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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81편)*
신데렐라 왕,
안동 김씨의 허수아비 철종(哲宗)왕이 된 강화도령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에서 철종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끄는 왕이 또 있을까.
왕족이지만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희박하던 사람이 왕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조선판 신데렐라 왕이 바로 철종(哲宗)이었다
(구군복 차림의 철종 어진)
요대목에서 잠깐 철종임금에 대하여 쪼매 알고 갑시다
조선 제25대 임금인 철종(서기 1831~1863년) 의 용안은 오늘날 남아 있는 어진(왕의 초상화)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철종의 외모와 어진에 얽힌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어진 속의 모습*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철종의 어진(보물 제1492호)은 그가 31세 되던 해에 그려진 것입니다.
비록 6.25 전쟁 당시 화재로 오른쪽 절반이 소실되었으나, 얼굴의 주요 부분과 왼쪽 몸체는 잘 보존되어 있어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이목구비*
눈이 가늘고 길며,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 있어 차분하면서도 예리한 인상을 줍니다.
코는 오뚝하고 곧으며, 입술은 단정하게 다물고 있습니다.
수염: 턱수염과 콧수염이 아주 정갈하고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왕실의 품격이 느껴집니다.
복장: 군복인 융복(戎服)을 입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다수 임금이 평상복인 익선관에 곤룡포 차림으로 그려진 것과 달리,
철종은 머리에 주립을 쓰고 손에는 채찍을 든 당당한 군왕의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강화도령'의 흔적
역사적 기록과 어진의 분위기를 종합해 볼 때, 철종은 어린 시절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만큼 골격이 건실하고 체격이 좋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어진 속에서도 어깨가 당당하고 전체적인 풍채가 당당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관상학적 특징
당시 어진을 그린 화가들은 인물의 외양뿐만 아니라 그 성품까지 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철종의 어진은 그가 세도정치 속에서 비록 권위는 약했을지언정, 인간적으로는 매우 온화하고 소박한 성품이었음을 보여주는 부드러운 눈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인해 온전한 전체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남아 있는 왼쪽 얼굴과 복장만으로도 조선 후기 왕의 위엄과 당시의 예술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철종은 순조 재위 31년인 1831년에 서울에서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손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었으니 철종은 아마도 공부에는 매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기본 소양을 갖추는 교육은 받았다.
왕이 된 후에 사가(私家)에 있을 때의 교육정도를 묻는 질문에 소학(小學)'까지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일자무식인 것처럼 철종은 그리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왜그럴까 강화도령이란 이름으로연결시켜보면 그 답이 나올까.
백성들은 강화도령 이란 별칭으로 철종(哲宗)을 불렀다.
강화도령은 '강화도 총각'이니 얼마나 친근한 표현인가.
철종은 태생부터 다른 별천지의 사람이 아니라 강화도에 살던 보통 총각이었고, 그런 그가 왕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일종의 친근한 마음에 경이감까지 담아서 강화도령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강화도령'은 또 다른 의미로도 쓰였다.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세도가들은 허수아비 왕 후보를 찾다가 간신히 뒤져낸 인물이었지만,
한갓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가 자신들의 왕이 된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철종(哲宗)의 출생배경을 낮추어 비아냥 대면서 강화도령 이라 그리 불렀을 것이다.
또한 철종(哲宗)이 강화도 에서 태어난 것처럼 오해하는 부분도 있다.
14살에 강화에 와서 19살에 왕이 되어 도성으로 돌아갔으니, 철종(哲宗)의 강화도 살이는 5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가 살았던 집을 용흥궁 생가'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용흥궁(龍興宮)은 원래 초가집 이었으나 철종이 왕이 된 후 기와집 으로 바뀌었고,
그의 아버지 은언군 (恩彦君)이 유배를 와서 살았던 집이었다.
