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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8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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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흥선대원군의개혁정치(2)
민생안정을 위한 기득권과의 한판 싸움, 삼정 바로 잡기 조선 말기 삼정(三政)의 문란은 극에 달했다.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
(田政)군정(軍政) 환곡(還穀) 을 둘러싼 부패는 그 도(道)를 넘어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흥선대원군은 문란한 삼정(三政)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했을까?
먼저 전정(田政).
전정을 바로 잡기 위해 대원군은 양전사업을 시행했다.
양전사업은 토지조사 사업과 같은 말인데, 왜 토지를 조사한 것일까?
그 이유는 세도 가문들의 토지 소유 방식에 있었다.
세도 가문들은 자신의 토지를 다 면세지로 만들어 세금을 내지 않았다.(이룬 뜨그랄~ )
과세대상에서 빠져 있던 토지를 찾아내 국가재정을 확충한 사업이 흥선대원군의 양전 사업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탈루(脫漏)를 막은 셈이다.(아싸라비요~)
그리고 군정(軍政).군정(軍政)이란 군대를 가지 않는 대신 포를 내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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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군은 군정에 대해서도 엄청난 개혁을 가했다.
처음에는 마을에 대해 포(布)를 부과하는 동(洞)포제를 실시해 그 마을에 사는 양반도 포(布)를 내게 했으나, 시행이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대원군은 더 강력한 조치를 내놓았다.
그 이름 유명한 호포제.
즉 마을 단위가 아니라 범위를 좁혀 집집마다 (戶)포를 매기는 호포제(戶布制)를 단행했다.
이는 평민의 집뿐 아니라 양반 집에 대해서도 세금을 매긴다는 뜻이었다.
이 호포제(戶布制)는 강의 현장 에서도 거듭 강조할 만큼 아주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조선 말기, 백성들의 피를 빨아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바로 양반들이었다.
양반들에게 돈을 많이 버니 세금도 많이 내라.
이것이 호포제의 핵심이다.
호포제(戶布制)는 조세정의(租稅正義) 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세금제도였던 것이다.
(어떠셔? 흥선 이 사람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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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 아니라 호포제(戶布制)는 신분제도를 약화시키는 효과도 가지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너도나도 족보를 사대고 국가에 돈을 받쳐 양반이 엄청 늘어난 통에, 양반과 평민의 구별이 애매했다.
따라서 군포(軍布)를 내는가 내지 않는가로 진짜 양반을 구별했는데, 포(布)를 내라고 하는 것은 양반의 명예를 흔들고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기득권층, 즉 양반들의 저항이 거세어지자 흥선대원군은 이리 말했다.
세금을 내는 것이 양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라면, 노비의 이름으로 내면 되지 않겠소.(진짜 멋진 사나이야!)
세 번째로 환곡(還穀).
농민들의 가장 극심한 원성의 대상은 환곡(還穀)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그간 환곡으로 꾸어간 곡식은 모두 탕감해주고, 환곡제도에서 더 이상 관리들이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도록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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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마다 쌀 창고를 짓고 창고관리를 조정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 중 덕망있는 자를 뽑아 자치적 으로 운영하도록 위임했다
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아가자, 요리조리 토지세를 피해 다니던 땅 많이 가진 놈들도 꼼짝없이 세금을 내야 했으며,
토지가 없는 농민은 세를 부담하지 않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이 말이 쉽지 수백 년 동안 아무도 감히 엄두를 못 내던 급진적인 개혁이었다.
조선은 그동안 🐕 같은 기득권층에 의해 정권을 농단하면서 개혁안마다 물고 늘어져 멍청한 왕이 아니더라도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개혁(改革) 이란 어차피 기득권자의 이익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기득권들은 나라가 망하든 말든, 백성들이 굶어 죽든 말든 제 당파,
제 집구석, 제 새끼들만 잘 처먹고 잘살면 그만이었다
이런 기득권층을 쓸어낸 대원군(大院君) 이 백성들 편에서 과감한 개혁을 강행하자, 대원군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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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동묘(萬東廟)와 서원철폐 ♡
서원(書院)은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물을 제향(祭享)하고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설 교육기관 이었다.
