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고 안 된 미담
근 사십년 가까이 교류하는 울산에 사는 대학 친구가 있다. 이 친구와 나는 2년제 교육 대학을 나와 초등에 재직하면서 다시 4년제 야간강좌 대학을 졸업했다. 당시 생활근거지는 친구는 울산이고 나는 밀양이었다. 이후 나는 고성 바닷가 중학교로, 친구는 지금 거제 포로수용소로 바뀐 터에 있던 학교로 옮겨 근무했다. 둘 다 야간강좌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으니 국어를 가르쳤다.
친구보다 한두 해 먼저 중등으로 건너간 나는 근무 환경이 달라도 적응해 지냈다. 그런데 친구는 초등과 사뭇 다른 중등의 근무 환경이 생리에 맞지 않아 갈등이 많았다. 이후 초등으로 다시 돌아가려니 그 길이 쉽지 않았는데 도교육청 인사담당자를 찾아 사정사정해 어렵게 성사되었다. 당시 친구는 일반대학원에도 적을 두고 부산까지 주 두세 차례 강행군하면서 학구열도 불태웠다.
친구가 초등으로 되돌아간 이유는 중등은 보충수업도 해야 하고 밤에도 학교에 붙들려 있어야 함이 생리에 맞지 않아서였다. 친구는 퇴근하면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하고 주말이나 방학이면 아이들과 캠프를 함께 다니면서 어울려 지내길 좋아했다. 승진에 대한 준비나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짧은 2년간 캠퍼스 생활을 같이했던 교육대학 다른 동기생들은 모두 학교 관리자가 되었다.
이 친구가 터 잡아 사는 울산 북구는 경주와 가까운데 수 년 전 경주 산골에 농장을 마련했다. 거기까지는 집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평일에는 들어갈 수 없다. 처음에 농사일이 서툴렀는데 여러 차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경험을 쌓아간다. 나는 생활권과 제법 떨어졌지만 일 년에 몇 차례 그곳 산방을 찾아 자연산 땀을 같이 흘리고 밤이면 잔을 기울이고 나온다.
지난 방학 때 들리지 못한 친구 산방을 팔월 말 다녀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구월 초 나눈 통화 속 방송국에서 전화가 자꾸 와 출연이 망설여진다고 했다. 지역 방송국 개국 20주년을 맞아 ‘생로병사’ 특집 프로그램에 한 코너 모셨으면 한다고 했다. 자기네 방송국 자료에 20년 전 여름날 불어난 하천에 떠내려가던 한 아이를 구한 선생님으로 친구가 등장해 섭외한다고 했다.
친구는 까마득한 일이고 남들 앞에 얼굴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담당 피디 제안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런데 방송국에선 집요하게 친구를 설득했는지 친구는 방송을 탔다고 했다. 친구는 개국 특집 ‘생로병사’ 프로그램 ‘생’코너에 나간 것이다. 방송국에선 20년 전 급류에 휩쓸려가던 아이도 수소문해 찾아냈다고 했다. 그 아이는 세월이 흘러 숙녀가 되어 생명의 은인 앞에 나타났을 테다.
친구가 자기 블로그에 올린 당시 상황을 간추리면 이렇다. 울산 북구는 시골티가 나는 지역으로 학교로 오가는 대로 지름길이 있고, 논밭을 거쳐 가는 길도 있었단다. 많은 비가 오고 난 퇴근 시간 시골길로 택해 차를 몰아가는데 검붉은 황톳물에 머리와 발바닥이 드러난 아이가 떠내려가고 있더란다. 친구는 차를 급히 몰아 하류로 내려가 차를 세우고는 뭔가 퍼뜩 뇌리를 스쳤다고 했다.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혹시 일이 잘못 되기라도 한다면 홀어머니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더란다. 늦장가를 가 이제 갓 백일을 지난 딸의 얼굴이 떠오르더란다. 그러면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냇물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고는 친구도 탈진했단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나타나 웅성거리고 친구는 황망한 가운데 겨우 집으로 갔더니 아내는 생쥐 모습의 남편을 보고 누구와 싸우고 온 줄 알았단다.
이튿날부터 방송국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와 귀찮더란다. 얼마 뒤 친구 내외는 집 근처 식당에서 그 아이와 부모와 같이 저녁을 들었단다. 부모가 동사무소 일일 근로자로 생계를 잇는다니 부담을 안길 친구가 아니었다. 고기를 굽고 소주를 곁들이고는 그 자리 밥값은 친구 아내가 치렀다고 했다. 친구 아내는 아이가 많이 놀랐을 테니 한약이라도 지어 먹이라고 얼마간 돈을 쥐어주더란다. 19.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