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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하는 백성들
출 16:1-12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출 16:1-12 / [만나를 약속하시는 여호와]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때가 애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가 나온 지 둘째 달 열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2) 그곳 광야에서 이스라엘 온 공동체 사람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3)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밥이라도 실컷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까지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차라리 그때 애굽에서 여호와의 손에 죽었다라면 맘이라도 편하였겠다.' 4) 그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먹거리를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 주겠다. 그러면 너희 모든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하루 먹을 만큼을 날마다 거두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를 시험해 보려는 까닭이다. 5) 그렇게 하다가 여섯째 되는 날에는 너희가 거둔 것을 되어 보면 평소에 거두어들인 것보다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에게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 7) 그리고 아침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너희가 여호와를 향하여 불평을 늘어놓는 소리를 그분이 친히 들으신 까닭이다. 우리가 무어라고 그렇게들 우리에게 불평을 늘어놓는거냐?' 8) 모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시고 아침이 되면 밥으로 배불리실 것이다. 너희가 불평을 늘어놓는 소리를 여호와께서 들으신 까닭이다. 도대체 우리가 누구냐? 너희가 우리에게 불평을 늘어 놓는다마는 그것은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불평을 늘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9) 모세가 아론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온 공동체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여호와께서 너희가 불평하는 소리를 다 들으셨으니 모두 여호와 앞으로 나아오라고 말입니다.' 10) 아론은 이스라엘 온 공동체에게 그렇게 명령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광야를 바라다보았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2) `이스라엘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놓는 소리를 내가 다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해질 무렵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이 되면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리라. 그때에 너희는 나 여호와가 너희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노예에서 구속되는 은혜에 감사하기는 커녕 과거의 삶을 회상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그런데도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원망의 말을 들으시고,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1-3)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한 지 한 달 만에 신 광야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 이번에는 과거 애굽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며, 그들이 고기와 떡으로 배불리 먹은 것처럼 과장하며 원망을 합니다(3). 하지만 실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비참한 노예 생활로 괴로움이 극에 달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출 2:23-35),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사실을 과장하고 왜곡하면서, 애굽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함으로 자신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욕되게 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렇게 어려운 일을 당하기만 하면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불평과 원망은 습관이고, 감사와 찬양도 습관입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4-5) 하나님께서 은혜를 원망으로 갚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분노를 발하시기보다,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누워서 떡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시면 매일 나가서 일용한 양식을 거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나 하지 않나 살피십니다.
너희의 원망은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6-1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향해 원망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한 것이라고 명확히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함을 들으시고 저녁에는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실 것이라고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그 메시지가 모세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구름 속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주심으로 확증하십니다.
적용: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로서 생활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혹 불평과 원망이 습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이 현재 처한 상황만 보지 말고,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이후에도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과 감사의 삶을 살아갑시다.
감사는 ‘Doing’(행함) 감사도 있지만 ‘Being’(존재) 감사도 있습니다. 이 존재 감사가 범사 감사입니다. 지구가 매일 변함없이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고 아침이면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밤낮이 바뀌는 것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사과 한 알도 만들 수 없습니다만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신비롭게 열매를 맺습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감사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존재 감사’ 혹은 ‘범사감사’입니다. 감사의 반대말은 ‘당연하다’입니다.
< 설 교 >
원망에도 들으시는 하나님 - 성도의 물질관
출애굽기 16:1-20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는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려움을 만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겠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샘과 종려나무 그늘이 넉넉한 엘림을 만나는 은혜 속에서도 때로는 '신 광야'에서의 배고픔도 겪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신앙을 힘들어하거나 혹은 신앙 자체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힘들어하는 신앙의 근본적 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광야에서 사흘동안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그 문제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불순종의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어려움은 사실 환경적인 어려움보다는 우리의 변하지 않은 마음, 본성, 즉 '불순종의 본성'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부분을 치료하시기를 원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피부병이나 치료하시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관절염이나 치료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치료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불순종의 본성을 치료하시기를 원하는 거예요.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속내를 보여주실 때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심이라" 백성을 광야로 이끄시는 것, 때때로 쓴 물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변하지 않는 불순종의 본성을 치료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그 뜻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믿음으로 광야를 걸어갑니다만 문제는 그 광야의 걸음걸이가 사흘을 못 간다는 데 있습니다. 출발은 좋은 마음으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홍해를 건널 때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군사들을 막아주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야를 걸어가면서 그런 신앙적인 모습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사흘이 지나면서 그들에게서 감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한 가지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요구는 것이 아니라 '물'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의 길, 곧 수르 광야, 신 광야를 가면서도 왜 하나님이 이 광야를 가게 하시는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옛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은 본성만 자꾸만 드러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가 그들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시험하시겠다고 알려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율례와 법 보다는 눈 앞에 보이는 물과 떡이 더 큰 관심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목말랐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례는 소용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에 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엘림'을 찾아다닙니다. 마치 퇴출 위기에 놓여 있는 은행을 살리기 위해 돈 보따리를 들고 도지사나 시장을 찾아다니는 사람과 같아요. 나도 살고 너도 살자고 하는 일이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나도 죽고 너도 죽는 자살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고난에 처할 때면 비밀스럽게 여러분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의지해 처신을 하지요. 내가 사는 길이라고, 우리 가정을 살리는 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죽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광야를 우리에게 주신 의도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출제 의도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답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1. 원망 - 들으시는 하나님(16:1-12)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로 하나님께서 다시금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애굽을 떠난 지 두 달 반이 된 때였습니다. 가져온 물은 물론 양식도 이제는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을 때, 떡을 배불리 먹던 그때 죽었어야 좋은 것을 모세 당신이 잘못 판단해서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애굽에 있는 것인데 당신이 잘못 판단해서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모세에게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자꾸 불평을 하다 보니까 이력이 생긴 것이지요. 불평이 왜 생깁니까? 불평이 나오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아직도 '애굽'에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주인 몰래 고기 먹을 때가 좋았다고 말하는 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우리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나의 자화상이예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삶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우리 안에서 분명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4번씩이나 원망을 했는데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원망을 들으심이라"고 그랬어요. 7절, 8절, 9절, 그리고 12절에서 우리 하나님은 원망을 들으셨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원망을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찬송을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여기서 찬송을 들으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왜 내가 너희의 원망도 들었다고 말하는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다 들으신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이제는 순수한 불평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대면서 주의 종을 대적하는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응답을 하는 이유가 뭘까? 정말 그들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에 응답을 해주신 것으로 안다면 그건 착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큰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무능해서 고기도 못 주고, 떡도 못 주고, 물도 못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이 원했던 것은 '새로운 질서'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떡보다도 물보다도 더 귀한 것을 그들로 알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불평하고, 또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엘림도 주시고 만나주시고 고기도 주셨어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불평하지 않아도 엘림을 준비해 놓으셨는데 엘림에 도착하기 바로 코 앞에서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한 거예요. 엘림을 출발해서 어느 지점에 갔을 때 이제 그들이 먹을 양식이 떨어짐으로 만나를 예비해 놓으셨는데 바로 그 코앞에서 먹을 것 없다고 원망을 한 거예요. 하나님의 준비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 불평을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새로운 양식 만나로 매일 먹여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보다 성숙하고, 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우리의 신앙의 행위를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것보다도 귀하다고 하는 것을 깨닫기고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만나의 공급 - 성도의 물질관 (16:13-20)
출애굽의 감격을 노래한 다음 장인 본문에 보면 그들이 신광야로 들어가자마자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아서 떡과 고기를 배불리 먹을 때가 그립구나, 차라리 거기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면서 애굽타령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들은 척 하지 아니하시고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신 본문의 말씀을 좀 자세히 살펴보면, 물질은 어디에서 오며 어디에 써야 하는가 하는 물질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며, 넉넉히 주십니다.
16장 13절부터 보니까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주셨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이슬이 마른 후에 보면 둥글고 서리 같은 가늘고 흰 것이 남게 되었는데 그게 만나입니다.
아침마다 모든 백성들이 일어나 들판에 쌓인 만나를 거두어 먹었는데 한 사람당 한 오멜씩 거두었습니다. 한 오멜은 2.3리터로 아주 넉넉한 양입니다. 모두가 담아왔으나 한 번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그들을 실컷 먹여 살리셨는데, 그들이 원망하고 불평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식량을 멈추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그래도 끊임없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하라"(딤전 6:17)
2. 물질은 오늘, 함께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나를 거두어다가 오멜에 담아보니까 힘 센자가 많이 가져온 것도 한 오멜이요 약한 자가 가져온 적어 보이는 것도 담아보면 정확히 한 오멜 이었습니다. 강자도 약자도 하루에 필요한 양식은 똑같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내일 필요한 것은 내일 또 내려 주실 것이니, 오늘은 오늘 먹을 것만 담아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 더러는 말을 듣지 않고 내일 모레 것까지 많이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채우심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이요, 자기만 먹고살겠다는 욕심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 그것이 다 썩어서 벌레가 나고 냄새가 나서 견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책임지신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은 그냥 양식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나 혼자 내일 모레 10년 뒤까지 먹으려고 쌓아둘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이 땅에 사람을 몇 명 태어나게 하시고, 그들에게 얼마의 양식이 필요한 줄을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먹을 양식을 충분히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들은 굶어 죽는데, 부자 나라는 음식쓰레기 때문에 골치를 앓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강자의 독식을 책망하시며 혼자 쓰려고 모은 것을 썩거나 녹슬거나 좀먹게 하십니다. 음식쓰레기 소각하면 다이옥신이라는 강력한 발암물질이 나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주신 물질을 공익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은 물질 때문에 형제끼리도 싸우게 되고, 그것 때문에 질병을 앓게 되고 살맛을 잃게 될 것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약 5:1)
만나는 일인용, 일일 양식입니다. 다음날에는 썩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얻는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주신 것을 의미 있게, 의로운 일에 나눠 쓰려고 하지 않고 그것을 30년 뒤의 자식을 위해서 모아 두기만 하면 그것은 썩고 녹슬어 결국 불같이 자기를 쏘게 됩니다.
