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을 찾아서
수출로 애국하자, 무역사 시험 1등 하고 창업했죠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16호(2021.03.15)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대표이사 회장
김동녕(경제64-68)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이 올해 총동창회 동문바둑회 회장을 맡았다. 김 동문은 바둑계에서 유명한 애기가(愛棋家)다. 중1 때부터 쌓아온 그의 실력은 아마추어 4단. 바둑을 통해 몸에 밴 예측하는 습관이 경영에도 도움이 된 걸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될 것으로 예측하고, 빠르게 생산라인 일부를 마스크·방호복 등 개인보호장비 생산라인으로 바꿔 지난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2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김 회장을 지난 3월 5일 여의도 본사에서 만났다.
-올해 총동창회 동문바둑회 회장을 맡으셨어요. 바둑을 즐겨 두시나요?
“요즘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거의 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둑TV는 하루에 10분이든, 2시간이든 즐겨 봅니다.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어요. 간혹 중요 대국의 경우 저녁 먹을 때부터 자러 갈 때까지 안 끝나는 경우도 있어, 애를 먹기도 할 정도입니다(웃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어려움이 많으셨죠. 지난 1년 어떠셨나요.
“전체적인 매출은 그 전 해와 비슷합니다. 의류 분야가 어려웠던 대신 마스크·방호복 등 PPE(개인보호장비) 분야가 생겨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었습니다. 자체브랜드의 매출은 30% 정도 줄었고요. 예스24도 전체적으로는 실적이 거의 비슷합니다. 종이책 판매가 30%
성장한 반면, 공연·영화티켓 판매는 상당 부분 줄었지요.”
-마스크·방호복 생산으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나요.
“원단공장을 갖고 있었고, 항균 원단 기술을 갖고 있었어요. 그 덕에 빠르게 전환할 수 있었죠. 코로나19가 장기화 될 거란 판단도 주효했고요. 동남아와 중남미 의류 생산라인의 일부를 개인보호장비 생산시설로 바꿔, 쉼 없이 돌아 갔습니다.”
-백신 접종이 시작돼 올 연말에는 경제가 정상화 될 거란 기대가 큽니다. 어떻게 예상하시는지.
“전반적으로 좋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OEM에서 마스크 등 개인보호장비 주문은 거의 없어졌어요. 하지만 마스크 수요는 지속될 것으로 보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연간 3,600만 장 이상의 마스크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지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대와 R&D 업무협약을 맺고 있어요. 이 대학이 섬유 분야에서는 미국 최고 수준입니다. 공장을 지을 때 어디로 갈까, 그 대학과 의논을 했죠. 도움을 줘서 단시간에 공장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화제를 바꿔보죠. 모교 졸업 후 와튼스쿨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70년대 초반에는 한국 유학생이 드물었을 것 같습니다만. 창업을 염두에 두고 가신 건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1970년 입학했어요. MBA란 말이 생소할 때죠. 당시만해도 한국 유학생이 1년에 한 명 정도 입학하는, 생소한 학교였죠.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 소위 창업 붐이 일어났습니다. 고 김우중 회장도 1968년에 창업하셨죠. 수출기업들이 당시 많이 생겼는데 이 수출기업들이 요즘으로 치면 벤처기업이에요. 요즘 벤처기업들은 벤처캐피털에서 자본 투자를 받지만, 당시에는 수출금융이라고 해서 저리로 정부에서 대출을 해줬습니다. 신용장만 있으면 대출이 어렵지 않았어요.”
-그때 창업과 지금 창업의 차이가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그 당시에는 창업 연령이 지금보다 높았습니다. 대부분 어느 정도 직장 생활을 하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창업에 나섰죠. 유학 가기 전 잠깐 은행에 다닌 게 전부인 저 같은 경우는 당시로서는 드문 케이스죠.”
-창업에 용감하게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으세요.
“글쎄요. 사실 유학 다녀와 교수를 할까 고민한 적도 있습니다. 당시 경영학 박사학위자가 거의 없어, 강의 요청도 많았고, 학생들 가르치다, 다시 미국 가서 박사학위 받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대학도 있었어요. 마음이 흔들렸지만, 창업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수출을 통해 나라가 부강해지는 데 일조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렇죠. ‘수출입국’이란 말이 있었죠. 수출하면 애국자예요. 남대문 전광판에 매일 수출 실적이 나오고, 수출업자 명단 책자에 실적 순으로 기업명이 새겨지곤 했죠. 박정희 대통령은 한 달에 한 번 수출 확대회의를 열어 기업인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역사 시험에서 1등을 한 것도 창업하는 데 큰 동기가 됐습니다. 당시 무역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회계사, 관세사처럼 전문자격제를 시행한 적이 잠깐 있었어요. 무역사 자격증만 있으면 출근 안 해도 월급이 들어온다고 할 정도로 가치가 높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72년 한세통상을 세우셨는데, 78년 오일쇼크 때 부도를 맞지요?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요?
“부도가 참 무섭습니다. 집안 곳곳에 딱지가 붙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어요. 주력 거래선이 미국의 K마트였습니다. 지금의 월마트 규모의 유통업체죠. 그 업체 관계자들이 우리가 부도가 났는데도 저버리지 않았어요. K마트의 주력거래처였던 대우실업을 통해 우리를 도와줬어요. 그때 신뢰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현재 한세실업의 매출이 2조원 가까이 되지만, 거래 회사는 30개 정도밖에 없습니다. 모두 강한 신뢰를 바탕으로 10년, 20년 된 오래된 관계입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시간엔 고통도 분담하고요.”
