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
저자 퀑탱 메이야수
출판사 서평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 』는 도서출판b에서 2010년에 완역 출간된 바 있던 퀑탱 메이야수의 Apres la finitude: Essai sur le necessite de la contingence (Editions du Seuil, 2006)의 개정증보판이다. 저자 메이야수는 2012년에 1장의 후반부를 증보하여 재출간하는데, 이번에 새롭게 재출간하는 한국어판은 그 증보된 내용을 모두 반영했다.
상관주의 -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서 주체는 대상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주체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주체와 대상 간에는 언제나 ‘상관적’(correlational) 관계가 있음을 주장(칸트이후 주류 철학)
이 책에서 메이야수는 데카르트, 칸트, 흄에 대한 비판적 독서를 통해 형이상학적 신과는 다른 절대자, 절대적인 것을 추론해 낸다. 이를 위해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근현대 철학의 주류, ‘상관주의’다. 대상과 주체 간의 관계에서 주체는 대상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알 수 있으며, 주체가 인식할 수 없는 것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주체와 대상 간에는 언제나 ‘상관적’(correlational)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는 상관주의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시작해, 하이데거와 니체, 비트겐슈타인을 거치며 철학의 주류가 된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다는 상관주의는 결국 상대주의를 낳았으며, 인간의 유한성을 확고하게 함으로써 허무주의로 향할 수밖에 없다. 메이야수는 모든 절대자에 대한 사유를 폐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상관주의’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으면서, 사변적 사유에 의해 절대자에 대한 사유를 회복시키려고 시도한다.
선조성: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실들을 진술하는 과학 담화의 성격을 지시하는 단어
메이야수는 우선 철학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선조성’이라는 신조어를, 즉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사실들을 진술하는 과학 담화의 성격을 지시하는 단어를 만들어 낸 후 질문을 던진다. ‘인간적인 것을 비워낸 세계, 사물들, 그리고 현시와 비-상관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세계의 기술을 허락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존재는 현시에 대한 존재의 선행성을 현시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그는 인간과 인간적 사유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존재하는 것이 실재적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이 책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상관주의가 그런 진술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상관주의라는 현대의 지배적인 철학이 그토록 오랫동안 선조적 진술의 자명성을 부인해 왔다는 데 놀랄 것이다.
모든 형태의 상관주의는 ‘선조적인 것’의 연대를 추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조건을 단다. 그런데 이 조건 자체가 절대자를 인식할 수 없다는 자신의 유한성을 증명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메이야수는 선비판적 독단주의로 다시금 추락하지 않으면서도 절대자를 감당할 수 있는 절대론적 절차를 제시한다. 그것은 ‘비(非)이성’의 원리의 공식화이며, 그 요지는 사유 형식의 사실성 자체를 사실성을 넘어서는 것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재는 근거 없이 존재하는 존재자의 우연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정립할 때 획득된다.
사변적 실재론- 세계는 수학적 사변에 의해 인간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
메이야수의 논증적 절차는 두 개의 존재론적 진술들로 요약된다: ‘필연적 존재자는 불가능하다’, ‘존재자의 우연성은 필연적이다.’ 이 두 테제는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의 토대를 형성한다. 그리하여 이제 절대자는 사유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수학적 사변에 의해, 신이나 뛰어난 지성으로부터 빌려온 신비적인 물리적 필연성의 옷을 입지 않고도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메이야수는 과학의 뒤를 따라붙던 철학의 위상을 전복시키고, 과학의 실효성을 인정하면서 그로부터 절대자에 대한 사변을 시작할 것을 요청한다. 관건은 과학이 철학에게 건네는 다음의 질문을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달려있다. ‘거기에 사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유는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사유할 수 있는가? 그러한 사유는 어떻게 재정의되어야 하는가?’
메이야수 철학의 적극적 소개자이자 프랑스 철학 박사인 정지은은 이번 개정증보판 발간을 위해 2010년의 초판 번역을 전면적으로 손봤다. 현대철학의 가장 강력한 조류가 된 사변적 실재론의 주창자인 메이야수의 주저를 읽음으로써, 우리는 다시금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는 새로운 철학 운동의 맨 앞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https://youtu.be/N-BL9b3gogI?feature=shared
유튜브 충코의 철학
(네이야수) 사변적 실재론
영화 "트루먼 쇼"에서 주인공은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던 중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바로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거대한 리얼리티 쇼 세상에 살고 있었다는 겁니다. 스스로는 멀쩡히 가족 안에서 성장하고, 학교를 나오고, 직장에 다닌다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사실 그건 다 각본이었다 하는 사람이, 사실 내가 알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충격은 어마어마할 겁니다.