3. 물질보다 물질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21-30을 보면,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아니하셨다는 내용을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물질을 바라보는 날이 아니라 물질과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쳐다보는 날입니다. 엿새 동안은 세상에 집착했고 만나 내린 들판만을 바라봤을지라도, 안식일 날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눈을 위로 향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날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데 힘을 써야 했고 물질을 구하러 들판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 거두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미리 이틀 분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거두어다가 삶고 구워서 미리 안식일에 먹을 양식을 준비하도록 일러주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위해서 미리 주신 음식은 다음날이 되어도 썩거나 벌레가 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에는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그들의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주일도 영적인 안식일입니다. 일주일 동안 세상일에 동분서주했는데 여러분의 힘과 지혜는 곳곳에서 한계가 드러났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도와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풀리지 않고 꼬여만 가는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문제를 놔두고 마음을 털어놓고 쉬며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입니다. 네 복잡한 문제를 내게 맡기고 너는 쉬라는 것이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날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일이 망가질 것 같고, 바이어를 만나지 않으면 수출길이 막힐 것 같고, 복잡하게 얽힌 문제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놔두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아침부터 푹 쉬는 것,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이 주일에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놔두고 온 그 일의 매듭을 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게 안식일을 누리는 것이며 이것이 믿는 자의 축복입니다. 여러분은 주일의 축복을 평생 누리시기 바랍니다.
4. 물질을 어디에 써야 가장 오래 남을까요?
32-36절에 보면 “항아리를 가져다가 만나 한 오멜을 담아 후손 대대를 위하여 간수하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게 될 때에 후손들이 묻기를 “조상들이 정말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까? 그때 정말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먹이고 마시게 하셨습니까”하고 물으면 그들에게 증거를 보이기 위하여 금 항아리에 만나를 채워 보관하라는 것입니다. 주신 물질을 후대의 신앙교육을 위해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자녀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증거하기 위하여 항아리에 담아 보관한 만나는 몇 년이 가도 결코 썩지않게 해 주셨습니다. 주신 물질을 하나님 공경하는데 사용하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며, 후대의 신앙교육에 사용하면,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됩니다. 주의 복음을 전하는데 사용하면 물질의 결과가 영원히 남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신기한 음식인 만나를 주셔서 그들로 먹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생명을 부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도 없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주어 먹게 하신 하나님, 금과 은과 보석으로 성막도 짓게 하신 그 하나님, 자녀교육을 위해서는 수년이 가도 만나를 썩지 않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고 물질을 바라보고 살지 말고 날마다 주일마다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그러면 우리의 성실한 삶을 날마다 복되고 넉넉하게 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크고 새로운 일을 행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광야에 나타난 영광
출 16:1-12, 빌 4:10-13, 마 6:25-34 / 인명진 목사
오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 우리가 살고 있는 광야를 살았던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금 시제를 바꾸어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스라엘이 살았던 광야를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우리가 살고 있는 광야에 살았다는 표현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살았던 광야는 옛날의 광야입니다. 옛날의 광야는 나와 상관없는 광야로 느껴질 수도 있고, 피부로 쉽게 와 닿지 않는 광야입니다. 오늘 대한민국, 우리가 살고 있는 현주소를 말하라고 한다면 광야시 사막리 666번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나라의 주력 산업이었던 조선과 해운산업이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이 현상이 경기침체로 인해서 오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분야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경제지표만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인간성이 다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광야는 무엇입니까? 내일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 불어오는 모래바람으로 내일이 안 보이는 상태를 광야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광야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별할 수 없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모래 바람으로 불과 몇 미터 밖을 내다볼 수 없는 장소에 살고 있습니다. 변해서는 안 되는 성의 가치, 가정의 가치가 변해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마치 모래 언덕처럼 침식되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모래 폭풍이 불어 조금 전까지 보이던 지평선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광야가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도 척박하고 가혹하는 점입니다. 누구 하나 돌봐 주는 사람이 없는 냉혹한 세상입니다. 사막은 매우 위험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사람도 독해야 광야에서 살아남듯이 사막에 살아남은 생물들도 거의 대부분 독합니다. 방울뱀에 물리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죽습니다. 전갈에 물리면 온 몸이 퉁퉁 부어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가 힘듭니다. 사막의 온도는 50도를 넘게 올라갑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인간은 탈진합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길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전혀 방향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른바 방향성의 상실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위험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영성 신학을 공부하면서 사막에 있는 정교회 소속 수도원에서 약 3주 정도 훈련받은 적이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지 이틀째 되는 날 수도사 한분이 아침에 도시락 하나와 물통 하나를 넘겨주면서 사막으로 훈련생 일행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것이 수도자를 위한 첫 번째 훈련이었습니다. 온도는 섭씨 약 50도 넘게 되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는 풀 한포기도, 한줌의 그늘도 없었습니다. 오직 모래와 작열하는 태양만이 이글거리고 있었습니다. 사막 한 가운데 쯤 가더니만 저녁 해지기 전까지 사막에서 기도하다가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기는 것이 공포였습니다. 이곳에는 모래 색깔을 띤 방울뱀이 많아 물리면 비명도 지르지도 못하고 죽으니 방울뱀을 조심하라는 것과 한 발자국 떼면서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을 둘러보지만 보이는 것은 모래뿐이고, 동서남북이 어디인지를 몰랐습니다. 가진 것 때문에 더 불편하고,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은 배설물과 같았습니다. 정말 제가 태어나서 가장 두려운 때가 그때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광야라고 말하는데 과연 어떤 곳이 광야요 사막일까요? 하버드대학의 조지 스타이너 교수는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분인데, 우리말로 번역 된 “톨스토이냐 토스토예프스키냐”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진리에게 미래는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그분이 주장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서구 사회는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을 들으며 힘을 얻고 앞을 향해 전진해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모든 것을 보고서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서구 사회는 이 세상은 좋은 세상이라고 믿어 왔습니다. 이런 세계관과 신앙관으로 생의 활력을 공급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념들은 결국 하나님과 이 세상과 미래는 근본적으로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낭만주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스타이너 교수는 이러한 낭만주의 세계관은 우리 시대에 와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을 지키겠다고 만든 무기가 타인을 죽이는 도구로 변하였고, 전 세계를 전쟁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제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사지로 내몰고 있습니다. 생태계는 더 이상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도리어 인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사실에 대해 긍정하고 싶지 않지만 긍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세계 속에 살면서 우리의 보이지 않는 마음 밑바닥에 이런 생각을 깔고 있습니다. 미래는 근본적으로 불길하고 위태롭다. 역사의 조류는 우리를 대항해서 밀려오고 있다. 우리에게는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는 고속도로가 없다.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절망적이다. 우리는 이 세상은 광야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스타이너 교수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설교자의 용어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서구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성경의 그림 안쪽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 그림 밖의 세계를 살고 있습니다. 현대과학이 주도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고전 작품들이 만든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서구 사람들이 살았던 세계는 성경의 세계였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성경의 이야기, 성경의 이미지, 성경의 언어가 서구 문화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지난 수십 년 간에 걸쳐서 바뀌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떨어져 나갔으며, 성경에 대한 문맹이 보편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세속화 현상이 널리 퍼진 것입니다. 교회가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서구 사회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거의 동일한 현상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불과 100여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경이적으로 성장했던 한국교회는 경제성장논리를 따라 교회성장이라는 금단의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그 결과 신앙의 본질인 성경적 교회를 등한히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보다는 자신을 위로하는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공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성경적 교회보다는 성공하고 성장하는 교회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모였지만 예수 정신이 없는 교회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경 말씀을 전한다고 말하지만 성경 밖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대학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대학생이 20% 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세속화 현상은 전 지구촌의 현상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광야의 전주곡이 온 세계를 향해 이미 울려 퍼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저들은 광야에 접어들자마자 회중 전체가 일어나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여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합니다. “만일... 만일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죽었다면...” 지난 과거가 너무도 달콤하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시절이 좋았는데, 왕년에 내가”과거를 그리워하는 것, 이른 바 향수라는 그것입니다. 향수는 과거의 시간 속으로 여행하고픈 간절한 바람입니다. 문제는 향수 속에 등장하는 과거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라 점입니다. 그랬으면 좋았겠다고 꿈꾸는 과거라는 점입니다. 향수는 과거를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것입니다.