서원(書院)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였고,
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군역이 면제되었으며,
유생들은 어느 서원이든 등을 대고 있어야 벼슬길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거기다 서원(書院)은 조정의 지원까지 있었으니, 내세울 것도 없는 것들이 거들먹 거리고 싶어서 돈푼만 있으면 마구 서원(書院)을 세우기 시작해 18세기가 되자 전국에 서원이 1,000개가 넘어섰다.
아니 훌륭한 교육기관이 이렇게 많고, 거기서 인재들이 송사리떼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왜 이렇게 🐕판이 되었을까?
이 서원이라는 것이 초창기에는 공부도 제법 시키고 하더니, 점차 파벌로 나뉘어 당파 싸움의 온상이 되고, 종장에는 부패의 온상으로 변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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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생이 되거나 서원의 일꾼이 되면 군대를 안 가고 부역을 안해도 되니 이놈 저놈 모조리 돈과 빽을 써서 유생으로 등록하거나 서원(書院)에 일자리를 얻었다.
거기다 관립교육 기관인 향교(鄕校)와 촌구석 지배권을 놓고 저희들끼리 박 터지게 싸우고 난리였다.
또한 제사 때가 되면 경비 염출을 위해 액수가 적혀 있는 묵패(墨牌)를 각 관아의 부호들이나 수령들에게 돌렸는데,
이 돈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가는 무슨 행패를 당할지 몰랐으며,
수령인 경우에는 서원(書院)이 속해 있는 당파까지 나서서 모가지를 날리는 수도 있었다.
서원(書院)은 이렇게 돈을 거두어 제사를 지내고, 시회(詩會)를 열어 먹고 마셔 경비를 없앴다.
이렇게 저희끼리만 처먹고 놀면 누가 뭐라 그래.이것들이 지체가 좀 낮은 양민을 보면 양반에게 대들었다느니, 선비를 능멸 했다느니 멀쩡한 사람들을 툭하면 데려다 요절을 내니,
서원(書院)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은 관가보다도 더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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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이런 꼴을 보다 못한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렸다.
대원군의 재가를 받은 서원 47개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書院)들을 모조리 폐쇄하고 건물을 헐어버리도록 명한 것이었다.
서원(書院)이 헐리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난리가 났다.
전국의 유생(儒生) 수천 명이 상소문을 들고 한양으로 올라와 대궐 앞에 거적을 깔고 꿇어앉아 도끼를 옆에 놓은 채 데모를 하기 시작했다.
도끼를 옆에 놓은 것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도끼로 목을 치라는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흥선대원군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경한 태도를 고수했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설령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해도 용서하지 않겠다!
이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성리학의 나라에서 공자의 뜻을 받들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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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만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은 서원 정리에 엄청난 개혁의 힘을 쏟았고,이 개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원군은 '만동묘(萬東廟)'도 폐지했다.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의 황제 신종(神宗)을 모시는 사당이다.
아니, 뜬금없이 웬 신종?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신종(神宗)에 대한 고마움으로 조선은 그때까지 비싼 돈을 처들여 명나라 신종의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나라에 의해 이미 망해 버려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는 명나라 황제의 사당이라니 그것도 명분을 운운하며, 그 나라에서도 모시지 않는 사람을 아직도 우리가 몇백 년 동안 모시고 있었다니.(헐~완죤 멘붕이다 ㅠㅠ)
이 만동묘(萬東廟)는 1874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화양동 서원이 복구되면서다시 세워져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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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베리아 벌판에 피어있는 🐕나리 같은 족속같으니!(충북 괴산 청천면 화양동 서원에 있는 만동묘)
철저한 사대주의(事大主義)!
중국을 종주국으로 보는 철저한 사대주의 지식인들이 떠 받들고 있던 만동묘.
대원군(大院君)은 이 만동묘
(萬東廟)와 서원을 폐지하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대원군의 치세중 결정적인 실수인 경복궁 중건이 발목을 잡으면서 말이다.
한심한 조선의 기득권 새끼들!걔들 죽지 않을 만큼 패!"
서원 철폐를 반대하는 유생들이 궁궐 앞으로 몰려왔을 때 했던 흥선대원군의 대답이 어울리는 85편이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8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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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과 침략의 시대에 서 있던 임금, 고종(高宗)흥선대원군의 발목을 잡은 경복궁 삼정(三政)의 문란을 바로 잡고,
서원을 철폐해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치세중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경복궁 중건이었다.
