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6장 53 - 56절
53.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열왕기상 20장에 보면 아합 왕 때 아람이라는 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는데 아람의 신하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 하나님이라는 신은 산에 능한 신이기 때문에 평지에서 싸우게 되면 아람 군대가 이길 것이라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며 전쟁에 나갔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강하신 모습으로 하루에 아람 군대 십만 명을 죽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산이든, 들이든 상관없이 어디서든 역사하실 수 있는 신이신 것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내려오는 무속 신앙 중에 풍수지리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심지어는 묘 자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자녀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묘 자리를 찾아 방방곡곡을 다녔을 정도였습니다. 아주 제한된 곳에서만 복을 받을 수 있고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풍수지리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따위 무속 신앙 때문에 삶의 제약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지역 특성 상 남향을 선호하는 것을 풍수지리와 연관 짓는 것은 무리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가 떠서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쪽이 남쪽이기 때문에 남향의 집을 찾는 것은 본능이고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도 모든 환경과 조건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6절에 보면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게 되면 그곳이 기적의 현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산이나 들에서 동일하게 승리의 능력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모습처럼 예수님도 아무 데나 들어가셔서 그 영광과 능력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던 아람 군대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스스로가 제한하면서 산다면 매우 어리석은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데나 가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그곳이 천국이 되고 바로 그곳이 이적의 장소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사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에 관한 가르침에 뛰어난 지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많은 제자가 모여들었고 스승의 눈에 띄기를 바라며 정말 열심히 배워갔습니다. 그런데 스승은 이상하게 그 제자들 중에 가장 바보스러운 한 청년을 유달리 사랑했습니다. 그 제자에게는 유능하거나 자기들보다 뛰어난 그 어떤 부분도 찾아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랑해 주는 스승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모두 모여 항의를 하며 그 청년보다 우리가 못난 것이 무엇이기에 그만 유달리 사랑해주시는지 이유를 물었습니다. 스승은 조용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문제를 하나 내겠다. 그 문제를 맞추면 그 이유를 설명해 주겠다.” 그렇게 말하며 낸 문제가 이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으로 가서 새를 한 마리 잡아오너라.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너라.” 모든 제자들은 속으로 문제가 너무 쉽다고 생각하고 각자 새를 잡을 도구를 들고 산으로, 숲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해가 지기도 전에 제자들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새를 한 마리씩 잡아 하나 둘 스승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해가 완전히 졌는데도 바보 제자는 돌아올 생각이 없는지 오지 않자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는 기쁨의 술렁거림이 일었습니다. “이제야 우리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하겠군.” “그 바보는 날이 새도 못 잡을 거야. 이제야 스승님이 우리의 능력을 인정해 주시겠군.” 이런 수군거림을 뚫고 바보 제자가 숨을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왔습니다. 그는 숙제를 끝내지 못한 듯 손에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스승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새는 잡았느냐?” “아닙니다. 스승님께서 아무도 없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새를 잡으라 하셔서 산으로 들로 숲으로 해가 지는 어둠 속으로 다녔으나 하나님이 안 계신 곳, 안 보는 곳이 없으므로 그냥 왔습니다.” 이 말은 들은 제자들은 그제서야 왜 이 제자가 유달리 사랑을 받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고개를 숙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기 때문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곳에서 이적이 나타나니까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 보겠다고 기를 쓰고 달려들었습니다. 사실 그런 행동은 믿음의 행동이라기보다는 미신에 가까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주도에 있는 돌하루방의 코를 만지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미신적 행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 연약한 모습에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아마 제자들이 그런 행동을 보였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배웠고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보였다면 오히려 꾸짖으셨겠지만 아직 무지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무지한 사람들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신데 하나님을 알고 또 알기 위해서 힘을 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얼마나 더 큰 사랑을 보여 주시고,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아무 데나 상관없습니다. 다 성함을 얻고 회복되고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무지한 영혼들에게도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알고 있고 또 알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우리들에게는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이런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고 모든 것이 다 성함을 얻게 되는 기쁨의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세요.