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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영웅' 심일 소령의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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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7 일 조선일보에 '北 탱크를 부순 '호국 영웅'의 불편한 진실' 이라는 제목으로 최초로 태극 무공훈장을 받은 국민 영웅 심일 소령이 조작 된 것이라는 폭로 기사가 실렸다. 최 보식 선임 기자가 압록강에 진격했었던 이대용 장군을 인터뷰하고 쓴 글이었다.
기사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선일보 인터넷 판에 350개의 댓 글이 달렸는데 글의 반 정도는 늦었지만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이라는 다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나머지 댓글들은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국민 영웅인 심일의 존재에 대한 조작설은 작은 태풍이 되어 군과 사회를 휩쓸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심일=국민영웅의 공식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유전자가 되어 있었다는 실정을 실감할 수 밖에 없었다.
이대용대위 준장으로 예편 주월공사로 있던 중 월남 패망후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북월남군에게 5년간 억류생활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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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그의 동상만도 다섯 개나 서있고 그의 이름을 딴 공원도 있다 심일의 모교인 육사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최우수 생도에게 심일상을 수여하고 있다. 춘천의 모 군단에서는 해마다 적지 않은 예산과 장비와 장병까지 투입하여 대규모 행사를 진행해왔다. [올해는 취소]충격은 정치판으로 퍼져 나갔다. 야당이 들고 일어나서 왜 새로 출간하는 국정 역사 교과서에 이런 조작된 영웅이 나오냐고 비난했다.
심일 소령 위령비를 찾아온 어린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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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로부터 이의 진상을 밝히라는 명령을 받은 계룡대의 육군 전사 연구소가 열 명이 넘는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 정밀한 조사를 했었다, 처음에는 “그럴리가 ---? “하면서 조사에 임했던 한 연구소원은 점점 심일의 전공에 대한 부정적인 사실들이 속출해서 무척 당황했던 심정을 말해주기도 했었다.
심일에 대해서 5년 넘게 자료를 모아왔던 나도 계룡대 육군 전사 연구소에 가서 증언을 했었는데 얼마 후 나온 연구소의 조사 결론은 역시 ‘심일 무공은 사실이 아니다.’였다.
아직 공식 발표가 되지 않았지만 이미 조사는 마무리되었고 보고가 된 상태다. 그러나 그 사실을 터트린 최보식 기자의 논조가 상당히 쿨 해서였던가?
심일 무공 훈장의 조작 사실은 기사를 읽은 사람은 물론, 심일과 연관이 있는 지역은 물론 일부 군 간부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인상을 뿌리며 확산되고 있다.
심일을 마치 허위 사실로 전공을 훔친 사기꾼으로 보는 시각이 깔리기 시작한 것은물론이고 그런 사기꾼을 등에 없고 국민을 속인 군은 도대체 뭐 하는 인간들의 집단이냐는 비난까지 나돌고 있다. 돌발적으로 터진 심일 사건의 유탄은 엉뚱하게 비산하여 군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더 두고 보기가 너무 안타깝다. 그간 정보를 모으며 조사를 해온 필자로서 여기에 심일 소령의 영웅 조작설에 관한 이면사를 밝혀 본다.
육사 8기생 고 심일 소령 -전사 때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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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결론을 밝히고 글을 소개한다. 심일은 60년간 국민들에게 알려진대로 육탄 돌격으로 자주포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심일 자신이 있지도 않았던 자기의 전공을 허위로 보고를 하고 훈장을 받지 않았다. 그런 복잡한 일을 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전선에서 허망하게 전사하고 말았디.
오히려 가슴을 적시는 슬픈 가족사와 인정 많은 지휘관의 온정이 얽힌 뒷사연이 있다. 그의 부모님들은 호국의 전선에 자식을 세 명이나 바치고 충혼의 비극을 당한 분들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전쟁에 내몰린 젊은 국가 대한민국에는 이런 고마운 분들에게 보답을 해드리는 보훈의 제도가 전혀 없었다. 부대에 찾아와 자식의 전사를 알고 통곡을 하는 부모님의 슬픔에 가슴 에이게 미안해했던 심일의 지휘관과 간부들이 비탄에 빠진 부모님을 위로해 줄 방법을 찾다찾다 할 수 없이 고육지책으로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을만한 심일의 전공을 가공해서 상신했던 것이다.
