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정조24년(1800년) 9월 어느 날 의주 남강포구의 저자거리에서 한 젊은이가 일단(一團)의 중국상인들을 상대로 무언가 열심히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조선 최고의 역관(譯官)이 되고자 어린 시절부터 한어(漢語)를 공부하고 중국인들을 상대로 꾸준히 이를 연마해 오고있는 청년 임상옥(林尙沃)이었다.
이런 그에게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당패 억쇠가 사색이 된 얼굴로 달려와 도움을 청한다. 사당패 공금 10냥을 노름으로 몽땅 날려 칼을 들고 달려드는 모가비 길천구(吉天九)를 피해 도망쳐 오는 길이었다. 울며 사정하는 그를 보다못한 임상옥은 길천구를 찾아가 그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그것은 송도(松都,개성) 최고의 상인 박주명(朴周命)의 의주점포 개소식(開所式)에 사당패들이 연희(演戱)를 해주고 돈을 버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벌린 사당패의 연희는 대성공을 거두나 이를 시기한 다른 객주의 왈짜들이 몰려와 연회장은 순식간에 싸움판으로 변하고 사당패들과 같이 싸우던 상옥은 왈짜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부상으로 인해 점포에서 후한 보상을 받던 상옥은 포주인(鋪主人)이 미모의 젊은 여자라는 사실에 크게 놀란다. 그리고 잇달아 벌어진 중국상인과의 흥정에서 통역대신 급작스레 투입 된 임상옥은 유창한 한어(漢語)실력과 예리한 관찰력으로 계약을 크게 성공시켜 포주인 다녕(多寧)을 놀라게 한다.
다녕은 상옥에게 점포에서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하나 그는 자신은 역관(譯官)이외의 일에는 관심이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미모와 총명함을 겸비한 다녕은 박주명의 외동딸로 박주명이 의주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 개설한 지점의 실질적인 포주인(鋪主人)으로 냉혹한 결단과 귀신같은 상술로 행수들간에는 이미 잘 알려진 여자였다.
나. 집으로 돌아온 상옥에게 부친 임봉핵(林鳳核)이 북경 사은사 무역상단이 결성된다는 소식을 전하자 돈이 없는 두 사람은 궁리 끝에 의주거상 홍득주를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돈을 빌리는데 성공한다. 부친은 돈을 벌기 위해서, 임상옥은 역관으로서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부자(父子)는 박주명 상단의 말단 말몰이꾼이 되어 머나먼 길을 떠난다
중국 땅에서 임상옥은 어릴 적 묘향산 임원(林圓)스님으로부터 배운 각종 경서(經書)와 유창한 한어(漢語)실력, 그리고 절묘한 기지로 객점에서 곤경에 처한 서장관(書狀官) 김현수를 도와주고 화상(華商)과의 흥정에서 꽤 큰 이익을 남겨 동료상인들의 관심을 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견마잡이 했던 물목이 금수품인 유황이라는 것이 탄로 나자, 실제 화주(貨主)인 박주명의 어처구니없는 배신으로 부자는 죄를 뒤집어쓰고 감영에 하옥된다.
다. 설상가상으로 밀매를 엄금하라는 정조임금의 어명에 따라 아버지 임봉핵은 급기야 참수 당하고 임상옥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나 의주 부(義州 府)의 관노(官奴)가 되어 비참한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집안을 적몰시킨 박주명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하며 헤어진 가족을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개천현(介川縣) 유기공방에서 노비로 비참하게 일하는 남동생을 발견한 상옥은 길천구의 도움을 받아 둘이서 관아를 탈출하나 탈출도중 동생은 추쇄꾼의 총에 맞아 절명하고 붙잡힌 상옥은 온갖 고초 끝에 안주(安州)의 철광산에 평생노예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역병으로 죽어 가던 채연(采淵)과 인연을 맺으며 극한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 임금이 등극하자 1801년에 내려진 정순 대비의 특지 "관노 사면령"에 의해 임상옥은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난다.