오늘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저들은 고기 가마 곁에서 고기를 먹던 일과 떡을 배불리 먹던 일을 회상합니다. 남의 나라 종살이 하는 주제에, 아이도 마음대로 낳을 수 없어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나일 강에 악어 밥으로 던져야 했는데, 무슨 향수와 추억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저들은 명절에 한번 먹었던 고기, 한때 배불리 먹었던 양식으로 애굽에 대한 전체 추억으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향수라 부르며 낭만적인 과거를 회상하는 것과 달리 다른 회상을, 다른 종류의 추억을 말하고 있습니다. 좋았던 시절만 회상하는 추억이 아니라 다른 회상이 있습니다. 이 회상을 가리켜 저는 “포괄적 추억”(Wholistic Remembering)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과거를 기억할 때 포괄적으로, 전체적으로 기억하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푸른 초원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동시에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포괄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침묵과 진노도 동시에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포괄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은, 삼겹살 지글지글 구웠던 애굽의 불판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노역 현장에서 자신들을 채찍질 했던 공사판 십장을 동시에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괄적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좋았던 부분만 기억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 광야의 현실에 대해 불만을 터뜨립니다. “당신들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온 회중이 굶어죽게 되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때 모세와 아론은 무엇이라 대답하였습니까? 9절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오늘 이 말씀 안에 아주 독특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출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디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어느 곳에서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광야 아닙니까? 사막 아닙니까? 내일의 불안 때문에 오늘 편히 잠들 수 없는 곳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기대치가 다 무너진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입니다. 저들도 알지 못하고, 저들의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내리신 것입니다. 그것도 광야생활이 끝날 때까지 말입니다. 이 광야의 역설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말고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시선을 바꾸어서 이사야의 경험을 살펴보겠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영광을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본 것이 언제였습니까? 성경은 매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말입니다. 가장 의지했던 임금이 죽던 해에, 나라와 인생이 혼란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바로 그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대 우리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이야기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애굽 경제가 제공했던 안전이 옛날이야기가 되었을 때, 애굽에서 들고 나온 물과 양식이 바닥이 났을 때, 사람들은 광야 너머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리라고 기대도, 예측도 할 수 없는 장소, 광야에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 알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생각납니다. “너희 목숨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양식을 공급하십니다. 단지 저장할 양식이 아니라 양용할 양식을 말입니다.
매일 먹는 양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성한 선물입니다. 먹는 문제를 신앙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생활신앙이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저장할 양식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밥상에 올려진 것들을 대할 때마다 그분의 인자하심은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날마다 찾아오시는 그분의 성실하심은 참으로 크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도시 속에 살지만 광야정신으로 만나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만나경제를 통해서 주시는 광야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광야정신을 사막에 파묻어버렸습니다.
만나경제,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만나정신을 잃어버리면 우리가 가진 만나는 썩고 변질 됩니다. 우리가 왜 광야정신 만나정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까? 우리는 예측하지 못하는 내일 위해 만나를 쌓아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만나를 쌓아두려고 합니까? 만나 저축 은행을 세우는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충분히 이렇게 반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선을 그어서 말씀하십니다. “만나는 내일까지 저축할 수 없다. 내가 공급해 주는 매일 양식 만나는 나 자신을 너무도 닮아있다.” 만나를 내일까지 저축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저축할 수 없습니다. 어제 먹은 만나로 배가 부를 수 없듯이 어제 만난 하나님으로 영혼의 만족이 없습니다. 사람이 만나를 소유하고 저축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소유하고 저축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만나를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듯이 하나님을 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습니다.
만나가 날마다 필요하듯이 하나님은 날마다 필요하신 분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약속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일용할 양식은 항상 우리가 필요로 할 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일용할 양식이 인생 끝 날까지 끊어지지 않고 공급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0세기의 최고의 사상적 전환자를 꼽으라 한다면 저는 주저 없이 러시아의 솔제니친을 첫 손가락에 꼽을 것입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유토피아로 보고 젊은 시절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강제노동수용소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아름다운 소설을 쓰게 됩니다. 현대판 광야 이야기입니다.
강제 노역이라는 광야생활을 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료스카로 매우 신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강제 노동과 감옥이라는 끔찍한 환경도 그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다른 통로, 그가 갖고 있는 공책으로부터 큰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복음서 절반을 기록해 놓은 공책이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있던 엘료스카가 그의 옆에 있던 이반을 돌아보며 말합니다. “여보시오. 여기를 보시오. 당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고 있소. 그런데 왜 당신은 기도하지 않소!” 그때 이반이 대답합니다. “내가 말하지요. 엘료스카씨 왜 내가 기도하지 않는지를 말이요. 우리가 드리는 모든 기도는 모두 저 높은 곳으로 보내지는 우리의 원망과 불평 같은 것들입니다. 당신은 이 기도들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내가 볼 때 다음 두 가지 중의 하나로 결말지어질 것 같습니다. 첫째는 그 기도들이 저 하늘까지 도달하지 못하거나, 둘째는 도착해도 수취거절이라는 도장이 찍혀서 다시 돌아오거나 말입니다. 엘료스카씨, 당신이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해보시오. 당신은 우리가 드리는 기도보다 더 나은 것이 있소? 우리 모두 이곳, 이 지옥 같은 곳에 있은 지가 25년이나 되었소. 당신과 나 각각 25씩 말이오!”
이 말에 엘료스카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반씨, 나는 그렇게 기도드리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여 구하라고 하신 것은 매일 양식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지금 우리는 엘료스카가 배웠던 것을 다시 반복해서 배워야 합니다. 모든 양식, 삶을 위한 모든 힘, 미래를 위한 모든 희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엘료스카는 예레미야 애가 3장 19절에서 23절을 광야의 노래로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겪는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합니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의 한결같은 사랑은 다함이 없고, 그 긍휼하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신실하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서신서에서 광야에서 노래하고 있는 사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광야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매일매일 목격하면서 살았던 한 신앙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소유 없이는 살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소유에 메이지 않고 살았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살았지만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은 무슨 힘으로 이렇게 살 수 있었습니까? 그는 소유로 내일의 불안을 해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환경으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아침마다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소유 앞에서도 당당하고, 환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멋있게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일을 장밋빛으로 내다보는 낭만주의 세계관은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광야의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것만 선별해서 기억하며 옛날이 좋았지 하면서 향수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포괄적 추억, 푸른 초장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동시에 기억하면서 기쁨도 고난도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리하면 광야에서도 우리를 아침마다 새롭게 하는 만나의 은혜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광야도 하나님과 함께! 라는 믿음으로 소유 앞에 자유롭고, 환경 앞에 당당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갈릴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광야의 3가지 교훈
출 16:1-12 / 피영민 목사
서 론
올해 2월 성지순례차 이동 중이었던 버스가 무장군들에 의해 이집트 타바에서 폭탄 테러를 당해 한국인 3명이 사망한 이후 지금 이집트는 왕래할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경로를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재 ‘멤피스’라고 하는 ‘라암셋’에서 출애굽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숙곳’으로 갔는데, ‘숙곳’은 ‘짐승의 우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짐승을 기르는 지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숙곳에서 광야 끝 ‘에담’이라는 곳으로 이동해서 진을 쳤다가, 북동쪽으로 열흘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 땅을 하나님은 남쪽으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비하히롯 앞 바알스본 맞은 편 홍해 앞에 서게 되었고, 진을 치고 있다가 홍해가 6km나 갈라지는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 따라오던 애굽의 군대가 모두 수장되는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원수들을 멸하시는 분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수르 광야를 거쳐 3일 만에 도착한 곳은 ‘마라’였습니다. ‘마라’는 ‘쓰다’는 의미였습니다.
룻기를 보면 나오미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의 뜻은 ‘즐거움, 기쁨’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방 땅 모압으로 이민 간지 10여년 만에 남편을 잃고, 두 아들도 잃게 되었습니다. 첫째 며느리 오르바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둘째 며느리 룻만 남아서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그녀를 나오미라고 부르자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 하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말했습니다. ‘씁쓸하고 쓰다’는 의미의 이름을 스스로 붙인 격이었습니다.
마라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갈증이 났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의 물이 써서 먹지 못하는 상황에 모세를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무 하나를 가져다가 쓴 물에 던지라고 하셨고, 곧 물이 달아져 많은 사람들이 물을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라를 지나 엘림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곳은 물 샘이 열 두 개가 있는 오아시스였고,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서 있었기에 안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지는 엘림이 아니라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형편이 조금 좋아졌다고 그 곳에 계속 머무르고자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지는 엘림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우리의 목적지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내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신 광야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 여정에서 중요한 세 광야가 있는데, 첫째가 수르 광야, 둘째가 신 광야, 셋째가 시내 광야입니다. 그러면 신 광야는 왜 신 광야라고 불렀을까요? 그것은 신 광야에는 봉우리 세 개가 서 있는 형태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히브리어 알파벳 ‘ש’(신)의 모습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나무라고는 법궤를 만들 때 사용했던 싯딤 나무만 군데군데 서 있는 민둥산의 모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곳 신 광야에서도 불평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두 가지를 내려주셨습니다. 첫째는 저녁에 내리는 메추라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아침에 내리는 만나였습니다. 아침에 이슬이 내린 후 마르면 희고 동글동글하고 꿀 섞은 과자와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그 히브리 발음이 “만후?”였습니다. 그래서 칠십인역을 만든 장로들이 이것을 ‘만나’라고 번역하였던 것입니다.