육군 대위인 심일은 지금 세간에 알려지듯 강원도 영월이 아니라 1950년 11월 10일 경, 묘향산 부근 동창이라는 곳에서 전사했다. 그는 그가 배속되었던 6사단 7연대가 압록강에서 철수하다가 중공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 큰 타격을 입고 생존한 부대원들이 산산이 흩어져 탈출해 나오던 중에 당한 최후였다.
심일과 태극무공훈장에 숨겨진 자세한 사연을 그 시발점에서부터 공개해본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춘천 주둔 6사단 7연대 정면 38선의 방어 병력을
뚫은 북한군 2사단은 북한강을 따라 남하해왔다.
7연대 -49년 국방부 사열 준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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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공 첫 날인 6.25일 아침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날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서울에 있었다. 그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 파티에 참석하라는 초청을 받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울로 가기 전 북한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대대장급 이상은 영내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려놓았던 터라 영내 대기하던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비상을 걸고 출동 준비를 했으나 간부들 소집에 긴 시간이 걸렸다.
급해진 임부택 연대장은 연대 본부 바로 앞에서 하숙을 하던 대전차포 소대장 심일 중위를 불러 57mm 포를 끌고 옥산포 북쪽 서연고개로 먼저 출동하도록 하였다.
옥산포는 현재 춘천시의 일부가 되어서 완전 도시가 되었으나 그 때는 북한강 옆에 작은 강변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강을 건너거나 오가는 배들이 들리는 작은 포구였다. 이곳은 북한강을 따라 남진하는 북한군이 반드시 통과하게 되는 요지였다.
명령은 받은 심일 중위는 포 57m 포 두 문을 끌고 즉각 출동하였다. 대전차포 5문중 3 문은 소양강 건너 전 일본인 소유 생사 공장에 주둔하던 16 포병대대와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춘천 역 앞에 있던 7연대 본부에는 57mm 포 단 두 문만이 있었다.
춘천 봉의산을 남쪽에서 본 항공 사진- 윗쪽 원안에 옥산포 방향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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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투가 유명하다 보니 60년대부터 김종오 장군이 북한 침공을 예상하고 참호 구축과 장병 외출 금지등을 명령했었고 만반의 준비를 하며 북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상당히 과장된 이야기다. 김종오 장군은 서울에 가있었고 외출은 그대로 시행되어 남침직후 선임하사가 춘천역으로 달려가 기차를 기다리는 수 십 명의 외출 장병들에게 전쟁이 났음을 알리고 모두 부대 복귀를 명했었다. 당시 군에 지급된 쌀이 항상 부족하여 부대에 별 일이 없으면 외출 외박을 실시하여서 식수 인원을 줄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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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일이 출동할 때는 이미 16 포병대대가 소양강 북쪽에서 대활약을 하고 있었지만 춘천의 1대대도 외출 병력이 많아 이를 수습하는데 애를 먹었다. 1 대대 1 중대장 이대용 중위는 우비와 장화를 신고 시도서관에 가다가 달려온 연락병의 전달을 받고 대대로 달려갔다.춘천 대첩의 주인공이었던 1대대가 출동한 것은 10시가 전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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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대의 쓰리쿼터가 57mm 견인하고 소양교를 건너 북상한 심일은 포 두 문을 옥산포 북방 1 km 북방 솔밭에 포 진지를 잡았다. 솔밭이라도 약간 높이가 있는 곳인데도 지금은 개간되어 없어졌다. 이곳은 북쪽으로 훤하게 시야가 트인 곳으로서 접근하는 북한군을 포격하기가 좋은 곳이었다.[ 첫 진지는
이보다 훨씬 북쪽이었고 이 곳은 두번째 진지였다.]
