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그러니까 2020년 시작하자마자 기약없이 시작된 재택 대기근무의 리스크를 만회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임시직 일자리를 찾아보게 되었다.
알바몬이며 그 비슷비슷한 경로를 통해 여러가지 정보를 얻고 나에게 맞는 일자리를 맞춰나가던 중 여러가지 난관에 다다랐는데...
일단 이 기간이 정확히 언제까지인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점.
가령 6개월이라면 거기에 맞춰 일을 하면 되는데 그게 3개월이 될지 1년이 넘을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다보니 덜컥 어느 사업장에 근로계약을 하고 출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미 오십대 중반에 이른 나이는 '연령별 필터링'을 통해 낙타 바늘구멍 통과하기처럼 문이 좁아진 것도 있다.
당연히 피씨방, 식당, 편의점 이런류의 보편적인 알바는 해당 무.
더군다나 전기감리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해당업종은 취업이 사실상 불가하다.
업무연관성이 어쩌고 저쩌고
그러다보니 좋은 주특기를 놔두고 쌩짜로 자연인으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엿같은 상황.
대한통운 택배 등 고액의 수입을 보장하다는 미끼도 솔깃했지만 이것 또한 지입차를 기본으로 하거나 적어도 일정기간은 일을 해야만 되는 제한이 있었다.
그렇다면 멀쩡한 사지를 잘 이용해 부담없이 돈을 벌며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은 새벽인력시장에 나가는 것인데 이건 타율(?)이 낮아도 너~무 낮아 실효성 자체가...도대체 한달동안 며칠이나 일을 할 수 있을지...
그때 운명처럼 눈앞에 나타난 꿀알바가 있었으니 바로 [쿠팡 플렉스]
"flex" 요게 요즘 아주 많이 나도는 단어인데 운동을 하는 사람에겐 "몸을 푼다"는 개념일테고, 젊은이들에게 신유행어로 나도는 의미는 "자랑하고 뽐내다", 그리고 공돌이인 나에겐 기존에 "가요전선관" 내지는 "가요전선"처럼 잘 구부러지는 신축자재로 각인되어 있다.
쿠팡에서는 굳이 이 단어를 타이틀로 내건 이유가 또다른 뜻인 "자유근무시간제 일" 일 듯. 여러가지 중의적인 효과를 노린 것도 있을테고
맨 첫날 전주공고 바로 앞 여산로 106에 있는 '전주 제1캠프'에 가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바로 그길로 물품(여기서는 기프트라고 한다. 초창기때 선물처럼 의미를 부여했던 듯)을 할당받아 스캔하고 분류해 차에 싣고 평화동 우미, 신성, 강남, 현대아파트 등지를 돌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꿀벅지 아가용 기저귀세트를 배송 해놓고 나중에 보니 그집 물품이 하나더 차에 남아 있어서 되돌아 갔던 적도 있었고, 하여간 좌충우돌 동선이 꼬여 헤맸는데 겨우 79건을 배송하며 날이 완전히 저물어 어두워질 때까지 개고생을...
나중에 숙달이 된 뒤에 되돌아보니 이건 편하고 배송하기 좋은 여건이었다.
일단 밀집도가 높고 아파트이면서도 고층도 아닌데다 시건장치도 없지 엘리베이터 잘 돌아가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 뒤로 현장이 조만간 개설될 거라는 통보를 받았고 그 뒤론 한결 여유롭게 일상을 누릴 수가 있었다.
그 뒤로 계절이 완전히 한바퀴 돌고 60년만의 한파가 왔다고 하는 주말 이틀간 새벽배송을 뛰게 되었다.
대구현장에 간 뒤론 주말에 심심풀이로 해오던 배송을 굳이 이렇게 극한의 조건에서 나서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내 스스로도 바로 설명하기 힘든 내면의 그 무언가가 혹한과 폭설로 얼어붙은 심야에 집을 나서게 한다.
기온은 영하15℃를 밑돌고 이틀전부터 내린 폭설은 어디 한곳 안심할 데가 없이 빙판을 이루고 있는 현장에서 단 한번의 실수가 일당하고는 비교되지도 못할 리스크로 남을텐데 뭐하러 이곳에 나왔을까?
이틀간 그 소중한 새벽시간을 보내며 머릿속이 정리가 된다. 점점~
사람에게 참기힘든 고통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인 본능
잠자고 먹고 싸고 번식하기
이런 본능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면 고통을 느끼게 될 터인데 사실 현대인에게 더 큰 고통은 반복되고 변화없는 일상의 지루함 내지는 나른함...대충 그런류가 되지 않을까?
마라톤을 하는 동안 느껴왔던 개똥철학과도 상통할텐데
왜 극한의 도전을 즐기는가?
변화없는 삶이 주는 나른한 고통, 그게 더 힘드니까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극한의 고통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미친놈도 아니고) 그 과정을 지나며 일상의 편안함을 재확인 하려는 내면의 발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한과 고통을 동반한 도전 속에서 이 과정이 지나고 무사히 현실과 일상으로 복귀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어딘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도 의미가 살아난다.
늘 머물고 부대끼던 생활영역이 나에겐 결국 돌아갈 소중한 곳이라는
이게 언뜻 가볍게 생각하면 뭔 견소리야? 할 수도 있겠지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운동 본연의 기술과 체력을 연마하는 과정은 너무도 당연하고, 몸을 풀어주는 방법에 대해선 공통적으로 전문가가 되어 있다.
운동을 할 때 몸을 준비시켜주고 운동이 끝나면 몸을 회복시켜주고, 또 그 중간에는 완전히 릴렉스하는... 그 사이클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제대로 된 운동인라고 할 수가 없다.
운동을 강도높게 하려면 거기에 비례해 잘 풀어주고 잘 쉬어주고 잘 보충해주는 게 필요하듯
쿠팡의 극한배송, 지리산 극한 산행, 마라톤 도전
뭐든 강할수록 어려울수록 더 많이 편하고 더 잘 쉬어주고...하여간 릴렉스 그걸 못하면 전문가가 아니지요.
...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뿌듯하고 행복했다.
단지 아무일도 없었을 뿐인데
아무일도 없기를 간절히 바랬던대로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아직도 어두운 새벽에 국수를 끓여 한사발.
이게 나에게 주어진 보상의 전부지만 이걸 얼마나 바랬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