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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자 사탄
-창 3: 1~6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또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사 에덴 동산을 만드셔서 보금자리로 주시고, 가정을 주셔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행복을 불행으로 바꾸어 버리고자 하는 사탄이 나타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고, 그들은 범죄하여 모든 주신 것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유혹자 사탄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사탄은 뱀을 통해 인간에게 접근을 하였습니다(창3:1)
오늘 말씀에서 보면 사람을 유혹한 것이 뱀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탄이 뱀에게 들어가 사람을 유혹한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사탄은 영적 존재입니다.
사탄은 어떤 것에든 들어가서 자기의 뜻대로 조종을 할 수가 있습니다. 돌이나 나무, 짐승, 사람에게 들어가 자신의 뜻대로 활동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 동산에 나타난 뱀은 어제의 뱀이 아니라 사탄이 유혹의 도구로 사용한 사탄의 도구인 것입니다.
물론 뱀은 사탄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뱀을 자세히 관찰하여 영적으로 이해를 하면 사탄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뱀은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량의 독이지만 치사율은 대단히 높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사람을 죽이는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악한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탄이 말하는 교훈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였다가는 사람은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처럼(마16:11) 사탄의 교훈을 주의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어버리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뱀은 냉혈동물입니다.
사탄에게는 양심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탄을 [우는 사자]에 비유하였습니다(벧전5:8). 사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냉혈적 적개심을 가지고 오직 멸망을 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에게 우호적이었다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 뱀은 혀끝이 갈라져 있습니다.
즉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 하셨습니다(요8:44). 그래서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사탄의 밥이 되고 맙니다.
또 뱀은 통채로 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 대적 마귀가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을 하였습니다(벧전5:8). 사탄은 사람을 데리고 놀다가 돌려보내는 존재가 아니라 완전히 멸망에 빠뜨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사단과 우호적으로 지내다가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뱀은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위 환경에 잘 적응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사탄도 위장술의 대가입니다. 고전11:14에서 바울은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해 줍니다. 겉모양만 봐서는 절대 사탄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그의 교훈이 진리인가, 그리고 열매가 옳은가 하는 것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마7:16).
또 뱀은 방향을 예측 못합니다.
전후좌우 방향전환을 잘 합니다. 이렇게 안되면 저렇게 우회하여 목적을 달성을 합니다. 성경은 이런 뱀의 모습을 간교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간교합니다. 간교하다는 것은 악한 지혜를 말합니다. 사람을 넘어뜨리는 다양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사탄의 공격을 막아낼 재간이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뱀은 정확하게 공격을 합니다.
뱀의 공격 성공률은 거의 100%에 가깝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는 자를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한 적이 없습니다. 수천 년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사람을 시험하여 넘어뜨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씀의 지혜를 습득하여 간교함을 간파해 내는 능력을 배양하여 승리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뱀을 통하여 사탄의 속성을 알아보았습니다. 사탄을 대적하는 좋은 지식으로 삼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탄의 유래에 대해서는 겔28:12~17, 유1:6, 벧후2:4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사탄의 유혹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창3:1~6).
첫째, 사탄은 혼자 있을 때 부드럽게 접근을 합니다(창3:1).
아담과 하와가 같이 있으면 쉽게 유혹할 수 없다는 것을 사탄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와가 혼자 있을 때를 택해 친구처럼 접근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들이 혼자 있을 때, 우리를 돕는 자들을 떠나 혼자 있을 때. 연약할 때 접근을 해옵니다. 부드럽게 친구처럼 접근해 오기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떠나 있지 말아야 합니다. 함께 모이고 교제하고 배우고 기도하고 봉사하며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탄은 각개 격파를 하기 위해 분열을 유도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속으면 사탄을 이롭게 하고 우리들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 되기를 힘써야겠습니다. 히10:24~25에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 하자]고 한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합니다(창3:1).
사탄은 동산의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의로 먹어도 좋다는 무한한 자유를 빼고 말했고,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빼고 부정적으로 들리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와는 사탄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멋대로 주물러 혼잡케 한 의도도 몰랐고, 혼잡된 것도 몰랐으므로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을 하고,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오해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뒤집어 자기의 교리를 만들어 주입시켜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소위 이단이라는 종교들이 꼭 이런 형태로 사람을 넘어뜨립니다.