시편 78편 25절에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만나를 ‘천사의 음식’이라고 불렀습니다. 출애굽기 16장 3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는데, 고혈압이나 당뇨에 걸린 사람도 없고 말라 죽은 사람도 없었던 그야말로 천사의 음식이었습니다.
또 생긴 것이 갓씨와도 같았던 이것은 요한복음 6장 32절에 ‘하늘에서 내린 떡’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2). ‘갓’은 ‘고수’라고도 하는데, 베트남국수에 들어가고 특유의 향을 가진 미나리과에 속한 풀입니다. 그 씨가 갓씨인데 희고 동그랗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200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만나를 하루에 한 오멜씩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16). 오멜을 환산하면 2~3리터가 되는데, 이를 계산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 먹은 만나의 양은 4,600톤이 됩니다. 1톤 트럭 4,600대가 공급해야 하는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40년 동안이나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며 분명한 세 가지 교훈을 주시고 가르치셨습니다.
Ⅰ.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도해서 받은 것도 많이 있지만, 기도하지 않고 받은 것이 더욱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것은 전부 기도해서 받은 것들은 아닐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미리 아시고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받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 만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출애굽기 16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제이월 십오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달 십오일(Fifteenth day of the Second month)부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을 떠난 지 한 달이 지나고 15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라암셋을 발행한 지 45일 된 것입니다.
이 때는 애굽에서 나올 때 가지고 나온 식량들이 다 떨어지게 된 때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던 자원이 떨어지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공급이 시작됩니다. 시편 68편 7~10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 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량이 떨어져 가난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주의 은택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미리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들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십니다. 기도하기 전에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 놓으시는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6장 8절에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분이 있다면,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미리 아시고 공급해 주시는 친절하고 다정하신 아버지 하나님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많은 염려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투명한 장래에 대해, 자녀들의 진로에 대해, 앞으로 이루어질 통일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필요를 다 아시고 미리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내려준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준비해 주신 것인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하는 소리를 듣고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2~3절에 “이스라엘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 너희들 때문에 광야로 와서 굶어죽게 되었다”, “죽어도 애굽에서 고기 먹고 죽는 편이 훨씬 좋을 뻔했다”는 불평입니다.
우리말 속담에도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때깔이나 좋게 죽어야 하는데 비쩍 말라 죽게 되었다며 계속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 없는 불평의 말을 들으시고도 징벌하지 않으시고 인내와 은혜를 베푸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이시고, 친절하신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육신적인 필요만 채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돼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4장 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적인 필요가 채워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필요도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6장 31~33절에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요한복음 6장 35절에도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육신적인 필요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은 하나의 예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사람들에게 영적인 필요를 공급해주신다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진리를 예표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생명도 필요하지만 영적인 생명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 7~80년 살다가 죽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으로 끝이라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합니까? 인생의 윤리는 무슨 필요가 있으며 바르게 산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가 왜 믿음으로 살아야 하고, 왜 교회에 나와야 하고,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까? 사람의 인생이 7~80년으로 끝이라면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할 아무런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영생을 누리며 천국에서 살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7~80년의 세월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현세를 바르게 사는 우리에게 내세에서 하나님은 큰 복과 상급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삶의 윤리가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내려주신 생명의 떡을 먹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시고 육신의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이런 은혜를 주실까요? 고린도후서 9장 8절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육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이유는 착한 일을 넘치도록 하며 살아가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 지방회 목사님 한 분의 아들이 혈액암에 걸려 억대의 치료비가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 드렸었는데, 한 권사님이 오백만원, 한 장로님이 일백만원을 전달해달라고 전해주셨습니다. 또 금요철야예배를 드리며 모아진 특별헌금도 잘 전달해 드렸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남의 자식일지라도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돕는 착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 모든 치료비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큰 도움이 되었고, 큰 위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착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Ⅱ.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사역을 가르쳐 주셨다.
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내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만나가 무엇인지, 어떻게 먹어야 하는 것인지, 만나를 어떻게 거두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해 줄 책임이 있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6절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 각 사람이 그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취할지니라 하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정확하게 한 오멜만 거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 가운데는 욕심을 부려 더 많이 가져가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침까지 남겨두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고 집안 위생만 나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지 안 하는지를 시험하는 테스트’라고 하였습니다. 22절에 “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두목이 와서 모세에게 고하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안식일에는 들에 나가도 만나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일 째는 두 오멜씩 거두어 이틀을 보관해도 썩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일부는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가 도리어 하나님의 책망만 들었습니다. 28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만나 요리법도 알려주셨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출 16:23). 만나는 구워 먹어도 되고 삶아 먹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의 사명은 하나님이 위에서 내려주신 만나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이 가진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행하셨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부지런히 설교하는 것입니다. 설교하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나이시고, 기록된 말씀도 만나입니다. 살아계신 말씀, 기록된 말씀이 만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주신 말씀을 잘 풀어서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해야 될 두 번째 사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짓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경고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셨을 뿐만 아니라 은혜도 베풀어주셨습니다. 마라에서 원망할 때에도 은혜를 주셨고, 신 광야에서 원망하고 불평할 때도 참으시고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을 괜찮다고 모두 용인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불평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 불평이 신속합니다. 홍해가 6km나 갈라져 물벽이 서 있던 것을 본 것도, 그 사이 마른 땅을 건너온 것도 3일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엄청난 기적을 경험하고도 그들은 다시 물 때문에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불평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물로 인해 불평한 것도 모자라 음식으로 인해 또 불평합니다.
둘째, 이들의 불평은 비논리적입니다. 홍해(물)로 기적을 이루신 하나님이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실 능력이 없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물도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물이 쓰다고 불평을 합니다. 비논리적인 불평입니다.
셋째, 이들의 불평이 표면적으로는 모세와 아론을 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즉각 움직여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러 번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 이와 같은 구절이 다섯 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2,7,8,9,12).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말을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다섯 번씩이나 언급하였습니다. 모세가 그 말이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이렇게까지 말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신 광야에서 그들의 원망과 불평을 들으시고 인내하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점잖은 신사의 모습으로 그들의 불평을 다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불평도 계속되면 하나님이 그것을 참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 모세는 더 이상 불평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원망하고 불평해도 하나님이 계속 복을 주시더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다. 지금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말씀하실 때 들어야 합니다. “예수가 무슨 생명의 떡이냐? 영생이 어디 있냐? 천국이 어디 있냐? 가봤냐?” 하다가는 때를 놓치고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이미 지옥에 떨어져 울며불며 영원토록 고통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좋은 말로 할 때 들으라”는 의미입니다. 신 광야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종은 만나를 잘 설명하고 백성들에게 죄를 짓지 말 것을 경고하는 설명의 책임과 경고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Ⅲ. 하나님이 안식일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셨다.
많은 사람들은 안식일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 오해를 갖고 있습니다. 첫째, 안식일이 처음으로 제정된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부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며 제정하신 창조의 법입니다. 하나님이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루를 쉬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6일을 일하면 하루는 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지 말고 쉬라고 하신 것은 모세가 율법의 두 돌비를 받기 이전의 일입니다. 시내산보다 신 광야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 16장은 창조의 원리를 실천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둘째, 율법의 제4계명에 기록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을 하나님이 토요일을 안식일로 정하셨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단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라는 의미가 아니라 6일을 일하고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원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념해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식 후 첫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일요일이 안식일로 바뀐 것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날을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리가 중요한 것이지 토요일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안식일의 주인이 바꿨다고 해도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안식교도입니다.
토요일에서 주일로 안식일이 바뀐 것입니다. 토요일이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이 안식일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면서 주일을 안식일로 정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황제라도 안식일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신약교회가 이미 해오던 일을 인준해준 것입니다. 결코 새롭게 제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열심히 일하고 주일은 안식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안식일은 인간을 귀찮게 하는 날이라고 오해합니다. “또 주일인가? 또 교회 가야 되나? 아, 귀찮아!”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은 귀찮은 날이 아닙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6일 동안 일을 하고 하루 동안 쉬라고 하신 것은 우리 좋으라고 하신 일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6장의 중요한 교훈 중에 하나는 “사람이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7일 모두 일한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놀다가 주일만 되면 학원을 간다고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옳지 않은 행동입니다. 주일에도 쉬지 않고 계속 일하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 것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7일 동안 일하면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사람에게 해롭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복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6일 동안 일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습니다. 7일째까지 일하면 썩고 냄새나고 벌레가 생깁니다. 창조하신 이후로 안식일을 참으로 지키도록 하신 것이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제6일에는 만나를 두 배로 거두게 하셨고, 안식일에는 만나가 썩지 않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사는 문제 때문에 안식일을 범하는 일이 없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하나님이 명하신 이 법을 잘 준행할 때 우리 대한민국은 복된 땅이 될 줄로 믿습니다.
