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을 소재로 사기를 치다
통영은 양수리 가는 길을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이미 그곳에 수십차례 가보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어렵고, 말도 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낚시꾼이 미끼를 던지는 것과 같다.
벤츠와 비엠더블유, 아우디 같은 외제차를 발렛으로 맡기는 여성들이 나타날 때마다 통영은 같은 질문을 한 다음, 계속 로비 주변을 서성인다.
사기꾼은 머리가 좋아야 하고, 기억력이 탁월해야 한다. 머리가 나쁘거나, 둔하고, 눈치 없는 사람, 기억력 뇌세포인 해머 부분이 하얗게 변해서 치매 초기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속여서 돈을 벌 수 없다.
자신의 몸뚱이도 제대로 콘트롤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지갑에서 돈을 빼낼 수는 없다. 그것은 병약한 말을 타고 눈이 쌓인 알프스 산맥을 넘으려는 바보처럼 실패하고 감방에 가게 된다.
옛날과 달라서 지금은 <늙은 사기꾼>은 별로 없다. 나이 65세 되면 사기꾼도 은퇴해야 할 시대다. 옛날에는 나이 먹고, 늙어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노회한> 사기꾼으로 행세할 수 있었는데, 요새는 그런 사기꾼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기꾼의 범죄연령이 자꾸 낮아진다. <n번방> 사건에서도 보면, 20대, 10대가 인터넷범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통영은 눈썰미가 좋아서 호텔에 들어올 때 말을 건 여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가 그 여자들이 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갈 때, 다시 다가가 아주 정중한 자세로 말을 건넨다.
“아! 사모님, 아까 뵙던 분이네요. 제가 재미교포로서 한국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데, 혹시 차 한잔 대접하면서 좀 여쭤보면 안 될까요?”
열명 가운데 아홉사람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미안합니다. 바빠서 죄송해요.”라고 그냥 간다. 그래도 통영은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예.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이런 일을 수없이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게 세상 이치다. 어떤 목표를 세우고, 피나는 노력을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약간 다른 의미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이 속담은 매우 과장된 표현이다. 큰 아름드리 나무는 도끼로 천번을 찍어도 끄떡하지 않는다. 강력한 전기톱으로 썰어야 벨 수 있다.
외제차를 타고 온 여자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차 한 잔 하자고 제안하면, 아주 드물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모처럼 친구를 만나서 점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면서 수다를 떨려고 마음 먹고 광내고 때 빼고 왔는데, 갑자기 친구가 약속을 취소하는 경우가 있다.
호텔에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여자는 맥이 빠진다. 공연히 기분이 나빠지고 짜증이 난다. 갑자기 스케줄이 망가졌고,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씨라 다시 집에 들어가 틀어박혀 있기도 싫다.
마침 남편은 지방 출장을 가서 오늘은 밤늦게까지 놀아도 되는 찬스인데 너무 아깝다. 가뜩이나 요새 남편과도 냉전 중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카톡을 주고받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능력 있는 남편은 돈을 팍팍 그 여자에게 쓸 것이 뻔하다.
이런 상태에서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키가 크고, 잘 생긴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서툰 말씨를 보니 본인 말대로 재미교포로서 미국에서 오래 살다와 한국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리고 이곳은 경비가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는 고급 호텔의 대낮이다. 밑져야 본전이므로 같이 차 마시는 것에 동의한다. 게다가 차를 사겠다는데 만사 오케이다. 여자는 차라리 약속을 깬 친구가 고맙게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여자는 통영과 로비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신다.
남자는 웨이츠레스에게 커피를 주문할 때도 발음을 딱딱하게 ‘꺼삐’라고 하지 않고, 아주 부드럽게, ‘커~휘~’라고 원어민처럼 발음한다. 완전히 미국 사람이다.
영어를 읽는 것은 약간 되지만, 회화에는 전혀 자신이 없는 여자는 남자 앞에서 영어발음에 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자신은 한국식으로 ‘아메리카노’라고 조용히 말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보통 커피라고 하지, 아메리카노라고 하지 않아요. 원래 아메리카노(Americano)라는 명칭은 에스프레소를 뜨거운 물로 희석하여 마시는 커피 음료의 한 종류를 말해요. 이탈리아어인 'Caffè Americano'를 영역한 것이예요. 한국에서는 모두 아메리카노라고 하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어요.”
<아메리카노>라고 해야 멋있는 줄 알았던 여자는 약간 겸연쩍어한다. 통영은 커피를 마실 때도 아주 천천히, 조용하게,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통영은 우선 자신은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고, 아는 사람이 전혀 없어 불안하고 두렵다는 말로 시작한다.
“저는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 가서 지금까지 살았어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 시간 떨어진 교외에서 살고 있는데, 버클리 대학교에서 영국 문학을 전공했지요. 아버지는 미국에서 고생을 많이 하다가 석유 관련 사업을 해서 재벌이 되었어요. 스코틀랜드에 가서 관광호텔사업도 했어요. 스코틀랜드에 거액의 투자를 한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정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스코틀랜드 백작(伯爵)’ 작위를 수여받았어요. 저도 아버지를 따라 스코틀랜드에 가서 사업을 같이 했기 때문에 저도 ‘스코틀랜드 공작(公爵)이라는 작위를 받았어요.”
여기까지 서툰 한국말로 설명하면서 통영은 매우 긴장하는 표정이다. 그러면서 중간 중간 어려운 영어로 공작이나 백작 같은 것은 단어를 발음하는데, 특히 ’R과 L‘ ’P와 F‘를 확실하게 구별하여 발음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설명을 듣고 있으니, 마치 자신도 유럽의 어떤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관광호텔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여자는 갑자기 자신의 남편의 단점이 아주 뚜렷이 뇌리속에서 부각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남편은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결혼하고 나서 집에서 책을 한 권 보는 것을 보지 못했다. TV 채널은 수백 가지가 되고, 외국 방송도 많은데 남편은 오직 순한국방송만을 고집했다. 그것도 뉴스 같은 것은 재미 없다고 보지 않고, 스포츠 중계, 연예가 중계, 개그프로에 집중했다.