라.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고 죽은 부친이 남긴 빛 독촉에 계속 시달리던 임상옥은 빚 대신 노역 살이로 홍득주 유기방(鍮器房)의 말단일꾼으로 사환(使喚)생활을 시작하나. 야심만만한 객주의 서기(書記) 정치수(鄭治壽)와 홍득주의 딸 미금(美今)과의 갈등으로 마음고생을 많이 한다. 특히 "당시(唐詩)사건"으로 자존심이 크게 상한 미금의 의도적인 행패는 상옥을 수없이 곤경에 빠트리고 이는 심적사(深寂寺) 불공행차 때까지 이어 진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당패 길천구로부터 관기로 끌러간 여동생의 소재를 파악한 임상옥은 속전(屬錢) 50냥을 마련하고자 포주인 허삼보(許三甫)에게 기상천외한 제안을 한다. 그것은 50냥을 빌려주면 한달 후에 그 10배인 500냥을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안주 철광산에서 사귄 주물공 노인의 도움과 파격적인 유기(鍮器) 유통마진 제거로 상옥의 제기(祭器)판매는 큰 이익을 남기고 허 삼보는 뜻밖에 500냥을 벌게된다. 이일로 허삼보에게 인정받은 상옥은 유기점의 서기(書記)가 되어 장부 정리 일을 맡게되고 그의 획기적인 물품관리와 치밀한 회계장부정리 능력은 도방(都房)인 홍득주의 눈에 띄어 "정화(鄭和)의 인삼사건"을 계기로 그는 일약 홍득주 본전(本廛)의 서기(書記) 자리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홍득주의 아들 홍상헌과 딸 미금의 관심을 끌게되며 크고 작은 의주의 상거래에서 마주친 다녕(多寧)도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상옥은 그녀가 원수 박주명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경악하고 이를 모르는 다녕은 계속 그에게 깊은 관심을 표명하는데... 그 와중에 헤어진 어머니를 만나 새롭게 집안을 꾸릴 즈음 마침내 그는 공석(公席)이 된 주단전(綢緞廛)의 새 차인(差人) 물망에 오른다.
마. 새 차인(差人)자리를 놓고 경합하는 정치수(鄭治壽)와 임상옥! 그러나 홍득주는 두 사람에게 각기 천냥씩을 주며 석 달 기한으로 장사를 하여 더 많이 돈을 번 사람을 차인으로 발탁하겠다는 통고를 한다. 차인행수의 꿈을 안고 한양 시전(市廛)에 당도한 임상옥은 기발한 착상으로 포목거래에서 꽤 성공을 거두나 막판에 정치수의 훼방으로 급기야 천냥을 모두 날리고 빈털털이가 된다.
절망하던 상옥은 갈등과 고심 끝에 우연히 만난 다녕(多寧)으로부터 300냥을 빌려 그 길로 충청도 혜미 땅으로 가서 건어물 거래에 마지막 승부를 건다. 그러나 추석대목을 겨냥한 그의 계획은 급작스런 악천후로 크게 차질을 빚고 수하 겸인들은 깊은 우려와 함께 철수를 종용하나 이를 거부한 상옥은 침착한 정세판단과 치밀한 지형분석으로 헐값에 매도하는 상인들의 물건까지 매입한다. 그의 작전은 결정적인 순간에 다급해진 상인들의 원정구매로 대성공을 거두고 그는 거금 3천냥의 이익을 남기며 정치수와의 승부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둔다.
마침내 차인행수(差人行首)자리에 오른 그가 다녕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나 다녕은 자신은 유능한 상인에게 투자한 것뿐이라며 미소로 응답한다.
바. 이듬해 봄 진하사(秦賀使)에 수반된 상단의 행수로 중국 북경(北京)으로 향하던 상옥은 일행 중에서 다녕(多寧)과 동행한 박주명의 최 측근 차인(差人) 장석주(張錫柱)를 발견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경계한다. 중국에서의 일정이 거의 끝나가고 귀국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상옥은 마천수(馬千壽)와 다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료행수들의 권유에 못 이겨 북경의 유곽(遊廓)을 찾는다. 유곽에서 우연히 벌어진 도박판에서 같이 간 송도행수 유두철이 큰 돈을 잃게되자 속임수를 간파한 임상옥은 유창한 한어실력과 두둑한 배짱으로 도박판의 돈을 되찾게되고 이에 흥분한 중국 상인은 그에게 단독 승부를 제안한다.
