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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
출 16:13-20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출 16:13-21 /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시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날아와 그들이 진 친 곳을 뒤덮었고 아침이 되면 그들이 진 친곳 사방에 이슬이 내렸다. 14) 이슬이 마르자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생긴 것이 쭉 덮여 있는 것이 보였다. 15)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어, 이게 무엇이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러자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먹거리로 주신 것이다. 16) 여호와께서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이 먹을 만큼씩만 거두어 들여라. 식구 수대로 거두되 한 사람당 ㄱ) 한 오멜씩만 거두어 들이도록 하여라.' ㄱ) 1오멜은 약 2리터이다) 17)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대로 실천하였다. 그들이 거두어들인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였다. 18) 그러나 거둔 것을 되로 되어 보니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곧 사람마다 먹을 만큼만 거두어 들인 것이다. 19) 또 모세가 그들에게 먹다 남은 것을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라고 지시하였으나 20) 더러는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아침까지 남겨 두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 보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요란하였다. 모세는 그들에게 화를 내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주시고 아침에는 만나를 주셨는데,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 공급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신 양식(13-15)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양식은 메추라기와 만나였습니다. 메추라기는 통통한 몸집을 가진 철새로서, 봄에는 아프리카에서 떼를 지어 북쪽으로 날아갔다가, 가을에는 아라비아나 시리아 쪽을 거쳐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권능으로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메추라기 떼를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일 개월 동안 이스라엘 진 주변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만나는 “이것이 무엇이냐?”에서 나온 말로써, 갓 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비슷한 모양으로 밤에 이슬이 내릴 때 광야 지면에 같이 내렸습니다(민 11:7-9). 그것을 모아 맷돌에 갈아 굽거나 삶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만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공급하신 하늘의 양식입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게(16-18)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만나를 각 사람이 먹을 만큼만, 그리고 식구 수대로 식구 한 명에 한 오멜씩 거두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여기서 한 오멜은 2.3리터 정도가 되는 양이지만, 정확한 도량형을 의미한다기보다, 그 정도 부피를 담을 수 있는 ‘토기 사발’을 의미합니다. 신기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지시대로 순종했을 때 만나를 다소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어 보이나, 실제 필요한 일용한 양식으로 볼 때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을 따를 때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19-20)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거두고 보관하는 것과 관련하여 거둔 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리 양식 걱정으로 많이 거두었다가 남겨둘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중에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걱정과 불신 가운데 아침까지 만나를 남겨두었다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 경우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들도 먹을 양식에 관해서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마 6:31)
적용: 혹 내일 먹을 양식을 위해 미리 근심하고 걱정하시는 분 있으십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날마다 근심 걱정 없는 평안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양들은 습관적으로 동트기 직전에 일어나서 먹이를 찾아 나섭니다. 이른 새벽에는 초목이 이슬로 흠뻑 적셔 있어서 양들이 동트기 전후해서 풀을 뜯을 때 싱싱한 양의 수분을 아울러 섭취할 수 있습니다. 이슬은 맑고 깨끗하여 순수한 물의 근원이 됩니다. 날이 밝을 때 나뭇잎과 풀잎들에 무겁게 매달려 있는 은빛 이슬방울 보다 더 찬란하고 고요한 물은 없습니다. 부지런한 선한 목자는 자기 양들이 이슬에 젖은 신선한 조반을 먹도록 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생명 그 자체를 섭취하는 것은 이른 새벽에 내리는 신령한 만나입니다.(양과 목자/필립 켈러)
< 설 교 >
섣불리 무시할 수 없는 성경의 증언
출 16:13-31 / 김영준 목사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님이 육군 장교이셨습니다. 아버님은 저에게 군대나 전쟁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이야기 중에 하나는 낙하산에 대한 것입니다. 공수부대원이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릴 때 남이 접어준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립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낙하산이 펴지지만, 낙하산을 잘못 접었으면 펴지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낙하산에는 그 낙하산을 접은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자기가 매고 내릴 낙하산을 직접 접는 군인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낙하산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 중에 낙하산 접는 법을 아는 분 계십니까? 낙하산을 올바로 접는 방법이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이건 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는 매우 전문적인 지식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세월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여전히 더 많이 있습니다. 일평생 배우고 배워도 세상에는 우리가 다 배울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섣불리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낙하산 접는 법, 그건 전문적인 지식인데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제가 수년 전에 어느 주일에 설교를 하다가 부정확하게 알고 있는 의학 상식에 대해서 섣불리 예화로 말을 했는데 예배 후에 어느 성도님이 조용히 다가오시더니 ‘목사님, 아까 설교 중에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아니고 이것입니다.’라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의학박사이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지적입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섣불리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설교 하는 중에…. 그 이후로 저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리라고 다짐을 했는데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본인이 많이 알고 적게 알고를 떠나서 섣불리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사람마다 강한 의견을 피력하려고 합니다.
대학교 선교회를 창시하신 故김준곤 목사님이 한번은 어떤 사람과 신앙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데 그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더랍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김준곤 목사님이 종이에 큰 동그라미를 그리고, ‘이 동그라미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시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은 이 중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작은 부분이 되겠지요? 그럼 당신이 알지 못하는 이 나머지 부분에 하나님이 계실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합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하는데 당연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땅에 있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하늘에 있는 것을 어떻게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야곱이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한 후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과연 여기에 계시건만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우리는 성경말씀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당연히 여러분은 성경말씀을 존중하실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내가 갑이고 성경말씀이 을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에 갑을논쟁이 많지 않습니까. 제가 며칠 전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왜 갑순이와 갑돌이가 맺어지지 못했느냐? 서로 사랑했다는데 왜 갑돌이와 갑순이가 맺어지지 못했을까? 이유가 분명합니다. 둘 다 갑이었기 때문입니다. 둘 다 갑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을이 되어야 하는데 둘 다 갑이 되려고 하니까 서로 사랑하지만 하지만 맺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이건 목소리를 높일 부분이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갑이 되고 우리가 을이 돼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내가 갑이고 성경이 을일 때가 많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성경을 읽는 거예요. 내가 성경을 이해해줘야 돼요. 때로는 성경말씀이 할아버지와 같아서 내가 부축해 드려야 되는 거예요. 성경이 좀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내가 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성경이 어린이 동화와 같아서 곧이들으면 안 되고, 새겨들어야 되고 의미를 내가 찾아줘야 되는, 마치 성경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태도가 내가 갑이 되고 성경이 을이 되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태도가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생각할수록 사람은 자기가 주도해서 성경에 의미를 부여하고, 성경의 의미를 찾고, 성경이 이 시대 사람에게 의미 있는 문서가 되기 위하여 자기가 뭔가 도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 같은 사람은 성경의 기적,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전부 삭제하고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만을 골라서 편집했는데 그것을 제퍼슨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제퍼슨은 자신이 그렇게 함으로써 성경을 사람들의 의구심으로부터 건져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그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성경말씀 스스로 얼마든지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얕보면 안 됩니다. 제퍼슨 같은 사람은 성경을 얕본 것입니다. 진지하게 대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충분히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가다가 오늘 본문 말씀 같은 구절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만나에 대한 구절인데 만나라는 말은 맛있다는 뜻이 아니고 이게 무엇이냐 라는 히브리어에서 파생한 말입니다. 만나가 처음 땅에 내렸을 때 사람들이 그게 뭔지 몰랐기 때문에 이게 뭐냐 라고 물은 데에서 만나라는 이름이 유래가 됐습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깟씨라 함은 코리앤더로 더 잘 알려진 식물의 일종입니다. 멕시코 음식에 코리앤더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 맛을 맛볼 수 있는데 왜 제가 이 구절을 지목하느냐? 만나에 대한 성경구절이 비유에 불과했다면, 굳이 만나의 맛이 코리앤더와 같았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40년 동안 먹이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하나의 비유적인 말씀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영적인 교훈을 주기 위한 신화라고 생각할 때는 없습니까? 만일 만나가 비유에 불과했다면 만나의 맛이 무엇과 같았는지를 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만나의 맛이 무엇과 같았는지를 굳이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영적인 비유가 아니고 역사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므로 만나를 먹어본 사람들이 그 맛이 어떠했는지를 증언했고 그것을 성경이 기록한 한 것입니다. 코리앤더 같았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실제로 코리앤더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만나가 코리앤더였다는 말은 아니에요. 코리앤더 같았다 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성경에는 ‘무엇과 같았다’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천국의 비밀을 사람이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알고 익숙한 것에 빗대어 그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은 ‘무엇과 같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 것입니다. 천국은 누룩과 같다, 겨자씨와 같다, ‘같다’와 같은 말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하늘의 비밀을 우리가 알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빗대어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성경에 대한 깊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됩니다. 성경은 픽션이 아니고 동화가 아니고 그리고 어떤 영적인 진리를 말하기 위한 비유도 아닙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책입니다.
