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치히 동물원
-슈레버 일기
세살 된 아이를 데리고
내가 찾아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가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제 내린 비로
하늘빛이 무척 푸른 날이었지만
군데군데 얕은 물웅덩이들이 놓여 있어
나는 말간 하늘보다는
앞서 내달리는 아이를 주로 쳐다보며
숲처럼 우거진 포장길을 걸어야 했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내 아이는
처음 보는 동물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들을 갖고 싶다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그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나는 아이에게 동물원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알기로 동물원은
움직이는 사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물원 안에선 그 어떤 사물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도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적 없었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놓은 주체가 빠졌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었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둔 테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으니
나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살 된 아이가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데려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경계와 경계들이 놓여 있는
경계의 안쪽이었다
크로아티아 비누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의 고향에선 볼 수 없던 대리석 문양의 비누였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바라보며 그곳의 짙푸른 해안선을 한참이고 떠올렸다 그곳은 시간을 두고 촘촘히 흘러내린 비누의 마블링 같은 섬들로 가득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신혼여행지의 해안선을 떠올리며 여행가가 되고 싶다는 자신의 꿈에 대해 생각했다 비누 하나 다 닳을 때까지 여행을 기억할 수 있다면 자신은 충분히 여행가가 될 자격이 있다고 나카타는 생각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여행가가 될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신혼여행 말고도 변변한 여행 해본 적 없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민했다 한번도 홀로 떠난 적 없었으므로 자신의 꿈이 아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을 거라고 나카타는 걱정했다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아내 없이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해 고민하며 욕실 나무 선반 위의 비누를 바라보았다 비누는 몸집이 부쩍 작아져 있었지만 아내는 살아 있는 한 닳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나카타는 안도했다
그리하여 나카타는 목욕을 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지 않을 아내를 생각하며 아내만큼 소중한 크로아티아 비누를 매만졌다 아낄수록 비누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임경섭 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