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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7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 루카 5,27ㄴ-32
가장 완벽하고 손쉬운 겸손의 길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기도 중에 하늘나라를 보았습니다.
하늘나라 가장 높은 곳에 비어있는 멋진 보좌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저 의자가 누구의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천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게 누구냐고 묻자 천사는 “당신의 스승인 프란치스코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제자가 프란치스코의 겸손을 시험하고 싶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인이라 부릅니다.
세상에 분명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어떻게 세상에서 선생님이 제일 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건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이라네. 내가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이 받았다면 누구든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루카 18,14)라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도 분명 높은 이가 있고 낮은 이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으로 살려면 이 세상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낮추려고 해도 나보다 못 사는 사람들이 항상 눈에 띕니다.
그래서 내 자신이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거짓처럼 여겨집니다.
이렇게 낮아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높아지기는커녕 구원에서 제외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부르셔야 하는지 아십니다.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사람이 세관일을 하고 있는 레위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왜 겸손한 사람일까요? 어쩌면 그의 이름에 해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레위란 이름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사제의 일을 맡기신 지파의 이름입니다.
레위는 이름 자체로는 사제의 일을 해야 하는데 누가 봐도 죄인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사제여야 하는 것을 아는데 죄만 짓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사람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압니다.
반면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행동으로는 올바르게 살고 있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이 누구여야 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저 신앙인의 수준으로 잘 살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 믿는 것이 교만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려주셨음에도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겸손해지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인간의 수준으로는 잘 살고 있는데 굳이 하느님의 자녀로 믿어서 부족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인 인간이 되고 싶었지 죄인인 하느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께로부터 제외되었습니다.
겸손해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누구여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라고 하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인은 바로 자신이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치고 이웃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남을 판단할 만큼 온전하게 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죄인임을 알게 됩니다. 오직 이 믿음만이 나를 겸손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태리 어느 시골에 마리오와 안셀모라는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마리오는 위대한 설교가가 될 꿈을 안고 수도원에 들어와 사제가 되었습니다.
반면 안셀모는 같은 수도원의 평수사로 살았습니다.
마리오는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셀모는 친구를 축하해주며 “항상 너의 사제직을 위해 기도할게.”라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마리오는 교회의 저명한 설교가가 되었고 안셀모는 수도원의 궂은 일을 하며 나이가 들어갔습니다. 마리오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을 때 안셀모가 떠올라 기도를 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셀모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마리오는 안셀모의 시신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수도원 원장이 마리오에게 물었습니다.
“위대한 설교가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가?”
“아닙니다. 안셀모처럼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무언가 되려고 발버둥치지 않을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이미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내가 주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고 그래서 하느님임을 알면 그 주어진 본성 때문에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쉬우면서도 완벽한 겸손의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7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복음: 루카 5,27-32
양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복음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명 한명을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시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 표현은 이렇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저는 여기서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에 대해서 묵상을 좀 해봤습니다.
예수님의 시선 과연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당시 유다인들의 세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 마디로 징그러운 벌레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습니다.
그들은 레위를 바라보면서 속으로 이렇게 욕을 했습니다.
“저런 매국노, 로마 앞잡이, 인간 말종, 처죽일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레위는 분위기상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책임지는 중간 관리자급 간부 세리였습니다.
동족으로부터 수모를 당했지만, 주머니 사정은 넉넉했습니다.
그러나 레위도 한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맨날 하는 일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동족들을 후려쳐서 세금을 뜯어내는 일이었습니다.
맨날 동족들로부터 싸늘한 시선을 받다보니, 삶의 피폐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갈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마음을 환히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시고 그의 갈등하는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레위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다른 사람과는 백팔십도 달랐습니다.
그 시선은, 측은지심의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 부드러운 시선, 안타까운 시선, 짠한 시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시선을 레위에게 보내면서 그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시는 것입니다.
때로 대화는 말로만이 아니라 시선으로도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시선으로 레위에게 이런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애야, 그동안 세리로 살아오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았느냐?