그런데 조금 진지하게 말하자면, 사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가 아는 모습과 완전히 다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제 친한 친구는 저와 헤어지고 집에 가면, 갑자기 인간의 가죽을 벗고 징그러운 외계인으로 변신할 수도 있죠. 물론 이럴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사실 거의 말이 안 되죠. 하지만 이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결코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는 언제나 세계의 대상들이 나에게 나타나는 모습만을 경험할 뿐이라는 겁니다.
내 경험을 넘어서 궁금증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대상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 되든, 그건 어디까지나 나에게 나타난 모습일 뿐입니다. 나와 무관한 그 대상 자체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서양 철학에서 칸트의 철학을 통해 많이 다뤄졌습니다. 칸트는 물 자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요, 물 자체는 나에게 나타난 대상의 모습이 아닌, 나와 무관한 그 사물 자체를 뜻합니다. 칸트는 물 자체가 미스터리의 영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눈앞에 돌이 하나 있을 때, 그 돌은 분명 자신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는 돌의 모습만을 알뿐입니다.
칸트의 이런 생각 이후로 서양의 철학은 주로 세계 자체가 아닌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려고 했습니다. 세계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그걸 직접 알려고 하는 건 무모한 시도에 불과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세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는지, 과연 그 관계가 무엇인지를 파고드는 것이었죠.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말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바로 이 정신을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세 개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어떤 신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비를 우리가 학문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딱히 추구할 만한 일이 아니며, 우리는 우리의 이성적 능력 안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잘 설명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일견 생각했죠.
프랑스의 동시대 철학자 광탱 메이야수는 이렇게 세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만 논해야 한다고 보는 현대 철학의 경향을 상관주의라고 표현합니다. 상관주의, 겉보기에 상당히 겸손한 이론 같습니다.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말을 삼가는 거니까요.
하지만 메이야수 생각에 상관주의는 아주 위험한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오히려 강력한 비합리적 신앙을 갖게 될 여지가 크거든요. 상관주의 입장에서 보면, 어차피 세계와 우리의 관계 바깥에 대해서 우리가 이성적으로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성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능력이며, 이 능력 너머의 영역에서 세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기 때문에 역으로 무엇이든 믿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어차피 이성적으로는 그 영역에 대해서 뭐가 옳은 건지 절대로 판단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상관주의 전통에서는 의외로 보기에 따라 매우 비이성적인 이론 체계들이 등장합니다. 메이야수가 생각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요즘 인기가 많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본 모습은 의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의지가 뭐냐 하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모두 뛰어넘어 있는, 인간이 한계 지어진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무언가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은 평소 시간과 공간의 틀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는데, 의지는 당연히 시간과 공간을 넘어섭니다. 시간과 공간은 그저 인간의 좁은 관점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세계는 어떤 공간에 한정 지어져 있지도 않으며, 특정한 시간 동안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따지면 사실상 우리가 의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의지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건, 그건 다 인간 특유의 틀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니까요.
그런데 어쨌든 쇼펜하우어는 의지라는 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없을 수는 없으니까요. 뭔가가 분명히 존재하니까, 지금 우리도 이렇게 살아 숨쉬며 존재하는 것일 텐데, 그거에 대해 이성적인 관점에서 묘사할 수는 없으니 그냥 의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의지를 마치 신처럼 다루는 거죠.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지만, 그것에 대해 우리가 제대로 알 수는 없는 것. 의지는 신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메이야수 생각에, 서양 철학은 계속해서 새로운 신을 세우려는 시도로 가득했습니다. 세상의 근원이나 근본적인 모습에 대해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상관주의 아이디어를 악용해, 논리적 설명을 뛰어넘는 체계를 만들어 놓고 그걸 그냥 믿어버린 거죠. 이런 맥락을 거치면서 현대 사상은 이성을 통한 합의에 도달하기보다는, 온갖 신앙으로 무장한 이념들이 진흙탕 싸움을 하는 곳이 됐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메이야수는 이제 상관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보기에 상관주의는 너무 성급한 견해입니다. 메이야수는 우리는 우리와 세계의 관계를 넘어서는 무언가에 대해 이성적인 능력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 수 있다고 봅니다.
자신은 바로 그 앎을 발견했다고 보죠, 그건 바로 이 세계의 모든 사물은 절대적 우연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메이야수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일단 상관주의 사고 방식을 따라가 보면, 세계의 모든 것은 나에게 나타나는 한에서만 나에게 알려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내 존재의 최종적 근거나 이유 같은 걸 나는 절대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렇기 때문에 나는 언제든지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의 논리가 약간 까다로운데요,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죠.
