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시절, 친구 한 명이 여섯 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있는 '육손이'였습니다. 하지만 그저 작은 혹 하나가 더 튀어나온 듯한 느낌만 받았을 뿐 그렇게 신기한 것도 이상한 것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주로 음지에서 놀던 우리 코찔찔이들과는 달리, 그 친구는 양지에서 전교 회장까지 역임한 터라 감히 근접도 못했습니다.
훗날 같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땐 수술을 받고 정상적인 '오손이'로 돌아와 있더군요. 반갑게, 당당하게, 먼저 악수를 청하는 그 친구의 손을 잡고서야 비로소 그 친구가 손 때문에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만 돌이켜보니 그 친구는 손으로 하는 장난이나 손 내미는 것조차 무척 꺼렸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서울 근교에서 입시학원을 경영하는 걸쭉한 입담의 아저씨로 변해 있는 그 친구에게서 작년 늦가을쯤 전화가 왔었습니다.
"아이구, 이게 뉘신가? 어떻게 지내? 학원은 잘 돼? 아이들은 잘 크지? 제수씨는 안녕하시고?"
"하나씩 물어라. 숨넘어가겠다. 날도 선선한데 간만에 마차나 타러 가자."
"마차 타는 거야 마다할 이유가 없지만서도......"
"걱정 출장 보내라. 특별한 일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가을 타는구나 너?"
"밥 타는 소리 하지 말고 나오기나 해."
그렇게 포장마차에서 만난 우리는 부어라 마셔라 회포를 풀었습니다. 궁상떨기 알맞게 술이 올랐으면 궁상만 떨고 말아야 하는데, 녀석은 우리나라 교육행정이 어쩌니 점점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그나저나 황 박사 말야.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물레방아냐?”
“물레방아?”
“사건이 어떻게 지져지고 볶아지고 있냔 말이야 내 말은!”
“관두자. 시큰둥이한테 말해 뭣하냐.”
“어? 사람 무시하는 거여 시방? 혹시 아냐, 시큰둥이가 열혈동지 될지······.”
그 말에 살짝 오기가 생기더군요. 사실 그 친구는 어쩌다 접하게 되는 언론보도에 따라 일희일비하는‘어정쩡 팔랑귀 스탠스’입니다. 즉 냄새는 맡았으나 어떤 맛인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은 세우던 안주 빨을 잠시 보류하고 기초공사부터 다시 하기로 했습니다. 조작수첩부터 시작해서 서조위, 검찰 발표를 거쳐 추적60분 불방 사태에 대해 한참 설명하고 있는데 친구가 중간에 말을 가로채더군요.
“그럼 그 섀튼이라는 코쟁이가 황 박사 특허를 날로 먹으려 한다는 거야? 먹기는 파발이 먹고 뛰기는 역마가 뛴 꼴이네? 몹쓸 종자네 그거!”
“더 기막힌 건, 황 박사님 개인의 특허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특허인데도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 내가 열통 안 터지게 생겼냐? 만약 그놈이 먼저 특허 따내면 우린 뭐가 되냐? 돈도 돈이지만 너무 억울하잖아. 그래서 추적60분이 꼭 방송돼야 하는 건데 그것마저 매국노들이 막아 버렸으니 사람 환장하는 거지.”
“근데 정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다 갑자기 원흉으로 돌변한 걸 보면 황 박사 사기를 인정한다는 거네?”
“비 오는 날 예수 목탁 치는 소리 하고 있네. 사기꾼은 박사님이 아니라 노성일 일당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냐? 연구비 횡령 문제만 해도 그래. 자기한테 후원된 돈을 자기가 횡령했다는 게 말이 되냐? 난자 공급 총책은 문신용인데도 생명윤리법 위반은 황 박사님이라는 게 말이 되냐고!”
어찌나 진지하게 역설했던지 친구는 두엄 위에 앉은 두꺼비마냥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내면의 불이 켜지는 밝음을 본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유아기적 단견을 드러냈습니다.
“그럼 처녀생식 어쩌고는 뭐다냐?”