아버지와 큰 형인 이명이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 당하고 난 뒤,
둘째 형 이경응과 함께 강화로 유배를 와서 살게 된 곳이 바로 용흥궁이었다
철종(哲宗)이 왕위에 오른 것은 1849년 그의 나이 만 18세!
아직 장가도 못간 총각이었는데,
이전 임금인 헌종이 아들이 없이 사망하자 강화도에서 자라면서 나무하고 농사짓던 강화도령 이원범(李元範)이 왕위에 올랐다
이원범(李元範)은 계보로 따지면 선왕이던 헌종의 삼촌뻘, 촌수로는 헌종과 9촌 사이였다.
조선 14대 왕인 선조보다도 더 심한 방계 중의 방계 출신 왕이었던 이원범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상하질서를 유독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사회에서 삼촌뻘이 되는 이원범(李元範)이 헌종의 양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이 때문에 순조의 왕비이자 왕실 최고 어른인 순원왕후(純元王后)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하에서 살아 남은
왕족 중에서 제일 가까운 혈육인 이원범(李元範)을 법적으로 효명세자의 형제로 만들어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왕을 마음대로 주무르게 된 안동 김씨들은 지금까지의 세도정치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해서 조씨 문중을 박살냈다.
김조순의 아들인 김좌근 과 김홍근이 모든 권력을 확고히 장악했으며, 집안에서 철종비를 내어 자그마치 한 가문에서 3대에 걸쳐 왕비를 내게 되었다.
요대목에서 잠깐 김조순의. 아들들에 대하여 알아봅시다
안동 김씨 세도의 중심 인물이었던 김조순(金祖淳) 은 슬하에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에서도 아들들은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하며 '세도 정치'의 핵심 축을 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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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김유근 (金逌根)
특징: 김조순의 뒤를 이어 안동 김씨 가문의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했습니다.
활동: 순조 시기에 이조판서 등 요직을 거쳤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습니다.
특히 헌종 즉위 초반에 강력한 권세를 휘둘렀으나, 나중에 병으로 정계에서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차남: 김원근 (金元根)
활동: 형인 김유근과 함께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주로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며 가문의 영향력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삼남: 김좌근 (金左根)
특징: 김조순의 아들들 중 정치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입니다.
활동: 철종 시대에 영의정을 세 번이나 지내며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전까지 사실상 조선의 국정을 좌지우지했던 인물입니다.
김조순은 아들들 외에도 딸인 순원왕후(순조의 비) 를 통해 왕실의 외척으로서 강력한 기반을 닦았습니다.
김유근, 김좌근 등 그의 아들들은 누이인 순원왕후와 협력하여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안동 김씨 문중에 인물이 멀쩡한 여인들이 그렇게 많았나?
(글쎄요~~~)
조선판 신데렐라 임금 그는 행복했을까.
순원왕후는 철종(哲宗) 즉위 후, 왕이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해야 한다는 점잖은 이유를 붙여 3년 정도 수렴청정을 했고,
철종(哲宗)이 21세가 되던 1851년, 헌종과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 가문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철종의 왕비로 삼았다.
철종(哲宗)은 강화와 연관되어 전해오는 이야기가 많다.
왕이 된 철종은 궁궐음식보다 어린 시절 강화에서 먹던 음식을 먹고 싶어했다고 한다.
시래기는 강화에서 가져와 먹을 수 있었는데 막걸리는 오는 도중 상해서 먹지 못해 매우 안타까워 했다고 한다.
왕이 된 후에도 강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 강화 사람들만 응시할 수 있는 특별 과거시험도 실시했고,
묵은 세금 빚을 탕감해 주기도 했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 철종(哲宗)은 매우 소박하고 어진 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세도가에 휘둘리는 왕의 자리가 힘겨울수록 가난했지만 자유로웠던 강화시절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 이원범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행상을 하거나 농부로 살면서 겨우 목숨만 부지했을 정도로 먹고 사는 일이 힘겨웠었다.
그 시절 원범에게는 혼인까지 약속한 양순이라는 처녀가 있었다고 한다.