내가 네 마음 다 알고 있다.
네가 지금까지 겪어온 수모와 비참을 다 보고 있다.
길을 걷다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이란다.
지난 세월은 이제 뒤로 하고 나와 함께 새롭게 시작하자.”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는 평생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예수님의 그런 따뜻한 시선에 큰 위로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갑자기 레위의 눈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는 회심과 감사의 눈물이 쏟아져내렸을 것입니다.
이어서 건네시는 예수님의 말씀, “나를 따라라!” 레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섭니다.
목숨과도 같은 장부도, 수금한 돈도 다 내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의 그 따뜻한 시선, 연민의 정으로 가득한 시선이 철옹성 같았던 레위의 마음을 무너져 내리게 하고 녹아내리게 한 것입니다.
그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들어가십니다
그날 저녁 레위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위해 준비한 잔치였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레위가 동료 세리들과 작별하는 송별식도 겸했습니다.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그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 자리는 요즘으로 치면 조폭 두목 결혼식 피로연, 아니면 조폭 두목 어머니 칠순잔치 자리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덩치가 산만한 조직원들,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총집합한 것입니다.
호시탐탐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며 꼬투리를 잡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한건 올렸다며, 예수님께 따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그때 예수님께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통쾌한 한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우리 죄인들에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여러분들, 사순 시기를 시작하면서, 이런 예수님의 모습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틈만 나면 욕을 바가지로 먹던 세리와 죄인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은 시선으로 오늘 우리들 한명 한명을 바라보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분께서는 우리는 예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제 내 나이가 70이고, 80인데, 예뻐할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죄란 죄는 다 짓고 살아왔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께서 예뻐하실 리가 없어! 라고 절대 말하시면 안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늙었다, 추하다, 하며 외면하지만, 하느님 눈에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스럽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무리 죄인이어도, 내가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하느님은 나를 예뻐하신다, 나를 사랑하신다,
나를 애지중지 하신다는 마음으로 올해 고백소 안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강론>
(2024. 2. 17. 토)(루카 5,27ㄴ-32)
<‘그들’이 아니라 ‘나’>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밖에 나가셨다가 레위라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7-32)”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사도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 아니라......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라는 말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 라고 비난하는 말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죄인’이라고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그 죄인들의 죄에 오염되는 일이고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의사가 치료하기 위해서 ‘병든 이들’을 만나는 것처럼, 당신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인들’을 만나고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뜻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왔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만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는 “죄인들과 의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죄인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고, “너희도 죄인들이다. 너희도 ‘병든 이’들이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구세주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예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입니다.
만일에 누구든지 “나는 의인이다.
그러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 라고 자처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 없다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유다인들이나 그리스인들이나 다 같이
죄의 지배 아래 있다고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로마 3,9ㄹ-11)”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로마 3,23-24).”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로마 5,8-9).”
따라서 ‘죄인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 라고 표현해야 합니다.
<‘우리’도 아니고, ‘나’입니다.>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나’를 ‘그들’과 구분해서 분리하는 것이고,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과 같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의인인 나’와 ‘죄인인 그들’을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 바로 그것이 바리사이들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나’를 구원하려고 ‘나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들’이 아니라 ‘내가’ 죄인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건강한 의인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병든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렇지만 회개하려고 노력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셈이 되지만, 예수님 말씀대로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로 바꿔서 표현하면,
‘그들’이 아니라 ‘내가’ 바로 ‘병든 이’입니다.
내가 이웃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나는 건강하고 그 이웃은 병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같은 병자이기 때문이고, 함께 치유되고 함께 건강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제가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것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지, 사제 자신은 건강하고 고해성사를 보는 이는 병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제 자신도 ‘병든 이’이고, ‘죄인’입니다.
물론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사제 자신이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용서한단 말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고해성사의 용서는 사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사제는 그 은총을 전달해 주는 사람일 뿐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주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사랑의 성사’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들이 죄인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남들보다 조금 먼저 회개한 죄인들이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구원을 전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이고 선교활동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