빗속에서 적을 기다리던 심일은 정오 조금 전 먼 북방에서 국군 38선 경비선을 뚫고 남하하는 북한군 보병을 발견하고 57mm 포문을 열었다. 포 사격을 하며 전투를 한참 하던 그가 갑자기 포 한 문만 끌고 옥산포 남쪽으로 도주해왔다 그는 첫 교전에서 포 한문을 잃고 철수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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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 한 문의 포다리가 논에 빠진 것을 건지지 못해서 유기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지만 내막을 더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심일이 포진지를 점령한 후 그 곳보다 더 남쪽에서 16포병대대 1 포병 중대가 김장근 대위의 지휘로 북쪽에 포사격을 하고 있었다. 중대장 김대위는 사거리가 짧은 105mm 포 2 문을 전방으로 추진해서 몇 발 발사했었다. 그러나 대뜸 북한군의 박격포탄들이 날아와서 빨리 포를 철수시켰다고 한다.
대전차포 포병 사격을 지휘하던 심일은 전방에; 나타난 북한군 보병에게 포사격을 가하다가 역시 북한 보병 박격포 사격을 받고 포병이 했엇듯 급히 철수하다가 포를 논에 빠뜨린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이 든다. 대전차포가 있었던 곳은 해발 7-8미터 되는 소나무 밭이었다. 적 박격포 사격에 놀란 포원들은 급히 경사진 사면으로 포를 끌어 내리다가 비에 젖은 사면에 그냥 미끄러져 논에 빠뜨렸을 가능성이 있다
포를 견인하던 트럭은 GMC와 같은 대형 차량이 아니라 3/4 트럭[쓰리쿼터]이라서 강한 견인력도 없었다.
그는 이동 철수하여 옥산포 남방에 또 포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니까 심일의 포진지 전환을 위한 철수는 지금처럼 단순한 시각으로 볼 수가 없다.
57mm 포. 7연대 소속 57mm 포 두 문은 압록강까지 진격해서 압록강에 설치한 북한군 부교를 파괴하는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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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 장비 망실은 군법에서도 엄중히 처벌하는 중범죄였다. 어느 군 원로는 장비 망실자는 잘못하면 총살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 때 총살형이 선고되던 적전 비겁 행동과 형량이 비슷했었다.
대전차포 중대장 송모 대위는 심일이 포 한문을 망실하고 후퇴했다는 사실을 알고 흥분해서 심일을 구타하고 소양강변 우두산에 7연대 CP를 설치한 연대장 임부택 중령에게 달려가 무릅을 꿇고 57mm 포 망실을 사죄하며 용서를 구했다.
전투가 한창 진행 중에 누구를 징계하는 것도 문제가 되기에 임부택 중령은 “어쩔 수 없지 않는가? 전투나 잘하게나!” 하고 포 망실을 문제 삼지 않았다.
57mm 포 중대는 그날 25일 오후 16 포병대대와 함께 소양교을 넘어 소양강 남쪽 강안에 포들을 방열하였다.다음 날 26일 심일은 16포병대대와 같이 밀려오는 북한군에 포사격을 하며 전투를 했었다.
이날 26일 포병이 사농동 일대에 몰려오는 적군에게 전개한 포격전은 그날 오전 6사단 7연대 1대대가 옥산포를 향하여 대돌격으로 거둔 승리와 함께 춘천 대첩의 핵심이 된다.
심일이 부쉈다는 북한군 SU-76 자주포-그러나 이날 이 포는 보병의 뒤에서
후속했기에 심일과 교전도 하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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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춘천에서 버티던 6사단 7연대는 전선의 정돈을 위해 낙동강까지 후퇴하며 싸워야 했다. 낙동강으로 후퇴하던 중에 대전차포 중대는 전원 포병으로 전과를 하게 되었다. 더 이상 보병이 아니라 포병이 된 것이다.
심일은 대전차포 중대장 송모 대위와 영 맞지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불화를 버티다 못하고 춘천에서 잘 싸웠던 김 성 소령의 16 포병대대로 부대 전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옮겨간 16 포병대대에는 계급이 대위인 심일에게 마땅한 보직이 없었다.그는 할 수없이 사단 사령부로 다시 전속을 갔다. 북진할 때는 사단이 그에게 부여한 보직은 7연대 파견 사단 포병 연락 장교였다.다분히 위인설관[爲人設官]식인 보직이었다.
7연대는 육군의 최선두에서 북진하다가 춘천에서 잘 싸운 휘하 김용배 중령의 1 대대가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깐 ,대규모로 참전한 중공군의 공세로 급히 철수해야 했다.