경복궁(景福宮)은 임진왜란 때 피난 간 선조에 대해 분노를 드러낸 백성들이 불태워 버린후 300년이 다 되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잡초가 우거지고 송충이가 우글거렸을 뿐 아니라 밤이면 살쾡이들이 돌아다니고 호랑이, 여우도 놀았다고 한다.
(설마 구미호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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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담장에는 판잡짓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조선 정궁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정궁인 경복궁이 타버린 바람에 왕들은 창덕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이런 경복궁의 기가 막힌 꼴을 볼 때마다 역대 왕들 거의 대부분이 경복궁의 중건을 생각했다.
그러나 중건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길이 없어 차일피일 이를 미루어 왔었다.
경복궁(景福宮)을 보면서 맨날 한탄만 하던 대원군은 드디어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하여
(자신의 위엄이 아닌 아들의 위엄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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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중건을 결심하고 공사를 맡아 진행할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했다.
중건의 명분은 중흥대업 이었다.
명분은 백 번 옳았으나, 당시 형편으로 경복궁 중건은 재정상 너무 무리한 일이었다.
조정에는 공사를 진행할 만한 재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공사는 순전히 기부금에 의하거나 편법을 동원해야 했는데,
공사비가 자그마치 800만 냥
(쌀 250만 석)이나 드는 대공사 였으니 부작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영건도감의 도제조는 영의정 조두수가 맡고 이돈영이 재정을 맡았으며, 이경하가 공사감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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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여기저기서 제법 협조가 들어와 공사가 잘 진행되었으나 해를 넘기면서 부터 마가 끼기 시작했다.
공사장에서 두 번이나 불이 나서 가건물 800여 칸과 쌓아놓은 목재들이 싸그리 타버린 것이다.
전각을 지을 수 있는 많은 목재들이 재가 되어버리자, 대원군은 이를 채워넣기 위해 원납전 징수를 강행하고 당백전을 발행해 사족들과 백성들 양쪽 모두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1867년 11월 경복궁(景福宮)은 중건 공사를 시작한 지 2년 6개월만에 완성되었다.
중건 낙성과 더불어 도성 정비사업도 같이 시행하여 궁궐 주변의 민가를 헐어내고, 광화문통의 주점들도 철거했으며, 낡은 문루와 함께 하수도도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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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세 신설과 원납전 징수*
불타버린 경복궁(景福宮)의 중건에 대한 명분도 좋고, 중건을 위한 부서도 다 정해졌는데 돈을 마련할 길이 캄캄해지자 대원군은 여러가지 무리수를 두었다.
경복궁(景福宮) 중건과 서양의 침략에 대비한 군비확충 의도로 시행한 온갖 잡세 신설과 원납전 요구는,
그간 그가 개혁 드라이브를 펼치면서 쌓아올렸던 상종가의 인기를 한순간에 끌어내리고 말았다
대원군은 통행세, 선세, 염세 등 별 거지 같은 세금을 신설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 시작했고, 있는 놈들에게는 원납전을 바치라고 종용했다.
원납전(願納錢)'이란 말 그대로 원해서 납부하는 돈, 즉 기부금인데 이게 사실 말이 자진 납부이지 반 공갈이나 다름 없었다.
있는 놈들은 돈을 내면서도 기분이 더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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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는 웃지만 뒤로는 울면서
돈을 내밀어 '원망하면서 납부하는 돈'이라는 말이 생겨나 원납전(怨納錢)
이라고도 했다.
이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願納錢)은 낼 수 있는 형편에 따라 정해졌다.
거금 10만 냥을 낸 사람이 몇 명 있었고, 1만 냥을 낸 사람도 제법 되었다.
당시 10만 냥이면 지금 돈으로 4~5억 원쯤 되는 큰 돈이었다.
대개 원납전(願納錢)을 내는 대상은 전국의 벼슬아치와 사족, 부호 등인데 배당된 액수가 들쭉날쭉 해서 공평치 못한데다 터무니 없는 금액인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원납전(願納錢)의 수금을 맡은 수령들이 자신들의 공과를 과시하려고 액수를 부풀리다 보니 거기에 따른 원성 또한 자자했다.
(그래서 밑의 것들이 잘해야 한다구!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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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튼 원납전(願納錢)에 대한 폐해는 심했다.
