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피싱
성병조
세상 살면서 별 희한한 일도 다 겪는다. 이렇게 치밀하게 사람을 속일 수 있다는 게 소름 끼칠 정도로 두렵다. 검찰이나 국세청을 사칭한 보이스 피싱은 경험했어도 이번처럼 관공서 두 곳을 교묘히 엮어 조직적으로 접근해온 것은 처음이다.
오전에 집 전화벨이 울렸다. 이런 경우 여론조사 아니면 보험 가입을 권유하는 게 대부분이어서 선뜻 나서기를 꺼린다. 전화를 받더라도 상대방의 목소리를 먼저 듣고 거기에 맞춰 응대하는 버릇이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우체국이라며 말을 걸어온다.
“등기 우편물이 두 차례나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OO우체국으로 와서 찾아 가셔야 합니다.” 낯선 여자의 목소리이다. 등기 우편물은 받는 사람에게 먼저 연락한다거나 부재 시에는 우체국 직원이 메시지를 남기는 게 보통인데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내용인지 물었더니 우체국 신용카드란다. 전혀 모르는 일이다. 발급 신청한 적도 유사한 상담을 한 적도 없다.
“나는 그런 카드를 신청한 적도 없으며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랬더니 우체국 직원이라는 여성이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서며 말을 건넨다.
“아마도 선생님의 개인 정보가 외부로 유출된 것 같습니다. 그걸 이용하여 선생님 카드를 발급받은 것으로 봐서 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신속히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었더니 선심이나 쓰듯이 태연히 답변한다.
“우체국에서 바로 경찰에 신고해 둘 테니 전화가 걸려오면 자세하게 답변하세요.”
이렇게 고마운 우체국 직원도 있나. 잠시 후 집 전화로 어느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입니다.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신속히 대처하지 않으면 어르신의 통장에서 돈이 다 빠져 나갈 수도 있습니다.”
긴박감이 몰려온다. 경찰은 바쁘게 나의 인적 사항과 거주지 등을 묻고는 전화를 상급자인 과장님에게 바꿔 주겠단다. 저 너머로 “과장님, 전화 받으십시오” 라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경찰의 행동치고는 미심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대번에 뿌리치기는 힘들었다.
이번에는 나긋나긋한 여성의 목소리다. 요즘 하도 사기가 많아 조심하지 않으면 감쪽같이 통장에서 예금이 빠져 나간다며 긴장감을 부채질한다. 불만을 가진 은행 직원이 고객 정보를 가지고 나온다거나, 아니면 나를 잘 아는 지인을 통해 벌어질 수 있는 일이란다. 최근 유사한 사건으로 범인들이 검거된 적도 있다며 잔뜩 겁을 준다.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나를 도와주려는 경찰인데 뚜렷한 증거도 없이 일방적으로 팽개치기는 어려웠다.
다급한 목소리로 거래 은행, 예금 종류와 잔액, 나이, 주소까지 묻는다. 대화하는 이 순간에도 돈이 빠질 수 있다며 긴장을 부채질한다. 주소 확인은 녹음 내용과 수사 과정을 우편으로 알려주기 위함이란다. 정기예금 역시 돈이 빠져나갈 수 있으니 즉시 해지하여 현금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의심은 부풀었지만 우체국에서 연결시켜준 경찰이라는 일말의 안도감이 계속 부여잡게 만들었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출 수는 없다.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라고 하였다.
“대단히 미안합니다만 정기예금에서 돈이 빠질 수 있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를 위해 애쓰는 경찰에는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과장님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좀 알려 주세요.” 주저 않고 답변하는 그녀의 이름과 조잡스런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 두었다.
예금 액수를 묻는 것은 우선순위를 가려 선별적으로 대응하려는 것으로 여겨졌다. 예금 종류도 경찰의 효과적인 보호 수단으로 생각하였지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또 조심스럽게 두 번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요즘이 얼마나 큰 불신의 시대입니까? 도둑이 스스로 도둑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 집 대문의 비밀 번호까지 묻는 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대문을 열 수 있는 번호까지 묻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사건이 확대되면 집안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대문을 여는 번호까지 경찰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큰 사고를 방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지만 깡그리 무시하기에는 부담이 따랐다. 마치 번호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더 큰 화라도 미칠 듯이 마음을 조여 온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대문 번호 확인은 통장 비밀 번호를 유추하기 위한 수단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제는 더 나아가 통장, 도장, 신분증을 옆에 두고 전화를 받으란다. 점입가경이다. 반신반의 하면서도 매정하게 뿌리치지 못해 여기까지 이끌려왔다.
이제는 은행까지 가는데 얼마나 걸리는 지를 묻는다. 시간 경과에 따른 불이익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란다. 당장 전화를 끊어버리고 적어둔 번호로 신분을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줄곧 하면서도 결단은 자꾸 미루어진다. 더 늦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제는 전화를 끊지 말고 은행까지 직접 들고 가란다. 이게 우리 집 전화라고 했더니 그제 사 내 휴대폰 번호를 묻는다. 잠시 후 휴대폰을 받으니 해외 전화 표시가 뜬다.
의심스런 해외 전화인데다 휴대폰을 끊지 말고 은행까지 들고 가라는 게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비록 경찰에게 실망을 줄지라도 여기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더 끌려가다가는 심각한 구렁텅이에 빠질 수도 있다. 그녀의 집요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귀신에 홀린 듯 긴 터널에서 겨우 빠져나와 적어둔 전화번호로, 또 휴대폰에 남은 번호로 발신음을 띄워 보았지만 대답은커녕 잡음만 가득하다.
“나쁜 놈들, 이토록 교묘하게 사람을 유인하여 사기 치려 했단 말인가?”
단호하게 일찍 전화를 끊지 못한 것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평소 이런 분야에 밝다고 자신하는 내가 왜 처음부터 뿌리치지 못하고 긴 시간동안 질질 끌려왔단 말인가.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끝내 당하지 않고 헤어 나온 것만으로도 다행하다 여길까. 보이스 피싱의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아내는 나답지 않은 행동에 쓴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