그리고 유곽 최고의 기녀(妓女)를 걸고 벌어진 마지막 승부에서 임상옥은 극적으로 이겨 절강성에서 팔려온 절세 미녀 장미령(張美齡)과 하룻밤을 지내게된다. 그날 밤 그녀의 애절한 사연을 들은 임상옥은 손끝하나 대지 않은 채 화상(華商)에게서 받은 사례금 전액을 털어 그녀를 유곽에서 빼주고 귀향비 까지 마련해 준다.
사. 귀국 후 성공적인 북경무역으로 홍득주의 환대를 받던 임상옥은 뒤늦게 연경에서의 도박건과 사례금 유용 사실이 밝혀져 홍득주의 무서운 추궁을 받으며 원칙을 고수하는 정치수의 고발로 임방회의(臨房會議)에 까지 회부되어 마침내 홍득주의 객주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의주 임방의 통문(通文)으로 관서일대에서는 어느 곳이고 상인 (商人)으로서는 발붙일 길을 잃는다. 홍득주 객주의 촉망받던 행수에서 급전직하, 말단 장돌뱅이 노릇까지도 불가능해진 상옥은 유일하게 그를 밀어주던 미금으로부터도 차가운 외면을 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다녕(多寧)의 은밀한 요청으로 한 밤에 포구(浦口)의 해상(海上)객주에서 그녀와 단독으로 만난다.
그러나 이 만남이 겸인들에게 들켜 정치수에게 전해지자 두 객주간에 크나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이로 인해 상옥은 더욱더 곤경에 빠지고 절망과 통한의 나날을 보낸다. 보다 못한 사당패 모가비 길천구의 권유로 그는 사당패에 보부상으로 끼게되고 그에 의해 사당패에 몸을 의탁한 채연(采淵)등과 함께 1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연희와 상거래를 겸한" 떠돌이 장사꾼 생활을 한다. 그 와중에 그를 사랑하는 채연(采淵)의 속내와 그 동안 숨겨온 신분을 알게되고 송파 깍정이패들의 "사기(詐欺) 환매사건"을 응징하는 과정에서 훈련원의 무인(武人) 임진한(任辰漢)을 사귀게 된다.
아. 1년 후 의주로 돌아온 상옥은 그토록 융성하던 홍득주의 객주가 뜻밖에도 박주명의 계략과 음모로 만신창이가 되어 기울어져 가는 것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여기에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고자 홍득주를 버리고 박주명의 휘하로 들어간 정치수의 배신도 큰 이유중의 하나였다. 박주명, 정치수에 대한 원한과 홍득주에의 옛정 때문에 상옥은 쓰러져 가는 홍득주의 상권을 다시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 홍득주는 화병으로 쓰러지고 딸 미금(美今)을 거두어 달라는 유언과 함께 숨을 거둔다. 얼마 후 홍득주의 유언대로 미금과 마음에 없는 혼인을 한 임상옥은 상술(商術)의 기본부터 다시 배우기 위해 홀홀단신 조선상업의 본바닥인 송도(松都,개성)로 떠난다.
자. 송도에서의 임상옥 생활은 거렁뱅이나 진배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어렵사리 체장을 구해 보상 노릇을 하던 상옥은 어느 날 포청의 감옥에서 박주명의 음해에 걸려 폐인이 되다시피 한 왕년의 송도 거상(巨商) 민상기(閔祥基)를 만난다. 상업의 정도(正道)만을 고집하는 괴팍한 성품과 기이한 행적으로 이름 난 민상기(閔祥基)와 인연을 맺게된 상옥은 그에게서 2년 간, 개성상인의 오묘한 상술과 철두철미한 상도정신(商道情神), 그리고 개성인의 기질을 배우고 그를 영원한 스승으로 모신다. 민상기 밑에서 상술을 익힌 그는 송도의 큰손 하가(河哥)를 찾아가 단도직입으로 일년기한으로 1만냥을 빌려줄 것을 요청하여 그를 놀라게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선선히 임상옥에게 돈을 빌려준다. 그 돈으로 사업을 일으킨 상옥은 차츰 성공을 거두자 박주명(朴周命)의 본바닥인 개성에서 그와 상거래로 한판 승부를 벌린다. 그러나 민상기의 충고를 외면한 그의 조급함과 과욕은 마지막 순간에 처참하게 패배하여 상옥은 돈을 몽땅 날리고 마침내 빈털털이가 되어 빚 대신 목숨을 거두려는 하가(河哥)를 피해 허겁지겁 송도 땅을 뜬다.
