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잔고(殘高)
인생의 뒤안길에 접어들면 지나온 삶을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이승에서의 삶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음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이 세상의 삶을 다하고 피안(彼岸)으로 떠날 때, 과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비워야 할까.
많은 사람의 삶은 세월 속에 묻혀 잊히고 사라진다. 그러나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타인을 사랑하고 세상에 선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누구나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두 분이 세상을 떠난 지 수백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다. 무엇을 남겼기에 이토록 많은 사람의 마음에 뿌리내리고, 오늘날까지 우리를 바른 삶으로 이끌고 있는 것일까.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을 남겼다. 한글은 그 과학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으며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한때 우리가 제2외국어로 독일어나 프랑스어, 일본어를 배웠듯이, 이제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우리 문화의 위상과 한글의 가치를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어떠한가. 임진왜란 당시 열두 척의 배로 수많은 왜군의 전선에 맞서 나라를 지켜 낸 위대한 장군이다.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했다. 오늘날까지 국민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은 나라를 구한 위대한 업적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기록한 『난중일기』를 통해 그 정신과 고뇌를 후세에 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세상에 그리움과 감동을 주는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얼마나 떳떳하고 보람된 일인가.
그렇다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무엇을 비워야 할까.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원망과 미움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가족에게는 사랑을 아낌없이 전하고, 친구에게는 우정을 나누며, 이웃에게는 따뜻한 배려와 정을 베풀어야 한다. 베풀 수 있을 때 베풀고,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음의 빚을 덜고 정(情)의 잔고를 아름답게 채워 가는 삶이 아닐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들을 떠나보낼 때마다 나의 마지막 날도 그리 멀지 않았음을 실감한다. 어느 공원묘지 입구에 새겨져 있던 “오늘은 나, 내일은 너”라는 글귀가 문득 떠오른다. 짧지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이치를 일깨우는 말이다.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다짐한다.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더 많이 소유하고 채우려 하기보다 가진 것을 나누고, 미움과 원망을 쌓기보다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살아야겠다. 재산의 잔고는 세상을 떠날 때 가져갈 수 없지만, 사랑과 배려로 쌓은 삶의 잔고는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