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인(參禪人)의 세 가지 요지(要旨)
불교의 핵심은 계정혜(戒定慧) 이 세 글자로 묶을 수 있지.
계행(戒行)이 근본인데, 계행에서 안정이 생기고 그 안정된 마음에서 정확한 지혜가 생기거든.
그런데 육조 스님은 정(定)과 혜(慧)를 다르게 보지 않았어.
바로 계(戒)가 정(定)이고 정(定)이 혜(慧)라고 했지.
우리 스님네야 250 계행(戒行)이 있지만, 사실은 계행도 팔만 사천 세행(細行)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 말 한마디, 일체 세밀한 행동 하나하나를
어느 시대의 도덕 윤리 사회윤리 이상으로 아주 세밀하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 있어.
팔만 세행을 그대로 다 지키면 그대로 성불하는 길이야.
신심(信心)‧분심(忿心)‧의심(疑心) 삼위일체(三位一體)
선(禪)은 정(定)과 혜(慧), 정혜쌍수(定慧雙修)가 참선이야.
참선하는 이의 세 가지 요지는 대신심(大信心)과 대분심(大忿心)과 대의심(大疑心)이지.
다시 말하면 확고한 마음의 정립과 분통 터지는 격렬한 의지,
그리고 고정관념에 이끌리지 않고 일으키는 진지한 의심이지.
대신심(大信心)에 대해 말한다면, 우리 출가한 사람은 대신심은 이미 성취가 됐지.
인간의 오욕락이나 세상을 완전히 등지고서
오로지 이 마음을 참선해서 찾아보겠다고 나섰으니까, 신심은 확립이 됐지.
그러면 대분심(大忿心)이란 뭐냐 하면, 우리 인생이 주인공을 알지 못하면
항상 끌려오고 끌려가서 생사 물결 속에 항상 떠내려가는 거야.
그러니 참 원통하고 분해. 올 때도 내 맘대로 온 게 아니고, 사는 것도 내 맘대로 사는 게 아니고,
그러니 가는 것도 내 맘대로 가는 게 아니야.
항상 소가 푸줏간에 끌려다니듯이 삼계 육도에 끌려다니니 이보다 더 분통이 터지는 게 어디 있겠나?
이 세상 사람들은 뭔가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 분심(忿心)이 터지는 거야.
그래서 가까운 친구끼리도 의리가 상해지고 심하면 재판한다며 그렇게 설치거든.
이를 뽀득뽀득 갈고 분통이 터진다고 하는데 그것은 몇 푼 안 되는 분통이야.
인생이 송두리째 끌려가고 끌려오니 이보다 더 원통한 게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러니까 이제 분한 생각을 가져야 해. 분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정신없이 사는 거야.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는 그런 맥 빠진 사람은 상관이 없지만,
적어도 인생을 똑바로 보고 진지하게 산다면 누가 나고 죽는 문제에 무심할 수 있겠어?
종일 앉아서 두 다리를 뻗고 울어도 시원치 않은 거야. 그러니까 참 분한 일이지.
그다음에 대의심(大疑心)이지. 꽉 막히는 거야.
모든 시비 장단이 의심이라는 불덩어리에 모조리 타버리고 오직 의심하나만 남은 게야.
신심(信心)과 분심(忿心)과 의심(疑心)은 삼발이와 같아서
그중에 발 하나만 짧거나 없어도 기울어지거든. 삼위일체야.
대신심이 없으면 대분심이 생기지 않고 대분심이 없으면 대의심이 생기지 않아.
갈라놓으니 그렇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따라오는 거야.
우리는 공부를 희미하게 할 게 아니라,
이것을 철저하게 관찰해서 틀림없이 공부하려는 태도가 있어야 해.
흐리멍덩하게 생각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철저하게 실행에 옮기려면 아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참선한다는 것은 생각이 딱 정립이 되어 들어온 사람을 향해서 화두를 시키는 게야.
그렇지 않으면 화두가 되지 않거든.
집을 하나 짓는데 모래사장 위에 아무리 튼튼한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워 봐야 그대로 쓰러지는 게야.
참선하는 사람이 막연하게 남이 장에 가니 나도 장에 간다는 식으로 참선한다면,
이런 맥아리 없는 생각을 가지고는 평생을 해도 뚫어지지 않는 게야.
철저한 기반이 선 다음에야 참선이 되는데,
우리 인생을 하나로 결집해서 묶어야 화두가 되는 거야.
그래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혼연일체가 되어서,
화두 하나를 내 생명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철저한 생각으로 묶여 져야 화두가 되지.
그렇지 않고 무슨 들락날락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화두가 될 수 있겠어?
부처님 말씀에도 죽을 사(死)자를 이마에 써 붙이지 않고는 공부가 안된다고 그랬거든.
그래 머리에 불 끄듯 하라 그랬거든. 머리에 불붙어 봐요. 그보다 더 급한 게 어디 있겠어?
그래서 화두 한다는 것은, 참으로 내 인생을 전부 묶어 딱 집중시켜서
내 몸도 잊어버리고 내 우주도 잊어버리고 오직 화두 하나만 있는 게야.
화두가 바로 자기 생명이야.
화두를 놓칠 때는 그래도 살아 있는 거야. 그렇게 되는 것이거든.
화두(話頭)란 말은 말(話)의 머리(頭)거든.
이 세상에 아무리 짤막한 말이라도 뜻이 없는 말이란 없거든.
그러면 말머리는 말이 생기기 이전이라는 말인데,
따라서 화두는 뜻으로 헤아릴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옛날에 “어떻게 하면 내가 견성성불(見性成佛) 하겠습니까?” 하고 물어 오면
황벽 스님의 경우엔 임제 스님의 머리를 30방 내리쳤어.
묻는 이도 생각이 철저한 데서 묻는 거야.
이 세상의 너절한 생명은 필요치 않고 생사를 해결하려는 문제 하나만 걸려 있어.
스승은 거기에 대해 설명이 필요치 않으니까, 방망이로 내리쳤지.
그런 것만 보더라도 화두는 이론으로 따져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단적(端的)으로 보여 준 게야.
그래서 우리가 이론으로 생각하고 더듬고 하는 모든 인간 지식 그런 것 가지고는 도저히 이룰 수 없어.
오히려 아는 지식 주머니를 완전히 집어 던지고 들어서는 것이 화두거든.
세상의 학문은 전부가 바깥으로 이론적으로 따지는 것이라.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안 되는 거야. 이 화두는 각도가 아주 180도 달라. 근본적으로 다르지.
평생에 자기가 듣고 보고 하는 그런 지식을 완전히 포기하는 게야. 꽉 막히는 거지.
- 서암 스님의 소참 법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