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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안식일
출 16:21-30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출 16:21-30 / 사람들은 아침마다 자기가 먹을 만큼씩만 거두어들였고 나머지는 해가 뜨겁게 내리쬐면 곧 녹아버렸다. 22) [안식일을 거룩히 하시다]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것보다 갑절을 거두어 들였다. 공동체의 우두머리들이 모세에게 와서 백성이 모두 지시대로 이행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23) 그러자 모세가 그들에게 일렀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내일은 쉬어야하는 날이고 나 여호와에게는 거룩한 안식일이다. 그러니 구울 것은 미리 굽고 삶을 것이 있으면 그것도 미리 삶아 놓아라. 그리고 그 나머지는 아침까지 남겨 두어라.' 24) 그래서 그들은 모세가 일러준 대로 거둔 것을 아침까지 남겨 두었으나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꾀지 않았다. 25) 모세가 말하였다 `오늘은 그 남겨 둔 것을 먹어라. 오늘은 여호와께서 쉬시는 안식일이다. 그래서 너희가 오늘은 들에서 먹을 것을 거두어들이지 못할 것이다. 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어들일 수 있으나 이레째 날에는 거두어들이지 못할 것이다. 이레째 날은 안식일인 까닭이다.' 27) 모세가 이렇게 말하였는데도 그 무리 가운데에서 몇몇 사람은 그것을 거두어들이려고 이레째 날에 들에 나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왔다.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희가 언제까지 내 명령과 지시를 지키지 않으려느냐? 29) 너희가 쉴 수 있도록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준 것이 아니냐? 그래서 내가 엿새째 날에는 이틀 먹을 양식을 너희에게 내려 주었다. 그러니 너희는 이레째 날이 되면 한 사람도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밖으로 나오지 말아라.' 30) 그래서 이레째 날에는 온 무리가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푹 쉬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안식일을 지낼 수 있도록 일곱째 날에는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실 것과, 여섯째 날에 만나를 갑절로 거두게 하시고 남은 것은 다음 날 아침까지 간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에는(21-22) 여섯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소처럼 만나를 거둔 것 같았는데, 평소와 달리 갑절이 걷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회중의 모든 지도자들이 당황하여 모세에게 상황을 알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도하지 않게 하나님의 지시를 어긴 것으로 보여 모세에게 설명하고, 또한 더 많이 걷어진 분량의 만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아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어긴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기에 하나님이 앞서서 여섯째 날에 갑절의 만나를 주신 것이었습니다.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23-26) 하나님께서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은 쉬시면서 그날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쉬면서 거룩한 안식일로 지키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전날 두 배의 만나를 주셔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거두어진 만나를 전날에 미리 굽고 삶아 두어 안식일에 먹을 양식을 준비하도록 지시하셨고, 그래도 남는 만나는 다른 날과 달리 아침까지 보관해도 냄새도 나지 않고 벌레도 생기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렇게 일곱째 날 하나님께서 세세하게 돌보시고 간섭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안식일에 충분한 휴식을 가지고 또한 거룩한 주의 날로 지키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27-30)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지시를 하시고 갑절의 양식을 공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에 만나를 거두러 나갔다가 허탕을 친 백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하여 벌어진 사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 모습은 여러 번 재앙을 당하고도 완악한 마음으로 회개하지 않은 바로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느 때까지 내 앞에 겸비하지 않겠느냐”고 책망하신 장면과 오버랩이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안식일의 규례를 어긴 사람들을 직접 징벌하시기보다 다시 한번 훈계와 책망으로 그치십니다. 그 이유는 성문화된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요즘 일요일을 거룩한 주의 날로 삼고 잘 지키고 계십니까? 당신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당신을 위해서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고, 당신의 영육을 위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시길 바랍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한 최근의 관심에 대해 염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그 이후의 개혁자들이 싸웠던 율법 주의적 극단으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기우 때문입니다. 안식일의 존재론적 의미를 이해하고 정기적으로 모든 인간적인 노력을 중지하고 안식함으로 나를 있게 하고 우주를 있게 하신 분의 숨결에 자신을 맡기고 인생과 우주와 생명에 대한 바른 시각을 회복하는 것은 영성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실천임에 틀림없습니다.(헤셀/안식/김영봉 목사의 추천사)
< 설 교 >
만나를 통한 훈련
출 16:16-31 / 임덕순 목사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내서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아주 짧은 여행이라고 할지라도 걱정되는 것이 먹고 자는 문제입니다. 우선 먹는 문제가 보통이 아닙니다. 바리바리 싸가지고 가서 먹겠다고 해도 쉬고 상하니 그렇게 할 수 도 없고, 매끼 사 먹자니 네 명의 가족이 오천원짜리만 사먹어도 한끼 2만원이고 7-8천원 짜리면 3만원인데 하루에 세끼 사먹으려고 한다면 돈도 많이 들지만, 매끼 어디서 무엇을 사먹느냐가 가장 고민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전교인수련회가 시작됩니다. 600명의 한가람 가족들이 모일 예상을 하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600명이 거기서 이틀을 자고 일곱 끼니 식사를 하게 됩니다. 굉장한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음식은 거기서 다 해주니, 우리는 즐겁게 모여 프로그램만 진행하다가 때가 되면 먹으면 됩니다. 설거지도 걱정하지 마시고 모두 오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600명이 2박 3일만 함께 해도 먹는 문제가 대단한 일인데, 200만 명의 사람들이 건물도 없이 햇빛 만 내리쬐는 사막 들판에서 한 달째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먹고 사는 문제가 걱정이 안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이 직접 홍해를 갈라 새 길을 만들어 내시며 인도하시는 전능하신 능력과 함께 있으니, 걱정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신광야에서 먹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 라는 신기하고 완벽한 최고의 음식을 하늘에서 아침마다 내려 주셨습니다. 그들을 죽이시려고 작정하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여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시려고 시작하신 길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며 원망했을지라도 준비해 두셨던 만나를 즉시 내려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거두는 데는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과 음식을 주실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먹는 것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미 만나를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나의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고 하신 바 있는데, 먹는 문제를 통해서 그들을 훈련하고 시험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훈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매일 아침마다 들에 나가서 거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일, 모레, 다음주일에 먹을 양식을 한꺼번에 주신 것이 아니라 아침마다 그날의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매일 매일 너희 생명을 책임지고 너희 필요한 것을 다 책임지는데 너는 그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나를 바라보고 나를 의지하고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나를 잊고 네 힘으로 삶을 시작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도 이어지는 하나님의 훈련이요 시험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라, 매일 매일 성실하게 살라는 교훈입니다.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매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삶이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하여 날마다 양식을 준비하고 공급하십니다. 이것을 믿고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둘째는, 공평하게 거두라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너희 각 사람의 식량대로 이것을 거둘지니 너희 인수대로 매명에 한 오멜씩 취하되”라고 명하셨습니다. 한 오멜은 약 2리터로 한사람 분량의 식량입니다. 한사람이 많이 가지려고 욕심 부리지 말고, 각자 자기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까? 어떤 사람은 순종하여 한 오멜을 거두었지만, 어떤 사람은 세 오멜 네 오멜 심지어 이십 오멜을 거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것을 집으로 끙끙 가지고 와서 되에 되어보았더니, 되는 순간 모두가 다 똑같이 한 오멜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8절입니다.
