이 시대에 불교가 다해야 할 역할은 정말 중차대하다할 것입니다. 포교란 단순히 신도를 모은다는 것을 뛰어넘어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감로수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측면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매머드 규모로 큰 댐같이 재형사찰을 만들어 수도를 통해 불법을 알리는 것이 지금의 포교 시스템이라면 이제는 옹달샘 같은 포교당이 곳곳에 들어서 가까이에서 목마름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 포교당의 형식이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어나서 들르고, 출근하며 들르고 퇴근하면서 들를 수 있는 제대로 만든 편한 작은 절이야말로 포교의 최일선에서 젊은 불교, 이 시대의 불교, 감로수 같은 불교로 바꾸어내는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8. 불교의 미래를 위한 불자건축가의 역할
건축가는 건축주를 대신해서 집을 짓는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역할을 합니다. 건축주는 집을 짓기 위한 대지와 공사비를 제공하고 건축가는 건축주로부터 그 권한을 위임받아서 준공할 때까지 책임을 다하게 됩니다.
건축주가 건축가를 선정하는데 심사숙고를 해야 하는 것은 나를 대신하여 건축가가 집 짓는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축주가 집을 짓는 일에 밝다면 손발을 대신할 사람만 있으면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건축주 본인처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건축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절은 예사로운 집이 아닙니다. 더구나 일반적인 기와집이 아닌 제가 제안하는 내용이 담기는 새로운 형식의 절이라면 신행생활이 돈독한 불자임은 물론이요 건축에도 아주 뛰어난 능력이 있는 이라야 할 것입니다. 돈독한 신행생활을 바탕으로 스님의 입장에서, 신도의 입장에서 서로 필요한 사항을 알아야 할 것이며 절에 대한 오랜 전통을 이어서 새로운 형식으로 담아낼 수 있는 답을 찾아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집은 한 번 지어지면 다시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절이란 그 집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성스러운 공간의 분위기를 잘 유지해야하기에 설계자로부터 시공자, 내부공간의 장엄까지가 일관성 있게 진행될 수 있도록 선정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 설계자의 요건은 앞에서 말한 자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사의 관계자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스님을 비롯한 불사관계자가 제시하는 절을 짓는데 필요한 의견을 충분히 받아들여서 전체적인 구성을 단계로 나누어 보고를 해야 합니다. 전체적인 예산은 향후 증축 및 관리를 위한 부분까지 반영하여 설계를 진행하여야 합니다.
지금은 제한된 예산으로 1단계를 진행하고 추후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최종단계로 완성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정된 예산에 맞추어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집을 완성하는 데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돈에 맞추어 그 만큼의 집을 짓게 되면 나중에 예산이 확보되더라도 더 돈을 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장엄하는 부분은 얼마든지 나누어서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뼈대는 한 번 손을 대어버리면 더 이상 고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인 결과까지 설계를 진행하여 단계별로 나누어 집을 지어야 최종결과물의 완성도가 보장될 수 있습니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백년을 두고 아직도 짓고 있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을 수는 없겠지만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면 단계를 나누어 진행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건축가는 그 모든 과정을 염두에 두고 진행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불자이면서 유능한 건축가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상을 만드는 이를 불모라고 하듯이 불사를 수행하는 건축가는 절을 짓는 장인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 다른 조건은 변할 수 없지만 건축가의 선정은 임의로 할 수 있기에 심사숙고하여 이 모든 능력을 구비한 사람이 선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간혹 목조가 아닌 자유로운 형식의 절이 지어지고 있지만 앞에서 제안한 내용이 반영된 절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프로그램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있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반영하여 설계할 건축가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절을 짓고자 하는 분이 있으시다면 꼭 제대로 된 건축가를 찾아서 앞에서 제안한 내용을 꼭 반영하여 진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불교의 역할, 새로운 절을 통해 구현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의 미래의 한부분이 신도의 역할이 포함된 새로운 공간의 사찰에서 희망차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원성 합장
특집 대형 도심사찰의 성공 비결 - 구룡사 편 |
대형 도심사찰의 성공 비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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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탄. 대형 도심사찰의 성공 비결 - 구룡사 편) |
대형 도심사찰 성공비결은 '체계적 교육' |
결산-기자 방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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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선원, 안국선원의 경우 정말로 교육이 엄격하다. 입교절차도 까다롭고 공부하는 과정도 쉽지 않다. 능인선원의 경우는 ‘신도사관학교’라는 별칭이 붙었고, 안국선원은 집중수행 등의 초심자과정을 거쳐야만 신도가 될 수 있다.그런데도 신도들은 오히려 이런 것을 좋아한다. 어떤 신도들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까지 끌어들인다. 이런 불자들은 당연히 많은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사찰들은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 점도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한다. -안국선원이 성공한 이유는 수행열풍의 시대조류를 반영하고, 또 일반인들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던 간화선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마음선원 역시 자율과 창의성을 중시하는 시대흐름에 맞는 수행과 신행체계를 갖춤으로써 역동적인 사찰이 될 수 있었고, 능인선원의 경우도 불자들의 편의를 고려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사찰과 신도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한 것이 주효했다. -한마음선원의 경우 생활 속의 불교를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신도들은 생활 자체를 공부로 삼고 있다.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바로 보는 노력을 하면서 깨달음에 접근해가려고 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신행도 기복이 아니라 철저히 ‘작복(作福)’ 에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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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꼭 스님 스타일 같네요..상도선원이...그곳에 스님 사진 작품전시회도 할수 있는 공간도 추가...ㅎㅎㅎ
구구절절 맞는 말씀입니다.
늘 아쉽고 안타까운 그런 부분들을 콕콕...
견학을 꼬옥 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