특히 남편은 그동안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봐였던 <개그콘서트>가 더 이상 방영되지 않는다고 하자, 큰 충격에 빠졌다. 자신이 상당히 유머스럽다는 칭찬을 받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KBS 2TV에서 주말마다 하는 개그콘서트 때문이었다. 그러한 개그 프로를 통해 유모감각을 익히고, 말을 재미있게 하는 연습을 했다.
남편은 또한 <맛집코너>는 모든 채널을 돌려가면서까지 보았다. 그래서 TV에서 방영되는 유명맛집은 물어서까지 반드시 가서 먹었다. 그 바람에 체중이 무려 120킬로그램이나 나갔다. 복장만 제대로 갖추어 입으면 어느 나라 위원장같은 풍채를 갖추었다.
남편은 월드컵이나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에는 거의 24시간 TV 앞에서 살았다. 메달을 따는 한국 선수, 외국 선수의 프로필까지 꿰뚫었다. 그 복잡하고 처음 듣는 경기 용어, 경기 규칙 같은 것에 대해서도 거의 스포츠 전문해설가 이상의 높은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
잘 모르는 것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고 확인하는 열성을 보인다. 심지어 노트를 한 권 사서 필요한 것은 메모까지 하고 가끔 들춰보기까지 한다.
국내 야구선수와 축구선수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선수들의 개별전적, 연봉, 스캔들까지 모두 외우고 있었다. 홈런 개수 및 안타 개수, 도루 성공횟수 등을 모두 외웠다. 특히 여자 배구선수들의 신장 및 체중을 모두 확인한 다음, 남편은 자신의 키가 너무 작은데 대해 심한 콤플렉스를 느끼게 되었다. 한 때 이 문제로 우울증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남편은 술을 좋아해서 중요 경기가 있으면, 반드시 치맥을 시킨다. 프라이드치킨 한 마리에 생맥주를 5천씨씨를 주문한다. 먹다가 생맥주가 부족해지면 집에 있는 캔맥주를 연속해서 딴다.
한국팀이 우승하면 남편은 마치 그날 먹은 치맥을 공짜로 먹은 것처럼 생각한다. 경기 내내 부인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경기 흐름을 놓칠 위험 때문이다. 부인을 쳐다보는 유일한 시간은 치킨배달원이 왔을 때, 부인에게 상을 차려달라고 할 때와 중간에 화장실 갈 때뿐이다.
부인은 보고 싶은 드라마도 보지 못하고, 정말 답답하고 한심하다. 부인은 이것을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오래 전에 가수 박재란이 부른 ‘님’이라는 트로트 노래에 나오는 가사가 떠오른다.
그러면서 늦은 시간에 배달온 젊은이도 중요한 경기를 봐야 할 텐데, 돈이 없어 경기도 보지 못하고, 편하게 집에서 경기를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구나 하는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낀다.
통영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이가 드니까 고국이 생각나서 아버지 승낙을 받아서 일단 미국 돈으로 천만 달러, 그러니까 한국돈으로 100억원 정도를 가지고 한국에서 관광호텔사업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스코틀란드에는 바닷가나 호숫가, 깊은 산속에 환상적인 호텔이 많아요. 저도 한국에서 경치 좋은 곳에 호텔을 멋있고, 예쁘게, 고급스럽게 짓고 싶어요. 그래서 양수리가 좋다는데, 한번 가볼까 하고요. 미국에서 나올 때 한국에는 사기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절대로 사업 이야기는 모르는 남자들과 하면 안 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도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에 사기꾼에게 전 재산을 날리고 빈손으로 갔대요. 그래서 이런 호텔 사업은 저 혼자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거예요. 사모님은 인상이 좋으셔서 믿어도 될 것 같아서 말을 꺼낸 거에요.”
여자는 호기심을 가진다. 우연한 기회에 이렇게 괜찮은 남자를 알게 되다니! 오늘은 행운이 닥친 날이다. 이런 날에는 로또를 하나 사도 될 것 같다. 여자는 점점 통영의 말에 빨려들어간다. 통영은 여자에게 물어본다.
“혹시 ‘폭풍의 언덕’ 읽어보셨어요?”
여자는 소설 제목은 들어봤지만, 그런 소설을 읽을 시간은 없었다. 읽어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드라마는 수없이 봤지만, 특별히 어떤 소설책을 사서 읽어본 기억은 없다.
“아직 안 읽었어요.”
“예. 폭풍의 언덕은 제가 대학교에서 영국 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영어로 된 원서로 수십번 읽었던 영국 소설이예요.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이예요. 저는 대학생 때 그 소설에 빠져 지금까지 결혼도 못하고 혼자 살고 있어요. 언제 한번 시간 나시면 읽어보세요. 한국에도 번역되어 나왔다고 하는 말을 들었어요.”
통영은 ‘폭풍의 언덕’ 스토리를 청산유수로 설명한다. 주인공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명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해준다. 감동적이다. 사기를 치기 위해 한국말로 번역된 ‘폭풍의 언덕’을 수십번 읽었다. 영어로 된 소설은 구경도 못했다. 한글 소설책은 하도 많이 읽어서 몇 페이지에 어떤 대사가 나오는지 다 외우고 있다.
여자들에게 써먹는 부분은 사실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많아야 20군데 정도다. 슬픈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제스처도 보인다. 여자는 감동을 받으면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다.
작은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