많이 거둔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욕심은 무익한 것입니다.
21-22에 보면, 이스라엘이 각기 충분할 만큼 거두어 들였는데도 들판에는 아직도 만나가 가득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해가 뜨겁게 쪼이면 양지바른 언덕의 봄눈처럼 사라졌습니다. 만나는 아침마다 들판에 가득 내렸다가 백성들이 하루 분량을 거두어 가고 난 뒤에도 들판에 가득 남아있었지만 해가 돋으면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또 들판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쓰고 남을 만큼 넉넉히 물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이십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충분히 줄 테니까 절대로 욕심은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매일 그날 분량만, 그 식구 양대로만 거두게 하셨습니다. 내일은 또 주실 것이니 일용할 양식만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만 하면, 매일 신선한 것으로 공급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풍성을 평생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 이틀 분, 사흘 분, 열흘 분 쌓으려고 서로 경쟁하면, 그것은 모자랄 수밖에 없고 수고는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음식을 함께 즐길 대상이요 사랑해야 할 대상인 이웃간에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여 오늘의 양식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해서 많이 쌓고 모으기 때문에 사회불안요인인 양극화가 심화되고 모두 함께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먹고 입고 살 것이 넉넉합니다.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식량은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먹으면 굶주리는 자가 생길 리 없이 넉넉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다 가지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부자나라는 음식쓰레기가 처치곤란이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굶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만 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명령은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순종하지 않을 때는 벌이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고 욕심을 내어 많이 거두면, 그것이 썩어버립니다. 썩으면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냄새가 나고 해를 끼칩니다. 돈을 많이 모아두려고 하면 자신의 양심이 썩고, 삶의 자세가 비틀어지며, 자식들의 영혼이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욕심으로 많이 모은 만나가 썩어 벌레가 꼬인 것처럼, 하나님도 모르고 욕심만 가득한 사람들 곁에는 사기꾼과 도적과 유괴범과 배신하는 사람들이 들끓게 됩니다. 이것이 현대판 벌레입니다. 그리고 가슴속에는 두려움이 들끓고 평안함과 마음의 자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하루에 세끼 밖에는 더 이상 못 먹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눕는 침대 사이즈는 똑같습니다. 삼 사대가 먹고 살 돈을 모아 두어도 그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누가 구멍 뚫고 훔쳐가고 어디서 썩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욕심 내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남을 해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것으로 우리를 시험하고 훈련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는 안식일에는 거두지 말고 전 날 갑절을 거두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날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날을 거룩한 날로 구별해야 하고, 그날 하나님께 경배하여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삽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도 안식일을 특별히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만나를 내리지 않으셨고, 대신에 전날 갑절을 거두어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나 안 하나, 그들을 시험하시고 훈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지 않는다고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고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갔습니다. 그런데 평일에는 그렇게 많던 만나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빈 그릇을 숨겨가지고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와서 하루 종일 굶주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에는 전혀 만나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날은 육신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거룩’ 이라는 말은 ‘특별하다.’ ‘구별되다.’ 는 말입니다. 어떤 날이 거룩하다는 말은 보통 날들과는 다른 날이라는 말이고, 어떤 물건이 거룩하다는 것은 일반 물건과는 특별히 다르다는 말입니다.
신자가 거룩하다는 말은, 세상 사람과는 영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럼 안식일이 어떻게 거룩합니까? 어떻게 다릅니까?
엿새 동안은 우리가 육신을 위하여 일하는 날들입니다. 그 날들에는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고 장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빨래를 합니다. 그것들은 모두 육신을 위한 일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은 보통 날에 하던 것을 하지 말아야 하고, 엿새 동안에 하지 않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에 하던 일들인 장사, 농사, 목축, 빨래, 공부 등은 그날에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거룩한 날이요, 그날들에 하지 않던 일인 교회에 와서 예배하는 것, 성경을 공부하는 것, 이웃을 봉사하는 것 등, 육신이 아닌 내 영혼을 위한 일들을 하는 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이 특별한날, 구별된 날, 거룩한 날인 것입니다. 그날이 거룩하다는 것, 특별하다는 것,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하는 날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것이 바로 그날에는 만나를 전혀 내려주지 않았다는 것이고, 전날에 미리 이틀 분을 거두게 하시고 안식일에는 다른 일들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한번 다녀오는 것이 주일성수가 아니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주일을 특별한 날로, 구별된 날로 여기고 그렇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그날은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지 않는 날입니다. 작은 섬사람들은 수도가 없어서 빗물을 받아서 살아가는데, 양동이가 아무리 커도 비가 오지 않는 날 내다 놓으면 물 한 방울 고이지 않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 따로 있고, 해가 맑은 날이 따로 있습니다. 주일날은 자신의 영혼과 이웃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하루를 사용하십니까? 그렇게 해야 복을 받습니다. 그날 돈을 벌려고 세상에 가면, 당장에는 돈이 벌릴지 모르나 돈이 모아 질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번 돈이 내게 유익되게 쓰일 리 없습니다. 돈이 벌어지지도 않을 것이고, 혹 벌었다 해도, 사고 뒤처리 하는데 쓰여지고, 병원비로 쓰여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의 날을 ‘특별한 날’ 이라고 인정하고 특별하게 써야만 합니다.
주일날 아직도 주일날 가게 문 열고 영업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서 고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쉽니다.” 라고 써 붙이고 과감하게 말씀대로 순종하는 생활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거룩하게만 사용할 거야. 주일은 세속적인 일에 사용하지 않을 거야’ 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결심하고 실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일하는 엿새 동안에 복을 부어 주십니다.