“처녀생식? 배꼽 아래 잡초가 웃겠다. 그건 매국노들의 알랑개비 슛이야. 그것 때문에 논문 취소되고 이 난리를 겪고 있잖아. 그거 발표한 놈도 오류가 있었다고 나중에 은근슬쩍 밝혔어. 그건 분명히 황 박사팀이 젓가락 신공으로 만든 환자맞춤형 줄기세포야.”
“젓가락? 니나노 술집에서 타악기로 쓰이는 그 젓가락?”
“짜식이 말을 해도 꼭······!”
솔직히 쥐어짜기 기법에 대해 확실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얼렁뚱땅 넘어갔습니다. 그렇게 한 고비를 넘기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데 이번엔 다소 생산적인 질문이 날아왔습니다.
“구세주 먼 데서 찾지 말고 황 박사더러 줄기세포 다시 만들어보라고 하면 바로 답 나오지 않을까?”
“그럼 오죽이나 좋겠냐. 근데 연구재연 기회조차도 박탈하려 하고 있으니 도대체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다. 이건 분명히 정부, 언론, 매국노 세력들의 짝짜꿍 합작품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한 과학자를 이렇게 마지막 숨통까지 치밀하게 끊어놓을 수 있겠냐.”
“그럼 뭘 하든 어림없는 바벨탑일 텐데 방법이 없는 거네 뭐.”
“어떻게든 이 재판에서 무죄를 밝혀야지.”
“이 대가의 식견으로 볼 땐 말야, 여론으로 죽은 건 여론으로 살리는 수밖에 없다고 봐. 탄핵도 국민이 막았잖아. 국민이 들고 일어나도록 해야 돼. 그 길밖에 없어. 땔감은 추적 60분 방영이고······.”
시간이 문제겠지만, 어쨌든 듣고 보니 그럴듯했습니다. 해탈한 도사처럼 보였습니다. 냉전을 종식하고 화해의 데탕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썰렁하던 가슴에 훈풍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먹다 만 꽁치의 유골을 뒤적이며 대통령이 어쩌니 보복부 장관이 저쩌니 하던 친구의 젓가락이 어느 순간 딱 멈춰지더니,
"와, 멋지다!"
"뭐가?"
"저기 저 카페 말야."
"카페야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난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 값이 제일 아깝더라."
"너 자꾸 더운 밥 먹고 식은 소리 할래? 카페 이름을 보란 말야!"
녀석이 어찌나 비호같이 술잔을 돌리는지 거의 만취 상태였던 저는 몇 번 눈을 비비고서야 카페 간판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우리는 한동안 그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글자 하나하나가 심장에 박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때나마 육손이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친구에겐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저 역시 그토록 근사한 카페 이름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다가 비에 젖지 않는 것처럼 그 어떤 시련에도 젖지 말라고 다독여주는 듯했습니다.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스며들게 하고 싶다는 카페 주인의 꿈이 담긴 듯했습니다.
카페 주인장이 갑자기 궁금해진 우리는 서둘러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역시나 사람 내음 물씬한 인상에 단아한 미소가 아름다운 중년의 여인이었습니다. 생전 닉네임이 ‘바다’님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핏 정해준 열사님의 미망인을 닮은 듯도 했습니다. 우리 민초리도 비에 젖지 않는 바다처럼 언제까지나 넓고 푸르게 출렁였으면 좋겠습니다.
P.S. 친구에게 민초리 가입을 권하고 싶었으나 워낙에 입담이 걸쭉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위인인지라 오자마자 윤리위원회 징계 먹을 확률 100%인 것 같아 참고 참았습니다.
첫댓글 옛날 우리집 옆에 살던 얘도 육손이었죠. 어른이 되어 돈벌어서 성형수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 ^ _ ^ )
곧 연구재개될 것 같습니다. 3월24일 서울 광화문 대집회 계획. 차량 준비완료. 많은 동참바랍니다. 017-234-2545
진리와 진실로 무장된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빛이 날 겁니다..우리가 가고자 하는 것과 얻고자 하는 것의 힘을 믿고 최선을 다해 열정을 불사르는 삶을 살길 바랍니다..손회장님껜 그저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