며칠 전이 광복절 아닙니까? 어떤 청년이 ‘흙 한번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춘다 - 광복절 노래입니다 -’ 그 가사를 페이스 북에 올렸더니 친구 한 명이 그 밑에 ‘시 쓰고 있네’ 이렇게 댓글을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글을 올린 친구가 ‘광복절 노래 가사거든!’ 그랬더니 그제서야 그 친구가 ‘앗, 그런 게 있는지 몰랐네. 미안.’ 이 세대의 무식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학교에서 광복절이 되면 반드시 행사를 하고 그 노래를 불렀는데 요즘은 수능 공부하느라고 광복절이든 삼일절이든 제헌절이든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고, 많이 배우는 것 같은데 무식한 세대를 양산하고 있어요.
과거에 일어난 일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직접 경험해서가 아니고 그것을 그때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가 갈라져서 그 가운데 길을 걸어 홍해를 건넌 것을 우리가 직접 볼 수 없지만 그때 그것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의 증언을 성경에 기록한 것을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무얼 먹고 살았느냐? 만나를 내려주셨어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40년 동안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맛이 무엇과 같았는지를 성경이 기록을 했는데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목격하고 증언했을지라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목격자들은 다 죽어 없어지고 무엇만 남습니까? 기록만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후세 사람들이 그 기록을 진지하게 대해주지 않으면 과거에 아무리 놀라운 일이 일어났었을 지라도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관심을 갖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이지만 과거에 하나님이 아무리 놀라운 일을 하셨더라도 그것을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방법은 증인들의 기록을 남기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그 이외에는 과거의 일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요즘 같으면 글뿐만이 아니고 동영상을 찍어서 남기겠지만 그러나 기록이라는 의미에서는 동영상이든 녹음이든 사진이든 글이든 결국은 증거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는 마찬가지에요. 요즘도 동영상을 보고도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글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아무리 신뢰할만한 증거를 남겨도 그것을 믿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가르쳐야 될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광복절 노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유태인들이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만들어서 끊임없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후대에 전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리 과거에 끔찍한 일이 있었더라도 세월이 지나가고 사람들의 기억이 지워져 버리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고 모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존중해서 책장에 꽂아두기는 하지만 정작 그것을 진지하게 읽고 그 말씀이 우리를 가르치고 인도하도록 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성경은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이지만 동시에 사람들이 제일 안 읽는 책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에게 ‘성경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슨 말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칼 바르트가 찬송가 가사를 인용했습니다. ‘Yes, Jesus Loves Me, for the Bible Tells Me So -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성경에 써 있지 아니하면 내가 경험을 하던, 감정을 갖든 그것은 근거가 희박한 것입니다. 성경에 써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성경의 기록, 성경의 증언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뢰할만한 말씀이에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있느니라’ 할렐루야!
날마다 경이로운 삶
출 16:13-18, 눅 11:2-4 / 이성희 목사
제가 처음 군에 입대하여 부대에 전입한 다음 한 주간의 자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주간 휴가를 얻었습니다. 그 때 처음 휴가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휴가를 얻어 집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타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을 하면 가장 보람 있는 첫 휴가가 될까?” 혼자서 생각해보니 할 일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만나야 할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일, 모든 사람을 다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차피 다 할 수 없다면 가장 중요한 것만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부모님께 인사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고 오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훈련을 잘 마치고 왔노라고 인사하고 곧장 기도원에 갔습니다. 가서 며칠을 기도하며 찬송하며 지냅니다. 그 때 하늘을 봐도 신비롭고, 나뭇잎을 봐도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물소리는 어쩜 그리 아름다운지 모든 것이 신비롭고, 경이로운 하나님의 창조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도원에서 내려와 부모님께 인사하고 부대에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매일 보는 것이 경이롭고 재미 있습니까? 매일 접하는 일들이 정말 재미 있고 신비롭게 다가옵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의 일과가 기대되고 가슴이 뜁니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활기가 있습니까? 내 삶이 생각만 해도 은혜롭고 즐겁습니까? 우리의 삶은 우리의 생각의 차이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합니다. 존 템플턴은 “마음 속에서 일어난 생각은 그 속성상 밖으로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하였습니다. 80-20법칙에 의하면 20%의 생각은 80%의 삶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손과 발은 우리의 사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 못합니다. 좋은 생각과 행동은 결코 나쁜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나쁜 생각과 행동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생각은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행동을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긍정적이고 신앙적인 눈으로 매일의 삶을 경이로운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이 그렇지 못하면 하다못해 하늘을 바라보세요. 하늘에는 희망이 있고, 새 힘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삶을 살면서 어떤이는 침울하고 지겨운 삶을 삽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삶이지만 어떤이는 유쾌하고 희망찬 삶을 삽니다. 최근에 리더십 전문가 존 맥스웰이 쓴 ‘생각의 법칙’(Thinking for Change)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전체의 내용은 생각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식 같은 말이지만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을 적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아침에 땅에 내린 만나를 보고 경이롭고 신비했습니다. 매일 똑같은 음식이며 똑같은 날이지만 이 경이와 신비가 40년을 계속했다고 했습니다. 매일 경이로운 삶입니다. 매일 신비로운 삶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매일 경이와 신비가 가득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이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녁과 아침에 각각의 양식을 공급합니다. 저녁 메뉴와 아침 메뉴가 달랐습니다. 그들이 매일의 양식에 싫증이 날까봐 하나님이 배려하신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 주신 양식은 매일 내리는 양식입니다. 하루에 적절하게 먹게 하신 양식입니다. 어떤 날은 많이 먹고 어떤 날은 적게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욕심으로 많이 거두어 먹고 남으면 벌레가 생겨 먹지 못하고 버렸습니다. 이것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안식일애는 거두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 먹을 양식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이것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들이 매일을 수고하지 않고 먹는게 신비의 연속이었습니다. 만나는 신비한 음식입니다. 먹을 때마다 맛이 있는 음식입니다. 40년을 똑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런데고 그들은 “오늘 뭐 좀 다른 것 없어?”라고 하지 않고 매일 아침 신비롭게 먹었습니다. 아이들을 보세요. 며칠만 똑같은 반찬을 먹어도 “우리는 왜 매일 이것만 먹어?”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40년을 먹어도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40년 내내 경이롭고 신비한 음식이 만나였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제는 3년 동안 매끼를 다른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궁중 요리사들이 각 집의 온갖 음식을 다 동원하여 중국의 음식 종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요리 책에 있는 요리 가지 수만 하더라도 3천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음식 까다롭습니다. 자기 입맛이 없는 것은 모르고, 며느리 손재주만 타박하는 시어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입맛이 없으면 아무리 맛있어도 맛있는 음식이겠어요? 날마다 감사하면 맛없는 음식이 없습니다. 수도원의 음식은 최소한의 음식입니다.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입니다. 매일 거의 똑같은 음식입니다. 밀가루 빵과 콩 삶은 것과 올리브가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감사하니 맛이 있어요. 하나님의 신비가 있으면 매일 경이로와요. 매일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매일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 매일 똑같은 지겨운 삶을 살기도 하고, 매일 다른 신비로운 삶도 삽니다.