차. 여기저기 떠돌며 유랑생활을 하던 상옥은 평소 스승 민상기와 교분이 두텁던 석숭(石崇)스님을 찾아 금강산으로 향한다. 의논 끝에 과거시험 역과(譯科)에 응시하기로 하고 추월암(秋月庵)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하던 그에게 박종일(朴宗一)이라는 송도상인이 찾아온 것은 개성을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뒤였다. 박종일은 상옥에게 자신의 북경 행에 동행해주면 대가로 1만냥을 주겠다는 믿기지 않는 제안을 한다. 궁리 끝에 결심을 하고 떠나는 상옥에게 석숭 스님은 3번의 역경이 그의 앞날에 닥쳐올 것을 예언하며 대책이 적힌 밀봉 서한과 의문의 계영배(戒盈盃)를 그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그는 박종일에게서 받은 1만 냥으로 송도의 하가(河哥)빚을 갚는다.
카. 이유를 모른 채 중국 북경에 당도한 상옥은 뜻밖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장미령을 만난다. 장미령은 3년 동안 그를 애타게 찾았고 무역거래로 만난 박종일에게 임상옥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유곽에 팔려온 유녀의 신분이 아니라 중국의 거상(巨商) 주병성(周炳成)의 총애 받는 측실(側室)이 되어있었다. 주병성은 조선상인과의 모든 거래에서 임상옥에게 최 우선권과 특혜를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의를 한다. 그러나 임상옥은 대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라며 그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한다. 오히려 모든 조선 상인에게 공평한 기회를 줄 것을 요청한다. 주병성은 훌륭한 그의 인격에 감탄하나 낙심천만인 장미령은 그날 밤 상옥의 처소를 찾아와 주병성의 호의를 받아드릴 것을 간청한다. 극구 사양하는 상옥과 이를 종용하는 장미령! 이 일로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며 밤을 새운다.
타. 이후 사업 기반을 갖춘 상옥은 홍득주 점포의 포주인이었던 허삼보를 데려오고 여진 땅에서 은거하던 홍상한을 불러 진용을 갖추고 박종일과 함께 동업을 시작한다. 장미령의 남모르는 도움과 그간의 시련경험, 그리고 민상기로부터 터득한 송도상인의 상술과 만상(灣商)특유의 배포로 임상옥은 차근차근 의주 상계(商系)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 와중에 박주명 정치수와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며, 때로는 호감을, 때로는 적의를 갖고 저돌적으로 그를 대하는 다녕(多寧)으로 인해 마음 고생을 많이 한다. 임상옥의 사업이 순조롭게 풀려가던 어느 날 "중국에서의 모든 거래 중지"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가 그에게 날아든다. 그것은 중국거상 주병성의 사주였고 1년전 북경에서 장미령과 하룻밤을 보낸 것을 통정(通情)한 것으로 오해한 때문이었다. 상옥의 무역은 큰 타격을 받고 연이어 세곡선 침수와 화재사건, 선혜청 감목관과의 갈등 등이 불거지고 여기에 박주명, 정치수의 농간까지 겹쳐 상옥은 급전직하 추락하기 시작한다.
파. 순조8년 세수(稅收)증대를 목적으로 어명에 의해 내려진 "인삼무역 제한법"은 임상옥에게는 기사회생하는 계기가 된다. 그 동안 중국무역의 핵심으로 모든 상인에게 개방되었던 인삼거래권을 능력 있는 소수에게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끼지 못하면 중국무역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임상옥은 심각한 고뇌에 빠졌고 그의 객주에서 서기로 일하는 홍경래(洪景來)의 종용에 따라 그는 한양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선혜청(宣惠廳) 당상(堂上)으로 있는 권신(權臣) 박종경(朴宗慶) 을 찾는다. 박종경의 집은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다. "백지어음"을 들이대며 무역권을 따내려는 박주명과 각종 뇌물로 이권을 얻으려는 개성상인들 틈에서 임상옥은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운 그에게 당대 최고의 권력자 김조순(金祖淳)과의 극적인 인연이 만들어지고 탐욕스럽기 그지없던 박종경도 그 일에 감동을 받아 마지막 순간에 인삼 무역권은 상옥에게 돌아온다.
