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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봉주와 미래권력들(미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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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권스 자유게시판 스크랩 멕시칸 샐러드와 대한민국 - 우리가 부여하는 의미들
권종상 추천 2 조회 56 12.07.10 15: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얼마 전에 직장 동료 마이크가 한국엘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처음 간 건 아니고, 맨 처음엔 동남아 쪽을 돌아보려 한 여행이었는데, 이 친구의 파트너가(아, 이 친구는 게이 커플인데, 우리 우체국에만 해도 성 소수자가 4명이 있습니다. 우리 우체국에서 일하는 우체부가 총 26명이니, 그래도 비율로 따지면 꽤 되는 셈입니다) 한국에 들러보고 싶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한국에 많이 왔다갔다 한 모양인데, 무엇이 제일 인상적이었냐고 제가 묻자 "최근엔 인터넷"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피드가 장난이 아닌데다가, 지하철 같은 공공교통을 이용해도 그 안에서 인터넷이 터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겁니다. 하긴, 최강의 IT 강국에 들렀으니... 그리고 나서 미국의 인터넷이 얼마나 느린지 알았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민족의 급한 성질이 그래도 긍정적으로 작용한 게 아닌가 싶긴 합니다.

 

이들은 갈 때마다 꼭 플라자 호텔에 묵었고, 그래서 항상 가는 남대문 시장이 꽤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먹자골목을 돌아다니면서 난생 처음 보는 음식들을 먹어보기도 했다는데, 처음엔 장어가 좀 충격적이었던 모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괜찮다고 하는 걸 보면 이 커플이 여행을 꽤 다니며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진짜로 충격을 받은 건 다른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꽤 오래 전에 한국에 갔을 때, 겁없이 허름한 생맥주 집에 들어간 이 친구들, 안주가 뭐가 뭔지 모르고, 그냥 닭 먹기는 싫고, 아무거나 시키기엔 뭐 하고 하니 얼핏보니 '멕시칸 샐러드'라는 말이 영어로 써 있더랍니다. 그래서 그걸 시켰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마 이곳의 타코 샐러드 정도를 생각하고 시켰던 것 같습니다.

 

마이크는 제게 물어봤습니다. "세상에, 햄이 썰어져 올라가있고, 계란 삶은 게 들어가 있고, 정작 멕시칸 샐러드라면 기대하는 타코 셸이나 토띠야도 없고, 마요네즈가 들어간 건 정말 충격이더라고. 그리고 나서 '멕시칸'이라는거야. 도대체 그게 왜 멕시칸 샐러드인거야?"

 

하긴, 대학교 다닐 때 돈 좀 생기면 친구들과 술 마시러 생맥주집에 갔고, 호프집에선 으레 소시지야채볶음, 아니면 멕시칸 샐러드를 시켰습니다. 평소엔 소주와 막걸리를 마셨고... 그때 저희는 멕시칸 샐러드이므로 당연히 멕시코 음식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보니, 우리가 멕시칸 샐러드라고 알고 있었던 것은 오히려 '월도프 샐러드'에 계란과 마요네즈, 그리고 햄을 더 썰어 놓은 것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우리 식의 샐러드는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특히 멕시칸 샐러드라고 하면, 이곳에선 타코 셸 안에 잘 썰은 양상추, 채 썰은 치즈, 토마토가 꼭 들어갔고 때로는 고추가 조금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소스는 멕시칸 양념인 살사를 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게 왜 멕시칸 샐러드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짐작컨대 아마 이것저것 섞어 내 놓았던 '믹스드 샐러드'라는 이름이 와전되어 멕시칸 샐러드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저는 마이크에게도 이런 제 생각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이해가 잘 안가는데."

"혹시 알아? 그 샐러드를 처음 소개한 게 멕시코 계 미국인이었는지."

"말 된다."

"근데 마이크, 나도 영어를 배우면서 이상한 걸 많이 느꼈다고."

그리고 저는 빵을 만들 때 꼭 들어가는 '버터밀크'라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이게 마치 유지방이 많이 들어가 고소한 우유일 것 같은데, 사실은 버터를 만들기 위해 지방을 다 뺀 탈지유입니다. 그런데 이걸 '버터밀크'라고 부르는 언어상의 부조리가 제겐 와 닿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 그리고 보니."

하긴, 말이란 것이 어떤 의미를 부여받고, 그것이 사회적 약속이 되고, 무엇인가를 지칭하는 부호로서 성립이 된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과정이 아닐 겁니다. 거기엔 역사라고 불리울 수 있는,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삶이 남기는 흔적들이 배어 있고 그런 것들이 우리가 사회화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머리와 가슴 안에 들어와 박힙니다.

 

말은 역사 속의 상처를 참 많이 담아 놓기도 합니다. 예전에 친구가 '골로 간다'가 왜 '죽음'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한국전과 그 전의 여순 반란, 그로부터 이어졌던 빨치산 준동 시절, 군은 빨치산 색출을 벌인다면서 좌익사상범으로 몰린 사람과 그 가족들을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학살했습니다. 골, 즉 골짜기로 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의미했고, '골로 간다'는 말은 그렇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죠.

 

멕시칸 샐러드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우리가 우리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일종의 패배주의와 변하지 않는 정치의 후진성에 대해, 그리고 치떨리던 가난에 대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때, 그런 염세주의와 합쳐진 낭만적 사고는 아마 '믹스드 샐러드'가 '멕시칸 샐러드'로 와전이 되고, 그것이 주는 어떤 이국적인 정서에 기대어 생맥주를 마시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는 윤활제가 되어 주다가 결국 고정적인 의미가 됐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멕시칸 샐러드는 우리 안에서 생명을 얻은, 어떻게 보면 사실 '진정한 한국어'가 된 것이죠.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여러분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긍정적인, 밝은, 활기찬 이미지로서 다가옵니까? 지난 월드컵 때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주었던 것은 역동성, 활기, 힘, 에너지, 이런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 대한민국이라는 단어 앞에 '이명박 치하의' 라는 말을 넣어 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듭니까? 이명박 치하라는 말이 싫으면 '이명박 각하의'라는 말을 넣어봐도 됩니다. 그러면 느끼함만 조금 더해질 뿐, 별 차이는 없는 듯 합니다. 대한민국이란 말 앞에 '우리 모두의'라는 말을 넣어 보십시오. 어떤 느낌이 옵니까?

 

그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이 어떤 의미로서 우리에게 다시 자리매김하게 될 지, 이제 올해 말에 있을 대선에서 결정이 될 겁니다. 그 대한민국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단순히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이 만들어내는 그 의미로서 대한민국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자랑스러운, 힘찬, 밝은, 그런 이미지를 대한민국이란 단어에 여러분이 입혀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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