어떤 분의 가게에 심방을 갔습니다. 가서 근황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분이 제게 “우리야 매일 똑같지요. 아침에 나와서 가게 문 열고, 저녁에 들어가고, 집에 들어가서 정리하고 잠자고 또 아침이면 나오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오늘 돈 얼마나 벌었어요?” 그 분이 얼마를 벌었답니다. “어제는 얼마를 벌었어요?” 어제는 얼마를 벌었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그 보세요. 어제 보다 오늘이 조금 더 벌었네요. 매일 조금 수입도 차이가 나고, 오는 사람도 다르고, 다른 얘기하는데 왜 똑같다고 그럽니까? 매일 다른 삶이지요.” 우리의 생각에 따라서 얼마든지 매일 다르고, 신비롭고, 재미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기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사람 만나고, 가르치고, 설교 준비하고, 심방하고 그리고 주일이면 설교하고, 또 사람 만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매일 다른 삶이지요. 매번 다른 사람 만나지요. 대화의 내용이 다르지요. 설교할 때마다 다른 설교하지요. 결혼 주례할 때면 매번 다른 사람이지요. 장례식 가면 매번 다른 사람이 돌아가시지요. 얼마나 재미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은 매일 “이것이 뭐냐”라고 경탄하는 신비로운 삶의 연속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그대가 하루 하루 그대의 생활의 기적에서 나오는 경이를 그대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대 고통도 기쁨 못지않게 놀라움을 보이게 되리. 그리하여 그대 슬픔의 계절들은 평온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을”이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기대감이 넘치고, 경이로운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즐거움도, 놀라움도, 감사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입니다. 삶을 신비로 볼 때에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신비로 본다는 것은 내가 아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아는 것을 내려놓고 모르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둘째,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양식입니다.
만나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은 음식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어떤 사람은 경이롭고, 어떤 사람은 경이롭지 않은 음식이 아닙니다. 모두에게 경이로운 음식입니다. 모두에게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면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정당한 요구입니까? 당시에는 하루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제 생활이란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당시의 상황은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 잘 난타납니다. 아마 구약 시대는 이런 음식에 대한 갈급함이 더 했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감히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은 엄청난 사실입니다. 모자람이 없는 삶은 여호와가 목자일 때 가능합니다. 우리의 목자는 모자람도 남음도 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신명기 8:2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왜 만나를 주셨습니까?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하십니다. “마침내”란 말을 묵상해 보세요. 하나님은 처음부터 마구 주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통하여 낮추시고 시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면 마침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의 근거는 만나입니다. 하루에만 넉넉한 양식이 하나님의 양식입니다. 하나님은 양식을 먹고 남고 버리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최근에 인디언들의 삶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을 주문하여 보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욕심 없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땅을 침범한 백인들이 땅을 차지한 자격지심으로 포악한 사람, 몽매한 사람으로 매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인디언에 대한 바른 평가를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디언들은 자연에 대한 지혜가 넘칩니다. 그 책에는 “백인들은 그들의 끝없는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치우는 것도 모자라 끝내 황량한 사막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란 모든 바닷물을 다 삼키고도 모자랍니다. 오마하족의 격언에는 “훔친 음식은 결코 배고픔을 채워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대지와 친화하고 가지는 것보다 베푸는데 의미 둘 때에 비로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신비로와질 것입니다.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삶의 경이로움, 신비로움은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째, 경이로운 삶은 40년을 계속됩니다.