본문에 보면, 안식일을 준비하는 것은 우선 이틀분의 식량을 준비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그날 전날보다 만나를 배나 더 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냥 갑절을 거두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 날을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평상시와 똑같은 양의 양식을 내려 주셨지만, 사람들이 안식일에 거룩한 일을 하기 위해서 전날에 갑절의 노력을 기울여 안식일의 식량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아무 노력도 없이 주일은 시간이 있으니까 그냥 교회에 왔다 가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교회에 갈 시간을 미리 준비하고, 물질을 준비하고, 마음을 정돈하고, 그리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와서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시간이 나면 교회가고, 여유가 있으면 기도하고, 물질이 생기면 그때 봐서 헌금 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일성수의 가장 기본적인 준비는 엿새 동안 열심히 자기의 일에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엿새를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자기 영혼도 잘 돌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상시에도 나중을 대비해서 여러 날 먹을 만나를 몰래 쌓아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만약에 내일은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는다면, 내일은 무엇을 먹지? 하면서 여러 날 먹을 분량을 거두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룻밤을 지나고 보니까 많이 모아다가 저장해둔 만나에서 벌레가 가득히 나서 집안이 온통 벌레 천지였고, 고생하며 치우고 나서 밖에 나가 보니까, 밖에는 새로 내린 신선한 만나가 온 들판에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말씀대로 매일 그날 양식만을 거두었고, 금요일에는 안식일을 위해서 이틀분량을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시험을 통해서 배워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만드신 분으로서, 우리 몸에 양식이 필요한 줄을 다 아십니다. 또 그것을 준비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만나가 필요한 줄을 아셨고 만나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끼 식사는 다섯 시간이 지나면 다 소화가 되게 하시여, 다시 음식이 필요하도록 인체를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아침에도 내일 점심에도 다시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보다 하나님이 더 잘 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친히 준비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어야 하므로 벼를 농사하여 먹게 하신 분이고, 빵을 먹어야 하니까 밀을 만들어 주신분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매일, 그날의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고,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셨고,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염려 대신에 믿고 성실하게 살아가면 책임지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 과연 있습니까?
옛날 배고픈 시절에 가난 한 집 아이들은 밥을 보면 배가 터지게 먹었습니다. 지금 먹으면 언제 또 먹게 될지 모르니까 배꼽이 이사 갈 정도로 먹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부잣집 아이들은 밥을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습니다. 이미 먹은 것이 있어서 배가 고프지 않기도 하거니와, 자기 부모가 다음 끼니에도 밥을 줄줄 알기 때문에 한꺼번에 많이 먹으려고 욕심 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요, 그분이 부자요, 내일도 나의 필요한 것을 아시는 대로 채우신다는 것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내년, 십 년 후, 아들, 손자가 살아갈 미래까지 염려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 먼 미래까지 염려하느라고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지 말고, 내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오늘 할 일에만 충실한 부잣집 자식의 자세를 가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평일에는 "일용할 양식만을 취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두 배를 거두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먹을 양식 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틀 분 양식을 모아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필요한 분량 이상의 물질을 허락하신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에만 물질을 축적하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물질을 축적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과 자식과 손자의 육신적 욕심을 위해서만 물질을 모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고, 노사가 앙숙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망하실 일입니다.
23- 24에 보면, 그들이 명령대로 순종하여 안식일 전날에 이틀 분량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날인 안식일이 되었어도 상하지도 않았고 벌레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날은, 하루만 지나면 완전히 썩어 벌레가 났었는데, 안식일을 위해서 모은 만나는 하루를 두었어도 전혀 변질이 되지 않았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물질은 무엇을 위해 모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모은 재산은 썩지 않고, 부작용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모두가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필요 이상으로 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예외를 허용하셨는데,
그것은 안식일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목적입니다. ①안식일에 음식을 거두러 나가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미리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②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준비하는 것과, ③하나님께서 기뻐하시도록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물질을 준비하는 것은 허용 하셨습니다. 자신이 많이 쌓아 두고 오래 오래 누리기 위한 축재는 허락하시지 않으시나, 선교와 구제를 위한 물질을 구하는 성도는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 하게 하셨고,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욕심을 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넉넉하게, 매일아침 만나를 주신 하나님,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을 위해서만 물질을 축적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개인의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다만 성실하게 살면서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물질을 모아서 하나님의 일을 해볼 용의가 생겼습니까? 선교를 위해서 돈을 벌고, 장학을 위해서 돈을 벌고, 구제하기 위해서 물질을 모으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사회는 비록 땅위에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선교사를 지원하고 계속하여 파송하기위해 물질이 필요하며, 몸이 불편해서 자기의 생활을 책임 질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물질이 필요합니다. 물질을 모아서 자기만 누리려고 하면, 썩고 벌레가 나서 결국 자신에게 해가 되지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준비하는 물질은 자신에게 축복이 됩니다. 우선 내 몫부터 챙기고 여유가 있으면 남을 돕겠다는 것 보다,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물질관입니다. 물질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물질을 무엇을 위해 모으고 쓸 것인가는 그의 삶의 목적과 신앙을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기본적인 물질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시험하고 훈련하십니다.
아직도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부요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와 자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쌓는 일에만 관심 갖는 사람도 그것이 썩어서 쓸모없고 나중에 고통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육신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거룩한 일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은 풍성하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고 채워주시는 손길을 경험할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드러내고 물질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됩시다.
굽고 삶고 간수하라
출 16:22-24, 눅 11:27-28 / 이성희 목사
인도는 여행하기 힘든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공기도 좋지 않고, 냄새도 좋지 않고, 길도 좋지 않고, 비행기 시간도 좋지 않습니다. 델리는 제가 경험하기로는 세계에서 가장 소음과 먼지가 많은 나라입니다. 아예 ‘경적을 울리시오’. ‘Please horn’, ‘Blow horn’이라고 차에 쓰고 다닙니다. 여행이 힘든 나라이기 때문에 선교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윌리엄 캐리, 스탠리 존스 그리고 최근의 테레사 수녀 등이 인도에 복음을 심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만큼 인도는 선교사적으로 중요한 나라입니다. 이번에도 가서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세계선교회 팀은 의료, 이미용, 풍선 아트, 페이스 페인팅 팀들이 5회에 걸쳐서 아주 어려운 지역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얼마나 힘든 곳인지 화장실도, 목욕시설도 없어서 고생하였고, 펀잡 지역에 갔을 때는 방과 마당 사이에 커튼만 있는 방에서 침낭 속에서 내복 입고 양말 신고 잠을 잤습니다. 방 안에 닭이 들어와 닭똥을 싸기도 하고 길에는 쇠똥과 하수들이 함께 질퍽이고 있습니다. 과일 껍질이나 쓰레기도 차 안에서 창밖으로 자연스럽게 아무나 버립니다. 우리도 며칠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쓰레기를 버렸겠습니까? 그걸 못하겠더라고요. 교육이나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이번에 특별히 펀잡에서 선다싱 기념교회의 기공예배를 드렸는데 저희들이 함께 참석하고 제가 기공예배에 설교하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청년들도 굉장히 고생하면서 열심히 사역하였습니다. 지역 전도와 특히 대학교에 가서 복음 전파하며 지역 교회들을 섬기고 돌아왔습니다. 여럿이 배탈이 나고 고생도 하였지만 무사히 돌아오게 되어 감사합니다. 지금 중국에 가 있는 청년 사역 팀들도 고생을 많이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고생만큼 많은 경험과 열매를 얻고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인도와 중국에 뿌려놓은 작은 씨앗들이 많은 복음의 효과를 거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인도 요리를 참 좋아합니다. 이번에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요리란 같은 재료를 가지고 하지만 나라마다 집집마다 손끝마다 맛이 다릅니다. 같은 재료이지만 인도음식은 커리를 사용합니다. 닭고기 요리지만 인도요리는 커리로 닭을 요리합니다. 한국은 닭도리탕을 합니다. 같은 재료이지만 음식의 맛이 다 다른 것은 참 재미있는 결과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요리가 발달한 나라는 중국입니다. 중국은 못 먹는 게 없는 나라입니다. 기어 다니는 것이나, 날아다니는 것이나, 물 속에 있는 것이나, 식물이나 무엇이든 중국인은 다 먹습니다. 최근에 가장 요리가 뜨는 나라가 어딘지 아십니까? 한국입니다. 지금 세계는 한국 요리에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특히 김치는 세계적 식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에서는 한류의 영향으로 비빔밥을 선호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전통 음식인 김치, 된장, 마늘 등이 새로운 세기에 세계적 요리로 부각될 것입니다. 발효음식의 맛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맛입니다. 최근에 와서 묵은지가 다시 유행하는 것도 이런 영향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요리는 철저하게 요리사에 따라 천차만별로 변합니다.