결 론
모세는 자손들로 하여금 이 세 가지 교훈을 잊지 않도록 당부하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과 하나님이 말씀으로 경고하실 때 청종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주일에 하루는 쉬어야 한다는 것을 후대의 자손들이 잘 기억하고 지킬 수 있도록 실물로 교육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오멜 항아리에 넣어 보관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언약궤 속에 두 돌비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가 담긴 오멜 항아리를 함께 넣어두도록 지시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먹는 육신의 양식과 영의 양식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성도
출 16:1-3 / 송기성 목사
하버드대학 연구진이 20년간 4700명을 대상으로 관찰해 본 결과 친구가 행복한 생각을 하면 자기도 따라서 행복해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나도 행복해지고, 불행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면 나도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은 우리 몸까지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몸도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행복을 선택합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해지도록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모세입니다. 사실 그의 일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파란만장한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는 실로 험난하고 험악한 세월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행복했으며, 그가 이끄는 민족까지도 행복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선택도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의 행복한 선택을 통해서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성도는 불평과 원망을 선택하지 않고 소망과 인내를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애굽에서 나온 후 한 달 만에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신 광야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광야에서 양식이 다 떨어졌다는 것은 몹시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불평한다고 해서 그들이 직면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도리어 지도자들의 사기와 의욕을 떨어뜨리고,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힐 뿐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들은 사실 하나님의 특별한 소명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민족을 위해 특별한 사명을 따라 헌신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 특별한 소명과 사명으로 말미암아 고난과 시련을 많이 겪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지도력을 존중하고, 그들의 노고를 이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존중과 이해는커녕 불평과 원망만 퍼부어댔습니다. 그런 일을 당했을 때 모세와 아론의 마음이 결코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백성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은 묵묵히 참고 견디어냈습니다. 그들은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대한 소망과 인내를 선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행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불평과 원망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소망과 인내를 선택합니다. 따라서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롬5:3), 범사에 감사하는 (살전5:18) 삶으로 신 광야와 같은 고난과 시련의 상황을 잘 극복해 나갈 줄 믿습니다.
어떤 큰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비슷한 또래의 직원 두 명이 오지에 있는 지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전혀 원치 않는 뜻밖의 발령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중 한 명은 그날로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직원은 흐뭇한 표정으로 발령지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두 사람의 반응이 이렇게 상반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표를 낸 사람은 평범한 공채 출신 직원이었지만 오지 발령을 기꺼이 받아들인 사람은 회사 소유주의 아들 곧 상속자였습니다. 소유주의 아들은 오지 근무 발령이 결코 좌천이나 사임 압력이 아니라 장차 최고 경영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한 훈련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소망과 인내로 오지 근무 발령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행복한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소망과 인내를 선택합니다. 그런 사람은 불행 중에서 도리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욥이 재산과 자녀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설상가상의 환난 중에 도리어 자기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1:21) 라며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소유주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1:12). 하나님의 자녀는 행복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신 광야가 결코 저주가 아닙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훈련과 연단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소망 중에 인내하며 하나님을 찬송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생각을 함으로써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소망과 인내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소망 중에 인내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감사하며 찬송하게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행복한 생각을 하는 성도는 불신과 거역을 선택하지 않고 신뢰와 순종을 선택합니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 장소는 신 광야였습니다. 신 광야에 이르기까지그들은 이미 홍해를 육지와 같이 건너는 기적을 체험하였으며, 마라의 쓴 물을 달게 해주신 기적도 체험하였습니다. 따라서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들은 더 큰 위기와 절망에서 구해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신뢰하고 간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을 뿐 아니라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면서 하나님까지 원망하였습니다 (출16:7).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배은망덕이었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불신과 거역이었습니다.
모세와 아론, 그들은 사실 그들을 원망하며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근심과 걱정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장장 40년 동안이나 광야의 길을 다 지나갈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광야가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사람에게는 좌절과 절망의 자리가 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광야가 도리어 기적과 축복 체험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행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불신과 거역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신뢰와 순종을 선택합니다. 따라서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 하던 때를 동경하거나 하나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절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그는 가나안 땅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손에 구원받았음을 감사함으로 신 광야와 같은 위기와 불안 속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와 돌봄의 은혜를 족히 체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슈퍼모델로 시작해서 배우 겸 탤런트로 크게 활약하며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한지혜 (1984.6.29.~) 성도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장로님이시고 어머니는 권사님이시기 때문에 그녀는 모태신앙으로 교회에 다니며 수련회도 참석하고 개근상도 받았지만 하나님을 잘 믿지는 못했습니다. 슈퍼모델로 발탁되어 고향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게 된 그녀는 바쁘다 보니 교회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이 행복으로 가득할 것 같았는데 하나님 없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2008년 〝미우나 고우나〞를 끝내고 나서 남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대인기피증 등 모든 게 너무 두려웠던 그녀는 이러다 안되겠다 싶어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을 두드려 주셔서 돌 같은 마음이 부서지고 은혜 안에 거하게 해주셨습니다. 일대일 제자양육을 받으면서 조금씩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늘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을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기도할 줄도 몰랐지만 이 세 가지를 간절하게 기도했죠. 자신감과 열정, 그리고 영적 분별력을 달라고, 그런데 하나님이 제 어눌한 기도를 다 들어주셨어요. 지금은 매사가 즐거워요. 때로 우리 삶에 광야가 펼쳐지기도 하지만, 그 여정까지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원해요. 나를 버리고 십자가를 따르라는 진리가 연기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아멘!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배에서 말씀을 가르치신 후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눅5:5)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자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습니다. 이를 보고 그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으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고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그의 어두운 마음에 하나님의 빛이 비추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의 삶에 광야가 펼쳐질지라도 그 여정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불신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신뢰하고 순종하며 늘 눈동자처럼 지켜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생각을 함으로써 불신과 거역이 아니라 신뢰와 순종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으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의 주님을 따르며 매사가 즐거운 인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노먼 빈센트 필 목사님은 인간의 생각을 행복을 유발하는 생각과 불행을 유발하는 생각으로 구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불행을 유발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불행을 유발하는 생각을 행복을 유발하는 생각으로 전환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행복한 생각을 하는 모세는 그의 일생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오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33:29) 라고 유언하였던 것입니다.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불평이나 원망을 선택하지 않고 소망과 인내를 선택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불신과 거역을 선택하지 않고 신뢰와 순종을 선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생각을 하고 행복을 선택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까지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하늘에서 내린 양식
출 16:1-15 / 임덕순 목사
지난 주일에는 이스라엘이 마라를 거쳐 엘림에서 휴식을 취하게 되는 과정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엘림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그들은 엘림을 떠나 시내산 부근의 신 광야에 도착했습니다. 1절에 “애굽에서 나온 후 제 2월 15일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던 유월절이 정월 15일이었으니까 유월절로부터 딱 한 달이 지난 것입니다. 그들은 가축과 노인들과 어린아이 때문에 진행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두 주일 정도면 가나안땅에 도착할 줄 알았는데 한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광야에서 헤매자 원망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나온 양식이 다 떨어졌고, 앞으로 무엇을 먹어야 할지 걱정이 되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을 지난 한달 동안 거의 매일 겪었으므로 지금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야 마땅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차라리 애굽에 있을 걸 그랬다, 애굽에서 살다가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그 말은 그들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을 그리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 시켜 주셨고, 그들이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도록 격리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마치 롯의 아내가 소돔 땅을 되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것 처럼, 기회만 있으면 애굽에서 살던 때를 회상했습니다. 그 소망 없던 땅에서 고생에 지쳐 자기들을 구원해 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던 그들이, 구원을 얻고 평안해 지니까 차라리 그때가 좋았다고 애굽을 떠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배은망덕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런 죄는 짓지 않아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한번만 도와달라고 울부짖다가, 문제가 풀리고 그때의 고생을 잊을 만하면 내가 언제 도와달라고 했느냐고 도리어 원망하는 짓은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가장 잘 범하는 죄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죄입니다.
그들은 애굽 땅, 고기 가마 곁에서 떡을 배불리 먹던 때를 추억하였습니다.