많다고 안 내면 영건도감(營建都監) 의 관리들이 대원군의 공문을 가지고 득달같이 달려와서 독촉이 성화 같으니 감히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납전은 기대만큼 걷히지 않았다.
어느 놈이 돈 내라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내겠는가.
여러 놈이 원납전(願納錢)을 내지도 않고 버티는 데다가, 돈을 내라는 가짜 공문과 가짜 서리가 판을 쳤고,
또 제대로 낸 돈을 중간에서 떼어먹는 놈도 한둘이 아니어서 원납전 제도는 성과를 거두지못했다.(이룬뜨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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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너의 100배야,당백전 주조 (1866) 이렇게 잡세를 신설하고, 원납전을 강요하여 마련한 재원으로 경복궁(景福宮) 공사는 착착 진행되었으나.그래도 돈이 모자랐다.
고종 3년, 결국 대원군은 당백전 주조라는 무리수를 두게 되었고,
이 실책이 두고두고 대원군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당뱩전)당백전(當百錢) 이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
(常平通寶)의 100배의 가치를 지닌 돈으로 당백전 하나가 100푼, 즉 1냥의 가치가 있는 큰 돈이었다.
1푼을 대략 지금 돈 200원으로 계산하면 2만원 짜리 동전이니 제까짓 게 금, 은도 아니고 문제가 있을 수 밖에.
조정회의 에서 대신들이 물가 폭등을 걱정하며 당십전 발행을 건의했으나, 흥선대원군은 이를 묵살하고 당백전(當百錢)주조를 강행했다.
한꺼번에 건지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당백전(當百錢) 발행 액수는 총 1,600만 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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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돈은 금본위 화폐 마냥 실질 가치가 있는 돈이 아니었으므로,
조정 입장에서는 당백전(當百錢) 발행으로 본전인 쇠값과 주조비만 빼면 막대한 돈이 한꺼번에 굴러들어 오는 것이었다.
당백전 발행은 호조에서 담당했으나, 엄격히 비밀을 지키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주조소를 금위영안에 설치했다.
또한 조정은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하기 위해 관아에 보관하고 있던 구리와 쇠붙이를 몽땅 징발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모자라서 전국에 구리와 쇠붙이 징발령을 내렸다.
전국에서 깨진 솥이나 화로를 비롯하여 못 쓰는 농기구와 구리 제품들이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아들인 구리와 쇠붙이로 6개월에 걸쳐 1,600만 냥의 당백전이 주조되어 돈이 나돌자, 곧바로 인플레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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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는 뛰기 시작했고, 상인들은 당백전(當百錢)을 불신하여 상평통보와의 교환을 기피했으며,
상평통보를 창고에 보관 하거나 독에 담아 땅을 파고 묻었다.
이른바 전황 (錢荒)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자 시중에는 돈의 유통이 오히려 줄어들고 물물교환 현상이 되살아났다.
돈 많은 부호들이나 상인들은 어음을 사용했으니 당백전(當百錢) 쓸 일이 없었고, 반대로 가난한 농민들은 돈의 액수가 너무 커서 쓰기가 불편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이렇게 유통질서가 무너지고 있는 판에 위조한 당백전이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위조한 당백전은 너무나 정교해서 구별이 쉽지 않았다.
위폐범은 잡히면 사형이었으나, 워낙 많이 남다 보니 목숨을 걸고 사람들은 당백전의 위조사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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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보니 당백전(當百錢)의 가치는 점점 떨어졌고, 당백전(當百錢)의 기피현상이 두드러졌다.
경복궁 영건도감에서 자재대금이나 인건비로 당백전(當百錢)을 내주면 서로 받지 않으려 했고, 당백전으로 세금을 내려 하면 벼슬아치들도 손을 내저을 정도가 되었다.
결국 발행된 지 겨우 6개월만인 1867년 5월 당백전 통용 중지가 발표되자 당백전(當百錢)을 다량으로 가지고 있던 상인들은 모조리 파산했고, 또 빚독촉에 자살하는 사람도 여기저기서 속출했다.
어쨌든 경복궁(景福宮)은 당백전 덕분에 중건되었으나, 대원군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오늘날 경복궁에 해외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오니 이걸로 그의 과오를 떼우면 아니될랑가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