나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을 통해 세상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만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틀이 유효하고, 내일은 갑자기 이 틀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갑자기 내일은 시간과 공간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미친 소리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겠지만, 정말로 진지하게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세계는 지금까지 그저 나에게 보이는 대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 보이는 방식이 갑자기 바뀔지, 어떻게 될지 우리는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지금까지 내가 게임 속에 캐릭터로 존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운영자가 대규모 업데이트를 통해 게임의 룰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에게 세계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것이며,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이해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갑자기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으며,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저 지금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언제든지 갑자기 무로 바뀔 수 있습니다. 메이야수는 이런 속성을 절대적 우연성이 부릅니다. 그런데 메이야수 아이디어는 모든 게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은 순전히 나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라지면 나와 세상의 관계도 없어지는 건데, 그때도 여전히 다른 모든 사물은 언제든지 없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있든 말든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죠.
우리는 내가 죽어도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라고 가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가정은 사실 절대적인 사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죽을 때 세상의 모든 사람도 한번에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사람들과의 관계는 그저 환상 같은 것에 불과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나와의 관계 안에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상관주의가 여전히 제약하게 작동하고 있죠.
하지만 사람들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고, 내가 죽을 때 사라질 수도 있고, 혹은 계속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에 갑자기 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만큼은 나와 별개로 존재한다는 게 메이야수의 생각입니다. 내가 있든 말든 내가 사라질 때든지 그게 사라지든 말든. 어쨌든, 사람들은 그리고 모든 사물은 절대적 우연성을 품고 있다는 겁니다.
근데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니, 그냥 우리가 평상시 하는 과학적인 사고가 이미 상관주의를 벗어난 생각인데, 무슨 갑자기 모든 게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다느니, 절대적 우연성이 복잡한 이야기를 하면서 사태를 꼬이게 만드냐? 생각해보면 그렇죠. 과학적으로 우리는 이미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여전히 유지될 우주의 법칙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메이아 수가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과학을 그냥 100% 신뢰하는 건 엄밀한 사고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메이아 수가 과학을 무시하자고 말하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메이아 수는 그동안 칸트 이후로 객관적인 세계 자체에 대해서 탐구를 안 하고, 그저 주관적으로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의 모습만 탐색하려고 했던 철학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이제는 과학의 말들을 훨씬 더 존중하면서 세계 자체의 주의를 기울이는 사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다만, 메이아 수가 생각하는 건, 최대로 엄밀하게 생각하면 과학 법칙이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게 엄연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1700년대에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희한한 생각을 하나 했습니다. A 사건이 일어난 다음 B 사건이 일어났을 때, A가 B의 원인이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바람이 불고 나무가 쓰러졌을 때, 바람이 분 게 나무가 쓰러진 원인인지, 우리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매우 독특하게도 흄은 이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냥 바람이 불고, 때마침 그때 나무가 쓰러진 건지, 아니면 정말로 바람 때문에 나무가 쓰러진 건지, 확실하게 판단할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이게 처음 들으면 억지 논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면, 아무리 세세한 과학적인 탐구를 해도, 정말로 A가 B의 원인이 100% 확실하게 맞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세상이 정확히 우리가 볼 때마다 하필이면 과학 법칙에 맞게 온갖 사건들이 벌어지도록 누군가가 조작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우리가 아는 과학 법칙에 따라 사물들이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면서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진정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는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평상시 믿는 과학은 무엇일까요? 과학은 이 세상에서 충분히 됐고, 계속 좋은 예들의 근거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뢰하는 지식일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은 사실 상관주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는 틀로서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시스템이죠.
그런데 메이아 수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어떤 세상의 최종적인 원리가 아예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닙니다. 어떤 원리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 우리가… 아는 대로 상상의 일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다만 그 원리가 정확히 뭔지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게 휴먼 스탠스입니다.
그런데 메이야수는 아예 원인과 결과라는 게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세상의 근간에 절대적 우연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우리는 보통 바람이 불면 나무가 쓰러진다 이렇게 결과가 나타나는 데 익숙하지만, 바람이 불고 그 결과로 지구가 두 동강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바다에 돌을 던졌을 때, 그 결과로 다리가 지구에 추락할 수도 있고요. 이건 비이성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고도로 이성을 발휘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바로 이런 절대적 우연성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연성을 확률적 우연성으로 이해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연성을 확률이 낮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길가다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딱 그때 그 자리에서 그 친구를 만날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죠.