그들이 정말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잘 먹었던 시절이 있기나 했습니까? 그들은 거기서 노예로 살지 않았었습니까? 애굽 땅에서 당했던 고통과 절망의 절박한 상황은 어디로 갔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면 내 보따리 내 놓으라고 한다." 는 속담이 있는데, 이들의 모습이 꼭 그 격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에 지쳐서 죽게 되었고, 아들을 낳아도 단 한명도 키울 수 없는 세월을 살면서, 그들이 하도 울부짖기에 모세를 보내어 열 가지 기적을 보여주면서 그 도도한 애굽 왕을 제압하고 해방시켜 인도하여 주시는데, 구원도 다 받기 전에 벌써 과거가 좋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들을 그 기가 막힌 절망의 세상에서 건져주었더니, 오히려 애굽이 좋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불리 먹었다고 헛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당장에 양식 좀 떨어진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위해서 거짓말까지 지어내고 있습니다. 혹시 어느 날 한 번 얻어 먹어보았을지 모르는, 그 배불렀던 한 순간을 늘 그랬던 것처럼 말하면서 거짓말을 꾸며 백성들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고자 파당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인간이 악하다는 증명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성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속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을 배신하는 악행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악한 본성이 살아있습니다. 렘 17:9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이라고 지적했고, 롬3:10-15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이 악한 본성을 어떻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악한 본성은 스스로의 힘으로 다스리지 못합니다. 회개하고 주님께 맡겨 주님이 고쳐주셔야만 합니다.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인정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들은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유월절 날, 죽음의 천사의 손에 죽은 애굽의 장자들을 부러워하는 말인데 그게 말이 됩니까? 애굽의 장자들을 죽인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습니까? 자기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을 듣지 않는 바로를 굴복시키려고, 애굽의 장자들을 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망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날 죽은 애굽의 장자들이 부럽다니요?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말만 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하다는 것과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이라는 말은, 지금 모세와 아론이 인도하는 길은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고 하는 선동입니다. 애굽에서 장자들을 죽인 일은 여호와가 한 일이고, 자기들을 구원하고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구원하며, 지금 물 없는 광야에서 물을 먹이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날마다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말로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떨까요? 일본의 억압아래 36년을 고생할 때는 해방을 위해 기도했고, 은혜로 해방을 받고는 너무 좋아서 온 국민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나라만세,” 라고 노래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건너편 언덕에서 온 백성이 불렀던 노래와 방불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먹고 살만 하니까, 믿는다는 사람들도 믿음이 다 식어져버렸고, 국민들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붉은 악마를 사랑합니다.
공산주의의 세력에서 이 나라를 지켜내고 전쟁 끝에 온 국민은 굶어죽기 직전이고, 온 산은 벌거숭이 홍수내고 있을 때, 강력하게 이 백성을 인도해서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되고, 온 산이 울창한 세상이 되니까, 지금에 와서 뭐라고 합니까?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지도자를 역적이라고 매도합니다. 6.25일 새벽에 갑자기 전국을 전쟁으로 몰아넣어 400만 명의 희생을 내고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든 북쪽의 전쟁광은 민족해방의 영웅으로 받들고, 그들의 총부리에서 우리를 건져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와서 6만 명 이상이 희생한 미군은 원수라고 미워합니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이 아무리 양심이 없다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설마 그러랴 하십니까?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런 존재라고 여기 본문이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배은망덕 하는 사람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사적 사실과 거기서 배운 교훈을 잊어버리면 또 다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이 자기들을 굶주려 죽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광야 길로 인도하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들의 길이 느린 것은 짐승들과 어린것들이 딸렸기 때문이었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그 순간도 그들 위에 덮고 있었으니 여호와의 인도하심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분명하여 모든 백성이 다 알고 있는 일까지도 일부러 부인하면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들도 애굽에서 바로를 항복시키고 자기들을 구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으며, 홍해를 갈라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써서 먹지 못하는 물을 나뭇가지 하나로 달게 하시는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엘림에서 신광야까지 오는 동안에도 날마다 보호 하고 먹이고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중에 광야에서 주려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신다고요? 얼마나 악한 거짓말입니까?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악한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면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참말보다는 거짓말을 더 좋아하고, 순종보다 거역을 더 좋아하고, 선보다 악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슬픈 사실입니다.
시 4:2에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 고” 라고 하였고, 시 52:3에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 도다.” 라고 하였고, 렘 13:25에는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고 하였습니다. 잠 9:17에는 어리석은 인생들은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 도다.” 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죄로 이미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이 진실보다는 거짓을 더 좋아하고, 정도를 걷기보다는 악한 길을 더 사모하고, 정당한 대가보다는 불의한 이익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가를 아주 확실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악한 인간을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4절을 봅시다.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보라" 라는 말씀은 주의를 환기시키고 집중시키는 말씀입니다. 보통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주 심각한 말씀을 하실 때에 쓰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너희를 위하여" 라는 대상은, 모세와 아론과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순종하는 몇 사람과 불순종하는 다수를 전부 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 전부에게 양식을 하늘에서 비같이 내려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내 공의의 법대로 하자면 너희를 단번에 박살내겠다만, 내가 너희 모두에게 기적의 음식을 내려주마, 그리고 그것으로 너희를 다시 한 번 시험하여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볼 것이야."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인자하심이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받아 마땅한 인생에게도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그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가 오늘까지 살아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열하고 나쁜 사람들을 욕하기 전에 우리는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만나를 주겠다는 말씀은, 순종하는 사람들 때문에 악한 반역자들도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소돔 성이 아무리 악했어도, 의인 열 명만 있었더라면 살리실 계획을 가지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의인 때문에 다수의 악인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올 기회를 기다리면서 가능성이 없는 악인에게도 심판을 지연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불의하고 배은망덕한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고 염치없는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6절에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라고 하셨고, 7절에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내려주시고,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침과 저녁에, 밤과 낮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피시고, 필요한 것을 날마다 순간마다 공급하시고 인도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좋은 음식을 왜 주시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 반복적인 언급이 있습니다. 왜 그들에게 벌을 주지 않고 만나를 주셨을까요?
7절에 보면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라고 했고, 8절에 보면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셔야 맞는 것인데, 반역하고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이 좋은 것을 주신다니 참 이상한 하나님 같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않고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한마디의 책망도 없이 즉각적으로 양식을 퍼부어주겠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반란이라도 일으킬까 봐서 하나님이 겁이 나신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만 한 것이 아니라 가나안땅에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하신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무엇이 필요한 줄을 아셨고 그것을 다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어디쯤에서 양식이 떨어질 줄을 다 알고 계셨고, 어디에서부터 만나를 내려 줘야겠다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원망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즐거움으로 그 만나를 주셨을 것이고 그들은 행복하게 그것을 누렸을 텐데, 그들이 반역함으로 슬픈 마음으로 그들을 시험하면서 주시게 된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다 준비하고 계신 일인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자기들의 죄악성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을까요? 왜 없겠습니까? 인생이 그렇습니다.
13-14에 보면 말씀하신 그대로,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만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사람들이 만나를 보고는 난생처음 보는 것인지라 놀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기한 것을 보고 ‘만나, 만나’ 라고 했습니다. ‘만나’ 라는 말은 이것이 무엇이냐 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서로 물은 것입니다. 몰라서 묻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도 신기해서 놀라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대답해 줍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하나님은 거역한 그들에게도 이렇게 좋은 음식을 주셨는데, 그들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겼더라면 얼마나 좋은 일들이 많았을까요?
우리는 그것을 상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실까 하고 상상력을 가지면 삶이 정말로 풍성해집니다. 신 28장에는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들어와도 복, 나가도 복, 우양의 새끼와 떡 반죽 그릇과 손대는 것마다 복을 주시고 만사를 복되게 하마.’고 하셨습니다. 출15:26에는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사 1:19에는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31절에 만나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깟씨 같았다고 했는데, 깟 이란 미나리과에 속한 풀입니다. 그 씨는 양념이나 소화제로 쓰이는데, 음식의 맛을 내고, 음식의 소화를 돕는 양념입니다. 깟씨는 흰 색갈인데, 청결 또는 순결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만나가 깟씨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의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다고 했는데, 만나는 최고의 영양가와 최고의 맛을 지닌 ‘지상최고의 음식’ 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비와 초지연적인 돌봄이 계속되는데도 그들은 계속 하나님을 원망했다니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적을 출애굽 때부터 계속 보고 있으면서도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사람들을 꼬여 반대당을 만들었는데, 이런 악하고 미련한 사람에게도 이렇게 좋은 최고의 음식을 주셨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인간은 대책 없이 악하고,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시다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가장 나쁜 사람들을 위해서 가장 아름답고 맛있고 완전한 음식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신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마저 자기들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악한 인생들을 향하여 여전히 은혜를 베풀고 계시며, 그들이 돌아오고 회개하기만 하면 용서하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만나는 요6:35, 48등에 의하면 우리 주님의 상징입니다. 주님은 못나고 악한 죄인들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순전하고 영원한 음식으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결국 죽었지만,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으로서, 그 어떤 사람이라도 이 떡을 먹기만 하면 영생하게 된다.”고, 그 만나가 자신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참된 만나로서 이 땅에 오셨고, 3년간의 공생애 기간 중에 여러 병자와 죽은 자를 살려서 생명이심을 보여주셨고, 벳세다에서 오병이어로 5천명 장정을 먹이심으로 사람들을 살리는 떡이심을 예고하셨고, 내가 곧 생명이라고 말씀 하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를 영생케 하는 만나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떡을 먹어야 살지만, 우리 영혼은 참 만나이신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혼 안에 모셔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 끝에 보면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백성들이 떡을 달라고 소리를 지르면 떡을 주시고, 고기를 달라고 윽박지르면 고기를 주시는 한없이 마음만 좋으신 분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먹고 사는 문제를 통해서 그들을 시험하고 훈련시키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맛있는 음식을 잘 먹었으니 그 다음부터는 말씀을 잘 들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또 시험을 받아야 했고 연단을 받아야 했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말씀을 많이 들었고 성경을 많이 아니까 그 정도 수준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아는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문제를 만나게 하시고,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의 일을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엘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아려주지 않아서 마라의 불평이 있었고, 만나를 곧 내리시려고 준비하고서도 알려주지 않아서 신 광야의 불평이 있었습니다.