가장 다양한 요리는 말씀의 요리입니다. 가장 다양한 맛은 말씀의 맛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물이 먼저 있은 줄 알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물밑에 말씀 이 있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 밑에 구원의 말씀이 있습니다. 광야 밑에 심판의 말씀이 있습니다. 만나를 내리신 것은 하나님 말씀이 내리심을 말합니다. 모든 것의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갖가지 요리가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기적을 배푸신 예수님은 완전히 배부르게 먹게 하신 다음에 맥 빠지게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6:31에는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48절에는 예수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십니다. 49절에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라고 하시고, 50절에는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이 기적의 주 목적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신령한 만나라는 것입니다. 옛 만나는 먹어도 죽었지만 새로운 만나는 먹으면 사는 만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 같은 법궤 안에는 만나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십계명의 두 돌비가 들어 있었습니다. 만나는 선민을 보호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팡이는 제사직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두 돌비는 지성소의 중심이며 이스라엘 신앙의 직접적 초점을 의미합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조상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이것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입맛대로 먹게 하십니다. 굽기도 하고 삶기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잘 간직하라고 하십니다. 재료는 주시되 요리는 우리의 몫입니다. 재료를 가지고 우리가 요리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른 말씀으로 먹습니다. 이것이 말씀입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영적 훈련과 성장’이란 그의 책에서 독서의 본질적 방법을 설명합니다. 첫째는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해석하는 것이고, 셋째는 평가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독서를 통하여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 영적 방법을 잘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굽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해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많이 말씀하십니다. 가장 쉽게 하시려고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비유를 못 알아들으면 비유는 가장 어려운 것이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태복음 13:13에 예수님은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하십니다. 51절에는 “이 모든 것을 깨닫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알아들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르낭은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없이 이해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 없이 이해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성경은 이해될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왔다”고 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내가 간다”고 해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중국의 노신(魯迅)의 말입니다. “명망 있는 학자와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이 말을 할 때 군데군데 이해가 되지 않는 척해야 한다. 너무 모르면 업신여기게 되고 너무 잘 알면 미워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다 알아도 미워하지 않고, 다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다 알아 들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엠마오 가는 길에서 두 제자를 만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알게 하십니다. 24:45에는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이 이해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시편 119:130에는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을 깨닫게 하나이다”고 합니다. 말씀을 열면 깨닫게 하십니다. 말씀은 깨닫게 하고 이해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하나의 언어를 이해하라. 이해하면 연금술사가 된다”고 합니다. 말씀을 이해하면 말씀의 해석도 가능합니다. 말씀을 마음껏 응용할 수 있습니다.
둘째, 삶는 것은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신 다음에 그 말씀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의 뜻을 해석해 주십니다. 기적의 뜻을 해석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왜 우리는 못 고쳤나요?”라고 합니다. 종말 현상을 말씀했을 때에 “언제 그런 일이 있습니까?” “주님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필요하실 때마다 말씀을 해석해 주십니다. 말씀을 들은 다음에 그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해석은 잘못하면 말씀의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됩니다.
클린턴과 일본 수상 모리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비서가 모리 수상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클린턴에게 ‘How are you?’ 하면 ‘I am fine and you?’ 할 것입니다. 그러면 ‘Me too’하십시오”. 그런데 모리가 클린턴을 만나 “How are you?” 한다는 게 “Who are you?” 그랬습니다. 클린턴이 “I am Hillary's husband”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리 수상이 “Me too”라 그랬답니다. 말을 이해 못하면 이렇게 엉뚱한 결과가 옵니다.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은 해석하는데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잘 해석해 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초대교회에도 교회에 강독자(Rector)라는 직분이 있어서 말씀을 읽고 해석해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전에는 강도사란 제도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단은 없지만 아직도 여러 교단이 강도사란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대로 하면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잘 해석해야 하는데 누가 잘 해석할 수 있습니까? 신령한 지혜를 가진 자가 잘 할 수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하고, 이성적이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령한 지혜를 가진 자가 성령의 지시를 받는 자가 잘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말씀을 해석하는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해석’이라는 성경의 단어가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다니엘과 요셉입니다. 이 두 사람은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해석하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말씀이 해석은 진령한 지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교회의 역사에 토르케마다라는 유명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15세기에 살았던 스페인의 도미니쿠스 교단의 사제입니다. 이 사람은 수도원의 부원장으로 오래 일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제는 카톨릭 군주의 비호 하에 엄청난 종교적 횡포를 일삼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좁은 성경해석에 불복하는 사람은 핍박하고 고문하였습니다. 얼마나 그 악명이 높았든지 그의 이름은 종교재판소의 공포, 종교적 편협함, 잔인한 광기 등의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해석하는 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하여 2천명을 화형시켰습니다. 1만6천명의 유대인을 스페인에서 추방하였습니다. 잘못된 성경해석은 이런 어마어마한 횡포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느헤미야 8:8에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권위입니다. 말씀의 힘입니다. 말씀은 바르게 해석되고 깨닫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말씀이 해석은 오히려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물론 철학자 포이에르바하는 “문제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라는 유물론의 명제는 사실은 ‘올바른 해석에 근거한 세계 변혁’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모방한 것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바른 해석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셋째, 간수하는 것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잘 간수하고 내 것으로 간직하는 것은 최종의 단계입니다. 왜 말씀을 이해하고, 왜 말씀을 해석합니까? 내 것으로 간수하려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간수하는 것은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묵상하면 간수됩니다.