하지만 메이야수는 절대적 우연성을 이런 확률적 우연성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확률적 우연성은 수적인 총체를 전제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가능성의 총체 중에서 지금 내 앞에 펼쳐지는 일이 적은 비중을 차지할 때, 우리는 이를 확률이 낮다고 생각하며 우연이라고 여깁니다.
지금 이 사건이 펼쳐질 가능성이 전체 가능성 중 99%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를 필연에 가깝다고 인식합니다. 그런데 만약 가능성의 총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메이야수는 우리는 이성적으로 이미 세계의 가능성의 수적인 총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수학자 칸토르의 이론을 끌어들입니다.
칸토어는 어떤 집합이 특정한 개수의 원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 그 원소들을 통해 만들 수 있는 새로운 집합들의 개수는 그 원소들의 개수보다 더 많다는 걸 보였습니다. 집합 S가 원소 A, B, C로 이루어져 있다면, 여기에 대해서 공집합, {A}, {B}, {C}, {A, C}, {B, C}, {A, B, C} 같은 더 많은 집합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만약 원소의 개수가 무한한 어떤 집합이 있다면, 그 무한보다 더 큰 규모에 집합의 집합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칸토어는, 아무리 무한이 있다고 해도 항상 그 무한보다 더 큰 무한이 있을 수 있다고 봤습니다. 만약 어떤 가능성의 총체가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그 총체가 무한의 형태로 주어져 있다고 해도 항상 그 총체보다 더 큰 총체가 존재할 것입니다. 메이야수는 절대적 우연성은 바로 이렇게 가능성의 총체 자체가 무력화되는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세계의 법칙이나 사물이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뒤바뀔 수 있다는 건, 단순히 전체 가능성의 총 안에 그런 변화의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흔히 우리가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몰라... 세상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이렇게 얘기할 때 생각하는 건 가능성의 총체 안에는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하는 가능성들이 많이 숨어 있다는 거죠.
반면 메이야수가 얘기하는 건 이 세계의 가능성은 애초에 총체의 경계가 한정되지 않은 채로 열려 있다는 겁니다. 메이야수는 주사위 던지기 모델로 세계를 설명하는데 반대합니다. 이 세계가 어떤 신적인 혹은 우주적인 주사위 놀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그때 우주 안에서 확률적인 도박이 펼쳐지면서 우연적으로 각 사건이 펼쳐진다는 거죠. 하지만 이 주사위 던지기 모델은 주사위를 던지더라도 전체 형태가 항상 그대로 유지된다는 걸 전제합니다. 그때그때 주사위에 어떤 숫자가 뜨는지 달라지지만, 어쨌든 매번 주사위를 던진다는 건 똑같은 거죠.
메이야수는 애초에 이렇게 항상 똑같이 유지되는 주사위 던지기라도, 그 총보다 더 큰 가능성이 항상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주는 언제 갑자기 지금의 주사위 던지기를 멈추고 다른 게임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이게 메이야수가 생각하는 세계와 나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는 이성적인 생각을 통해 접근 가능한 이 세계의 진실입니다.
네, 지금까지 "유한성 이후"라는 책에 나온 메이야수의 견해를 설명드렸는데요, 결국 메이야수가 얘기하는 건 상관주의가 인간 생각의 가능성을 너무 좁은 범위에 부당하게 제한한다는 겁니다. 분명히 우리는 나에게 나타나는 대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긴 합니다. 하지만 생각의 능력만큼은 어쩌면 이런 한계를 뛰어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리 없이 매끄럽게 생각을 이어나가면, 물론 인간으로서 조건 지어진 그동안 학습한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을 답습하게 되겠죠. 하지만 이성의 능력을 고도로 발휘하면, 세상이 나에게 나타나는 방식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하게 되고, 그 틈새를 통해 나 너머의 영역을 잠깐 볼 수도 있습니다. 메이야수는 수학이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세계에 접근하는 경로로, 지금까지 인류가 발견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수학을 통해 지금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세계에는 절대적 우연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거고요. 어쩌면 앞으로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메이야수의 도발적인 견해와 달리, 상관주의는 우리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진실일지도 모릅니다.
수학을 통해 통찰한 세계의 모습마저, 절대적 우연성마저 그저 우리에게 나타난 무언가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솔직히 저는 아직까지 상관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겠습니다. 저에겐 여전히 세계는 나에게 나타나는 세계로 보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이상의 가능성에 대해서 과감하게 논하는 메이야수의 용기는 또 다른 사고의 재미를 불러일으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