-한세실업이 세계적인 OEM(주문자상표 부착생산), ODM(제조업자 개발생산) 업체인데, 주력 브랜드가 어디인가요.
“미국의 타깃(Target), 월마트 등 대형 유통업체들의 자체상품(PB)을 비롯해 올드네이비, 갭, 핑크, H&M 등의 고객사를 두고 있습니다.”
-컬리수, 버커루 등 자체브랜드도 여럿 갖고 있죠? 해외수출과 자체브랜드 매출비율이 어떻게 되나요?
“재작년에는 자체브랜드 5,000억원, 물론 여기에는 NBA 등 라이선스 브랜드도 포함됩니다. 수출은 1조6,000억원을 했습니다. 작년에는 수출이 1조7,000억원, 자체브랜드가 4,000억원 정도였고요.”
-베트남, 인도네시아, 미얀마, 과테말라, 아이티 등 여러 나라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습니다. 그 나라 특유의 문화, 노사 관행 등이 있어 어려움이 있을 텐데 어떻게 해결해 가시는지요?
“어느 나라나 그 나라만의 리스크가 상존하지요. 직원, 마을 주민 더 나아가 그 나라와 잘 지내려고 노력합니다. 예를 들어 베트남 호치민 구찌지역의 7개 고등학교 200명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재단을 통해 봉사활동을 정기적으로 합니다. 20년 넘었습니다. 장애인 학교도 돕고요. 축구시합, 체육대회를 열기도 합니다. 체육대회에는 그 시기에 가장 유명한 베트남 연예인을 초청해, 가족 단위로 많은 주민들이 참여합니다. 열기가 대단하죠.”
-의류 제조업체가 주력 사업인데 2003년 온라인 서점 예스24를 인수하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한세실업이 98년 코스닥에 상장됐을 때 우리 지분을 산 해외 펀드가 있었습니다. 그쪽에서 사외이사로 들어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줬어요. ‘돈을 쌓아두지 말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라’며 다른 업체 인수를 격려했어요. 그렇게 저희도 시야가 넓어진 거죠. IMF 이후 동종업계 매물이 몇 개 나왔는데, 이상하게 우리랑 연이 닿지 않았어요. 그러다 때마침 온라인 쪽으로 눈을 돌렸죠. 포털, 온라인 쇼핑몰 등을 눈여겨보다, 예스24가 눈에 띈 거예요. 제가 독서, 음악을 좋아한 데다 소비자와 직접 만나는 이커머스가 미래산업이라 진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인수 마지막에 처조카인 알라딘 조유식(정치83-94) 대표에게 물었어요. 말수가 적은 사람인데, ‘고모부가 하면 틀림없이 흑자 낼 거다. 걱정하지 말고 인수하라’고 기분 좋게 말하더군요. 경쟁업체인 알라딘 대표가 그렇게 말하니 힘을 얻어 실행에 옮겼죠.”
-예스24도 그렇고 다른 자회사도 자제분들이 맡아서 하고 계신데, 회장님은 경영에 어느 정도 관여를 하시는지요.
“한세예스24홀딩스는 말 그대로 지주회사입니다. 두 아들과 딸이 계열사를 맡아 하지만, 계열사 지분은 거의 없어요. 우리는 지주회사 지분을 갖고 있지요. 자녀들이 자회사 경영을 맡아서 하더라도 자기 회사는 아닌 거예요. 대부분 전문 경영인이 있고 우리 가족은 최소한만 관여하는 지주회사로 남으려고 합니다.”
-사회공헌활동을 위해 재단도 세우셨는데, 그럼 재단 활동에 주력하고 계신 건가요.
“재단도 직접 하는 것은 아닙니다. 월드뱅크에서 일하셨던 분이 도와주고 있어요. 큰 재단이 아니라서 여러 일을 하기보다 특정 분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세안 10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가요.
“아세안 10개국의 미술과 문학을 소개하는 일을 펼치고 있습니다. 매년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등 각 나라를 돌아가며 그 나라의 미술을 국내에 소개했어요. 책은 올해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대표 문학책을 번역해 발간할 계획입니다. 여력이 된다면 음악 분야로 교류를 넓혀 가고 싶습니다. 아세안 10개국 사람들이 모인 실내악단을 조직할 수도 있고요. 아세안이 우리에게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곳입니다. 친하기 위해서는 서로 존중해줘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에 대한 지식이 깔려 있어야 하지요. 아세안 국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을 잘 알고, 호의적입니다. 반면 우리는 아세안 국가에 대해 모르는 게 많지요.”
-학창시절 얘기도 좀 여쭤볼게요. 종암동 캠퍼스 세대이신데, 그때 이야기 좀 들려주시죠.
“상대만 있어서, 학생이 적었어요. 1학년이 190명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건물도 형편없고요. 조금 나가면 고려대가 있었는데 비교가 됐지요. 어느 영화에서 우리 학교가 나왔는데, 인민군 막사로 등장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어요(웃음). 수가 많지 않아 오히려 동기들끼리 더 끈끈한 것은 장점이었습니다.”
-부인(조영수)께서 독문과 64학번이시던데, 어떻게 만나셨나요.
“대학 1학년 때 독문과 동기 소개로 만났어요. 64년에 만나 72년 결혼을 했죠.”
-마지막으로 모교 졸업식장에서 축사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세요.
“미국에서는 모교 졸업식장에서 연설하는 것을 정말 큰 영예로 여기지요. 저에게 그런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만약 온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네요.
‘행복하게 살아라. 본인이 우선 행복하게 살고, 주변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도록 관심을 가져달라’.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는 모두가 달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으면 합니다.” 정리=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