셋째, 사탄은 의심을 주어 하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창3:1에서 하와에게 말을 걸어온 사탄은 [참으로]라는 말을 집어넣어 의심을 유도했습니다. 회의를 품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너무 절대적으로 믿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의도대로 해석하여 주입시키는 시탄의 방법입니다. 이단들이 꼭 이 방법을 씁니다. 이미 확실한 말씀들을 교묘한 말로 회의를 품게 만들어 자기들의 거짓된 교리가 진리라고 주장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할 때 생명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말씀은 그렇게 많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고 행하게 하지 아니하고 자꾸 요리 조리 살펴서 이상한 생각들을 유도하여 거짓 확신을 심어 주어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창3:4). 그러므로 이런 시단의 시험을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넷째, 사탄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합니다(창3:5).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는 것을 금지하신 것은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인간 위에 영원히 군림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를 지킴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축복을 영원히 누리게 하시려는 깊은 사랑의 의도에서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사랑을 의심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이래로 인간에게 베푸신 놀라운 애정과 복을 까맣게 잊어버리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은혜, 사랑, 축복을 잊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사명을 무거운 것으로 여기게 만듭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이 무한한 기쁨과 자유, 평안과 기쁨인데도 이를 뒤집어 부담스럽고 부자유하고 불합리 부조리하게 여겨지게 만듭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부자유하고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바로 그 때가 시험의 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여겨지지 아니하고 쑥처럼 쓰게 느껴지거든 사탄의 시험이 시작되었음을 눈치 채고 그 시험을 단호하게 이기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탄은 우리를 멸망시키는 게 유일한 목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나 말씀은 우리를 영원히 복되게 하는 목적밖에는 없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사탄은 이런 하나님을 우리에게 거짓과 술수를 써서 떠나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진리의 무기로 이를 분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귀는 평생 시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싸워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하에 있기 때문에 믿음과 진리만 가지고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도 말고, 가볍게 여겨 방심하지도 말고 깨어 있어(벧전5:8), 믿음을 굳게 하여(벧전5:9)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타락이 가져온 변화
창 3: 7-13
인간의 타락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변화는 인간이 극도로 불행하게 된 부정적 변화입니다. 그런 부정적 변화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모든 인생들에게 있는 불행입니다. 이런 불행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서 죄의 해악과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께 의존되어 살아가는 영적 변화의 결단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영적 순결을 잃어버렸습니다(창3: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며,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사단은 말하였습니다. 이런 사탄의 말은 반은 이루어졌지만 반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즉 눈이 밝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지게 되지도 못했고, 어떤 능력을 갖게 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밝아진 것도 부정적으로 밝아진 것입니다. 그들에게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게 되는 그런 부정적 변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말은 100% 거짓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말은 100%가 거짓입니다.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말을 하지만 나중에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보면 100% 거짓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교훈이나 유혹 등에도 무엇인가 유익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만약 무언가 타당성이 있는 말들을 한다면 그것은 큰 것을 빼앗으려는 미끼이지 우리를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쨌든 눈이 밝아진 아담과 하와의 행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제일 먼저 본 것은 자기들의 벗은 몸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여 나뭇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그들이 벗었다고 탓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외모를 보고 기뻐하거나 싫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 전체를 보고, 그들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하나님은 그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타락하여 그들이 영적 순결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타락하여 영적 순결을 잃어버린 영적 수치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고, 드러난 알몸이나 가리면 된다는 사고의 부정적 변화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 영적 순결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 영적 타락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육체적 결함이나 단순한 생활상의 작은 실수들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알지만 자신이 하나님을 떠나 있기에 영적으로는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고, 생명을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엄청난 위험과 불행 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몸이나 가리고 작은 실수나 허물 같은 것이나 가리고 감추고 고치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냐 하는 식으로 무지하고 어리석게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영적 순결을 잃어버린 인생의 실상입니다.
2. 하나님을 피하게 되었습니다(8절).