원범은 왕이 된 후에도 강화도에 두고 온 양순이를 항상 그리워했다고 한다(TV에서 방영되었던 '임금님의 첫사랑')
만인의 왕이 되었지만 세도정치의 허수아비 왕이었기에 천민 신분의 양순이를 궁으로 불러들이지 못했고, 양순이 역시 원범을 잊지 못해 미쳐 돌아다니는 것을 궁에서 사람을 보내 죽여 버렸다는 얘기도 전해온다.
(이룬~뜨그랄! 사실인겨?)
철종(哲宗)의 죽음
철종(哲宗)의 통치는 정말 본받을 만했다.
재위기간 동안 철종(哲宗)이 자신의 뜻대로 사람을 쓴 것은 강화도에 살 때 먹을 것이 떨어지거나 했을 때 쌀을 꿔 준 이웃집의 이시원을 개성유수로 임명한 것이 전부였으니 얼마나 편하게 왕노릇을 했을까.
(비꼬는 것 아시져? ㅎㅎ)
처음 궁중에 들어왔을 때 삼손보다 더 튼튼했던 철종(哲宗)은 오직 술과 여자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5년의
궁중생활을 끝으로 33세라는 창창한 나이에 병으로 승하했다.
(흐흐흐~ 그래서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
철종(哲宗)이 궁중 내부 일로 바쁜 동안 전국에서는 민란과 소요가 일어났고, 서양의 배들이 동해와 서해에 출몰하기 시작했다.
한편 조선과 마찬가지로 내리막길로 들어선 청나라는 열강의 압력에 못이겨 북경조약을 맺고 통상을 허용했다.
(이양선)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어 시급한 대처가 필요한 때인데도 불구하고, 우물 안 개구리인 조선의 권신들은 눈을 딱 감고 과거부,
정경유착(政經癒着)가렴주구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챙기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멍청한 🐕새끼들, 그 돈들을 죽을 때 다 지고 가니.김씨 문중의 집 앞에는 돈을 싸들고 오는 놈들로 붐벼 번호표를 나눠줘야 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도처에서 굶어 죽어 가는데, 김씨 집안에는 귀한 게장이 몇 독씩 있었고, 집구석에서 파티라도 하는 날이면 술과 고기가 발에 채였다.!
종놈들도 너무 처먹어서 다이어트를 해야 했고, 하다못해 말이나 노새들까지 사람이 먹는 고급 음식에 물려 풀을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것들을 잡아 먹으면 광우병에 걸리니 조심해야 한다.
영의정 김좌근의 애첩인 나합
(羅閤)은 나주 기생이었는데,
김좌근의 총애를 받자 돈 수레가 몰려들었고, 그녀는 무소불위
(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둘렀다.
일개 기생 첩이 권세를 휘두르고 제 마음대로 돈을 챙길 정도였으니,
이 빌어먹을 나라는 진작 망했어야 했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때 그들이 할 수 없었던 것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뿐이었다
(그것도 요즘 세상은 가능하지)
(김좌근의 애첩 나합)안동김씨에게 철종(哲宗)의 죽음은 한 나라의 왕을 잃어버린 백성의 슬픔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꼭두각시가 사라진 황당함이었을 것이다.
농사를 지으며 건장했던 철종
(哲宗)이 이렇게 빨리 승하할 것이라곤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
결국 허둥지둥 당황하는 안동 김씨들을 노려보던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망나니'라고 불리던 왕족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었다.
기대하시라~~운현궁의 봄!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82편)*
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조선시대 왕들 가운데 후대의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뉜 경우는 심심찮게 있다.
태종, 세조, 광해군 등이 그런 경우인데, 조선왕조가 거의 수명이 다해 갈 무렵에 왕이 된 고종(1852~1919) 또한 역사적인 평가가 갈리는 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에 대한 평가는 인색하기까지 하다.
아마도 망국(亡國)의 책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과연 구국의 왕(황제)이었을까?