출애굽기 16:35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사람 사는 땅”을 “가나안 지경”이라 합니다. 광야는 사람 사는 곳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즉 사람이 살 데가 못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 살 만한 곳도 못되는 척박한 곳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은혜롭게, 풍부하게,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살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놀라는 경이로운 40년의 삶을 살았습니다. 신명기 2:17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고 합니다. 날마다 경이로움, 신비로움, 놀라움, 새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움이 매일 계속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난안에 들어갈 때까지 이 경이로움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은총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지금도 주시는 은총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생각을 가다듬고 보세요. 뜨는 해와 스치는 사람, 호흡하게 하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경이로움과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신령한 가나안인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매일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감탄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실 때마다 “하나님 무엇을 주시렵니까?”(창 15:2)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무엇인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끼면 수지 맞습니다. 매일 하나님께 “무엇을 주시렵니까?”라고 하는 신비한 기대감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진 한 어린이가 있었습니다. 이 불행한 어린이를 부모는 아주 어렵게 키웠습니다. 의술의 발달로 15세쯤 되는 해에 수술을 하여 어린이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눈을 뜨고 보는 이 세상은 신비롭다 못해 이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어느날 이 소년을 아룸다운 대자연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세상에 태어난 지 15년만에 보는 자연의 세계는 너무나 아름다왔습니다. 소년은 어머니에게 원망했습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가 이 땅 위에 있음을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는 울먹이며 “난들 왜 말해주고 싶지 않았겠느냐. 말해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내가 설명을 한다 해도 네가 알아들을 수 있었겠느냐?”고 대답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름답고 신령한 세계를 우리가 아무리 설명을 잘 듣는다 해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 소년과 같은 원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삶을 주셔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합니다. 마음이 둔해 깨닫지 못합니다. 날마다 경이로운 삶을 보고도 경이로울게 없다고 합니다. “왜 나에게는 감격도, 기쁨도, 경이로움도 안 주십니까?”라고 어리석은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눈을 떠 보세요. 온통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찬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주시는 것은 경이로음과 신비함 그 자체입니다. 어니 젤린스키는 말했습니다. “어제는 역사, 내일은 신비, 그리고 오늘은 선물이다”(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mystery, today is a gift).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제도 신비, 오늘도 신비, 내일도 신비이다”. 정말 우리의 삶이 경이로움의 연속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경이감과 열정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세계가 온통 경이로움입니다. 그래서 아기들은 말을 배우면 “이게 뭐야?”로 시작합니다. 보는 것마다 “이게 뭐야?”라고 묻습니다. 아기들은 매일 만나를 경험하는 삶을 삽니다. 어른이 되면 “이게 뭐야?”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이 우리 에게도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만나의 경이로움이 매일 똑같이 반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온통 신비입니다. 온통 경이로움입니다. 사람의 몸은 생체의 경이로움 덩어리입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경이로움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삶은 경이로움의 경험입니다. 미국에서는 그런답니다. 아무리 봐도 한국은 망해야 되고, 재무구조나 노사문제나 모든 문제를 보면 안돼야 하는데 되고 있어서 이상한 나라라고 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 지난 달에는 수출이 172억 달라로 월간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습니다. 부산항의 크랜인이 태풍에 무너져 망해야 하는데 망하기는커녕 더 잘 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한국은 참 경이로운 나라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것이 무엇이냐”하고 신비롭게 살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매일매일 경이로움의 연속으로 삽시다. 우리의 사는 날이 앞으로 40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하루하루의 남은 날동안 날마나 “이것이 무엇이냐”, 아침마다 경이롭고, 밤마다 감사가 넘치는 감동의 연속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먹게 하신 양식
출 16:13-21 / 엄기호 목사
하나님은 종 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선민 구원을 계획하신 당신의 언약을 실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신실한 구원언약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출 3:5-8).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하나님께서는 40년간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셨습니다. 스데반은 이 시기를 “광야교회”(행 7:38)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셨습니다. 문제의 홍해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고,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의를 행하며, 법도와 규례를 지키면 치료하는 야웨로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가 있는 엘림에 장막을 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16장 첫머리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낙원과 같은 엘림을 떠나 신 광야에 이르러 다시 비난과 원망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교회 동안 끝없이 불평하고 원망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불평과 원망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깨닫기 원하실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
먼저, 인내하지 못함을 반성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너무 성급하게 하나님께 불평하고 보챘습니다.
걸핏하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고 조금도 참을성이 없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작은 일에도 모세를 비난하고, 잠깐의 고난에도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머물러두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광야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이 있더라고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인내하며 나아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나안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봤습니다.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금방 씨를 심고는 빨리 싹이 나서 열매 맺기를 기다리는 농부와 같이 그들은 참고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성급한 사람은 실수가 많게 마련입니다. 무엇이든 너무 서두르면 예상 못한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위험도 역시 훨씬 높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인내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순간 그들 눈앞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배가 고프다고 보채면 만나를 내려주시고, 현기증이 난다고 하면 메추라기 떼를 보내어 잡아먹게 하시며, 마실 물이 없다고 소리를 지르면 반석에서 물이 내서 마시게 하셨습니다. 또 불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기적과 응답을 체험했으나 계속 원망을 일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미래를 바라볼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지 않고 현실의 광야만을 바라봤습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 미래의 소망을 바라보며, 나를 만드시고, 나를 붙드시고, 나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며, 그 손길을 체험하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셋째,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에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의 흐름을 초월해 철새 메추라기를 이스라엘 백성 진영에 쌓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껏 본적 없는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하지만 민수기 11장 8절과 21장 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꿀 섞은 과자’(출 16:31) 같다던 만나를 ‘박한 식물’, 혹은 ‘기름 섞은 과자맛’이라고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일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간사해서 만족과 감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도 세상에는 불만으로 가득 차 있고, 만족이 없습니다.
돈을 가져도 그 돈에 만족이 없고 직장에서도 만족함이 없으며, 사업과 가정에도 만족과 감사가 상실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어도 만족함이 없이 욕구불만으로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매순간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살지만 그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순간 감사하지 못함을 회개하고 주신 은혜에 감사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
출애굽기 16장15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이것은 야웨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전혀 새롭고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만나는 그들이 과거에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것이며 경이로운 것이었습니다.
만나는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주신 하늘의 양식입니다. 그런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날마다 넉넉히 공급하셨습니다. 적게 거둔 자나 많이 거둔 자나 부족함이 없고 남는 자도 없게 주셨고, 각 사람의 분량에 맞게 주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 곡식을 먹을 때까지 계속해서 공급해 주셨습니다(출 16:35). 모세는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고(신 34:7), 갈렙(수 14:10-11)과 여호수아도(24:29) 가나안에 들어가 수확한 곡식을 먹기까지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책임져주셨습니다.
만나를 주시고 먹이심은 하나님의 섭리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날마다 공급하신 것처럼, 또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책임져 주신 것처럼, 우리도 책임져주시며, 날마다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더불어 우리는 요한복음 6장 48-51절에서 증거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양식,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취하며,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우리가 취해야 될 떡은 생명의 떡,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풀도 마르고 꽃도 떨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고 했습니다. 썩을 양식, 냄새날 양식 때문에 죄를 짓는 자리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따르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날마다 채우십니다.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궁핍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신령한 만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욕심은 썩고, 벌레 먹으며, 냄새나는 만나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먹게 하신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승리하는 성도가 됩시다.
깨끗하고 향기로운 삶
출 16:13-30 / 이수영 목사
방금 읽은 말씀은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또 하나의 놀라운 사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엘림과 시내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는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곧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라고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4)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12) 그리고는 그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내려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에 덮이게 하심으로써 그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주셨고, 아침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라고 이름지어 부르게 된 희한한 물질을 날마다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처음 보고 서로 "이게 뭐지?" 라고 물었던 말 "만 후"에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치고 있는 그 주위에 아침마다 이슬이 맺혔다가 그 이슬이 마르고 나면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14)이 남곤 했는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31) 같았다고 했으며 해가 뜨겁게 쪼이면 스러지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진기한 양식을 하늘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몇 가지 제약을 두셨습니다.
그 첫째는, 매일 매일 각 사람의 머리 수대로 하루 먹을 분량의 양식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많이 거두거나 몇 일분의 식량을 미리 한꺼번에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매일 매일 그 날 거둔 것을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제7일 즉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 것이며, 그 대신 그 전 날, 즉 제6일에 이틀 분의 식량을 거두어 그것으로 그 다음날 안식일 아침의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명하신 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 그 결과가 주목할 만 합니다.
