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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산성 근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삼별초가 세웠던 임금. 왕온의 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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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한번 있던 역사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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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보통 사람의 묘와 다를 바 없는 왕온의 묘. 한때 왕이었지만 역사에는 그 이름을 올리지 못한 왕의 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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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4년의 풍상을 이기고 왕온을 지키는 석인상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이른 아침 울돌목에 뜨는 해를 보느라 쉴틈도 없었지만,
또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묵었던 숙소로 들어가 아침을 챙겨먹고,
힘을 얻어 다시 길을 나섰다.
진도대교쪽에서 진도 읍내쪽으로 들어가면서 진도의 동쪽 근처에 있는
근세의 화가들이 대를 이어 배출된 운림산방으로 가는 도중에 "왕온의 묘"가 있었다.
왕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어제 용장산성 기념관에서
용장산성에 대한 내력을 20분 안내 동영상에서 알았다.
처음에 진도여행을 계획했을 때만해도 삼별초는 알았지만,
당시 왕이었던 원종이 원나라에 항복하는 바람에 누군가 중심인물이 었었겠지만
그사람이 '왕온'인줄은 몰랐었다.
더구나 그에 대한 최후의 역사는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는 원종이 원나라에 항복하자 삼별초군은 고려 왕씨중에 종친으로
원나라와 싸울만한 기상이 있는 인물인 왕온을 원종대신 왕으로 옹립하였고,
왕온은 삼별초군과 함께 싸우다가 용장산성에서 멀지 않은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에 의해서 그의 시신은 이렇게 묻히게 된 것이다.
역사의 기록은 이긴자의 것이기에
패한자는 그나마 이런 흔적이라도 남은 것도 대단한 호사요 영광이다.
그가 만일 삼별초군에 의해서 왕으로 추대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한사람의 왕족으로 편안한 삶을 살던지,
아니면 삼별초군과 함께 군인의 한사람으로 싸우다 죽었다면 흔적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삼별초군은 고려 원종이 이끄는 정부군과 원나라 기마병에 패하여
진도 남쪽에서 급하게 배를 타고 추자도를 거쳐 제주로 또 다시 피난정부를 차렸으니,
그 기상이 끈질기다 해야할지 가련하다 해야할지
역사를 뒤쫓는 나그네는 심정이 묘하기 그지 없었다.
국가의 융성과 백성의 삶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왕과 그 왕의 주변에서 권력을 잡은 자들만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그도 모자라 권력을 잡은자들이 패거리를 이루어
서로가 다툼하는 사이에 국가는 쇠약해지고,
내부에서는 화합대신 암투와 모함이 판을 친다.
그러니 외적이 처들어와도 그에 대한 대처는 하지 못하고,
그 틈에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자신의나라를 침공한 외적에 빌붙어서
그에 앞장서는 자들도 있었으니, 인간의 헛된 욕심은 그 끝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리 얻은 권력으로 원나라에 충성하면서
고려인을 종부리듯 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부원배라 부르고,
그 대표적인 인물로 고려의 귀족출신으로 원나라에 자신의 여동생을 공녀로 바치고,
그 공녀가 황후가 되자 그의 힘에 의지하여 고려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기철이다.
고려인으로 공녀가 되어 기구한 삶을 살게되었던 기황후도 기구하지만,
그에 기대어 고려에서 온갖 권력을 휘두르고
고려를 쇠망하게 한 기철같은 인물은 지금에 비유하자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온갖 잇권을 다 챙기고 자손들을 잘 가르쳐
부귀와 권세를 대물림한 오늘의 한국의 사정과 별로 다른 것이 아닌 것 같다.
삼별초가 완전히 몰락하고, 그 후 100여년이 흐른 뒤,
공민왕은 기울어가는 원나라를 멀리하고,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겠다며 배원정책을 펴고
원나라에 줄을 대고 부귀영화를 대물림하려는 부원배를 몰아내는 개혁정치를 하려하자.
부원배인 기철은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반기를 들려다가 결국 공민왕에게 죽고 말았다.
한 번 잡은 권력은 영원히 갖고 싶은 것은 어느 시대나 같은 것인가 보다.
그런데 그 권력은 국가나 민족이 우선이 아니고,
오직 자신들의 부귀영화와 자신들의 자손들에게 그 부귀영화를 물려주는 것이 목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