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금식 (16-18절)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두 번씩’ (눅 18;12)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 역시 정기적으로 금식했다. 심지어 ‘자주’ 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았다. (마 9;14; 눅 5;33), 그러면 어째서 산상수훈의 이 절에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이 금식할 것을 기대할 뿐만 아니라 금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인가? 이 본문은 대개 무시된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마치 이 구절이 성경에서 찢겨나간 것처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기도하고 희생적으로 헌금하는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금식을 강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마음과 심령의 내적 믿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기독교는 금식과 같은 외적인 육체적 관행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는 특정 절기에 행하도록 되어 있는 구약 관행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폐기된 것이 아닌가? 하고 묻는 기독인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경과 교회사를 선택적으로 알고 선택적으로 사용하기 쉽기 때문에 균형을 잡기 위해,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주님 예수님은 친히 광야에서 40일 밤낮으로 금식하셨다. 사람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대답으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 그들이 (예수 제자들)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마 9:15). 나아가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금식하리라는 가정하에서 어떻게 금식할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도행전과 신약서신서 들에는 사도들의 금식에 대한 언급이 서너 번 나와 있다. 그러므로 금식을 신약에서 폐기된 구약의 관행으로, 혹은 개신교에서 거부하는 가톨릭의 관행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금식은 무엇인가?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음식을 완전히 금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단기간으로나 장기간으로나 음식 없이 지내는 것으로 의미를 확장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매일 첫 번째 먹는 끼니를 ‘아침 Breakfast’하게 된 것이다. 아침을 먹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밤 시간의 ‘금식을 중단하기 (break our fast)’때문이다.
성경에서 금식이 여러모로 자기 부인 및 자기 훈련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다. 우선 ‘금식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은 사실상 같은 말이다 (시 35:13). 때론 이것이 과거의 죄에 대한 참회의 표현이었다.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심히 괴로울 때 울며 금식했다. 예를 들면, 느헤미아는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사람들을 모았으며,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금식을 선포했으며 베옷을 입었다. 다소 바울은 회심한 후, 자신이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에 대해 회개하고, 3일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행 9:9). 금식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면서 자비를 구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춰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죄를 뉘우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을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방향이나 축복을 위해 하나님의 자비를 구할 필요가 있을 때 음식이나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을 제쳐놓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신의 백성을 삼으신 언약을 새롭게 하신 직후 시내산에서 금식했다 (출 24:18). 에스더 왕비는 목숨을 내걸고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모르드개에게 유대인 모두 그녀를 위해 금식하라고 촉구했으며, 자신과 시녀들도 똑같이 금식했다 (에 4:16). 에스라는 바밸론 포로들을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여 오기 전에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했다 (스 8:21 이하).
금식을 해야 하는 또 다른 성경적 이유가 있다. 굶주림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이며, 탐욕은 인간의 기본적인 죄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절제’가 우리 신체를 통제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며, 자기 훈련 없이는 불가능하다. 바울은 운동선수를 예를 들며 설명한다. 이것은 자기학대도, 그릇된 금욕주의도, 성전 안의 바리새인처럼 공로를 얻으려는 것도(눅 18:12) 아니다. 우리 몸을 ‘벌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그 몸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므로), 다만 몸이 우리에게 순종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 몸을 훈련시킨다. 그리고 금식은 (자발적으로 음식을 끊는 것)은 절제력을 증가시키는 한가지 방법이다. ‘
금식에 대해 또 다른 이유를 기술하려 한다. 즉 우리는 먹을 것 (혹은 그 비용)을 공급받지 못한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의도적을 음식 없이 지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성격적 근거는 여러 곳에 기술되어 있다. 하나님께선 이사야를 통해 예루살렘 거민들의 금식을 정죄하시면서 비난한 내용은 그들이 금식하는 날에 그들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그들의 일꾼은 억압한다는 것이다 (58:3이하). 그들의 마음으로든 행동으로든 금식하는 것이 일꾼들의 물질적 필요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종교는 정의나 자비가 없는 종교이다. 예수님은 거지가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 불리기를 바라는 동안 매일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던 부자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그와 비슷한 것을 암시하셨다 (눅 16:19-31).
참회를 위해서든 기도를 위해서든, 자기 절제를 위해서든, 연대적 사랑을 위해서든, 금식을 할만한 좋은 성격적 이유들이 있다. 금식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당연히 금식이 존재하리라 여기셨다. 그의 관심사는 구제와 기도와 마찬가지로, 금식에서도 외식하는 자들처럼 우리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켜서는 인 된다는 것이었다.
주님은 또한 금식하는 방법을 말씀하시면서, 슬픈 기색과 얼굴을 흉하게 보이지 말라고 하셨고, (평소처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곧 금식하는 날에도 평소처럼 아무도 그들이 금식하는 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도록 평소처럼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한번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것이다. 금식의 목적은 우리 자신을 광고하기 위함이 아니고 훈련하기 위함이며 스스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궁핍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들이 성취된다면, 그것을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들을 되돌아 볼 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께서는 두 대안적 경건, 즉 바리새인들의 경건과 그리스도인의 경건을 대조하신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결과만 보더라도, 외식하는 자들의 경건은 왜곡되어 있다. 그것은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 구제하는 것, 금식하는 것 모두 그 자체로는 믿음을 표현하는 활동임을 보았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고, 구제하는 것은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것이고, 금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선의 결과는 이것들을 각각 자기 과시로 바꾸어 버려 이 활동의 진실성을 파괴한다. 나아가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은밀하게 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완전히 은밀하게 할 수는 없다. 설사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 분은 우리를 잡기 위해 “염탐하는’ 하늘의 경찰 같은 존재가 아닌 하늘께 계신 우리 사랑의 하나님, 언제나 우리에게 축복을 주실 기회를 찾고 계시는 분이시다. 결론적으로 어느 구경꾼이 우리에게 더 중요하느냐다. 이 세상의 구경꾼인가, 하늘의 구경꾼인가,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군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의 경우 관객은 하나님이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주의 깊게 관객을 선택하여야 한다. 인간 구경꾼들을 더 선호한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실성을 상실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관객이 되는 경우에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본히퍼가 말했듯이 “나를 나 자신의 기도 공연의 관객으로 바꾸어 버리면 더욱 더 치명적이다. … 나는 심지어 나 자신의 은밀한 골방에서조차 나 자신을 위한 대단히 멋진 쇼를 펼칠 수 있다.”
그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관객으로 선택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전 헌금함에 사람들이 헌금 넣는 것을 지켜보셨듯이 (막 12:41 이하), 하나님은 우리가 드릴 때 우리를 지켜보신다. 하나님은 위선은 미워하시지만 진실함은 사랑하신다. 그 때문에 그 분의 임재하심을 의식할 때에만 우리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진짜가 될 것이다.
매일의 삶_ 특별히 구제, 기도 및 금식에서 하나님을 저의 관객으로 선택하는 온전한 삶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 2023. 8.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