먼저, 본문 20절에 보면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사실은 본문 24절에서 보는 대로 제 6일에 미리 거두어서 그 다음날 안식일을 위해 예비했던 만나는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한 것입니다.
그 다음, 본문 27절에 보면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베푸신 일, 백성들이 그 식량을 거둠에 있어서 지키도록 정하신 규칙들, 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명령 앞에서 이스라엘이 경험하고 확인한 그 모든 사실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을 위한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매일 매일의 양식과 삶의 염려를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매일 매일 그 날 분의 식량만을 거두고 또 다음날까지 남기지도 말라고 하신 뜻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삶을 오늘도 책임지시며,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책임지시고, 내일 뿐 아니라 언제나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자 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29절의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하신 말씀은 또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을 위해 일하지 말고 쉬라 하실 때에는 우리가 일 안하고 쉴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문제를 책임지시고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게 하고자 하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이 매일의 양식과 생존을 위해 스스로 하는 염려,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하겠다는 염려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남겨두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 둔 양식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먹게 된 사실은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기억하고 되새겨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마6:1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마6:19),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6:34)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백성의 풍족함은 자연이나 인간 스스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17∼18절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꼭 같은 땅에 왜 평일에는 만나가 덮이고 안식일에는 그것이 없으며, 또 꼭같은 만나인데 왜 보통 때 그 다음 날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끓고 냄새가 나는데 안식일 전 날에 거두어 안식일 아침까지 둔 것에는 벌레도 냄새도 없었다(24)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자연의 어떤 숨겨진 이치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어떤 조작을 통해 가능한 것도 아니며 오직 그렇게 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행하는 수고는 실상 얻을 것이 없는 헛수고임을 알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아껴서 그 다음날까지 남겨둔 것도 벌레와 냄새로 헛수고가 되고 말았으며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일부 이스라엘 백성이 들에 나가 보았으나 결국 아무 것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백성을 향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나라 백성이기를 원하는 우리들 가운데에는 아직도 이러한 가르침들을 깨닫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여 책망 받을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대하면서 "거 뭐 하나님이 세우시는 계명과 율법이 고작 먹는 양식에 관한 자질구레한 간섭인가" 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오늘의 이야기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 있어서 그 근본의도는, 복잡하고 까다롭고 종종 그 의미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외형적 행위의 요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은혜의 프로포즈에 있으며 우리에게는 오직 그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을 요구하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결코 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짐을 내가 지겠고 너희는 그저 나만 믿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안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과 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게 하시고 오직 그를 믿는 믿음만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제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 속에 들어있는 근본적인 복음의 정신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삶의 문제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는 것 보다 더 확실한 안식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이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 이 진정한 안식의 비결을 소유한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정하시고 일을 멈추고 쉬라 하신 것이 어디 하나님 자신의 어떤 이득을 위해서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정해주신 것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6일간 힘써 일한 후 하루를 쉼으로써 심신의 피로를 풀고 활력있는 삶을 위한 재충전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심을 실제로 경험케 하심으로써 진정한 안식은 오직 하나님께 있고, 참된 안식의 비결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안식일 뿐 아니라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일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정해주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시는 것은 한 주간 중 하루를 안식하게 하시는 은혜일 뿐 아니라 한 주간 전체를 평안 속에 살 수 있는 비결을 소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나라의 백성이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허락하신 영원한 안식의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지 못해서, 또는 알아도 믿음으로 확인해 볼 용기를 내지 못해서, 또는 세상적 관심, 인간적 염려, 물질적 욕심이 보다 강해서 주일에도 안식보다는 계속적인 일과 돈벌이를 택하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곤 합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일입니다. 오늘의 안식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의 평안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모든 안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을 외면하고 스스로 얻고자 하는 안식은 진정한 안식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하실 염려를 굳이 스스로 하려는 것 보다 더 어리석고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수고만큼 헛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일하고 애쓰고 벌어들이고 남기고 모아두는 모든 것에서는 냄새가 날 수 밖에 없고, 그러한 어리석고 욕심스런 삶은 반드시 벌레가 끓게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이렇게 벌레 먹고 냄새나는 삶을 아직도 살고 있는 사람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일하든지 쉬든지 모으든지 쓰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을 따라 행함으로 벌레도 없고 냄새도 없는 삶,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풍기는 삶, 남는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는 깨끗하고 향기로운 삶을 사는 지혜를 새롭게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부터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지낼 때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만나를 주셨듯이,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기 전 광야와도 같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의 길을 가는 우리들에게도 하늘의 양식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그 하늘양식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하셨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셨습니다. 삶의 모든 염려를 다 하나님께 맡기고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안식은 우리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귀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주일을 거룩히 지키자
출 16:13-31 / 임덕순 목사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의 뜻과 우리가 가야할 길을 계시 하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독교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신앙의 기초는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자세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죄에 눌리고 질고에 시달리고 절망에 목 졸린 인간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고, 그것을 위해서 안식의 날까지 제정해 주신 분입니다. 오늘 드리려고 하는 말씀은 엿새는 힘써서 일하고 주일 하루는 꼬박꼬박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며 섬기는 생활을 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엿새에 걸쳐 천지만물을 완벽하게 창조하신 후에 만물이 완성되자 크게 기뻐하시며 일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일을 마치신 그 다음날 즉 제 7일에 하나님은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는 말은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한 작가가 커피한잔을 들면서 자기가 만든 작품을 감상하듯이, 하나님께서 만물을 완성하신 뒤 그것을 감상하며 쉬신 날을 일컫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만드신 만물들이 스스로 동작하도록 작동시키시고 지켜보시며 조정하고 관리하는 섭리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섭리란,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을 그 정해진 목적을 이루도록 유지하고 인도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만물을 사람에게 관리를 맡기면서 당신께서 쉬신 그날에 우리도 안식하라고 안식제도를 주셨습니다. 일곱 날 중에 한 날은 안식해야 하는 날이며, 그날 모두가 자기의 일을 멈추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로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안식일은 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우선 이 날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로 사용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11에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모든 만물을 만들고 쉬었으니, 그러므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 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를 감사하는 날입니다.
신5:15에는 “네가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더니, 내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이끌어 내었으니,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을 봅니다. 이 말은 내가 너희를 구원한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들이 감사하는 날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구원의 은총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날은 복스러운 날, 복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이날에 복을 주시며” 하나님은 그 날을 복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날이 복을 받는 날입니다. 이날에 안식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 이날 지키는 사람에게 이런 복을 주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사56:1-8에는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이지 않게 하마”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그들을 기쁘게 하마” 하셨고,
사58:14에는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요, 땅의 높은 곳에 올리며,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날을 잡으려고 돈 들여 점쟁이에게 묻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길일을 일 년에 52일 주셨습니다. 길일 정도가 아니라 복 받는 날을 52일 주셨습니다. 그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날에 우리의 집과 자녀와 산업과 밭에 복을 내리시기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큰 기대로 하나님을 만나러 나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복된 날이요 복을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평안함,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즐거움, 하나님의 부요함,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이것을 우리에게 누리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주일은 복된 날입니다.