시편 1:2에는 복 있는 사람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영혼이 평안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세상의 욕심에서 떠납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세상의 악에서 떠납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편 119편의 주제가 ‘말씀’인 것은 아시지요? 말씀이 주제인 시편 119편에는 묵상에 관한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15절에는 “주의 법도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27절에는 “주의 기사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23절과 48절에는 “주의 율례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78절에는 “주의 법도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97절에는 “주의 법을 종일 묵상”한다고 합니다. 99절에는 “주의 증거를 묵상”한다고 합니다. ‘말씀’이 주제인 장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말은 ‘묵상’입니다.
말씀은 묵상되어질 때에 참 말씀입니다. 말씀의 힘은 묵상에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내 것이 됩니다. 말씀은 내 것으로 잘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일시적으로 가질 수는 있지만 말씀을 잘 간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말씀을 품으라는 말은 말씀을 두고 다니지 말라는 말입니다.
분을 품으면 분을 전합니다. 사랑을 품으면 사랑을 전합니다. 말씀을 품으면 말씀을 전합니다. 무엇을 품느냐 하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보면 앙심을 품고 있다가 사고를 저지른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앙심을 품으면 사람을 죽입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스토킹 하다가 일을 저지르고 잡힙니다. 이메일로 악성 유언비어를 퍼트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비난하기 위한 나쁜 의도에서 악성 리플을 다는 것을 ‘악플’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범죄가 되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항상 좋은 것을 품고 다녀야 좋은 것이 나옵니다. 말씀을 품고 말씀이 몸에 배어 있기를 바랍니다.
나폴레옹 힐은 “무엇이든지 마음에 품고 신념을 가진다면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잘 품고 살면 그 말씀이 현실이 되어 말씀처럼 살고, 말씀처럼 은혜 받고, 말씀처럼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잘 간수하라”고 하신 말씀을 여러 번 주십니다. 다니엘 8:26에는 “이미 말한바 주야에 대한 환상이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고 합니다. 12:4에는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말씀을 잘 간직하라고 하신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에는 “내 아들아 이 명령을 네게 간직하라”,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말씀은 잘 간직해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27에는 어떤 여인에 예수님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28절에는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몇 대 째 예수를 믿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잘 듣고 잘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교회 다닌 연수, 직분, 관계를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하기를 바랍니다.
결 론
요한계시록 2:17에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승리하는 마지막 날에는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님을 통해 신령한 만나를 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신령한 만나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배불리고, 영원히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말씀을 잘 이해하고, 해석하고, 늘 묵상하는 신령한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출 16:25-27 / 안양준 목사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마음 속에 원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길 만이 가장 축복된 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늘 연약하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이러한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죄악된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국을 예표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기 전까지 겪어야 할 광야의 길에서 체험한 또 하나의 신앙적 교훈을 가르쳐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을 걷는 동안 엘림과 시내산 사이의 신광야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에 먹을 것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곧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출 16:3을 보면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고 지도자 모세에게 불평을 토해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의 불평은 사실상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 16:12에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그리고 그 말씀대로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내려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진에 덮이게 하심으로 날마다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주셨고, 아침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라는 희한한 음식을 날마다 내려주셔서 배불리게 되었습니다.
만나는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것을 처음 보았을 때 하도 신기해서 서로 “이게 뭐지?”하고 물었던 히브리어 ‘만 후’에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이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진치고 있는 주위에 아침마다 이슬이 맺혔다가 그 이슬이 마르고 나면 지면에 ‘작고 둥글고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남곤 하는데 ‘모양이 깟씨같고 색깔은 희고 맛은 꿀섞은 과자’(출 13:14)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신기한 양식을 하나님께서 주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 가지 제약을 두셨습니다.
그 첫째는, 매일 매일 각 사람의 수대로 하루 먹을 분량의 양식만 거두라는 것입니다. 쓸데없이 많이 거두거나 며칠 분의 식량을 미리 한꺼번에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거둔 것을 다음 날까지 남겨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7일째되는 날 즉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것인데, 그 대신 6일째 되는 날에 이틀 분의 식량을 거두어 그것으로 안식일의 양식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일부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 결과는 20절에 보면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제 6일에 미리 거두어서 다음 날 안식일을 위해 간수해 두었던 만나는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제 칠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지만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양식을 베푸신 일, 그리고 백성이 그 식량을 거둠에 있어서 지키도록 정하신 규칙들이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기초가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일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그 날 분의 양식만 거두고 다음 날까지 남기지 말라고 하신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오늘도 책임져 주시고,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책임져 주시고, 내일 뿐 아니라 언제나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매일의 양식을 위해 하는 염려, 즉 하나님이 하실 일을 자기가 하겠다는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남겨 두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까지 남겨둔 양식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못 먹게 된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양식은 인간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17-18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 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땅에 평일에는 만나가 덮이고 안식일에는 덮이지 않는 것입니까? 또 똑같은 만나인데 보통 때는 다음날 아침까지 두면 벌레가 끓고 냄새가 나는데 안식일 전날 거두어 들인 것은 벌레도 끓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연의 숨겨진 이치 때문도 아니고 인간의 조작을 통한 것도 아니라 오직 그렇게 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넷째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인간이 행하는 수고는 실상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는 헛수고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일부 이스라엘 백성이 들에 나가 보았으나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한 사실이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2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명령을 지키지 않은 백성들을 향해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를 원하는 우리들 가운데도 아직도 이러한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여 책망받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약속이고 우리는 그저 하나님에 대해 전적인 신뢰와 순종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삶의 문제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한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이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 진정한 안식의 비결을 소유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일을 정하고 쉬라 하신 것이 하나님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 6일간 힘써 일한 후에 하루를 쉼으로 심신의 피로를 풀고 활력있는 삶으로 재충전할 수 있게 하시고, 내가 쉼에도 불구하고 나머지 삶의 문제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대해 신뢰할 수 있고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목적입니다.
두 나무꾼 친구가 산에 올라갔습니다. 경쟁적으로 나무를 찍어 장작을 만들어갑니다. 한사람은 유달리 승부욕이 강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지지 않을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50분 일하고 10분 쉬는 식으로 숨을 돌려 가면서 일했습니다. 어느덧 산을 내려갈 시간이 되어 두사람은 각자 서로가 수고한 결과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셈일까요? 쉬어가면서 일한 친구가 더 많은 장작을 장만했더랍니다. 승부욕이 강한 친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투덜거렸습니다. "내가 더 열심히 했는데도 왜 자네 것이 더 많단 말인가? "그러자 다른 한 친구가 점잖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10분씩 쉴 때마다 도끼날을 갈았다네."
