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기도방법 (주기도문)
바리새인들의 기도가 위선적이고 이교도들의 기도는 기계적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진정한 것이 되어야 한다. 위선적인 것과는 다르게 진지한 것, 기계적인 것과는 다르게 사려 깊은 것이 되어야 한다.
‘주기도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모범으로 주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이교도들의 기도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있는 본질적인 차이는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인가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먼저 그분이 인격적인 분임을 암시한다. 내가 ‘나’인 것처럼 그 분은 ‘그’인 것이다. 그 분은 루이스의 말을 빌면, ‘인격 이상의 분’이시다. 현대의 급진적인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재구성하려 하는 것을 우리가 거부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비인격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우리 존재의 기반’을 보는 개념은 그 분이 신적 아버지라는 개념과 도저히 양립할 수 없다.
둘째로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그분은 무시무시한 잔인함으로 우리를 겁주시는 분이 아니며, 또한 독재자나 바람둥이나 술주정뱅이 같은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 자신의 사랑으로 자기 자녀를 돌보심으로 이상적인 아버지 상을 성취하신다.
셋째로, 하나님은 권능이 많으시다. 그 분은 선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위대하시다.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거주 장소라기 보다는 창조주이시며 통치자이신 그 분의 권위와 권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하늘의 권능과 결합시키며, 그분의 사랑이 지시하는 것을 권능으로 수행하신다.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신지 상기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그럴 때에만 하늘에 계신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에게 맞는 겸손과 헌신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에 사랑과 능력이 많으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할 때,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 면에서 근본적인 영향을 받는다. 첫째로, 하나님의 관심사, 즉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의 나라 … 하나님의 뜻”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 자신의 필요는 하나님께 맡겨질 것이다. (우리에게 주시옵고 ..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우리를 구하시옵소서) .
주기도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것이고, 그 다음은 사람의 필요에 관한 것이다. 십계명 역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첫 번째 판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두 번째 판은 이웃에 대한 의무를 개략적으로 말하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처음 세 간구는 하나님의 이름, 통치, 뜻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표현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비인격적인 힘과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분은 당연히 관심을 두신 우리가 가질만한 인격적인 이름이나 통치나 뜻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정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충만히 계시된 사랑과 능력의 인격적인 하나님, 만유의 창조주로 자기가 만드신 피조물과 자신이 구속하신 자녀들을 돌보시는 분이라면, 비로소 그 하나님의 관심사에 우선순위를 둔 그분의 이름,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에 열중할 수 있다. (사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미 다른 모든 이름과 구분되고 다른 이름들보다 높임 받는다는 의미에서 이미 ‘거룩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라고 기도한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그 이름에, 즉 그 이름을 가지신 분께 응당 돌려져야 할 영광이 제대로 돌려지기를 열렬히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왕적 통치이다. 또한 그분이 이미 거룩하신 것처럼 그분은 이미 왕으로서, 절대적 주권을 자연과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롬 12:2)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사랑과 능력이 무한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뜻에 저항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그것을 분별하고, 바라고, 행하는 것이 곧 지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이 땅에서의 삶이 하늘에서의 삶에 더 가까워지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시는 것, 그분의 나라가 널리 퍼지는 것,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에 똑같이 다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 대항문화에서, 우리의 가장 우선적 관심사는 우리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나라와 뜻이다. 우리가 진실하게 이러한 간구들을 기도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그리스도인의 고백의 진실성과 깊이를 측정하는 엄중한 시험 수단이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 하늘의 아버지와 위대한 왕이신 그분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의 개인적 필요는 보조적 위치에 놓이게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되지는 않을 것이다. 기도에서 그러한 필요에 대한 언급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그런 필요들에 대해서만 기도하는 것만큼 오류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며 아버지의 사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자기 자녀의 전체적 복지에 관심이 있으시며, 우리가 신뢰하는 마음으로 양식과 죄 사함과 악에서 구하여줄 필요를 그분께 가져오길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옵시고” 일부 초기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문자적인 양식, 몸을 위한 양식을 첫 번째로 요청하게 하신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앞 부분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고상한 세 가지를 간구한 뒤, 갑작스럽게 너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관심사로 전락하는 게 적절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그 간구를 은유적으로 해석했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양식은 분명히 영적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칼빈은 교부들의 영적 해성에 “이것은 너무나 터무니 없다”고 일갈했으며 루터는 그 ‘양식’이 “음식, 건강 신체, 좋은 날씨, 집, 가정, 아내, 자녀, 좋은 정부, 평화 등과 같이 이생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지혜롭게 이해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식’은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양식이 신체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죄 사함은 영혼과 생명과 건강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의 기도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이다. 죄는 빚 (debts)에 비유된다. 죄는 응징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실 때, 벌을 면제해 주시고 고소를 취하하신다. 여기에 덧붙여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을 이 기도 뒤에 나오는 14절과 15절에서 더 강조되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 하늘 아버지도 우리를 용서하시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길 거절하면 그분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리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은 죄를 뉘우치는 사람만 용서하시며, 뉘우침의 주된 증거 가운데 하나는 용서하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일단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극악한 죄를 저질렀는지 본다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범한 죄는 그에 비해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나치게 크게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죄를 경시하고 있다는 증거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마 18:23-35)의 요점은 빚의 규모가 너무 차이 난다는 것이다. 그 결론은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32-33절)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과거의 악을 용서받은 죄인은 미래의 악의 폭압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악으로 시험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한다 (약1:13). 그러면 그분이 절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하지 마시라고 기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서 고려하는 것은 마귀로,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며, 우리는 그에게서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성경이 유혹과 시련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 1:2). 시험이 유익하다면, 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 기도가 시험을 피하기 보다는 극복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 입에 넣어주신 세 가지 간구는 더할 나위 없이 포괄적이다. 그 간구들은 원칙적으로 우리 인간의 모든 필요, 곧 물질적 (일용할 양식), 영적 (죄사함), 도덕적 (악으로부터 구원받음) 필요를 망라한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할 때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게다가 삼위일체설을 신봉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 간구에서 삼위일체에 대한 숨겨진 암시를 본다.
즉, 우리는 성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받으며, 성자 하나님의 구속의 죽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의 내주하시는 권능을 통해 악한 죄로부터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비그리스도인의 기도와 대조를 이룬다. 바리새인들의 자기 중심성(자신의 영광에만 몰두하는)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 중심적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가지는)이다. 그리고 이교도들의 기계적 주문과는 대조적으로 지성적 (생각 깊은 의존을 표현하는)이다. 그러므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올 때 우리는 사람들의 갈채를 받고자 하는 배우처럼 위선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무 생각 없이 중언부언하는 이교도들처럼 기계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려 갚고 겸손하고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에게 나오듯이 신뢰하는 마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이리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매일 매일이 이 주기도문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향한 측은한 도덕적 마음이 충만한 삶을 영위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