하. 중국과의 인삼무역 독점권을 얻은 그에게 장미령의 노력으로 주병성과의 오해도 풀리게되어 임상옥은 화려하게 재기(再起)에 성공하고 점차 거부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치밀한 계획과 주도면밀한 작전으로 박주명의 상권(商圈)을 야금야금 잠식하고 의주와 개성에서 그의 거점을 차례로 격파하며 복수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는 상옥을 사랑하게된 다녕이 부친과 상옥의 원한관계를 알게 되면서 끝없는 갈등 속에 빠져들고 이를 알고 괴로워하는 미금과 적의를 갖은 정치수 사이에서 상옥은 크고 작은 사건을 겪게된다.
까. 순조9년에 북경에서 있었던 유명한 "중국상인들의 인삼 불매담합"과 "인삼에 불을 지름"으로서 조선상인의 배포를 여지없이 과시한 임상옥의 통쾌한 복수극은 그를 조선최대의 무역상으로 자리잡게 한다. 그리고 뻗어 가는 상옥의 상세(商勢)에 막바지로 밀린 박주명은 이를 갈며 재기(再起)를 획책하나 거상 임상옥을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 된다. 중국에서 귀국한지 얼마 후 은밀히 상옥을 찾은 홍경래(洪景來)는 선문답(禪問答) 형식을 빌어 그에게 거사에 동참할 것을 제의한다. 혁명가로서 웅심(雄心)을 가진 그는 임상옥을 거사에 끌어드릴 목적으로 그의 객주에서 서기(書記)로 일해왔던 것이다.
이로 인해 임상옥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고 크나큰 심적 동요에 휩싸인다. 만일 거절하게되면 천기(天機)가 누설되므로 죽음을 당할 것이고 승낙하면 상인의 길을 포기해야만 한다. 게다가 거사가 실패할 경우 그의 집안은 3족이 멸하게 된다. 절대 절명의 순간이 지난 후 입을 열은 임상옥은 "상인(商人)의 길은 오로지 이재(理財)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인조 반정 때 신수근의 선문답(禪問答)을 예로 들며 우회적으로 거부 의사표명을 한다. 그날 밤 임상옥의 방에 자객이 찾아온다. 목에 칼을 들이 댄 홍경래는 천기가 누설됐으므로 당신은 죽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상옥은 "나를 죽일 경우 3가지 손실이 생기며 나를 살려줄 경우 3가지 이점이 생긴다"는 명언으로 그를 당황하게 만든다. 침묵의 순간이 지나고 마침내 포기하고 떠나는 홍경래에게 그는 거사 자금을 줄 수는 없어도 훔쳐갈 수는 있다고 한다.그날 밤 홍경래는 상옥이 알려준 비밀금고에서 거금을 훔쳐 갖고 임상옥의 집에서 자취를 감춘다.
따. 순조11년(1811년) 12월18일 마침내 홍경래는 다복동에서 군사를 일으켜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관서지방을 점령해나간다. 이에 의주에서 방어군이 편성되고 군자금을 모집하자 임상옥은 또 한번의 갈등에 빠진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칭병(稱病)을 한 후, 의원이 처방한 약재(藥材)에 부자(莩子)를 넣어 복용하고 의식불명 상태로 빠져든다.
그리고 얼마 후 정주성에서 홍경래가 전사하고 난이 평정되자 임상옥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홍경래와의 의리를 지킨다. 반면에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해서는 거금을 쾌척 한다. 난(亂)이 끝나고 뒤이어 발생한 3년 동안의 가뭄과 흉년! 기아(饑餓)가 전국을 휩쓸고 도처에 죽어 가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한 임상옥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즉 "돈은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그로부터 전혀 새로운 상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를 좌우명으로 삼고 기민(饑民)의 구휼(救恤)과 상도(商道)실천에 앞장서 스승 민상기의 상업철학을 실천한다.