당연히 이길 수 밖에 없습니다. 도끼날 무디어 지는 줄도 모르고 덮어놓고 열심만 낸다고 되겠습니까? 아무리 바쁘다해도 경건의 시간 -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의 시간은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안식의 비밀을 깨닫지 못해서, 아니면 알면서도 믿음으로 확인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또는 세상적인 관심과 인간적인 염려, 물질적인 욕심이 많아서 주일에도 안식하지 못하고 계속 일하고 돈벌이를 택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는 일입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일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이고 모든 안식의 근원인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일하고 애쓰고 벌어들이고 남기고 모아두는 모든 것에서는 냄새가 날 수 밖에 없고, 그런 어리석고 욕심스러운 삶은 반드시 벌레가 끓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벌레 먹고 냄새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없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일을 하든지 쉬든지, 모으든지 쓰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믿음을 따라 행함으로 벌레도 생기지 않고 냄새도 없는 삶, 그리스도의 향기만이 풍겨지는 쓰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고 또한 남지도 않는 깨끗하고 풍요로운 삶을 사는 지혜를 얻는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식하면서 길을 가십시오
출 16:21-30 / 박준수 목사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인기리에 소개되었던 책 중에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그 책에서 저자는 삶의 능력은 느림에 있다라고 합니다. 느림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을 갖고 삶을 느리게 사는 것입니다. 사색하면서 천천히 차를 마시기도 합니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산보를 하기도 합니다. 생각하면서 천천히 글을 써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작은 행복들은 서두룸과 조급증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행동할 때 가능한 것들입니다. 저자는 느림을 정죄하는 현대에서 오히려 빠름을 정죄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저자는 질문합니다.“오늘 우리에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서 감동하는가?”“저녁마다 어둠을 맞이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느냐 ”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는 지금 스피드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빠른 것이 능력입니다. 빠른 컴퓨터가 좋은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는 빠른 것으로 세계제일입니다.인너텟 세계 제일입니다. 휴대폰 세계제일입니다. 컵라면 세계제일입니다.얼마전에 우리나라에도 고속전철(ktx)이 생겼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이제는 2시간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국이 반나절이면 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고속에서 초고속,광고속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영역들이 너무 빠르게만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쁠수록 빨라질수록 우리의 삶도 분주해집니다. 점점 바쁜 삶 속에서 삶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열심히 빨리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쉼도 우리에개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빠르게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쁘게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쉼을갖고 살라고 합니다. 여유를갖고 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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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광야에서 이동중에 있습니다. 광야의 길을 가면서 이들은 빨리 광야를 벗어나고 싶을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광야의 길을 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안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광야길은 내 열심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광야길은 내 계획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광야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는 길입니다. 광야길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길입니다. 무엇보다도 광야길은 안식하면서 가는 길입니다.
우리 인생은 광야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길을 가야 합니다. 나그네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오늘도 길을 가야 합니다. 길은 어디가 끝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은 안식하라고 하십니다. 왜 안식해야 합니까?
어떻게 안식해야 합니까?
1. 안식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3절“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여기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이 만나는 매일 새벽에 광야에 내려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 각 사람의 식구대로 만나를 거두어야 했습니다. 이 만나는 해가 뜨겁게 쪼이면 거둘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육일에는 각 사람이 갑절로 거두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휴식하면서 지내야 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그치고 휴식하면서 안식하라고 하십니다.
왜 사람들에게 일을 하지 말고 쉬라고 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쉬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2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고 합니다.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동안 지으셨습니다. 창조의 일을 다 하신 후에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6일동안 일을 하시고 1일을 안식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이 피곤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단지 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주일에 하루를 안식하라고 하신 것은 단지 우리가 피곤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답을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내용이 소개됩니다. 첫째날은 빛을 창조하십니다. 둘째날은 하늘을 만듭니다. 셋째날은 땅과 바다, 풀과 채소와 과목을 만듭니다. 네째 날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듭니다. 다섯째날은 큰물고기 새와 모든 생물을 만듭니다. 여섯째 날은 육축과 기는 것,땅의 짐승을 만들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십니다.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하시고 난 뒤에 반복적으로 소개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 표현은 바로 “좋았더라”는 표현입니다.빛을 창조하시고 난 뒤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창세 1장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표현이 몇 번 나오는지 아십니까? 4절,10절,12절,18절,21절,25절에 반복적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 마지막에 가서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시고 나서 31절에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합니다. 여기 ”좋았더라“는 원어는 ”완벽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때에 단순히 일만 하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신 일들을 점검하셨습니다. 자신이 하신 일들을 통한 기쁨을 느끼셨습니다. 자신이 하신 일들을 자축하시면서 즐거워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열심히 일만 하다가 죽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일을 한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도 못하고 그냥 바쁘게 열심히 일만 합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평생을 일만하다가 그냥 인생을 마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일을 하십니까?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단지 일을 위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이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예화) 중세기에 어떤 성당 건물을 짓기 시작하는데 건축 현장 바로 옆 채석장에서 인부 세사람이 돌을 깍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물었습니다.“당신들은 지금 무얼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인부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보면 모르십니까? 돌을 깍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인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무얼 하느냐구요 돈을 벌고 있소”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인부는 ‘저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해도 어떤 생각으로 일을 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는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을 하고 나서 그 일에 대하여 “자축의 시간” “즐거움의 시간”을 갖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하면서 자신이 창조하신 일들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안식을 통하여 나를 돌아보면서 일에 대한 감사와 즐거움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종종 일상 속에서 항상 바쁘게 살다보면 짜증이 늘고 신경질이 늘고 사람이 무덤덤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일을 그치고 쉬면서 한번 여유를 갖고 자신을 돌아보면 새로운 기분과 삶이 회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명하신 것은 우리가 삶에서 일주일의 하루를 쉬면서 과거를 돌아볼 때 우리는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도와주시는가? 어떻게 인도하시는가?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무엇을 기억합니까? 결코 내힘과 내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같이 쉬면서 자기들의 과거를 바라본다면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셔서 매일 매일 살아왔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낮과 밤을 지켜주셔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습니다.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하신 일들을 바라보십시오.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들려주시는 놀라운 음성을 들으십시오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보여주시는 놀라운 계시를 보시기 바랍니다.
2. 거룩한 안식일로 구별하여 안식하여야 합니다.
23절 거룩한 안식일이라고 하면서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말고 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30절에 안식하였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기 이전에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구약 창세기나 오늘 본문이 나오기 이전까디에서 어디에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지키거나 지키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면서 하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안식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0장에 가서 더 적극적으로 명령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0계명에서 4계명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6일동안 일을 하시고 1일을 쉬면서 안식한 것을 우리들도 그대로 적용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날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뿐 만 아니라 모든 날도 하나님이 창조하셧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의 주인이요 모든 날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한 자기 백성을 통해서 구별된 날로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증거를 통하여 그가 하나님의 백성된 것을 세상 만민들에게 증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31:1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2장 3절에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셧으니”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안식일에 하나님이 안식일을 다른날과 어떻게 구별하였는가? 바로 ‘복’‘거룩입니다.
