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4일,
뉴욕타임스가 케이팝 걸그룹 스테이씨의 댈러스 콘서트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당시 스테이씨는 팬서비스의 일환으로 현지 팀인 카우보이스(미식축구), 매버릭스(농구), 레인저스(야구)의 유니폼을 나눠 입고 공연을 펼쳤는데,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위치한 축구단인 레인저스 FC 유니폼을 착용하는 실수가 있었습니다.
↑댈러스 공연 중 의상 담당자의 실수로 레인저스 FC 유니폼을 착용한 스테이씨 멤버들
고의였다면 비난받았겠지만 스테이씨가 현지 사정과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한국 가수였고 각각의 레인저스가 속한 국가나 종목도 달라 유쾌한 에피소드로 취급되었습니다.
이후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하여 영국의 BBC를 비롯한 많은 매체가 재미있는 가십으로 재보도했습니다.
그러자 본의 아니게 선전이 된 레인저스 FC가 11월 7일 스테이씨를 현지로 초청해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행사를 벌였습니다.
↑레인저스 FC의 초청으로 아이브록스 구장을 방문한 스테이씨
이에 스코틀랜드 케이팝 팬들이 집결해 스테이씨를 환영했습니다.
글래스고는 흥행 여건 때문에 자주 찾는 곳이 아니다 보니 레인저스 FC의 초청이 현지 팬들에게는 케이팝 가수를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국의 반대편 미국에서 벌어진 작은 실수가 다시 대서양을 건너가 많은 이들을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될 만큼 케이팝의 위상이 커졌습니다.
↑스테이씨와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는 스코틀랜드 케이팝팬들
스테이씨의 귀여운 실수(?) 덕분에 톡톡히 홍보 효과를 누린 레인저스 FC는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스코틀랜드 1부 리그) 소속으로 1872년에 창설되었습니다.
유구한 역사만큼 2023년 현재까지 리그 우승 55회, FA컵 우승 34회, 리그컵 우승 27회라는 금자탑을 세우며 라이벌 셀틱 FC와 함께 리그 흥행을 선도하는 명문 구단입니다.
특히 55회의 리그 우승은 유럽 축구 전체를 통틀어 최다의 기록입니다.
↑레인저스 FC는 스코틀랜드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구단입니다
역사가 오래되고 기록이 화려한 만큼 당연히 레인저스 FC를 빛낸 슈퍼스타도 즐비합니다.
1956년부터 1964년까지 미드필더로 활약한 해럴드 데이비스(Harlod Davis)도 그러한 전설 중 하나입니다.
그는 9년의 1부 리그 활동 중 8년을 레인저스 FC에서 활약하면서 5번의 리그 우승, 4번의 FA컵 우승, 3번의 리그컵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그의 업적이 특히 돋보이는 이유는 경이로운 불굴의 의지 때문입니다.
↑1962년 영국의 축구 잡지 Charles Buchan's Football Monthly 6월호 표지 모델로 나온 레인저스 FC의 해럴드 데이비스. followfollow.com
↑영국군 최고의 정예 부대인 영국군 최고의 정예 부대인 블랙 왓치의 제2차 대전 당시 훈련 모습
1881년에 창설된 블랙 왓치(Black Watch)는 이후 영국이 뛰어든 모든 전쟁에 참전했을 정도로 동원 1순위의 정예부대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부대 중 제일 먼저 라인강을 건넜고 그가 입대했을 때는 한국전쟁에 투입된 상태였습니다.
동료들이 파병을 자원하자 데이비스도 동행했습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전쟁터에서 총을 쏘고 있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치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항상 총탄이 날아오는 위험한 참호 속에서 근무 중인 데이비스
그렇게 데이비스는 그때까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한국으로 가서 중공군과 싸웠습니다.
그가 투입된 임진강 전선은 1952년 이후에는 휴전을 염두에 두고 소강상태였지만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제한적인 교전은 상당히 치열하게 벌어지고는 했습니다.
휴전 두 달 전인 1953년 5월,
그는 전방 경계 중 중공군이 발사한 기관총탄에 복부가 관통되고 발목을 크게 다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 데이비스(右)와 동료들의 망중한
즉시 후송되었지만 무려 6주 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고 이후 18번의 수술을 견딘 후 목숨을 건졌습니다.
당연히 앞으로 그가 축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2년의 투병 중 그는 꿈을 꺾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그라운드에서 다시 섰고 1956년 레인저스 FC에 입단했습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처럼 8년 동안 대단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승리의 표상이었습니다.
↑1962년 FA컵 우승 당시. 우측에서 두 번째가 데이비스
은퇴한 데이비스는 이후 지도자 등을 역임했고 호텔을 경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98년에 교통사고로 목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었음에도 살아남았고 역시 몇 년의 재활 끝에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인간이기에 2018년에 영면에 들었지만, 데이비스는 가히 불사조라고 칭해도 결코 모자람이 없는 생명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국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데이비스가 구단을 방문한 스테이씨를 보았다면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축구인이었기에 2002년 월드컵 등을 통해 한국이 변했다는 것은 인지했을 것입니다.
다만 그는 "많은 피를 흘렸고 시간이 다 됐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때론 잔혹했고,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도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런 그가 만일 스테이씨의 구단 방문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요?
분명히 감개무량한 감정도 느꼈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그의 명복을 빕니다● [ august 의 軍史世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