또한 이 날은 물질의 소득 대신에 신령한 소득을 주시는 날입니다.
작은 섬에는 물이 귀해서 빗물을 받아 놓았다가 그것을 가라앉혀 먹기도 하고 빨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 오는 날 그릇을 내놓아야 물이 고이고, 햇볕이 따가운 날 빨래를 널어놓아야 잘 마르지, 비가 오지 않는 날에 그릇을 내 놓으면 있던 물기마저도 말라 버립니다. 날을 구분할 줄 알아야 신자의 기본이 갖추어 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애굽에서 해방되어 먹을 것이 없는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만나라는 기적의 음식을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아침에 텐트 밖을 나가보면, 하얀 떡가루 같은 것이 눈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것은 매우 영양가 높고 맛있는 음식이었고, 그 음식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 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음식과 물과 모든 것을 공급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물증으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거두는 데에는 하나님이 정하신 몇 가지 규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음식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훈련시키기 위한 만나를 거두는 규칙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매일 아침마다 나가서 거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일, 모레, 다음주일에 먹을 양식을 한꺼번에 주신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그날의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매일 매일 너희 생명을 책임지고 너희 필요한 것을 다 책임지는데 너는 그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고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나를 잊고 네 힘으로 삶을 시작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훈련이요 시험입니다.
만일 그들에게 한달치 만나를 한꺼번에 주시면, 날마다 여행하는 그들이 한 달 분의 양식을 짊어지고 가는 것도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달치 양식이 있을 경우에, 그들은 먹을 것 걱정이 없으니 양식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잊어버릴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람이란 너나없이 은혜를 망각하는 존재입니다. 만약 우리가 한 달 만 아무 걱정이 없이 평안하다면, 그 한 달 동안 감사가 넘치고 믿음이 더 좋아질 것 같습니까? 도리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길로 떠나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매일매일 하나님을 우러러 의지하고 살게 하시려고, 날마다 하루 분량의 양식을 내려주시며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매일 매일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 매일 매일 성실하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날마다 양식을 준비하고 공급하십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날마다 그분의 보호와 책임 아래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성도가 됩시다.
둘째는, 각 사람에 한 오멜씩만 거두게 하셨습니다.(16상)
한 오멜은 2.34리터쯤 됩니다. 북한의 사람들은 하루에 강냉이 350g 씩만 먹고 산다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꿀 섞은 과자 같이 맛좋고 영양가 풍부한 양식을 하루에 두되 반씩이나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 개인의 필요를 아시는 자상한 분이라는 것을 말하고,
하나님은 각 사람의 필요한 분량까지도 아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되 충분히 채워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일인분만 거두라고 신신당부하셨지만, 어떤 사람은 세 오멜, 네 오멜을 거두었고, 어떤 사람은 열 오멜을 거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집으로 끙끙 가지고 가서 되에 되어보았더니, 되는 순간 모두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똑같이 한 오멜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욕심을 내어 아무리 많이 모아도 자기 분량 밖에는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일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가 욕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들 쉬는 날 일을 해서, 남보다 잘살아야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주일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데,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요 후회가 남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이시지만 하루에 한 오멜씩만 거두게 하셨고 욕심 부리도록 많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셋째는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고 전 날 갑절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매일 만나를 내려 주시는 중에도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지 않으셨고, 대신에 전날 갑절을 거두어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는다고 미리 말씀하셨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고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평일에는 그렇게 많던 만나가 안식일 아침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빈 그릇을 가지고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와서 종일 굶어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만나를 주시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날은 육신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는데, ‘거룩’ 이라는 말은 ‘특별하다.’ ‘구별되다.’ 라는 뜻입니다. 주의 날이 거룩하다는 것은 보통 날들과는 완전히 다른 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엿새 동안에 하던 일들은 하지 말아야 하고, 엿새 동안에 하지 못한 일들을 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엿새 동안은 각자의 육신을 위하여 농사를 짓고 장사를 하고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엿새 동안 하지 않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에 하지 못했던 일인 교회가고, 예배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남들을 돌보고, 봉사하는, 육신의 일이 아닌 영혼을 위한 일들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날이 특별한날, 구별된 날, 거룩한 날인 것입니다.
저는 지난 20년 동안 주일날 새벽예배 시간마다 의도적으로
“이 날은 주의 정하신 참 기쁜 날 일세” 등의 안식일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주일날에는 커피 자판기도 전원을 끊었습니다. 돈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편리를 위해서 설치한 것인데 그것도 끊을 필요가 있느냐 하겠지만, 자판기에 커피 빼러 갔다가 “아, 참 오늘은 주일이지”라고 생각을 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판기 판매가 많으면 장학금에 보탬이 되겠지만 장학금 보태주는 것보다 주일이 특별한 날임을 알려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특별한 날이지 보통날이 아닙니다.
만일 너희가 그날에도 너희 육신을 위해서 일하면, 내가 아무것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를 그날에는 만나를 주지 않으신 것으로 확실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날을 ‘특별한 날’ 이라고 인정하고 특별하게 사용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아직 못했으면 금년에는 실천합시다.
아직도 주일날 가게 문 열고 영업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고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쉽니다.” 라고 큼직하게 써 붙이고 과감하게 순종하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엿새 동안에 하는 일에 복을 주십니다.
그러면 일주일에 엿새분만 양식을 주셔서 하루는 굶어야 했느냐, 아닙니다. 안식일 전날에 이틀 분을 주셨습니다. 주일에 쉬어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신자요,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불신자일 뿐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왜 만나를 내리지 않으신 줄 아십니까?
엿새 동안 매일 만나를 거둘 때, 사람들은 날마다 만나가 가득한 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들판에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곱째 날은 들판을 바라보아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왜 오늘은 만나가 내려오지 않나" 하고 자연히 하늘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가 아니라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만나가 내리지 않는 안식일 마다 성막 앞에 모여 제사를 드렸는데, 그들이 드린 제물은 사람들을 영원히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떡으로 주실 예수님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리시는 참된 만나였습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요6:49-51) 하나님은 안식일에 육신의 만나 대신에 영혼의 만나를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왜 육신의 만나 대신에 신령한 만나를 바라보게 하셨을까요? 그들이 엿새 동안 줄곧 만나를 먹었지만 그것은 단지 하루하루를 연명했을 뿐입니다. 만나는 분명 기적의 음식이었지만 육신의 음식이었으므로 먹고 나도 다시 배가 고팠고, 아무리 많이 먹어도 삶은 여전히 공허했습니다. 세상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해도 우리들을 채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질, 명예, 권세, 영화, 스포츠, 사랑, 그 무엇도 그리고 그것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의 영혼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하나님 앞에 모일 때에는 심령이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들판을 바라보지 말고 참된 만나이신 하나님을 우러러보라고, 일부러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오늘날의 주일은 참된 안식일이며, 참된 만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먹는 날 입니다. 주일은 주의 영이신 성령을 물 붓듯이 만나 내리듯이 내리시는 날입니다. 물질과 세상 것들로 엿새 동안도 채워지지 않았고 채울 수도 없었던 우리들의 가슴과 영혼을, 주님과 그의 말씀으로 채우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에는 마음의 빈 그릇을 준비하고 교회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 성도들 전체가 금년에는 철저히 주일을 지켜봅시다. 한 사람도 결석하지 않고 교회에 출석해서 은혜를 사모합시다. 주일을 성수를 다집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당신 자신은 안식을 포기하고 고난의 땅에 내려오셨고, 온갖 시달림과 수모와 고통을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어 희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안식을 누리는 방법은 안식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이 준비하신 사죄의 은총을 받는 것이고, 그분께 나아가는 일에 전념하라고 제정해 주신 주일을 지키는 것이 기본입니다. 주일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안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와 위로와 문제 해결과 참된 평안을 얻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얽매었던 일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안식일, 즉 주일에는 일단 일을 쉬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은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신 분입니다.