안식일은 복된 날입니다. 안식일은 거룩한 날입니다.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되다는 의미입니다.
안식일을 구별하여 지키라는 것은 단지 쉼을 위한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우리가 단지 일을 그치고 그냥 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교제함으로 다른 날과 특별하게 구별되이 지키는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명령하십니다. 출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레위기19:30에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제사드리면서 지켜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성스럽게 하나님께 나아가서 지금으로 말을 하면 예배드리면서 지켜야 했습니다.
물론 이 구약의 안식일을 우리는 주일에 지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새창조를 하신 날이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때부너터 안식후 첫날인 주일날 모여 예배드리면서 새안식일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가장 쉼을 얻을때가 언제입니까?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만날때입니다. 아기가 엄마를 만나 그품안에 안길때 가장 평안을 얻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은 만날 때 가장 쉼을 얻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쉼은 세상 사람들의 쉼과 다르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주5일근무제도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이미 공공기관에서는 이것이 공식적으로 시해오디고 있습니다. 이제 내년부터는 학생들도 한달에 한번 주 5일 공부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주중에 이틀이 놀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이용해서 더 들로 산으로 물로 놀러가는 것에 기회를 이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달라야 합니다. 주일은 쉼을 위해서 철저하게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위급한 일이 아닌 경우에는 주일은 본교회에서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서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만남과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에 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하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쉼과 평안을 얻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서로 함께 모여서 함께 떡을 떼로 함께 나누고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일날 서로 함께 모여서 음식을 나누면서 차를 마시면서 대화하면서 누리는 그 즐거움 그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외부에서 오시는 분들이 종종 놀라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제실에 있는 당구장 때문입니다. 아직 당구하면 굉장히 세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혹 있습니다. 그런데 당구장에서 서로 교제하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왜 교회에서 탁구는 되는데 당구는 안됩니까? 다 같은 것입니다.
종종 과거에 우리가 주일을 지킬때 잘못 지킨 것 중에 하나는 주일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만남으로만 제한하여 모든 것들을 제한하였습니다.우리는 주일에 같이 차를 마실 수 있습니다. 주일에 같이 축구도 하고 같이 탁구나 당구도 치고 서로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일입니까? 또 같이 모여서 악기를 연주하고 같이 찬양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나라 신앙의 전통 중에서 우리가 꼭 닮고 따라야 할 것이 2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새벽기도이고 다음이 바로 주일성수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과거의 구닥다리같은 어떤 하나의 유물같이 여겨서는 안됩니다. 특히 주일성수는 하나님의 계명입니다.물론 이것을 지키지 않아서 우리가 벌을 받고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더 잘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안식일로 기억하여 지키면 가장 우선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고 다음에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쉼을 얻고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안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구별하여 우리가 찬양하고 봉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구별되이 지키면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위로부터 은혜를 주시고 새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새힘을 얻고 쉼을 얻고 승리의 삶을 한주간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일주일의 시작입니다. 우리는 일주일을 주님과 예배하면서 쉬면서 지킵니다. 주일은 결산의 날이 아니라 바로 준비의 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주일을 기억하여 안식하면서 나오는 자기 백성들에게 일주일을 살 수 있는 새힘과 새삶의 비젼과 뜻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순종의 결단으로 안식하십시오
30절 그러므로 백성이 제 칠일에 안식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에 안식하였습니다.
여기 안식일에는 광야에 나가보았자 만나를 주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는 만나를 주시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 이것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26절에 보십시오.“육일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칠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처음에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27절에 보면 “제 칠일에 백성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고 합니다.
여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안식일날에도 광야에 나가서 만나를 주우려고 했습니다. 만나를 더 소유하기 위한 욕심이 마음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소유하려고 더 많이 얻으려고 하는 욕심으로 안식일에 나가서 만나를 줍는 일을 했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28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하십니다.그러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무엇을 먹을까 염려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29절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제 육일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제 칠일에는 아무도 그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여기 안식일을 주는 대신에 그날에 만나를 거둘 수 없게 하는 대신에 그 전 날에 두배를 더 주시겟다고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만나를 얼마나 주시는가 하면 광야 40년동안에 주십니다. 출애굽기 16장 35절에 보면 가나안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40년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왜 만나를 주셨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순종하게 하기 위함입니다.광야에서 사는 길은 떡이 아닙니다. 광야는 바로 하나님이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광야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살 수 있고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여 보십시오.
가령 여러 식구를 거느린 아비와 어미의 심정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가령 저희 같이 애들이 여러명이 가장일 경우에 내일에 대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만나는 하루양식밖에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거두어 들여서 하루 먹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 내일 하나님이 만나를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염려합니다. 오늘 더 만나를 얻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도 나가서 빈광야에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2가지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염려이고 다음은 욕심입니다. 오늘이라고 하는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많은 불안과 염려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소유에 대한 염려,근심들이 많습니다.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쓸가 물질에 대한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내일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일일에 대하여 불안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먹을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쓸까 염려하면 우리는 시간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을 순종할 수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욕심입니다.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더러 욕심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소유에 대한 욕심이 일어날 수 잇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그 욕심이 과하여서 스트레스가 되고 쉴줄 모르고 일을 하다가 병을 얻고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일을할때에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입니다.그러나 쉴때는 쉬어야 합니다. 그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영혼과 육체와 범사가 웰빙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더운 여름에 주님 안에서 쉼과 평안을 얻으시고 날마사 믿음의 길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식일과 만나
출 16:21-30
1. 하루 한 오멜(약2리터)을 거두되 엿샛날에는 두 배를 거두시라는데..
* 왜냐면 제 7일은 안식일이기 때문...
* 우리에게야 구약 전체를 통해 워낙 안식일 얘기를 많이 들어서 당연하다 생각하겠지만,
* 400년이나 이집트 문화에서 살았던 당시 이스라엘에게는 정말 이 말이 낯설었을 거라 충분히 상상이 됩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굉장히 낯선 얘기라 하더라도 지도자의 말을 잘 따랐을 거고..
* 분명 어떤 사람들은 꼭 이럴 때 자기 생각대로 뛰쳐나가서 또 거두려하는 ‘실험정신이 강한?’ 사람도 있었을 거라~~ (주로 내가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는 자각이...ㅠㅠ)
2. 안식일은 쉬라고~~
* 엿새를 일하고 하루는 주님 안에서 푹 쉬는 리듬을 살려주는 날
* 이 리듬을 살다보면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우리를 먹이시고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날,
* 내게 맡겨주셔서 내가 행한 세상을 경영하는 일에 대해 만족과 감상을 할 수 있는 쉼이 있는 날
*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여전히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땀을 흘려야만 먹거리를 장만할 수 있는” 자연 질서 속에서, 육일동안 일한 육체와 정신이 쉼과 회복을 얻는 날.