철수하던 7연대는 10월 29일 자정 초산군 풍장면에서 철수로를 차단하고 맹공을 가하는 대병력의 중공군에게 붕괴당했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고 실종자들도 부지기 수로 발생하였다. 국방전사는 6사단 7연대는 이 전투에서 75%의 병력을 잃었다고 쓰고 있다.
6.25 초전때 가장 잘 싸웠던 최강 7연대는 이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짓거나 분대나 소대 단위로 중공군들과 북한군 내무서원들이 살기 띄게 처 놓은 포위망을 뚫으며 탈출해야 했다.
이 중에 열흘 만에 20 여명의 생존 중대원을 이끌고 제일 먼저 탈출해 나온1대대 1중대장 이대용 대위 같은 지휘관이 있는가 하면 무려 3개월 후에야 단독으로 강화도를 거쳐 탈출해온 3대대 인성훈 소령같은 분도 있었다.`
7연대 본부에서 근무하던 심일은 안태석 소위와 팀을 이루어서 남쪽으로 탈출하였다. 탈출 도중 두 장교에게 두 사람의 사병이 합세해서 네 명이 된 그들은 무턱대고 남으로 향했다.그들은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하염없이 산길을 걸었다..열흘간 걷던 그들은 11월 10일 경, 묘향산 부근 동창이라는 곳에서 한 화전민 외딴집을 발견하고 찾아 들어갔다. 이들은 화전민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너무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들었다.[전후 사정으로 보아 저녁에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국군이 북으로 진격해 들어갈 때는 그래도 그 쪽 북한 주민은 국군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참전하고 상황이 바뀌자 그들 북한 주민들은 180도로 방향을 바꾸었다.심일의 집주인 화전민도 불쑥 찾아온 심일 일행에게 밥을 해주고 잘 대해주는 척 했지만 속은 전혀 달랐다. 심일 일행이 잠드는 것을 본 그는 몰래 산밑으로 내려가 그곳에 온 중공군에게 국군 출현 밀고를 하였다.
새벽 무렵 심일 일행이 아직도 곤히 잠자고 있을 때 중공군 1개 소대가 나타나서 집을 포위하고 항복하라고 외쳤다. 안태석 소위와 사병 한 명은 앞 문을 열고 손을 들고 나가서 포로가 되었지만 심일과 다른 사병은 화전민 가옥의 뒷문으로 탈출하다가 매복한 중공군에게 사격을 당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손들고 나간 안태석 소위와 한 사병은 중공군의 포로가 되어 평북 압록강가 벽동군 우시면의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고 말았다. 뒤에 남겨진 심일의 유해는 현재 한줌 흙으로 산화했으리라.
한편 초산 풍장에서 연대 주력을 잃고 붕괴되었던 6사단 7연대는 간신히 신병들로 재편성해서 11월 20일에 평양 북방 말고개에서 압도적인 중공군과 싸웠지만 또 패하고 평양을 걸쳐 한탄강선까지 후퇴하였다;
1950년 12월 31일, 중공군이 발령한 3차 공세에서 밀린 7연대는 다시 한강 광진교를 건너 후퇴하였다. 부대가 경기도 안성 죽산면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있던 1951년 1월 어느 날이었다.
이때는 1대대의 김용배 대대장이 7연대 부연대장으로 가고 이대용 대위도 부대대장으로서 공석인 대대장 대리로 1 대대 지휘를 하고 있을 때였다.
연대 본부에서 부대 작전 회의를 하는데 연대 간부들이 다 집합하고 기다렸으나 연대장이 나타나지를 않았다.거의 한식경을 기다려서야 임 부택 연대장이 나타났는데 표정이 어두웠다.
임 부택 대령은 먼저 늦어진 이유를 말할 때 심일의 이야기가 나왔다.
"방금 심일 대위의 부모님이 다녀 가셨네. --무척 걱정하시는데 잘 위로해드릴 수가 없어서 정말 죄송했어."하고 임부택 대령은 말했다.
그때 7연대는 미귀환 간부들이 부지기 수로 많았었다.초산 풍장 전투에서 겨우 살아 남아 돌아온 간부가 희귀할 정도여서 실종자 심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별다른 신경을 쓰고 있지 않고 있었다.
[출처] '슬픈 영웅' 심일 소령의 이야기-1-|작성자 울프 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