빠. 그의 의로운 행적은 관서지방은 물론 조정에까지 알려져 순조 임금 까지 알현하는 영광을 얻게된다. 급기야 임상옥은 임금의 특지로 사대부의 반열에 올라 곽산 군수를 제수 받는다. 임지로 부임하는 길에 그를 기다리는 다녕(多寧)과 가슴아픈 해우를 한 임상옥은 시골 정자에서 향반들에게 수모 당하는 삿갓 쓴 한 젊은이를 만나 그를 도와주고 그와 하룻밤을 지낸다.
술 한 병을 놓고 마주 한 자리에서 젊은이의 뛰어난 문장에 감탄하던 임상옥은 그의 신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홍경래의 난"때 난군(亂軍)에 항복하여 역적으로 죽은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의 손자 김병연(金炳淵), 김삿갓 바로 그 사람이었다. 조부가 김익순 인줄 모르고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할아버지 김익순을 능멸하고 질타하는 명시(名詩)를 지어 장원을 하지만 나중에 그 사실을 알자 자신을 비관하며 하늘 아래 머리를 들 수 없다고 삿갓을 쓰고 거렁뱅이 시객(詩客)으로 팔도를 떠도는 중이었다
싸. 임상옥은 지방수령으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거상으로써 갖가지 일화를 만들며 마침내 조선최고 거부의 길로 들어선다. 그를 사랑하다 비밀 장부 탈취 건으로 끝내 아버지 박주명에게 쫒겨 나는 다녕(多寧)의 애절한 은애(隱愛)와 상옥과 다녕(多寧)사이에서 고뇌를 거듭하는 아내 미금(美今)! 끝까지 계속되는 박주명 정치수와의 악연! 그리고 홍경래에게 감화되어 거사에 동참했다가 끝내 참수 당하는 홍상헌과 난에 연루되어 집안이 적몰되는 바람에 관비(官婢)가 된 스승 민상기의 딸 송이(松伊)에 대한 순수한 동정과 사랑! 그리고 홍삼 대량재배의 성공과 왜국과의 인삼무역 전환기 마련!
그러나 그에게 마지막이자 최대의 위기가 닥쳐오니 그것은 그가 역적 홍경래와 연루되었다는 박주명의 참소 였다. 조정에서는 즉각 임상옥을 의금부에 하옥시키고 진상을 밝히는 추국을 실시한다. 설상가상으로 삼봉산 아래 지은 거옥(巨屋)이 권신들의 입에 오르내리자 그는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무서운 시련을 겪는다. 그를 구하고자 사력을 다하는 다녕(多寧)과 미금(美今)! 그 와중에서 두 여인의 애증도 풀리고...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홍경래가 임상옥의 거금을 훔쳐 달아났다는 증언과 당시 방어군 제찰사였던 평안감사 정만석의 두둔, 그리고 이제는 신분이 회복된 채연(采淵)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풀려난다. 미천한 장돌뱅이에서 귀성부사라는 3품의 고위관직에 오른 임상옥에게 끊임없는 질시와 모함이 따르고 그의 행로에 역경이 밀어닥치나 그는 묵묵히 이를 받아드리고 의연하게 대처해나간다.
짜. 순조 임금이 승하하고 안동 김씨의 횡포가 극에 달할 무렵인 철종 원년 1849년 초여름, 조선개국이래 최고의 재물을 모으고 최대의 구휼활동을 벌려 이제는 경상(京商), 송상(松商), 만상(灣商)을 위시하여 팔도의 모든 상인들에게 흠모를 받게된 임상옥은 어느 날, 전라도 동복(同福)땅의 한 작은 마을을 지나간다. 그곳에서 그는 거렁뱅이로 병들어 죽은 김삿갓의 시신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집에 돌아온 그는 평생 자신이 모은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증하고 미련 없이 삼봉산(三峰山)에 은거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시가(詩歌)에 몰두하여 "가포집"(稼圃集) "적중일기"(寂中日記)등을 저술하다가 철종 6년(1855년), 아들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7세로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