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제리 아낙네들
고은
먹밤중 한밤중 새터 중뜸 개들이 시끌짝하게 짖어 댄다
이 개 짖으니 저 개도 짖어
들 건너 갈뫼 개까지 덩달아 짖어 댄다
이러 개 짖는 소리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야 따위 말끝이 들린다
밤 기러기 드높게 날며
추운 땅으로 떨어뜨리는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의좋은 그 소리하고 남이 아니다
콩밭 김칫거리
아쉬울 때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묵은 장 가서 팔고 오는 선제리 아낙네들
팔다 못해 파장 떨이로 넘기고 오는 아낙네들
시오릿길 한밤중이니
십릿길 더 가야지
빈 광주리야 가볍지만
빈 배 요기도 못하고 오죽이나 가벼울까
그래도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못난 백성
못난 아낙네 끼리끼리 나누는 고생이라
얼마나 의좋은 한세상이더냐
그들의 말소리에 익숙한지
어느새 개 짖는 소리 뜸해지고
밤은 내가 밤이다 하고 말하려는 듯 어둠이 눈을 멀뚱거린다.
(시집 『조국의 별』, 1984)
[어휘풀이]
-먹밤중 : 캄캄한 밤중
-까 여 다 여 : 전라도 사투리의 특징적인 종결형을 나열한 것.
-접 : 채소나 과일 따위를 묶어 세는 단위 : 한 접은 채소나 과일 백 개를 말한다.
-파장 떨이 : 섰던 장이 파해서 싼값으로 나머지 물건을 팖.
[작품해설]
이 시는 어느 초겨울, 군산 장(場)에 갔다 밤늦게 돌아오는 선제리 아낙네들의 모습을 통해 서민들의 고단한 삶돠 순박함을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군산’은 시인의 고향으로, 시인은 이 작품에서 그 지방의 한 마을인 ‘선제리’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별다른 시적 기교없이 사실적 필치로 잔잔하고도 넉넉하게 그려 냄으로써 우리 농촌의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여과 없이 보여 주면서 그들의 삶에서 풍겨 나오는 따스한 인간애를 놓치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 시는 마늘 한 접을 팔기 위해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그들의 고단한 삶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지만, 정작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것은 ‘이 고생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민중들이 모두 함께 하는 것이라는 공동체적 정서이다. 이런 인식은 따스한 인간애라는 색채를 이 시에 더해 준다.
이 시는 전 23행의 단연 구성이지만, 시상의 흐름에 따라 모두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3행으로,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이 제시된다. 시간적 배경은 ‘한밤중’이고, 공간적 배경은 ‘군산 근처의 어느 시골 마을길’이다. ‘먹밤중 한밤중’은 밤이 매우 깊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이며, ‘새터’ ⸱ ‘중뜸’ ⸱ ‘갈뫼’는 모두 시골 마을 이름이다.
둘째 단락은 4~8향으로, 그 같은 배경 속에서 누군가 길을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개 짖는 사이로 언뜻언뜻 ‘까 여 다 여’ 같은 말끝이 들려오는데, 그들의 말솔는 그들이 여간 의좋은 사이들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셋째 단락은 9~14행으로, 인기척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들은 아침 일찍 마늘 한 접 이고 가서 군산 장에 가서 팔고 밤늦게 돌아오는 선제리 아낙네들이다 .그나마 다 팔지 못해 더 어두워지기 전에 파장 떨이로 헐값에 넘기고 돌아오는 길이다. 그래도 해가 일찍 저물어 그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집까지는 시오릿길로 한밤중이라 걸음이 더뎌 한참을 걸었음에도 아직 십릿길을 더 가야 한다.
넷째 단락은 15~20행으로, 건제리 아낙네들의 곤궁한 삶을 보여 준다. 먼 밤길임에도 자동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에서 충분히 짐작되는 것이지만, 마늘 한 접을 팔기 위해 식사도 거른 채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에서 귿르의 고달픈 삶이 느껴진다. 파장떨이로 광주리는 가벼워졌지만, 허기르 채우지 못한 터라 빈 광주리라도 가볍지만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은 혼자서만 겪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민중들이 다함께 겪는 것이기에 그네들은 그리 힘든 줄을 모르며, 서로 의좋은 마음으로 순박하게 세상을 살아간다.
다섯째 단락은 21~23행으로, 평온해진 시골 마을의 밤이 정겹게 그려진 결말 부분이다. 개들은 아낙네들의 말소리에 익숙해져 다시 조용해지고, 어둠은 더욱 깊어 간다. 특히 마지막 새행은 단순히 밤이 깊어 다시 고요해졌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간 그네들을 고달프게 하던 현실적 고통들이 죄다 사라지고 마침내 마음의 평화까지 얻게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작가소개]
고은(高銀)
본명 : 고은태(高銀泰)
법명 : 일초(一超)
1933년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52년 출가(出家)
1956년 『불교신문』 창간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전은사운」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2년 환속(還俗)
1975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1989년 장시집 『만인보』 발간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1998년 제1회 만해시문학상 수상
시집 : 『피안감성(彼岸感性)』(1960), 『해변의 운문집』(1963), 『신언어의 마을』(1967), 『세노야』(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부활』(1975), 『제주도』(1976), 『입산』(1977), 『새벽길』(1978), 『고은시선집』(1983), 『조국의 별』(1984), 『지상의 너와 나』(1985), 『시여 날아가라』(1987), 『가야할 사람』(1987), 『전원시편』(1987), 『너와 나의 황토』(1987), 『백두산』(1987), 『네눈동자』(1988), 『대륙』(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1988), 『그날의 대행진』(1988), 『만인보』(1989), 『아직 가지 않은 길』(1993), 『독도』(1995), 『속삭임』(1998), 『머나먼 길』(199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