막5:에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서 병을 고치고 가르치고 먹이신 후에 저녁 늦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주님은 피곤해서 이내 잠드셨습니다. 그런데 풍랑이 거세게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든 제자들이 주님을 깨웠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바다와 바람을 꾸짖으셨고, 바다가 조용해졌습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어디였는가 하면 이방 사람들이 사는 거라사인의 땅이었습니다. 거기 가니까 귀신들려서 평안히 집에서 살지도 못하고 무덤사이에 살면서 울부짖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괴롭히는 귀신을 내쫓아서 정상적인 사람이 되게 해 주신 다음에, 되짚어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하루의 일을 마친 뒤 쉬지도 못하시고 생명을 위협하는 거친 풍랑을 헤치고 안식을 잃은 한 이방인을 찾아가셨고, 그를 마귀의 속박에서 풀어 안식을 주신 다음에 곧바로 되짚어 돌아오시는 모습입니다.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인생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주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안식일을 제정하여 주면서 이 날을 지키라고 명령하기까지 하신 뜻을 이해 해야 합니다. 이 안식일, 즉 오늘의 주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을까요?
요5:17에 보면,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 날 고쳤다고 예수님더러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이 나오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질병에 얽매여서 절망의 세월을 사는 사람을 그 질병에서 풀어 안식을 주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당신 잘 살려고 돈벌이 일하신 것이 아니라 남에게 안식을 주려고 욕을 먹으면서 고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치실 날도 안식일이었는데 그날은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가지고 안식일을 범한 죄인이라고 또 몰아붙였지만, 주님은 그런 모욕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죽어주기까지 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질병과 마귀에 매인 사람들을 풀어 안식을 주기 위해서 힘든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도 죄와 근심과 질고에 얽매인 안식을 얻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이 주일에 설교하고 심방하고 돌보는 날로 삼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기 육신의 돈벌이나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해서는 안 되지만 남에게 유익을 위해서는 당연히 주님의 일을 해야 하는 날입니다.
부득이 하게 주일날 어디를 가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자기 일을 위해서는 가지 않지만 교회일로 가게 되는데, 예를 들면 초상이 나서 부득이 문상을 가야 하는 경우입니다. 상가가 먼 지방이라서 가다가 식사 시간이 되어 밥을 사 먹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우리교회 장로님들은 주일날이라고 밥도 사먹지 말자고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목사나 장로님의 입장에서는 사먹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속도 모르고 목사님 장로님도 주일날 사먹더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무엇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목적이 무엇인가가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돈벌이를 위해서 주일날 어디를 가던 중인데 가는 길에서 밥을 사먹었다면 주일을 범한 것이고,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을 돕기 위해서 자기의 휴식과 이익을 희생하면서 가던 길이라면, 때가 되어 사먹는 것이 죄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몸인 교회와 성도는, 타인의 안식을 위하여 주님이 가신 길을 뒤따르는 사람들이지, 자기 탐욕을 위하여 안식일마저 범하고 돈벌이에 몰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남을 돕기 위해서 주일에도 일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주의 백성인데, 성도라고 하면서 아직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느라고 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한다면 기초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주일날에 자신의 경제적인 이익이나 명예적 이익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면, 돈에 매인 사람이고, 출세욕에 매여 사는 사람이며, 아직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기본 중에 기본은, 주일에는 절대로 결석하지 말고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물질을 바라보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처럼 남들에게 안식을 주는 일에 참여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삶의 안식을 누리고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감사의 대주제
출 16:15-31 / 석원태 목사
하나님은 종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선민 구원을 계획하신 당신의 언약을 실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신실한 구원언약을 성취하는 일이었습니다(출 3:5-8).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40년의 기간을 정했습니다. 그 기간은 애굽에서 나올 때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할 때까지의 어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어간을 광야교회 시대라고 하였습니다(행 7:38). 하나님은 이 시대를 ‘만나 시대’로 저들의 역사 속에 남겼습니다. 이 만나는 40년 동안 저들 이스라엘 백성을 살게 했던 생존의 주식이었습니다. 저들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그 땅에서 나는 열매를 먹을 때 만나가 그쳤다고 하였습니다(출 16:35, 수 5:12). 그렇다면 이 만나는 구원의 길을 걷던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구원의 양식입니다. 바로 이 만나는 신약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요 6:48-58). 이 시간에는 ‘만나 축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I. 만나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출 16:1-15).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온지 꼭 1개월이 되던 2월 15일이었습니다(출 16:1). 저들은 신광야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때 저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너희가 어찌하여 애굽 땅 고기가마 곁에서 배불리던 우리를 인도하여 여기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원망에는 섞여 사는 무리가 주동이 되었습니다(민 11:4). 저들은 바로 왕의 추격을 받았을 때도(출 14:11), 마라에서 쓴 물을 만났을 때도(출 15:24) 그리고 본문에서는 양식 때문에 이런 원망과 불평의 죄를 답습하고 있었습니다(출 16:2-3). 이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출 16:4)라고 하였습니다. 매주 6일 동안 아침마다 이 양식을 내릴 것이고, 안식일 전날(제6일)에는 안식일 분량까지 예비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매일 해가 질 때는 저들의 진(陣)에 날아온 메추라기를 먹고, 아침에는 이슬이 사라진 지면에서 ‘만나’라고 하는 양식을 거두어 먹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출 16:12-15). 그렇다면 만나는 죽음에 대한 생명의 양식이었습니다. 절망에 대한 소망의 양식이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부(富)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대치하였습니다.
II. 만나의 출처는 하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6장 4절에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라고 하였습니다. 느헤미야서에는 「저희의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느 9:15)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8편 24절에는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05편 40절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11장 9절에도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는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내린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6:32). 이는 초자연에 속한 이적적 양식임을 보여줍니다. ‘비와 같이 내린다’ 함은 많은 분량을 말합니다. 40년 동안 그 많은 백성들이 먹은 양식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람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은혜의 산물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만나’는 밤에 광야에 이슬과 함께,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늘 양식이었습니다. 바로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참 떡, 하나님의 떡, 생명의 떡(요 6:32, 33, 35, 48),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 6:51), 하늘로서 내려온 떡(요 6:41), 참된 양식, 참된 음료(요 6:55)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반복하여 주장하였습니다(요 6:33, 38, 41, 50, 51, 57, 58, 62, 65). 예수 그리스도의 화육강세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役事)임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III. '만나'는 실로 불가사의(不可思議)적인 신비 충만의 양식이었습니다.