왜 미래를 알려주시지 않을까요? 매 순간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염려를 이기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 미래의 일을 미리 말씀해 주시지 않습니다. 이제 불평은 그만 하고 염려를 이기고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의 문제를 아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을 믿읍시다. 말씀하지 않지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서, 위기에서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원망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출 16:1-12 / 김철현 목사
유대인 한 사람이 아랍인 두 사람과 함께 비행기를 탔습니다. 유대인이 구두를 벗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랍인들이 유대인의 옆구리를 위협적으로 찌르면서"어이, 가서 주스 두 잔만 가지고 와"하고 다그칩니다. 유대인은 기분이 나쁘지만 싸우기 싫어서 얼른 일어나 오렌지 주스를 가지러갔습니다. 그러자 아랍인들 둘이서 유대인이 벗어 놓은 구두 속에 침을 마구 뱉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대인이 가지고 온 주스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셨습니다.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해서 유대인이 구두를 신으려고 보니 구두 안에 침이 질퍽거렸습니다. 그 구두를 들고 유대인이 아랍인들을 보면서 말했습니다."이스라엘과 아랍이 평화로우려면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구두에 침을 뱉지 말아야 되고 유대인은 아랍인들이 마시는 오렌지 주스에 오줌을 싸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평안은 신뢰에서 옵니다. 사람은 서로 믿을 수 있을 때에 그 관계가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 법칙은 명확합니다. 내가 그를 믿어주면 그가 나를 믿어주지만 내가 그를 믿지 못하는 한 그도 나를 믿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신의가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신앙이 올발라야합니다.
또 하나 평안은 책임에서 옵니다. 서로가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자기 책임이라고 하는 곳에는 싸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싸웁니까? 서로 네가 잘못했다는데서 싸움이 있는 것이거든요. 먼저 내 잘못이다 인정하는 데에서는 다툼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이 책임감이 문제입니다. [스티븐 코비]의<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워낙 베스트셀러여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다들 알고 있습니다만 결국 그 책에서도 하는 이야기가 제목 그대로 성공한 사람의 성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환경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성품이요, 습관이 성공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독특한 성품이 대략적으로 일곱 가지인데 통틀어서 요지가 뭐냐 하면<주도성>이라는 것입니다. 주도적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가장 쉬운 예가"내가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일하는 사람은 남에게 떠넘기거나 남의 도움을 빌어서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먼저 손해 볼 각오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먼저 희생할 마음으로 앞장서는 것입니다. 가령 백만 원짜리의 물건이 꼭 필요하다고 합시다. 이건 반드시 필요한 물건입니다. 주도적인 성격의 사람은 내가 먼저 얼마라도 돈을 내놓습니다. 그리고는 사자고 말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진다는 의지입니다. 이 물건이 사지겠습니까 안 사지겠습니까? 사집니다. 그런데 이 주도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앞장서서 큰 소리만 치면 되는 줄 압니다. 자기희생, 자기 손해, 책임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책임지는 영역만큼이 내 것입니다. 내 것만 책임지면 좁은 영역을 살지만 남의 것 까지 책임지는 사람은 그만큼 넓은 영역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내 잘못까지 남에게 돌리면 내 영역은 반으로 줄어드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완전히 남의 책임이라고 하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스티븐 코비]의 말이 이런 주도적인 정신을 가지고, 성품을 가지고 살아서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이"성공할 것이다."가 아니라"성공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것은 확실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남을 원망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환경도 탓하지 말아야 됩니다. 환경이란 수시로 변하는 것 아닙니까? 변하는 환경에 따라 내 근본마저도 또한 달라져야한다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환경에 매여 살아야 한다는 것도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간혹 보면 실패한 과거 때문에 미래를 망치는 사람들을 봅니다. 실패한 과거란 지나간 환경일 뿐이지 내 미래가 그 과거 환경 때문에 어두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로 성공한 과거가 미래를 망치는 경우도 봅니다. 지난날에 좀 잘된 것이 있다고 여기에만 집착되어서 오늘과 내일을 망쳐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 중에는 자기가 일류대학을 나왔다는 과거, 그것 하나 때문에 미래를 망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가하면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어떤 면으로든지 옛날에나 가능했던 일이 있습니다. 지금 될 수도 없고 앞으로도 되어 지지 않을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 과거에 매달려서 그것만을 꿈꾸다가 미래를 다 망치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놓고는 세상이 어떻고, 사람들이 어떻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실패한 과거 때문에 현실을 원망하느라 미래가 어두워도 안 되지만 성공한 과거의 환경에 매여서 교만하여 현재를 원망하느라 미래를 실패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자손만대에 노예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의 400년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왔습니다. 애굽 군대가 쫓아오지 못할 만큼 완전한 자유인이 됐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자유인은 됐으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비롯한 몇 사람 외에는 광야에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를 혹시 아십니까? 성경은"원망 죄 때문"이라고 그 원인을 밝히고 있습니다. 원망은 무서운 죄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다 엎드려져 죽을 만큼 원망이라는 죄의 결과는 비참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원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은 죄는 범하지 말아야 신앙인이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원망을 하는지 본문 가운데에 원망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옵니다. 애굽에서 나온 지 한 달이 된 어느 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졌습니다. 곧 바로 이스라엘백성들이 불평합니다. 애굽에서는 먹을 것이라도 있었는데 차라리 거기서 먹고 죽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둥 괜히 우리를 애굽에서 데리고 나와서 굶어죽게 만든다는 둥 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거침없이 원망을 쏟아놓습니다. 보다 못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십니다. 이것을 주신 의미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영육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망의 내용이 정말 유치합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은"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건 곧 다시 노예생활로 가자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리고 고기 이야기를 합니다만 노예주제에 무슨 마음껏 고기를 삶아 먹었겠습니까? 노예생활 할 때 주인들의 음식 만들면서 고기 가마 옆에서 갈고리로 몇 점 건져 먹었는데 그게 맛이 있었다는 겁니다. 자 중요한 이야깁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원망하고 있는 것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우리도 가끔씩은 옛날로 돌아가서 많이 생각합니다.'그때가 좋았는데...'하는 감상에 빠져서 현실을 보지 못하거나 미래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완전히 단절 되어야 할 과거는 단절해야합니다. 도움이 되지 못하는 과거와 결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공했던 것도 그렇고 실패했던 것도 그렇고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같은 과거라도 해석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과거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항상 오늘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제보다 오늘이 낫다. 작년보다 올해가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항상 과거가 오늘 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때는 또 그때대로 죽을 지경으로 살아놓고도 이제 와서 그때가 나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보면 단지 이 어려운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해석능력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그 길고 긴 노예생활 중에 그 잠깐 잠깐에 있었던 즐거움 그거 하나를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기 한 점 건져먹을 때 육체적이고 세속적이요, 물질적인 만족 그 기억 때문에 이성이 병들었습니다. 차라리"거기서 노예적으로 향락하기보다는 자유인으로서 광야에서 죽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냐?"이 정도가 되었더라면 원망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 고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을 텐데 어찌 이런 저속한 인간이 되었더냐 말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정리해봅니다. 그들의 믿음이 문제였습니다. 불신앙이 원망을 만들었고 거침없는 원망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신앙 없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랑은 믿음이어야합니다. 부끄럽지 않은 신앙으로 자랑거리를 삼을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늘 들어도 우스우면서도 찔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장로님 한 분이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천사가 반갑게 맞이하며 중국집으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픈 차에 잘되었다 생각하는데 같은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장로님보다 먼저 와서 탕수육을 맛있게 먹고 있더랍니다. 순간 장로님이 생각하기를'아, 집사님이 탕수육을 먹는 것 보니 나는 장로인데 더 맛있는 것을 주겠구나'생각하고 기다리는데 자장면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실망한 장로님이 하나님께"아니, 하나님 집사에게는 탕수육을 주고 장로인 나에게는 겨우 자장면을 주십니까?"하고 볼멘소리로 물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장로님 귀에다 대고 하시는 말씀이"김장로! 그런 소리하지 말어! 자네교회 담임목사는 지금 자장면 배달 갔어!"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원망은 어디로부터 옵니까? 환경에서도 아니고 세상사에서도 아닙니다. 또 그 누구로부터도 아닙니다. 오직 나의 불 신앙적인 교만으로부터 원망은 시작됩니다. 실패한 과거에 매이지 말고 벗어나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성공한 과거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져서 지금의 내 신앙을 살펴보아 깨끗한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면 모든 원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와 그 능력이 바로 우리 눈앞에 보여 질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
출 16:1-5 / 김경호 목사
이스라엘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두달 반이 지났습니다. 이들은 시나이 반도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행렬을 계속합니다. 제가 성지 순례를 갔을 때, 이 시나이 반도를 돌아 이스라엘로 들어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여정을 따른 것이지요. 시속 70-80 킬로의 속도로 하루종일 나가도 끝없는 돌산들, 이글거리는 태양,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없는 땅이 계속됩니다.