* 아직도 여전히 죄를 먹고 마시는 사람들, 자기가 최고가 되기 위해 날뛰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무노동 무임금”, 하루 24시간과 일주일에 칠일을 모두 다 기업주를 위해 일할 것을 요구하는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드러내기 위해 투쟁하고 지켜내야 할 날.
* 예수님이 그렇게 야단치셨고,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안식일의 본질(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을 성취하셨건만, 아직도 여전히 바리새인들 마냥 율법적으로 ‘주일성수’를 외치고, 세세한 규칙(eg. 주일에는 돈 쓰면 안 된다 등등)을 만들어 사람들을 율법의 감옥으로 가둬놓으려는 종교지도자들이 강조하는 날.
* 현대적으로 본다면 주일(일요일)이 안식일의 의미를 살리는 날이 될 텐데, 주일을 안식일이 아닌 ‘안 쉴 일’이 되어 녹초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교회봉사 우선주의을 강요하거나, 거기에 빠져 사는 불쌍한 안 쉬는 종교인들... (이들은 제 7일에 들에 만나를 주우러 나가는 이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는...ㅠㅠ)
*** 암튼, 쉬라고 주신 날. 잘 쉬고, 즐겁게 놀고, 잔치로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가운데, 정말 창조의 리듬,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로 충분히 젖어드는 날, 그런 안식일이 우리 삶의 리듬이 되길 소망하고 기도합니다.
3.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데..
* “너희가 언제까지 내 말을 안 들을래?”
* 하나님이 좀 짜증스럽게? 화가 난 어투로? 암튼, 실망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을 거라는 상상이 됩니다요..ㅠㅠ
* 근데, 하나님! 이건 약과예요... 뭐 벌써부터 그러세요? 아직 40년 더 이럴 거고, 아니 구약 전체를 통해, 예수님 오시기까지... 하긴 오시고 난 뒤 지금도 그런데요 뭘... 끙...
* 구약 + 신약의 이야기를 아는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이 실망감이 약간 빠르다는 느낌...ㅋㅋ
*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과, 참 순수하게 여전히 인간을 믿으시는 그 마음에 이런 실망스러움을 드러내시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나를 향해 기대감이 크시고, 순수하게 나를 신뢰하시고, 하나님나라의 일을 같이 하자고 초청하시고 맡기시고 계신다는...
*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사소한 실패와 불신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기대하심과 믿어주심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고,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있고, 또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분명히 누리게 될 것을 확신할 수가 있는 거라는~~^^
* 그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죠^^
* 그래서 자나깨나 하나님 만세~~
여호와의 안식일
출애굽기 16:21-36
Ⅰ. 만나
1. 하나님의 은혜
출애굽기를 보면서 인간의 실상, 변하지 않는 인간의 실체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인간을 알지 못하면 인간의 행동, 인간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특별히 죄인을 알면 인간의 행동, 인간의 태도, 이 세상 자체를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이 기독교에서 방법을 운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조건’을 제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충성하면 은혜를 주신다, 순종하면 복을 주신다’는 방법론을 말하는 것은 가장 반 기독교적입니다. 만약 조건을 말하려면 기독교에서 ‘은혜’라는 개념을 없애버려야 합니다. 기독교가 조건적이 아니라 은혜적이라는 대표적 상징 중의 하나가 바로 만나입니다. 백성들이 불평과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만나가 내렸습니다. 만나가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찬양하고 경배한 사람에게만 만나가 내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날 거둔 만나를 남겨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에도 모든 사람에게 만나가 동일하게 내렸습니다. 백성들의 순종과 불순종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만나는 펑펑 내렸습니다. 상급도 아니요 면류관도 아니요 대가도 아니요 오직 은혜입니다.
2. 백성들의 인식
백성들이 원망하는 이유와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는 이유 사이에는 전혀 다른 문제인식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주시면서 시험하신 것 즉 교육하시고 가르치신 것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려 하려 하심이라’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인간에게 먹을 것이 있으면, 좋은 조건과 상황이 있으면 모든 것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깨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는 것은 배가 고파서 지키지 못하고 배가 부르면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성을 고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배가 고파서’, ‘힘이 들어서’, ‘목이 말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를 전혀 엉뚱하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왜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교육
저들이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죄인이라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노역을 풀어주면 순종할 것 같아서 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마시면 순종할 것 같아서 물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배부르면 순종할 것 같아서 만나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출애굽을 시켜주는 이유, 홍해에서 구원해주는 이유, 마라에서 물을 고쳐주는 이유, 만나를 내려주는 이유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들의 순종에 대한 상급이 아니고, 저들의 충성에 대한 대가가 아니고 도무지 자기들 문제의 원인조차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교육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시킬 때에도 ‘노예에서 해방됨’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라’고 강조하십니다. 마라에서 물을 주실 때에도 ‘갈증이 풀어짐’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라’고 강조하십니다. 만나를 주실 때에도 ‘배고픔이 해결됨’을 강조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라’고 강조하십니다. 노예라는 문제가 해방되면, 물이라는 문제가 해결되면, 배고픔이라는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정반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노예생활이 문제가 되지 않고, 하나님을 알면 물이 쓴 것이 문제가 되지 않고, 하나님을 알면 배고픔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이 40년간 지속됩니다. 만나가 40년 내립니다. 40년간 먹을 것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에 하나님이 동행하셨습니다. 40년간 어떠한 외적에 대해서도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들은 40년간 불순종하였습니다. 신앙은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Ⅱ. 여호와의 안식일
1. 여호와의 안식일
성경에 ‘안식일’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 바로 16:23절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입니다. 만나가 내리기 시작하여 6일 동안 매일 매일 내리고, 만나가 내리기 시작한지 6일이 지나고 일곱째 날이 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일곱째 날을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하면 ‘휴일’입니다. 여호와가 안식하는 날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안식하셨는데 그 이유를 ‘하시던 일을 마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모든 것을 만들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의 안식은 일하시는 중간에 잠간 휴식하는 것, 잠간 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모든 일을 마치고, 모든 계획이 완성되어서 더 이상의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진행해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그래서 완성의 상태를 누리고 있는 것을 안식이라고 합니다.
2. 백성이 안식하니라
16:29절에 ‘여호와가 안식을 주셨다’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그래서 ‘인간이 안식하였다’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하다가 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안식하기로 마음먹고, 그냥 일을 안 하면 쉬는 것이나 안식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안식이요, 안식의 의미는 쉼이 아니라 완성의 상태에 거하는 것, 완성의 상태를 누리며 사는 것이요, 그러한 안식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의미를 바로 만나를 주시면서 일곱째 날 만나를 거두러 나기지 않는 것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설명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3. 일하지 말라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해주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시는데 안식일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규정이 ‘아무 일도 하지 말라’입니다.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일’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일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일하시는 분이며,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인간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음을 통해 인간 생명이 인간의 수고(일)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