1. 그것은 작다고 하였습니다(출 16:14).
그러면서도 그것이 보유하고 있는 충분한 영양가는 사막의 죽음을 이겨내는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한 싹’, ‘한 가지’, ‘나사렛 사람 예수’, ‘갈릴리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로 표현된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2. 둥글다고 하였습니다(출 16:14).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시무종(無始無終), 영원자존하심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만지기에 좋고, 먹기에 좋고, 보기에 좋았습니다.
3. 서리같이 세미하다고 하였습니다(출 16:14).
여기 ‘세미하다’는 말은 ‘가는 것’(thin)을 뜻합니다. 이는 참으로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으신 구주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강했고, 중했습니다.
4. 그 빛은 희다고 하였습니다(출 16:31).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 성결함을 예시하고 있습니다(계 1:14, 2:7). 그는 죄가 없었습니다. 죄를 지을 수도 없었고, 죄를 알지도 못했습니다(요일 3:5, 벧전 2:22, 고후 5:21, 히 4:15, 9:14). 그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 앞에 뛰어나신 분이었습니다(아 5:10).
5. 맛은 달다고 하였습니다(출 16:31).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출 16:31)고 하였습니다. 민수기에는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민 11:8)고 하였습니다. 꿀은 피곤한 자에게 있어 눈이 밝아지게 하는 힘을 가졌습니다(삼상 14:27). 바로 우리 구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쾌미, 은총의 쾌미를 생각나게 합니다.
6. 그 모양은 진주와 같다고 하였습니다(민 11:7).
민수기 11장 7절에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 귀중성, 고귀성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만나’라고 하였습니다. ‘만나’(aWh ;), 즉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질문할 정도였습니다. 저들은 이것을 보고, 만지고, 거두고, 직접 먹었으면서도 이 양식의 본질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만 후?’, 곧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답하기를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출 16:15)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질문이 바로 그 양식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Ⅳ. 만나는 가나안을 향하는 백성에게 주신 특별한 비상양식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전 삶의 목표는 가나안 입성이었습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행군하는 것이 전 삶이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길쌈을 하거나 집을 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생존 자체는 오직 언약의 땅,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1. 만나는 매일 매일의 양식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7절에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아침에 진에 내린 이슬이 마른 후에 나타난 만나를 두고 한 말입니다. 16장 8절에는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6장 12절에도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라고 하였습니다. 16장 21절에는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그것이 스러졌더라」고 하였습니다. 16장 4절에는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만나는 무질서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정한 장소에서 얻었습니다. 매일 매일 얻어야 할 양식이었습니다. 이유는 저들이 매일 매일 가나안 행군을 위하여 존재해야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매일 매일 우리가 먹고 마셔야(믿음) 할 생명의 양식입니다.
2. 만나는 개인 개인의 양식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21절에 「무리가 아침마다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고…」라고 하였습니다. 16장 16절에도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개인 개인의 믿음, 개인 개인의 구원입니다. 창조가 개인적이듯이, 타락이 개인적이듯이, 구원이 개인적입니다. 구원받은 개인이 가정을, 사회를, 민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합니다.
3. 만나는 모든 사람이 먹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저희가 배불리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출 16:8, 12, 18). 광야에서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서 죽은 자는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3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되 곧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의 여리고 평지에 도착하여,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수 5:10-12)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40년간 매일 매일 광야에서 만나 축제를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Ⅴ. 만나의 구속사적 교훈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애굽을 나온 지 만 1개월만에, 먹는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나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회상하면서 죽음의 위협 앞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당신이 광야교회의 생활에 이미 계획해 놓으신 ‘만나’에 대하여 알려 주셨습니다. 결국 이것은 저들의 죄를 진압하고, 광야에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주었습니다(출 16:4).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2. 여호와 구원의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들이 애굽을 나온 목적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가는 것이었습니다(출 3:7-8, 16-20, 5:1-3). 결코 정치적 이유나, 경제적 이유나, 그 어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는 거룩한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이었습니다.
① 그래서 출애굽한 무리, 곧 선택받은 자를 위하여 양식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② 6일간에만 내리고, 안식일인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하게 하였습니다(출 16:5, 25-26).
③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신종여부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16:4, 20, 27).
④ 생명의 본질을 교육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그들로 알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신 8:3). 이 모든 내용들은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신앙교육을 위함이었습니다.
3. 생명의 만나, 구원의 만나, 영생의 만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교회는 확실히 신약시대의 교회운동을 예표한 것입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만나 축제 속에서 가나안 행군을 계속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시대의 교회가 새 하늘 새 땅을 향하여 소망의 행군을 계속할 사실을 예시하신 것입니다. 모름지기 예수의 살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상 성찬의 축제에 참여하여 즐기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을 ‘예수를 먹는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 하시고, 또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마 26:27-28)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는 예수 믿는 믿음이란 바로 먹고 마시는 식음 작용과 같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험적 신앙, 체험적 신앙을 뜻합니다.
그 사람은 살리라(요 6:54, 58)!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적입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이적입니다. 예수는 하늘로부터 오신 이적 자체입니다. 그 만나를 먹고, 그 예수를 먹는(믿음) 일도 또한 이적입니다. 말하자면 비상법칙입니다. 이적이란 일반 통상법칙, 통상섭리에 의지하지 않는 하나님 자신의 직접 개입입니다. 제2위 원인이 매개되지 않은, 제1원인이신 하나님의 직접적 행동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이적은 바로 죄인 구원을 목적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운동, 곧 구원운동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신 것입니다.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 반석의 생수 같은 비상법칙이 나타난 것입니다. 죄인구원 운동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 세상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탄생)이 이적이요, 그의 무죄의 삶이 이적이요, 십자가 대속과 부활과 승천이 이적입니다. 성령강림이 이적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출생된 지상의 예수 교회가 이적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먹고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감사의 삶, 곧 축제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의 영감의 기록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감사)하리로다」(합 3:17-18)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감사의 본질적 우위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있는 곳에 어찌 무화과와 포도열매와 감람유, 밭의 소출과 외양간의 소가 없겠는가!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구원인)들에게 만나가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감사는 여호와께서 죄인들에게 베푸신 구원에 대한 반응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인간 구속 역사에서 일어나는 최귀, 최고의 응답입니다.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최귀의 감사는 예수라고 하는 만나를 먹고 마시면서(믿음), 그 분의 일을 하는 여기에 그 정체성(正體性)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믿음) 것입니다(요 6:26-29). 예수 만나를 먹었으니(믿음), 예수의 말을 하고 예수의 일을 함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이스라엘 백성의 만나 축제는 바로 신약 교회가 즐기는 예수 축제 곧 구원의 축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