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봉선을 보러
백로가 지난 구월 둘째 주 토요일을 맞았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많이 서늘해져 등산하기 좋은 계절이다. 나는 산행을 멀리 떠나거나 높이 오를 처지가 못 됨은 스스로 잘 안다. 그냥 생활권에서 가까운 근교 산자락 임도나 걸으면 만족이다. 이 계절에 피어나는 들꽃을 감상할 수 있다면 더 없이 좋으리라. 나는 사계절 산과 들을 누비면서 어느 들꽃이라도 눈길을 고루 보내고 있다.
무릇 이 세상 꽃들은 존재로써 그 가치는 다하리라. 나는 많고 많은 들꽃 중에서 물봉선을 무척 사랑한다. 물봉선은 사람의 발길이 뜸한 응달 계곡 물가에 잘 자란다. 다른 야생초들이 자라기 거북살스러운 곳에 자라기에 내가 더 좋아하는 들꽃이다. 북면 감계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그곳에도 군락지가 있었다. 장복산 북사면 완암 나들목 저수지 근처도 있었는데 지금을 볼 수 없다.
물봉선꽃을 완상할 수 있는 몇 곳이 떠올랐다. 천주산 꼭뒤 달천계곡으로 들면 된다. 서북산 영동마을이나 부재골로 가도 된다. 감재를 너머 함안 여항 버드내로 내려서도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런 곳들보다 더 가까운 용추계곡을 택했다. 근래 용추계곡은 산사태가 나고 사람들이 많이 다녀 물봉선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었다. 물봉선은 그만큼 사람 발길이 뜸한 외진 곳에 잘 자랐다.
물봉선은 봉선화 사촌쯤 되는 꽃이다. 봉선화는 한여름에 피는 꽃인데 물봉선은 늦여름에 피기 시작해 초가을이 절정이다. 때로는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도 꽃을 피우는 곳이 있다. 꽃 모양이 좀 특이해 서양병사 투구 같기도 하고 깔때기 같기도 하다. 꽃 색깔은 선홍색이다, 일부 돌연변종은 노란색이나 흰색 물봉선이 있다. 구룡산에서 고암으로 내려가는 산기슭에 노란 물봉선이 있다.
창원중앙역으로 나가 용추계곡으로 들었다. 주말인데도 산행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예전엔 계곡 들머리부터 물봉선을 볼 수 있었으나 사람들 발길이 잦아서인지 사라졌다. 작년 가을 태풍으로 유실된 등산로는 아직 복구가 덜 되었다.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섶에는 이삭여뀌와 꿩의다리꽃이 보였다. 늦여름 피어난 보라색 맥문동꽃도 보였다. 선홍색 물봉선은 간간이 몇 송이 피어났다.
우곡사 갈림길 부근 응달 돌너덜에서 흰 물봉선을 만났다. 근동서 용추계곡에서만 볼 수 있는 흰 물봉선 자생지다. 계곡을 더 올라 포곡정 부근에 이르니 제철을 맞은 선홍색 물봉선이 많이 보였다. 꽃잎과 잎줄기는 간밤 내린 이슬을 함초롬히 맞아 물기에 젖어 있었다. 진례산성 동문으로 향하다가 몇 그루 노송이 우뚝한 쉼터에 앉았다. 날씨가 서늘해 이제 얼음 생수가 필요 없었다.
배낭에 넣어간 곡차를 꺼내 양파조각을 안주로 자작으로 잔을 비웠다. 산에 들면 누구로부터 간섭 받거나 눈치 볼 일 없다. 내가 선호하는 곡차는 파란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국순당이다. 두 병을 넣어갔는데 한 병만 비우고 한 병은 나중 비울 생각으로 남겨두었다. 쉼터에서 일어나 비탈을 올라 진례산성 동문 터에 닿았다. 경사진 비탈을 따라 사람이 잘 다니질 않는 임도로 내려갔다.
진례 시례에서 평지를 지나 신월에 이르는 아주 길고 긴 임도였다. 나는 평지마을을 뒤로 하고 송정방향으로 걸었다. 산모롱이를 돌아가다 쉼터 정자에 앉았다. 아까 노송 밑에서 비우다 남긴 곡차를 마저 비웠다. 임도는 간간이 자전거 라이딩을 나선 이들이 더러 있었는데 아무도 지나지 않았다. 임도에서 등산로가 아닌 숲으로 들어 지름길로 내려가니 바닥이 드러난 저수지가 나왔다.
활엽수가 우거진 숲을 빠져나간 인적 없는 계곡 언저리에도 물봉선꽃이 피어나 있었다. 저만치 산월마을이 보였다. 나는 들판을 따라 송정마을로 걸었다. 이삭이 팬 벼들은 고개를 숙여갔다. 농부 손길이 덜 닿은 논배미는 피가 벼보다 더 높이 자라 있었다. 송정마을을 돌아 진례 면사무소 앞에까지 갔다. 장유로 가는 버스는 제법 기다려야하기에 추어탕 집으로 들어 점심을 들었다. 17.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