오늘 말씀에서 보니 아담과 하와에게 [날이 서늘할 때]가 닥쳤습니다. 이 때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행동에 대하여 판결을 받는 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런 서늘할 때를 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사람은 누구나 [서늘한 때],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야 하는 때, 자신의 모든 삶에 대하여 판단을 받는 때가 도래합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때문에 그 때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바로 그 서늘한 때가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행해야 하겠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하시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때 전과는 다르게 반응하게 되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뵙는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그들에게 너무나 반가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음성은 복되고 너무너무 기다려지고 사모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두려워졌습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두려움에 피하고 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큰 화를 당할 것 같아서 공포가 밀려왔고, 그들은 피하고 숨고 난리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을 뵙는 것이 공포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두렵고 외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담스럽고 하나님과의 대면은 어떻게든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반면에 사탄의 소리에는 귀가 번쩍 뜨입니다. 사람의 소리에는 귀가 번쩍 뜨입니다. 세상의 소문, 세상의 지식, 세상의 부름에는 귀가 번쩍 뜨입니다. 이것이 타락으로부터 온 부정적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의 사람들이 꼭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셔도 왼만하면 움직이지 않습니다. 뭔가 절박한 사건이 생기면 혹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끌릴까 그 전에는 절대 하나님의 음성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합니다. 진리를 듣는 것에 정말 알레르기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신문기사에는 눈이 번쩍 뜨이며, 사람의 말, 세상의 소리에는 민감하게 반응을 합니다. 하나님을 피하는 만큼 세상과 마귀,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에게 온 두 번째의 부정적인 변화입니다.
3.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창3:9~11).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아담이 어디 숨어 있는지 몰라서가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과 아담은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무슨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지금 어디에 숨어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누가 너의 벗었음을 고하였느냐? 네가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물으시는 것은 그의 실존을 올바로 파악하기를 애타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호소인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었으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며 사랑할 때 그는 그 누구보다도 복되고 영화로운 인생을 살았지만, 이제 마귀의 거짓을 믿고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그 모든 특권과 복을 상실하고 불쌍하고 불행한 존재로 전락되어 있는 비참한 현실을 보고 깨달으라는 애타는 호소를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비참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하나님께로 전적으로 돌이키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라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며 돌아오기를 호소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 닥친 일이 어떤 일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만큼 그는 어리석어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지를 깨닫지를 못하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정말 봐야할 것을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돌이키거나 깊이 회개하거나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악해 진 것입니다. 그들을 거짓으로 속여서 자기의 종으로 만들어버린 마귀를 어느 새 닮아 버려서 숨기고, 감추고, 변명하고, 죄를 끝까지 시인하지 아니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반 사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탄의 종, 사탄의 자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의 인생들을 살펴봐도 꼭 이렇습니다. 자신의 실존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불신앙과 죄가 얼마나 자신을 망하게 하고 있는지, 그 멸망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하는 것들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정작 보아야할 자신의 참 모습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하며, 설령 인정을 한다고 하여도 감추고 변명하고 남을 탓하는 등 회개를 거절합니다. 이것이 타락이 가져온 세 번째 부정적 변화입니다.
4. 하나님이 주신 관계를 다 깨뜨려 버렸습니다(창3:12~13).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하나님을 모시고 사람과 사람이, 그리고 사람과 모든 짐승들이 이름다운 조화와 질서 속에서 전혀 무리가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모두가 깨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 탓을 하고 원망을 하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짐승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세상은 사랑의 법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증오와 싸움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부정적 변화가 창4장을 보면 금방 나옵니다. 가인이 의로운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그리고 가인의 후예들은 무기를 만들기 시작을 합니다. 라멕은 사람 죽인 것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이후로 세상은 계속 타락하고 부패하고 악해져서 서로 죽이고 빼앗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쟁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사랑해야할 관계인 부부가 싸우고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고부간이 싸우고 형제간이 싸우고, 민족과 민족이 싸우고 나라와 나라가 싸우고, 나와 다르기만 하면 아무하고나 싸움을 해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이 가져온 네 번째 부정적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범죄와 타락은 인간의 내면에 엄청난 부정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 모든 부정적 변화를 한 마디로 표현을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마귀의 자녀로 전락을 한 것입니다. 모든 복을 다 소유한 존재에서 아무 것도 좋은 것이라고는 가진 것이 없는 비참한 존재로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구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이미 그런 존재에서 은혜를 입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닫고, 다시 그런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성도된 우리들은 부정적으로 변질된 우리들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진리를 따라 새롭게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