아니면 망국(亡國)의 왕(황제) 이었을까?
고종(高宗)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전에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과 은 그 제작과정에서 일제의 간섭에 의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역사의 현장에서 그 내용을 잘 활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선 역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고종(高宗)과 순종(純宗)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겠기에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듯이 망국의 역사를 조금씩 풀어갈 예정이다.
왕이 된 어린 소년
1863년 12월, 그 동안 술과 치마폭에 메우 바쁘셨던 철종이 기가 빠져 시름시름 앓더니 후사없이 창덕궁 인정전에서 33세의 삼삼한 나이의 청춘으로 세상을 떴다.
순조(純祖)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숭(追崇)되어 대비가 된 조대비(신정왕후, 헌종의 모후)가
옥새부터 챙긴 다음 김병국
(金炳國)에게 지시했다.
정원용을 원상(院相, 왕이 죽은 뒤 어린 임금을 보좌하여 삼우제를 지낸 뒤에 哭을 끝내는 26일 동안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벼슬)으로 삼으며,
흥선군의 둘째아들 명복(命福) 으로 대통을 잇게 한다."라고 한 후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명복(命福)이 아직 열 두살이었기 때문이다
(국립 전주 박물관의 고종 어진)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혈통으로 따지면 명복(命福)은 왕위에 오르기 힘든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복(命福)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외척인 안동김씨를 숙청하려는 대왕대비 조씨와 '상가집 개' 노릇까지 하며 기회를 엿보던 흥선군(興宣君)의 정치적 입장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명복(命福)은 익종의 후계이자 대왕대비 조씨(이하 조대비)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고종(高宗)의 어린시절 이름은 개똥이었다.
소년기에 명복(命福) 으로 개명했고, 왕이 된 뒤에는 이름을 재황(載晃)으로 바꾸었다.
형인 이재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흥선군(興宣君)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손쉽게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우루루 모인, 당시 끗발이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김씨 성 가진 대신들은 어이없게도 다음 왕통을 잇게 될 명복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흐흐~ 이제 이 인간들 벼락 맞을 준비 하셔!)
이렇게 해서 철종(哲宗)이 승하한 후 5일만에 즉위한 고종(高宗)은 1907년까지 자그마치 44년간(대원군의 10년 섭정 기간을 빼면 34년)을 재위했으나,
별로 똑똑한지 못한 데다 우유부단하여 개항을 했으면서도 이를 부국강병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열강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 결국 조선을 망국(亡國)으로 내몰고 말았다.
고종(高宗)의 재위기간은 격동의 시기였다.
즉 변혁과 침략의 시대였던 것이다.
조선 사회에 개화사상과 같은 새로운 가치관이 싹 텄으며,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2번이나 우리 영토에서 열강들이 전쟁을 벌일 정도로 숨가쁜 시기였다.
그러니 똑똑한 왕(王)이 통치를 했어도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시기인데 고종(高宗) 정도 가지고서야 감당하지 못한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
재수없게시리 조선은 꼭 국가의 큰 일이 벌어지면 이상하게도 얼뜨기 임금들의 통치시기였다.
조일전쟁은 선조, 병자호란은 인조,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했을 때는 고종!
고종(高宗)의 재위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만 해도 명단이 꽤 길다.
1. 대원군의 섭정과 개혁
2. 민씨 외척들의 발호
3.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4.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1876)
5. 임오군란(1882)
6. 갑신정변(1884)
7. 동학농민운동(1894)
8. 청일전쟁(1894)
9. 갑오개혁(1894)
10. 을미사변(1895)
11. 아관파천(1896)
12. 대한제국 건국(1897)
13. 러일전쟁(1904)
14. 을사늑약(1905)
이러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단 몇십 년 사이에 모두 일어났을만큼 고종(高宗)의 치세는 눈이 핑핑 돌아가던 시대였다.
다음은 운현궁의 흥선대원군편이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