두 달 반이 흐르는 동안 이들이 에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음식도 다 고갈되고 그 당시 보여주셨던 여러 가지 하나님의 이적, 능력의 감격도 식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적으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그것은 이렇게 황량한 광야로 우리를 불러 죽이시려는 의도였나? 여러 날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는 갈급함에 이들에게 불평과 원망만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이들은 “에집트의 고기 가마가 그립다”고 했습니다. 노예 주제에 무슨 고기가마 이겠습니까? 아마 노예로 있을 때 배는 곯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굶고 있는 그들에게 주인이 내어주던 음식은 아마 고기가마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들에게 출애굽 당시의 감격은 다 사라지고 “차라리 우리를 누가 주의 손에 넘겨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광야의 길은 ‘죽느니만 못한 삶’, ‘다 굶어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이들은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하늘에서 너희 먹을 것을 비처럼 내려 줄 터이니...”라고 하십니다. 굳 뉴스입니다. 그냥 비가와도 좋은데 굶어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이 비처럼 온다니, 알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날 그날 먹을 만큼 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그렇지 않은지 시험하여 보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날 거둘 만큼 만 내려 주셨다면 몰라도 어디 배고픈 사람이 지천에 먹을 것이 쌓였는데 어떻게 그날 것만 거둘 수 있겠습니까? 저 부터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쌓았습니다. 내일 것, 모레 것... 넘치게 쌓았는데 그 다음날 온 진지에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백성들은 벌을 받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게 무슨 죄라고....
하나님께서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 들이라고 하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 일까요? 왜 지천에 쌓인 음식을 다 놔두고 오늘 것만을 거두라고 하십니까? 이 명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두 글자로 이것을 줄여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누구를 믿는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지 아닌지 그 믿음을 보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만나로 이들에게 허용하신 것은 오늘입니다. 그러나 내일은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습니다. Don't touch it. 내일은 우리의 손에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내일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내일이 다가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맛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하나님은 높이의 개념에서 찾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높이 계시고, 이 땅을 굽어보시고... 우리들의 제사를 흠향하시는... 초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저 세상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 권능을 가지고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르네쌍스 이후 인간이 그 중심 주제가 되고 특히 실존주의 영향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실존, 인간의 깊은 내면에, 깊이의 하나님, 궁극적인 실재로서...groud of being으로, 우리 안에 예민한 조정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 하나님은 개인적 영역의 하나님으로 축소되어졌고, 인간의 깊은 내면도 그곳이 꼭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 자리잡은 궁극적 불안, 깊은 고독, 무언가 길을 찾지 못하는 우리 안의 불안한 에너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앞으로의 신학, 현대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3차원 속에 묶어두는 것이 아니고 4차원의 공간에서 발견합니다. 즉 미래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시간의 축으로 옮겨집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오지 않은 시간입니다. 미래는 은총의 시간이고, 하나님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우리를 향해 당신의 계획을 펼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인간은 불안하기에 내일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 안에 있기에 우리의 소유물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것을 마치 내가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대한 착각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속게 됩니다. 오늘 내가 영원하리라 생각하고 있는 것을 어느 날 아침에 하나님은 한꺼번에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찾아가신 다음에도 우리를 능히 견딜 수 있게 하시고 또 새로운 내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게됩니다. 사실 문제는 본래 하나님의 것인 내일을 단지 내가 소유하고 내게 붙잡아 두려고 하였기에 생긴 문제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갈등과 실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염려하여도 머리털 하나라도, 눈섶 하나라도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면 끝이 없습니다. 아직 당하지 않은 온갖 불안과 염려가 우리를 집어 삼킴니다. 내일을 걱정으로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밝은 미래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피해망상의 불안이 있을 뿐 항상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은총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오늘은 서로의 내일을 예비하기 위한 전쟁의 장, 끝없는 욕심의 희생잔치가 될 뿐입니다. 동물의 사회에는 내일이 없습니다. 이들은 배고프면 잡아먹지만 더 이상 내일을 위해 쌓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배부른 사자 옆을 태연히 사슴이 지나갈 수 있습니다.
내일을 예비하는 인간의 탐욕은 오늘을 살벌한 전쟁의 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내일 것 뿐만이 아니고, 모레, 한달 후, 몇 년후, 나의 노후생활, 죽은 후에 자손의 삶까지도 염려하고 그들의 미래를 위해 탄탄대로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받은 훈련은 철저하게 내일을 하나님께 돌리는 훈련입니다. 마침내는 이들 가운데 적게 거두는 사람도 있었고 많이 거두는 사람도 있었지만 적게 거두어도 모자라지 않고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나눔과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5절에 “매주 엿새 날에는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을거리를 준비하다보면, 날마다 거두던 것의 두배가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엿새날에 두배가 되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안식일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쉴 수 있게, 그날만큼은 모든 먹고사는 걱정근심에서 벗어나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과 만나도록, 하나님 안에서 평안한 안식을 하도록 하신 날입니다. 그날의 안식 역시도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태 5,33은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 사람들(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고 하십니다.
내일은 어떤 날입니까? 내일은 하나님의 인정하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하나 하나를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인정하시는 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인정받는 사람에게는 더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하시는 순간, 이것은 하나님 눈에 꽁깍지가 쓰이는 순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것들을 좋게 보시기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긍정 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환타지로 우리를 보십니다. 우리에게 베일을 치고 환상의 베일 속에 우리를 좋게 보시기 시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 긍정이 시작됩니다.
아무리 죄인 괴수라도 그의 가족(혹은 어머니)은 그를 불쌍히 봅니다. 그의 어머니는 세상이 뭐라고 하더라도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긍정의 눈으로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는 만남, 그를 인정하는 눈으로 보기에 세상이 그를 보듯 정죄하지 않습니다.
객관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그의 설자리를 없게 합니다. “보시기에 좋았다”하는 순간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되고 이미 그의 객관은 무딘 칼이 되어 버립니다. 창세기는 이미 콩꺼풀이 쓰여져서 인간을 자신의 환상으로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언들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셨으나 그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세운 법을 어기고 하나님 자신도 법을 어겨가면서 까지 그를 보호하셨습니다. 죽음 대신 하나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입혀 보내셨습니다.
가인은 자기 동생을 죽였습니다. 생명에는 생명으로, 죽음에는 죽음으로 답해야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이마의 표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갑절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온통 썩어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멸하셨지만 결국은 무지개의 약속을 통해 다시는 세상을 멸하지 않고 그 생명들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이 악한 것을 아시지만(8:21)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인간의 교만이 하늘 끝까지 닿아 바벨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땅에 흩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흩어진 민족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불러 새민족을 시작하십니다.
이렇게 창세기 원역사(1-11장)만 하더라도 인간의 거역과 하나님의 사랑이 자꾸 나선형적으로 확대되어 갑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중심이 흔들렸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우리의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의 사랑의 파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으로 우리에게 안겨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우리교단 총회에서 주관하는 신년목회자 세미나에 발제를 맡아 다녀왔습니다. 밤에 바닷가에 나갔습니다. 대천 바닷가에 서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들을 쳐다 보았습니다. 이렇게 좋은 자연 안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가야할 것 같아 바닷가에 나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섰습니다. 처음에 그 파도의 교향곡들이 너무 아름답고 웅장하게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한 한시간 넘게 흘렀을까 별다른 느낌도 없고, 불안하고 답답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에 앉아서 책이나 볼걸!”하면서도 무언가가 느끼고 가야할 것 같아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한 참이 지난 후에 아주 새로운 느낌이 제게 스쳐갔는데, 문득 밀려오는 파도가 다 같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계속 밀려오는 파도의 모양이 아주 형영색색(形影色色)의 다른 모양이었습니다. 파도 마다 특징이 있고 같은 모양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늘 새로운 파도라고 생각하니 그 하나하나의 모양이 감격이었습니다. 아마 제가 지루하게 느껴졌던 것은 수 없이 밀려오는 파도의 모양이 모두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 머리 속에 모두 같다는 관념이 늘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파도의 역동성을 천편일율(千篇一律)적인 것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일이 어제, 오늘과 다름없다는 선입관 속에서 아무런 흥미없이 내일을 맡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가진 선입관이 미래를 죽은 고목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이 교회당을 나갈 때부터 여러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쏫아지는 밝은 햇빛 속에서 그분의 소리, 내일로 향하여 우리를 부르고 초청하시는 소리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순간의 시간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전혀 가슴 벅찬 당신의 은총 가운데로 초청하십니다.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오늘 불안하십니까? 우리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우리의 내일, 미래가 우리 앞에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를 지극히 좋게 보시기로 결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가슴을 열고 그 하나님을 호흡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